눅12:16~21
소유권 문제
퀴즈를 낼 터이니 한 번 맞춰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를 때 약속한 두 가지 축복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은혜와 복으로 주는 두 가지 주된 약속은 땅을 주시겠다는 것과 자손을 번성케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이 때는 가니안에 자기 소유로된 땅 한평없을 때이고, 자식은 물론 없을 때입니다.
창12장 2절을 볼까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렘33:10절 이하에서도 바벨론 포로 이후 하신 약속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와 “신랑신부, 어린 아이 소리가 다시 들리게 하겠다.”는 땅 이야기와 사람이야기를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땅 이야기를 언급하시면서, “내 나라 내 땅을 은혜로 주시겠다.” 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영원히 살 천국을 바라보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과 아브라함과 유대인들에게 선민이란 특혜를 주었듯이, 지금도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을 자녀 삼아 구원하겠다는 사인을 지속적으로 주고 계신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주된 관심사는 ①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② 영혼을 건져 천국에 오게 하는데 초점이 있으신 거죠.
그래서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가서 머물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내가 구원받았듯이 또 다른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바로 그 심장으로 전도하며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살라고 좀 넉넉히 재산과 복을 주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할 사람을 한 사람 고르셨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의 마음이 오직 땅과 물질에 마음을 뺏겨 사는 자로 오늘 등장합니다.
사람이 말입니다. 하나의 예로 등장할 때는 좋은 모델로 등장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는 샘플로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직 자기, 오직 땅의 것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좋은 예화거리로 등장하시고, 간증 거리로 삼는 모델케이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16~21절입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이 부자를 예로 들면서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것은 세상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면서 이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나라는 말과 내 것이란 단어를 한국식 번역만으로도 6번이나 사용하면서 그 모든 소유가 자신의 것임을 강조합니다. (헬라어 성경을 분석하면 "내가"를 주어로하는 동사는 8회,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이인칭 단수는 "네가"는 5회 그리고 나아가 속격 이인칭 단수, 즉 "나의", "내"가는 4회 총 17회나 등장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통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그 소유가 비록 자신이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하여서 얻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에 대해 감사하는 자세를 가르치려고 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그게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혼마저 자신의 것인양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이야기 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요해졌다든지, 돈을 잘 못 썼다든지 하는 것을 지적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소유권의 문제 앞에 그의 자세를 논하고 있다는 거죠.
부자 된 게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청종한 자에게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떡 반죽 그릇에도 차고 넘치게 하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겠다는 게 신28장에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같은 재산과 재물이 주어진 것을 가지고 그게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지, 아니면 자신의 공로로 삼는지를 보는데 오늘 초점입니다.
재산만이겠습니까?
건강, 학벌, 재능 행복하게 사는 사랑 등 모든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 가지는 꼭 가지고 있으라고 살전5:16~18절에 언급하실 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시면서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델레마」 니라고 했습니다. 즉 “작심”입니다. 아예 하나님이 이 세 가지는 꼭 가지고 살아야 돼! 하고 작심하시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제가 봐도 그래요. 공부 잘 하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죠!” 하고 겸손하고 감사하면 더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거제도에 제 아우 같은 손아무개 목사님이 정말 목회를 잘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녁 예배인데도 아이들까지 다 와서 한 300여명이 예배를 드리는 정말 멋진 교회에요. 그래서 너무 멋있어서 “목사님 목회가 너무 아름답고 멋있어요. 정말 목회를 잘하시네요!” 하고 칭찬을 했더니, 웬만한 사람 같으면 “아고!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다들 잘하는데요. 뭐!” 이 정도의 겸손을 표할 것입니다.
그런데 손 사례를 치면서 “아이고, 아이고, 아니에요. 정말 주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한 게 없어요.” 하고 정말 찐 겸손을 보여주기는 거예요. 사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런데 진짜로 겸손이 몸에 완전히 밴 거죠.
그럼 여쭙겠습니다. 더 존경스러울까요, 안 존경스럽겠습니까? 네, 존경스럽죠.
네 존경스러울 줄 믿습니다. 옆에 분과 인사를 나눠볼까요? 배워요. 배워!!
오늘 부자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감사가 없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출애굽하면서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잊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래서 유월절부터 맥추감사절까지 오십일을 지나면서 날짜를 세라고 지시받은 적도 있습니다. 같이 신16: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그렇습니다. 날짜를 세는데 잊을 수가 없겠지요.
이게 단지 맥추감사만의 일이 아니라, 추수감사까지 늘 잊지 말라는 의미이거든요.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기를 바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가슴에 새길 것이고, 자연히 이웃과 남에게 베푸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부자는 온갖 생각을 다 창출해 냅니다. 아마도 창작대회를 나가도 될 만큼 밤새 머릿속으로 추수에 대해, 그것을 담아둘 창고 등등을 계획을 합니다. 더 크게 늘려 짓겠다는 등
한 번 볼까요?
16절부터 입니다.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온갖 구상과 생각을 다하고 누릴 생각은 하는데,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 나누겠다는 마음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만 행복하고 자기만 기쁘면 되는 삶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그가 한 가지 놓친 게 있습니다. 내일은 자기의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야 자기 날이 된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땅에서 나는 것의 소유권은 자기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영원에 대한 문제도,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을 것 역시도 전혀 생각지 못하는 사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것인 줄 알고 죽어라 고생하며 모았는데 정작 자기는 써 보지도 못하고 남에게 빼앗긴다든지, 사라져 버린다면 이보다 더 허무하고 기가 막힌 일은 없을 것입니다.(울 삼촌)
이 부자는 정말 허무한 인생으로 끝을 내고 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내 것을 내 것으로 삼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것을 마음 놓고 쓸 수 있도록 허락하시게끔 내 인생의 소유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뺏어가거나 탈취하지 않습니다.
나누면 두 배가 되는 원리! 그게 과거 우리네 어른들이 이야기한 콩 한쪽도 나눠 먹자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주면 더하는 말씀이 눅6:38절에도 나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아멘
눅16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이야기를 곁들여 하고 마치고 싶습니다.
그에게서 예수를 안 믿었다, 믿었다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옥 간이 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 “예수 믿었다 안 믿었다.” 로 지옥 간 이야기가 없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는 유대인이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하나님의 헤세드가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으면서 당연히 따라오는 예수님의 심장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심장이 있었다면 자기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나사로를 하나님이 돌봐주라고 의도적으로 그의 곁에 두셨다는 것쯤은 눈치를 챘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에서 절기 때마다 하나님이 잊지말라와 더불어 누누이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라 그들을 불러다가 함께 잔치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하나님입니다. 즉 전도의 확장 선에서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 있는 해외까지 살피라는 광의적 선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없다, 없다 해도 선진국이란 부요함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교회와 성도들 가슴속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인 헤세드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이 부자를 통해서 너희도 풍성한 것을 거두지만 그 거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베풂과 나눔, 나아가 해외 있는 정말 못사는 나라에 복음과 더불어 선교를 함으로 너희에게 특권으로 주신 거둠의 복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행하고 순종하는 게 우리에게 주신 소유권이 하나님이 것임을 인정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럴 때 다음에 더 풍성한 추수를 위해 내리시는 늦은 비와 이른 비의 은혜가 더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