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2章 마녀(魔女)를 만나다
밤이다. 천지만물을 녹초로 만들었던 태양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셔
진 밤은 그러나 한낮에 지나간 소나기의 습기를 머금어 끈적하기만
했다.
"으음! 이 넓은 천지의 어디에 가서 취취를 찾는단 말인가?"
눅눅한 밤 공기를 헤치며 누군가의 탄식성이 들렸다.
이곳은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의 경계를 이루는 험산인 태
행산(太行山)의 동쪽 산록을 지나는 관도(官途)다.
한 명의 청년이 우울한 표정으로 밤길을 걷고 있었다.
임풍옥수의 헌앙한 자태를 지닌 약관의 청년으로 군살 한점 없는 늘
씬한 몸에는 하얀 백삼이 걸쳐져 있다.
그는 바로 능비헌이다.
북경을 떠난 그는 남행하며 모용취취의 행적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드넓은 세상에서 여자 하나를 찾는 일은 그야말로 창해일
속(滄海一粟)이나 다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수소문해봤지만 어디에
서도 뾰족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 년이 가도 찾지 못한다. 무언가 다른 방도를 강
구해야만 한다!'
능비헌은 검미를 모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밤이 되면 마땅히 쉴 곳을 찾아야하지만 마음이 심란한 능비헌은 잠
자리를 찾는 대신 밤 새워 걷고 있는 것이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무슨 소리지?'
능비헌은 흠칫하며 멈춰섰다. 어디선가 요기(妖氣)서린 여자의 웃음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서서 귀를 기울였지만 바람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 외에
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능비헌은 갸웃했다. 이어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호호호……!"
다시 어디선가 소름이 오싹 돋게 만드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능비헌의
귓전에 들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스팟!
능비헌의 눈이 번쩍 빛을 발하고 다음순간 그의 모습은 반사적으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곳은 관도의 우측에 자리한 울창한 숲속이었다.
'피비린내!'
아람드리 고송이 빽빽이 들어찬 숲으로 날아들던 능비헌은 움찔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풍겼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그 직후 능비헌은 그만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숲 속에는 십 장 가량의 공터가 있는데 지금 그곳에 실로 끔찍한 목
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수십 구의 시체가 곳곳에 늘어져 있
는 것이다.
'이런 참혹한 일이… 대체 누가 이토록 끔찍한 참살을 저질렀단 말인
가?'
능비헌은 공터를 그득 메운 시체들을 둘러보며 치를 떨었다.
수십 구의 시체들 형상은 실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악독
한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당한 듯 복부가 짓뭉개져 오장육부가
흘러나와 질펀하게 늘어져 있고,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선혈들이 피
의 강을 만들고 있다.
헌데 억지로 용기를 내어 그 끔찍한 시체들을 살펴보던 능비헌은 또
다시 경악을 터뜨리고 말았다.
"심… 심장이 없다!"
그렇다. 수십 구의 시체들은 한결같이 심장 부위에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고 심장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다니……?"
태어나 처음 목격하는 만행에 능비헌은 절로 분노했다.
그와 함께 능비헌은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방금 전에 들었던 요
기서린 여자의 웃음소리가 떠오른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인이 여자란 말인가?'
여자가 이런 끔찍한 짓을 했으리라고 싶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능비헌은 단서를 얻기 위해 주위를 살펴보았다.
'저건!'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번쩍 이채를 띠었다.
시신들은 모두 흑의경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누런 황건(黃巾)을
이마에 두르고 있어서 그들이 같은 문파 소속임을 알 수가 있다.
헌데 그 흑의인들의 시신 중에는 일신에 은의(銀衣)를 입고 있는 한
구의 시신이 끼어있었다.
능비헌은 급히 그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헌데 시신 곁에 도착한 능비헌의 눈이 일순 광채를 발했다. 은의를
걸친 시신의 오른손 근처에 놓인 바위위에서 몇 줄기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능비헌은 급히 그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 이들은?"
능비헌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건장한 체구를 지닌 그 은의인
이 자신의 피를 찍어 써놓은 몇 줄의 글은 그가 놀라기에 충분한 것
이었다.
<나는 천라제왕부 산하 대력황건단(大力黃巾團)의 부단주인 대력패왕
(大力覇王) 화무경(華武慶)이오.>
"이 사람이 대력황건단의 부단주란 말인가?"
능비헌은 경악하며 신음했다.
당비영은 능비헌을 위해 지난 백여 년 간의 강호정세를 한 권의 책으
로 정리해 주었었다. 강호세보(江湖細報)라는 그 책자를 통독한 덕분
에 능비헌은 어지간한 강호의 사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 중에는 물론 대력황건단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본래 대력황건단은 천라제왕부의 외단(外團)을 구성하는 백(白), 황(
黃), 혈(血)의 삼건제왕단(三巾帝王團)중 두 번째로 꼽히는 조직이다
.
대력황건단의 단원들은 무림의 각파 장문인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
다는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헌데, 흉수가 누구기에 혁혁한 명성을 지닌 대력황건단의 고수들을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씩이나 참살하고 심장을 파간 것일까?
능비헌은 급히 대력패왕이 써놓은 글을 마저 읽었다.
<태행산(太行山)… 백화장(白花莊)… 유리마녀(琉璃魔女)… 두 분 아
가씨… 구(救)…>
죽음 직전에 사력을 다해 쓴 듯 글은 두서가 없었다.
글을 읽은 능비헌은 생각에 잠겼다.
'백화장이라면 바로 천라제왕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처가집이 아닌
가? 그렇다면 두 아가씨란 천라제왕의 손녀들인 천라쌍미(天羅雙美)
를 말하는 게 틀림없다!'
능비헌은 검미를 모았다.
천라제왕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손녀가 두 명 있다는 것은 무림인이라
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무림의 청년들은 천라제왕부의 그 아름다운 자매를 천라쌍미라 부르
며 흠모한다.
'한데 이들을 해치고 천라제왕의 금지옥엽같은 손녀들을 납치한 유리
마녀란 또 누구란 말인가?'
능비헌은 검미를 모았다. 당금 무림의 고수들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
는 그였지만 유리마녀라는 이름은 처음 접하는 것이다.
염두를 굴리면서도 능비헌의 눈은 예리하게 사방을 살폈다.
'저곳이다!'
날카로운 능비헌의 눈길이 좌측의 숲을 향했다.
그런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라쌍미를 납치한 유리마녀란 그 여인은 실로 고절한 무공을 지녔
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추적술을 지닌 만리추풍객이라 해도
결코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능비헌은 천천히 걸어가며 두 눈을 유리알처럼 빛냈다. 그는 지금 일
종의 투시술(透視術)로 얼마 전 현장을 떠난 누군가의 종적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고금제일의 추적술(追跡術)을 지녔던 무영귀매(無影鬼魅)의 무영비
록(無影秘錄)을 익힌 나의 눈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능비헌의 입가로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무영귀매(無影鬼魅)!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그는 무림 사상 가장 뛰어난 추적술의 소유자
였다.
전국사군(戰國四君) 중 한 명인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 노릇을
하기도 했던 그는 마음만 먹으면 열사의 사막에서 잃어버린 바늘 한
개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절기인 삼신통(三神通)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삼신통이란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지심통(地心通)을 말하
는데 이를 시전하면 감각이 보통보다 일천 배까지 예민해져 아주 작
은 흔적도 놓치지 않는다.
삼신통의 능력에다가 고금오대경신술 중 하나인 귀매부풍술(鬼魅浮風
術)이란 초절한 경신술마저 지닌 그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 무영귀매가 남긴 무영비록은 태극비고에 비장되어 있던 일만 권의
무경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자들이 위험에 빠졌다면 간과할 수가 없지!'
휘이익!
흉수의 흔적을 발견한 능비헌은 소리없이 몸을 날렸다.
* * *
유리마녀란 신비한 흉수를 추적하던 능비헌은 갈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십 리 이상을 쫓아왔건만 유리마녀의 행적은 고사하고 흔적
조차 점차 희미해지는 것이 아닌가?
'놀랍다! 대체 유리마녀란 이 여자의 능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천라쌍
미를 안고 가면서도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단 말인가?'
능비헌의 추적은 급격히 느려만 갔다. 때로는 일장을 추적하는 데도
반 시진 가량이 걸리기도 했다.
휘이잉!
바람은 갈수록 신선해졌다. 그것은 곧 어둠이 가시고 아침이 된다는
증거였다.
능비헌은 어느덧 태행산의 깊은 곳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어느 이름없는 산봉우리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 능비헌은 낙담
해버렸다. 마침내 유리마녀의 종적을 잃어버린 때문이다.
능비헌은 허탈한 심정이 되어 이제 막 동녘을 박차고 떠오르는 시뻘
건 태양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추적해온 거리는 거의 이백 리에 가깝다. 보통 인물
이라면 두 여인을 데리고 가는 동안 한 번쯤은 쉬거나 지쳐서 어떤
흔적이라도 남겼을 텐데 놀랍게도 흔적은커녕 냄새조차 사라져 버렸
으니……!'
헌데 낙담하고 있던 능비헌의 두 눈이 돌연 번쩍 광채를 발했다.
스으! 스으!
그가 서 있는 산봉우리 건너편의 산 중턱에서 희뿌연 안개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휘익!
능비헌은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뭉클… 뭉클!
능비헌이 발견한 짙은 안개는 번개에 맞아 허리가 끊어진 엄청난 크
기의 고목(枯木)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번개에 의해 타 죽은 나무에서 안개가 흘러나올까?'
능비헌은 검미를 모으며 유심히 고목을 살폈다.
이 고목의 잔해는 열 명의 어른이 양 손을 잡고 둘러싸도 부족할 만
큼 엄청나게 굵었는데 높이는 오 장 가량 되었다.
스읏!
잠시 고목을 살펴보던 능비헌은 고목 위로 몸을 날렸다.
놀랍게도 고목 잔해의 가운데에는 마치 우물처럼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구멍은 얼마나 깊은지 어둑한 아래쪽이 보이지가 않는다
.
능비헌은 동전 하나를 꺼내 구멍 속으로 떨어뜨렸다.
땡그랑!
향이 반쯤 탈 시각이 흐르고 그제서야 능비헌의 귓전에 희미하나마
동전이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능비헌은 해연히 놀랐다.
'정말 깊구나! 동전이 떨어진 속도로 보아 이 구멍의 깊이는 적어도
백 장 이상이 된다.'
하지만 이내 능비헌의 두 눈이 결의로 빛났다.
'이왕 시작한 일, 끝장을 보자!'
휘익!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구멍 속으로 몸을 날렸다.
고목에 뚫린 구멍의 바닥은 천연적으로 형성된 넓직한 지하광장이었
는데 광장의 사방 벽에는 수십 개의 동굴들이 벌집처럼 뚫려 있었다.
화르르르!
능비헌은 조심스럽게 지면에 내려섰다. 직후 그는 자신이 북해의 빙
산(氷山)에 갇힌 듯한 착각을 느꼈다.
'으… 지독한 한기(寒氣)다! 대체 이곳에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가공
스런 한기가 풍기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가슴까지 찢을 듯한 엄청난
사기(邪氣)는 또 뭔가?'
능비헌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금 그가 서있는 지하광장에는 스산한 사기가 서린 한기가 꿈틀거리
고 있었다. 그 한기 때문에 안개가 일어나 지상으로 흘러나가고 있는
것이다.
능비헌은 공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며 주위를 살폈다.
문득 그의 시선이 광장의 벽에 뚫린 한 동굴에 멈췄다. 그곳이 바로
한기의 근원임을 알아본 것이다.
스읏!
곧 그의 신형이 그 석동으로 빨려들어갔다.
동굴은 칙칙한 습기와 살을 에일 듯한 한기로 가득차 있는데 그 안쪽
으로부터는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능비헌은 숨을 멈추며 빛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한기는 급격히 강해졌다.
화요월로부터 십갑자 수준의 내공을 얻어 한서불침(寒曙不侵)을 이룬
능비헌이었으나 이 한기만은 참기가 어려웠다.
'전신의 공력을 모두 끌어올렸는데도 여전히 춥다니……! 대체 이 한
기의 정체는 무엇이기에 이토록 강렬하단 말인가?'
능비헌은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앞으로 나아갔
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굴 끝에 다다른 능비헌은 그 직후 두 눈을 부릅떴
다.
'저… 저건!'
능비헌의 시선이 멈춘 동굴의 끝에는 너비 십 장 가량의 넓직한 석실
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석실 중앙에는 핏빛 석단(石壇)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석단 위에는 두 명의 여인이 깊은 잠에 취한 듯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이십 세 가량과 십 육칠 세 가량으로 보이는 두 여인
은 미녀도에서 빠져나온 듯이 아름답다.
아마도 그 두 미녀가 천라쌍미(天羅雙美)인 듯했다.
스으! 스으!
헌데 두 미녀가 누워있는 그 혈단 앞에는 사람 형태를 한 백색물체가
하나가 앉아 있었다.
'맙소사!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능비헌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백색물체를 주시했다.
기괴하긴 하지만 그 백색물체는 분명 인간이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알몸의 여인이었다.
헌데 믿을 수 없게도 이 여인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신체의 모든 부위
가 투명했다. 혈관과 뼈와 오장육부가 훤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마
치 유리(琉璃)로 만들어진 듯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인간의 모습이 저렇게 투
명할 수 있단 말인가?'
능비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괴사에 넋을 잃었다.
'저 여자가 바로 유리마녀(琉璃魔女)라는 흉수겠구나!'
능비헌은 경악하면서도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여인, 유리마녀는 마치 유리인형(琉璃人形)같다.
긴 은발(銀髮)은 둔부까지 치렁거리고, 피부는 유리와도 같이 투명한
데, 실핏줄까지 내비치는 그 유리질의 피부는 그대로 반대편의 사물
을 투영시킬 정도다.
눈엔 검은 자위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하얀 진주(珍珠)를 박어 넣은
듯한 백안(白眼)이다.
들어갈 곳은 날씬하게 들어가 있는데 튀어나올 곳이 문제다. 엉덩이
와 유방은 그대로 건드리면 깨져서 파편이 튀어나갈 것처럼 탱탱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보통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얼굴인데 그녀의 얼굴
역시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조각한 듯이 단아한 얼굴은 도도하면서
도 우아하여 절세미녀(絶世美女) 소리를 듣기에 충분하다.
헌데 나이는 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얼핏 보기엔 주름살 하나 없고 청초하여 십대 후반의 어린 소녀같다.
하지만 온갖 풍상을 겪은 연륜이 그대로 서려있는 표정은 그녀가 이
미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 든 여인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호호호! 한 시진 후면 본녀의 십년 대공이 이룩된다. 이제 열 개의
심장과 저 두 계집의 순음지기만 섭취한다면 본녀는 천하무적(天下無
敵)이 될 수 있다!"
문득 투명한 몸을 지닌 신비한 여인, 유리마녀가 사악한 교소를 흘렸
다.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다.
유리마녀는 양 팔을 가볍게 움직였다.
스읏!
순간 혈단 밑에서 시커먼 물체가 하나 솟구쳐 올라 곧장 유리마녀의
입을 향해 날아들었다.
'놀라운 격공섭물 신공이다.'
능비헌은 내심 경탄했다.
와작! 와작!
그때 유리마녀는 자신의 입으로 날아든 시뻘건 물체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헌데 그 모습을 자세히 지켜보던 능비헌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 저건 인간의 심장……?"
"어떤 놈이냐!"
쐐액!
그의 경악성이 끝을 맺기가 무섭게 유리마녀가 호통과 함께 정좌한
자세 그대로 능비헌을 향해 쏘아져왔다.
"헛! 전설의 삼매부동신법(三昧不動身法)!"
능비헌은 또다시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삼매부동신법!
중원무림의 원조인 달마대사조차 해탈 직전에 깨달았다는 전설적인
무공으로서 지난 천 년 동안 이 신공을 터득했다는 인물은 단 한 명
도 없었다.
한데 이 유리마녀란 괴녀의 몸에서 그 절세의 신공이 펼쳐졌으니 능
비헌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스팟!
투명한 유리마녀가 능비헌의 일 장 거리에 내려앉았다.
"호호호! 네놈은 누구냐? 혹시 유령지존이나 천라제왕이 보낸 첩자
놈이 아니냐?"
능비헌은 흠칫했다.
'유령지존과 천라제왕이라고? 그렇다면 저 유리마녀는 그 두 사람과
잘 알고 있는 사이란 말인가?'
그는 유리마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유리마녀의 신체는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괴이했다.
머리부분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투명하기만 해 오장육부는 물론 조그
만 뼈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능비헌이 대답하지 않자 예리하고 섬칫한 흉광
을 번뜩이며 날카로운 교갈을 질렀다.
"네놈은 본녀가 묻는 말을 듣지 못하느냐?"
능비헌은 급히 정신을 차리며 노갈을 터뜨렸다.
"사악한 계집 같으니! 나는 유령지존이나 천라제왕과는 아무런 연관
이 없다. 한데 네년이 어젯밤 천라제왕부의 무사들을 해치고 천라쌍
미를 납치했느냐?"
능비헌의 일갈에 유리마녀는 일순 흉폭한 노기를 띠었다.
그러나 이내 무엇을 생각했는지 부드럽게 표정을 고쳤다.
"호호호! 그렇다! 그놈들은 본녀가 익히는 유리투갑빙살강(琉璃透甲
氷殺 )을 익히는 데 필요한 심장을 기꺼이 바쳤다!"
"뭣이? 유리투갑빙살강을 익히고 있다고?"
순간 능비헌의 두 눈에 분노의 섬광이 터져나왔다.
-유리투갑빙살강(琉璃透甲氷殺 )!
이것은 가장 사악하고 잔인한 저주의 마공이다.
실전된 지 천 년도 넘은 이 극랄한 마공을 익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북해의 만년빙 아래에서 자란다는 만년빙련실(萬年氷蓮實)을
얻어 일갑자 동안 면벽 수련하면서 자신의 몸을 극음지신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단점이 있지만 이 방법으로 수련하면
금강불괴체신공을 익힌 것처럼 어떤 신병이기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
몸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방법은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이다.
만년빙련실을 복용한 후 인간의 심장 일천 개를 먹고 가장 강한 순음
지기를 지닌 두 명의 여인의 체내에서 피와 뇌수를 빼 먹어야만 한다
.
이 방법은 시일이 걸리지 않고 순식간에 십이성의 대공을 이룰 수 있
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인간의 심성을 완전히 뒤바꿔 제아무리 선한 자
라 할지라도 부모형제는 물론 자식마저 죽이는 마인(魔人)으로 변하
게 한다.
너무도 잔인하기에 고금 사상 이 마공을 익혔다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비록 이 무공을 익히면 한 번의 가벼운 손놀림에 산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게 되지만 너무도 사악하기에 사파의 거
마들조차 익히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 저주받은 마공을 익히다니……!"
능비헌은 극도의 분노로 치를 떨었다.
"호호호! 네놈의 자질이 너무 뛰어나 기쁜 마음으로 정부(情夫)를 삼
으려 했더니 감히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니……!"
능비헌의 분노서린 질책에 유리마녀는 사악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미 인성(人性)을 거의 상실해버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
서야 여자의 몸으로 남자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데도 가릴 생각도 않
으니 수치심이 있을 리가 없다.
한 올의 털조차 보이지 않는 미끈한 유리질의 은밀한 부위마저도 그
녀의 움직임에 따라 언듯언듯 벌어지며 꿀물을 머금은 오묘한 구조를
내보이고 있다.
"놈! 이리 와라!"
쐐액!
유리마녀의 갸름한 왼손이 쾌속하게 뻗으며 능비헌의 목을 움켜쥐었
다.
"헉!"
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쾌속한 유리마녀의 공격에 능비헌은 기겁
하며 몸을 날렸다.
쉬- 학!
유리마녀의 좌수는 아슬아슬하게 능비헌의 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순간 유리마녀의 얼굴에도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본녀의 공격을 그토록 가볍게 피해내다니 제법이로구나. 하지만 요
행은 한 번 뿐이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그녀의 양손이 교차되며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빠른 속도로 능비헌의 맥문을 파고들었다.
쐐애액!
유리마녀의 손놀림은 비록 빠르기는 하지만 단순했다. 한데 능비헌을
향해 덮치는 순간 급속하게 변화를 일으켜 수십개의 환영을 일으키
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능비헌은 헛바람을 삼키면서 급히 몸을 날렸다.
스스스스!
순간 장내에는 능비헌의 모습 삼백 육십 개가 생겨나 유리마녀를 에
워쌌다.
"요놈이?"
유리마녀는 흠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요악하게 웃었다.
"호호호!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는 네놈에게 이토록 고절한 무공이
있었다니 실로 놀랍구나. 천라제왕, 그 놈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면 질투 때문에 머리가 터져 버렸을 것이다. 그 놈도 네놈처럼 어렸
을 때 기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네놈만 못했으니까."
말을 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시퍼런 흉광이 번뜩였다.
그녀의 전신에서 풍겨지는 살기와 사악한 사기를 접한 능비헌은 난생
처음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모종의 결의로 번뜩였다.
'무서운 마녀다. 그러나 저 마녀의 존재를 안 이상 묵과할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죽여야만 한다! 비록 비겁한 수단이나 방법을 써서라
도!'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의 생각은 쾌속하게 정리되었다.
'병서(兵書)에도 강한 자와 싸울 때는 기습과 선제공격이 최상이라
했다!'
결정을 내린 그의 눈이 무섭게 빛을 발했다.
"죽어랏! 마녀!"
능비헌은 그대로 유리마녀를 덮쳐갔다.
쩌저저정! 츠파파팟!
능비헌의 모습이 또 다시 삼백 육십 개로 늘어나면서 동시에 삼백 육
십 가닥의 지력(指力)이 유리마녀를 덮쳤다. 실로 놀라운 수법이 아
닐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느 공격이 진짜인지 몰라 당황하
고 말 것이다.
그러나 유리마녀의 표정이나 태도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
녀는 사악한 웃음을 흘려내었다.
"호호호! 그런 어린애 장난으로는 어림없다."
그녀는 마치 장난하듯 양 손을 가볍게 저었다.
우우웅!
그러자 무거운 음향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핏빛 경력이 느릿하게 뻗
어나와 능비헌의 그림자들 중 하나를 향해 쏘아갔다.
쩌쩌정!
직후 둔탁한 음향이 장내를 날카롭게 울렸다.
"우욱!"
능비헌은 가슴을 세찬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뚝 떨어졌
다. 놀랍게도 유리마녀는 삼백 육십 개의 환영 중 능비헌의 본체를
정확히 가려내 일격을 가한 것이다.
'대… 대단하다!'
기가 막혔다. 아니, 오기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능비헌은 들끓는 기혈을 진정시키지도 않고 십성의 공력을 끌어올렸
다.
'좋다! 어디 끝까지 해보자! 전국시대의 살수지존(殺手至尊)이던 살
황(殺皇) 야우림(夜雨林)의 십방쇄폭참(十方鎖爆斬)이라면 최소한 저
마녀에게 충격은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능비헌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확신은 뜻
하지 않은 불행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요사한 계집! 받아랏!"
고오오오……!
여인의 그것처럼 부드럽고 뽀얀 능비헌의 두 손이 확 떨쳐지면서 열
가닥의 새하얀 강기( 氣)가 뻗혀나왔다.
특이하게도 이 열 가닥의 강기는 직진하지 않고 맹렬히 포물선을 그
리면서 유리마녀를 덮쳐갔다. 마치 거미가 토해내는 거미줄처럼 유리
마녀를 휘감아 가는 것이다.
십방쇄폭참이라는 이 기괴한 수법은 열 가닥의 강기가 제각기 다른
각도와 바위에서 덮쳐들기 때문에 어떤 고수자라도 피할 수 없는 천
라지망같은 수법이었다.
하지만 유리마녀는 여전히 태연함을 잃지 않고 사악하게 웃었다.
"호호호! 이번 것은 제법 쓸만하구나! 하지만 그런 솜씨로도 본녀의
머리카락 한 올 만지지 못한다!"
스악!
교갈과 함께 그녀의 우수가 강철처럼 뻣뻣해지며 능비헌을 향해 쾌속
하게 뻗쳤다.
"봉황산수(鳳凰散手)의 제일초 봉황획사(鳳凰獲蛇)다!"
유리마녀의 투명한 손에서 일순 한 자 길이의 손톱같은 조강(爪 )이
쭉 뻗어나오며 마치 독수리가 뱀을 낚아채듯이 능비헌을 휩쓸어왔다
.
두 사람이 쏘아낸 가공할 경력은 무섭게 격돌했다.
콰콰쾅!
지축이 뒤흔들릴만큼 엄청난 폭음이 우레처럼 터졌다.
"크으윽!"
참담한 비명과 함께 능비헌은 일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고 입에선 연신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렸다. 또한 그의 전신 의복은 갈가리 찢겨져 나갔고 곳곳에선
피부가 쩍쩍 갈라져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외상 뿐만 아니라 내상도 결코 가볍지 않은 듯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진 능비헌의 두 눈에 경악이 깔렸다.
'미, 믿을 수 없다! 방금 내가 전개한 일초에는 오갑자 이상의 힘이
실려 있었는데도 저 마녀에게 충격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반진력에 내
오장육부가 흔들리다니…….'
그의 눈에 짙은 회의의 빛이 떠올랐다.
'난 태극비고에 있던 만종천무(萬種天武)를 익혀 누구에게도 지지 않
을 것이라고 자부했었다! 한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는가? 저 이름없
는 마녀조차 제압하지 못할 정도였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능비헌이 강호무림의 생리를 모르기에 일으키는 착각
이었다.
사실 그가 태극비고에서 익힌 비급들은 하나하나가 무림에서 일무류(
一武流)의 지존이 될 수 있는 가공할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실전경험!
그것이 없으면 제 아무리 머리에 하늘을 뒤덮을 무공이 들어있다고
한들 소용이 없다.
목숨을 걸고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공격에 상극이 되는
수법을 찾아내서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임기응변이다.
한데 능비헌은 단지 비급에 적혀 있는 그대로 고지식하게 초식을 펼
쳐내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평범한 고수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능비헌이 상대하고 있는 이 유리마녀의 정체는 실로 엄
청난 것이었다. 그녀는 천하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고
수인 것이다.
그녀는 능비헌보다 내공, 초식 등 모든 면에서 우세할 뿐 아니라 풍
부한 실전경험까지 갖추고 있다. 애초에 능비헌은 그녀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능비헌의 가슴속에서는 이 순간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나란 놈은 겨우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어리석은 놈! 이토록 보잘
것 없는 실력으로 단숨에 천하를 어찌해볼 수 있다는 자만심에 들떠
있었다니……!'
능비헌의 자학(自虐)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마녀가 사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사내놈이 겨우 일합을 겨뤄놓고 그렇게 죽을상을 하면 어떻
게 하느냐? 그나저나 본녀의 오성(五成) 공력조차 받아내지 못하는
놈이 겁없이 덤볐구나!"
'겨우 오성 공력으로 나를 상대했다고?'
유리마녀의 말에 능비헌은 두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의 경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마녀는 다시 비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호호호! 하긴 천라제왕이라도 구성(九成)에 이른 본녀의 유리투갑빙
살강을 막아낼 수는 없을진대 솜털도 가시지 않은 네녀석이 이 정도
라도 버틴 것은 놀라운 일이지!"
칭찬인지, 비웃음인지를 모를 유리마녀의 말에 능비헌의 가슴속에서
노기가 불끈 치밀었다.
하지만 왕왕 인간은 절망에 처했거나 위급한 지경에 처했을 때 별안
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침착해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능비헌이 바로 그러했다.
유리마녀가 온몸에서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다가올수록 그의 가슴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답답하고 분노에 휘
말려 있던 머리 속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유리투갑빙살강이 구성에 이르면 머리를 제외한 몸 전체가 투명해진
다고 하더니 사실이로구나. 저 정도의 경지만으로도 만독불침은 물론
금강불괴지신이 되어 어떤 신병이기로도 죽일 수 없다고 했던가?'
짧은 순간에 능비헌의 머리속에선 유리투갑빙살강에 대한 수많은 생
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분하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저 마녀를 어찌해
볼 수가 없다!'
그의 두 눈이 모종의 결의로 번득였다.
'정면대결은 승산이 없다. 머리를 쓰자!'
스팟!
다음 순간 능비헌의 신형이 벼락같이 유리마녀를 덮쳐갔다.
"네놈이……!"
능비헌에게 다가서던 유리마녀는 흠칫했다. 설마 한차례 호되게 당했
던 능비헌이 또 다시 선제공격을 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호호호! 네놈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구나!"
놀라던 유리마녀는 이내 냉혹하게 웃으며 능비헌의 공격을 맞받아치
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으하하! 잘 있어라, 마녀!"
스팟!
유리마녀를 덮쳐오던 능비헌의 신형이 갑자기 옆으로 홱 틀어지며 석
실 밖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 교활한……!"
유리마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능비헌이 공격하는 척하고 달아
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만일 정상적인 대치 상황이었다면 제 아무리 무영귀매의 경신술을 익
힌 능비헌이라고 해도 유리마녀 앞에서 달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능비헌이 마지막 발악으로 공격을 해온다고 여긴 유리마녀는
반격을 위해 몸을 멈췄고 그 간발의 차이가 능비헌으로 하여금 몸을
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쐐애액!
능비헌은 단번에 석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못 간다, 육시를 할 놈!"
쐐애액!
속았다는 사실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유리마녀는 사나운 교갈을 터
트리며 능비헌의 뒤를 쫓아갔다. 폭발하듯 석실을 뛰쳐나가는 그녀의
경신술은 결코 능비헌에게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헌데 유리마녀가 막 능비헌의 뒤를 쫓아 석실을 날아나가는 순간이었
다.
"으하하하! 걸려들었구나, 마녀!"
갑자기 석실 입구의 그늘에서 능비헌이 와락 튀어나오며 양손을 휘두
르는 것이 아닌가?
쩌러러렁!
튕겨진 능비헌의 열 손가락에서 마치 벼락이 작렬하는 듯한 시퍼런
지강(指 )이 터져나와 유리마녀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하악!"
유리마녀는 기겁을 했다. 능비헌이 설마 달아나는 척하며 석실 밖에
숨어있다가 기습을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능비헌이 노리는 부위는 그녀의 유일한 약점인 두 눈이었다.
유리투갑빙살강이 구성에 이른 그녀의 몸 부위에서 아직 외부의 공격
에 취약한 것은 두 눈 뿐이었는데 능비헌은 용케도 그것을 알아차리
고 눈을 공격해온 것이다.
파카카캉!
다급히 얼굴을 가린 두팔 주위로 능비헌의 지력이 작렬하여 시퍼런
섬광(閃光)이 튀었다. 유리마녀의 이 믿어지지 않는 쾌속한 반응으로
인해 능비헌의 지력이 직접 그녀의 눈을 뚫는 것은 실패했다.
"아악! 내 눈……!"
콰당탕!
하지만 직후 유리마녀는 비명을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비록 눈
을 찔리지는 않았으나 능비헌의 지력이 그녀의 팔뚝에 맞는 순간 일
어난 강렬한 섬광이 일시적으로 그녀의 시력을 빼앗아간 것이다.
-작렬폭섬지(炸裂爆閃指)!
이것이 방금 능비헌이 유리마녀를 공격한 지법의 정체였다. 극양의
지법인 이것은 세 치 두께의 철벽도 뚫는 관통력을 지니기도 했지만
그 관통력보다는 표적에 닿는 순간 강렬한 섬광이 이는 것이 더 치명
적이다.
벼락이 바로 눈앞에서 터진 듯한 그 강렬한 섬광은 일시적으로 적의
시력을 빼앗아 버린다.
일단 시력을 빼앗아버리면 그 다음에 적을 쓰러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능비헌은 비록 기습을 가해도 그렇게 간단히는 유리마녀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작렬폭섬지를 쓴 것이다.
물론 이 작렬폭섬지는 능비헌이 태극비고에서 연마한 만종절예의 한
가지다.
"죽어라, 마녀!"
작렬폭섬지의 기습이 성공하자 능비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재차
유리마녀를 향해 돌진했다.
퍼퍼퍽!
그의 손끝에서 터져나온 강기의 창날이 그대로 유리마녀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아악!"
나뒹굴고 있던 유리마녀가 또다시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일 장 밖으
로 튕겨져나갔다. 능비헌의 통렬한 일격이 그녀의 아랫배에 자리한
단전(丹田)에 작렬한 것이다.
알다시피 단전은 공력이 생성되는 곳이다. 인체의 수십 개 사혈(死穴
) 중에서도 머리 끝의 백회혈(百會穴)과 더불어 가장 약하고 중요한
사혈로서 조그만 충격만 가해져도 죽음을 당하거나 내공을 잃어버린
다.
비록 유리마녀가 유리투갑빙살강을 구성까지 연마했다고는 해도 단전
에 직격을 당한 이상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이지는 못
해도 최소한 일시적으로 운신은 못할 것이라고 능비헌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능비헌의 희망사항이었다.
"이… 이 쥐새끼 같은 놈……!"
능비헌에게 단전을 통타 당해 일 장 밖으로 나뒹굴었던 유리마녀가
이를 갈며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능비헌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랬다.
'끔… 끔찍한 괴물이로구나!'
능비헌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바득!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쐐애액!
유리마녀는 악귀나찰처럼 악을 쓰며 능비헌을 덮쳐왔다.
쿠쿠쿠쿠!
그런 그녀의 양손에서 시뻘건 장력이 폭사되었다.
'허억!'
능비헌은 기겁하며 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콰콰쾅!
직후 목표를 잃은 유리마녀의 시뻘건 장력이 동굴의 한쪽 벽을 강타
했다. 그녀의 장력에 격타당하는 순간 동굴 벽이 두부처럼 으깨지며
와르르 무너졌다.
'지… 지독하군! 저기에 한방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다!'
능비헌은 소름이 오싹 끼쳐 뒷걸음질을 쳤다.
"바득! 죽어랏!"
콰아아아!
유리마녀는 마구잡이로 장력을 휘둘러 동굴의 사방 벽을 무너뜨렸다.
겁에 질려 피하던 능비헌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유리마녀는 능비헌을 발견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엉뚱한 곳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력은 확실히 잃었구나!'
유리마녀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에 능비헌은 어느 정도 안심했다.
하지만 마냥 안심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유리마녀가 시력을 잃은
것은 눈을 다친 게 아니고 작렬폭섬지의 강렬한 섬광에 노출된 것 뿐
이기 때문에 머잖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녀의 발광으로 동굴 전체가 무너질 듯이 뒤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쿠쿠쿠쿠쿠!
바위조각들이 마구 날렸고 지축이 격심하게 흔들렸다.
능비헌은 두렵다기보다도 기가 질렸다.
'어떻게 인간이 저토록 엄청난 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그나저
나 저 마녀의 광란을 방치하면 여기가 무너져 석실 안의 두 여자가
변을 당하고 만다!'
다급해진 능비헌은 유리마녀를 향해 외쳤다.
"마녀! 난 여기에 있는데 왜 엉뚱한 곳에다 헛손질이냐?"
"네… 네놈이……!"
순간 유리마녀는 이를 갈며 능비헌을 향해 덮쳐왔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능비헌은 벼락같이 몸을 날려 동굴을 빠
져나갔다.
"으하하! 잘 있거라! 나는 그만 가보겠다!"
동굴을 재빨리 날아나가면서도 능비헌은 그녀를 조롱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크아아아!"
유리마녀는 상처입은 암사자처럼 울부짖으며 그런 능비헌의 뒤를 추
적했다. 그녀가 석실을 붕괴시키지 못하게 만들려는 능비헌의 계책이
성공한 것이다.
마침내 쫓고 쫓던 두 남녀는 능비헌이 처음 떨어져내린 고목의 구멍
밑부분에 도착했다.
"하하하! 꼴 좋구나, 마녀야!"
순간 능비헌은 회심의 일갈을 터트리며 수직으로 치솟았다.
"저… 저놈이……!"
능비헌이 날아나가는 것을 감지한 유리마녀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어
렸다.
"바득! 네놈은 절대 본녀의 수중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악에 받친 교갈과 함께 입을 쩍 벌렸다.
콰아아아!
순간 그녀의 입에서 무엇인가 하얀 물체가 튀어나와 빛살처럼 능비헌
의 등 뒤를 향해 쏘아갔다.
"헛!"
날아오르던 능비헌은 섬뜩한 파공성에 아래쪽을 내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주먹만한 크기의 새하얀 구슬이 찬연한
섬광에 뒤덮인 채 자신을 향해 벼락같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저… 저건……!"
꽈르르릉!
능비헌은 경악하면서도 급히 아래쪽으로 쌍장을 내리쳤다.
과연 유리마녀가 내친 그 하얀 구슬의 정체는 무엇일까?
첫댓글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