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경 베이징(北京)에서 안광천(安光泉)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지도했고, 레닌주의 정치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을 설립·운영했다. 1930년 후반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고, 이듬해 1931년에는 박차정과 결혼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지도해왔으나, 1933년 종연방직 파업사건을 계기로 전원 체포되어 동맹의 국내기반은 붕괴되었다.[2]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김원봉은 상하이에서 삼민주의역행사의 서기 텅제를 만나 재정을 지원받았다.[2]
1932년 장제스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를 중국 난징 외곽에 설치하고 교관을 담당하여 혁명요원 모집과 양성을 하고,[7]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였다.
이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구 의열단 단원 및 신규 청년들을 모집하여 활동하였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와 연대하여 항일전을 펼쳐 나갔다. 소수의 인력이었던 조선의용대는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선전활동과 홍보 업무를 주로 하였고, 김원봉은 중국의 방송에 출연하여 연설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각자 의견의 대립과 김구의 임정 법통 고집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민족유일당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을 임정과 우파 독립운동가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비협조적이었고 우파 인사 중 김규식(金奎植)만이 호의를 보였다.
1935년에는 김규식(金奎植)의 민족유일당 운동에 동참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한다. 구 의열단 단원들이 주류를 차지하여 당내 실력자가 되었으나 김원봉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통합을 위해 당총재 직을 김규식에게 양보하였다.[8]
1937년 김원봉은 일시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원봉은 자신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보다는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9][10]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루산에는 김구 등이 와 있었다. 초대에서 중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11]
1938년 10월에는 훈련해온 청년들을 규합하여 중국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 즉 선전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를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했다. 1939년 5월에는 김구 등과 전국연합전선협회를 결성했고, 민족유일정당 결성에 합의하여 7당통일회가 열렸으나 결국 우익 인사로는 김규식만의 호응을 얻었을 뿐,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정적, 소극적인 반응 때문에 민족혁명당에 의한 민족유일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940년, 3개 지대 중 2개 지대가 중국 공산군이 집결하고 있는 중국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의용대 사령관 김원봉의 지휘하에서 이탈하자 김원봉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12] 여기에 김원봉은 사상 이념을 떠나서 조선의용대와 임정세력과 합작을 할 것을 제의했으나, 임정내 보수세력 우파인 김구와 대립하였다. 1939년, 김원봉이 한국독립당과 통합논의를 제의했으나 임정내의 보수세력들의 반발로 인해 성사되지 못하였다. 임정내에서 반발했던것과 마찬가지로 민족혁명당내 일부에서는 기존의 단체를 연대하는 것에는 찬성하나 기존의 조직을 해체하고 새로운 당을 만드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고 반발했던 것이다.[13]
김성숙은 '김원봉 일파는 김구 일파와 크게 대립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성숙에 의하면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계열의 지원을 받고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경쟁관계를 부추긴 것이라고 보았다.[14] 김원봉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 대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반대하였다. 김성숙은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고,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그뒤 조선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14]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한 후, 〈동지 동포에게 고함〉(1939년)이라는 성명서를 김구와 공동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후 한국 광복군에 참여를 결심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내 공산주의계열의 반발이 컸다. 그러나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의 편입에 동의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일부 사회주의계열은 조선의용대에서 이탈, 화북의 김두봉·무정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을 찾아갔다.
1942년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하였으나 이 시점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의 지도자로서, 여당인 한국독립당 당수인 임정 주석 김구와 끊임없이 정쟁을 벌였다.[15]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16] 1942년 6월에 윤세주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김원봉은 매우 충격이 컸다고 한다.
1942년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내에서 그의 위상은 내실이 없었는데,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김구 중심의 민족주의 우파계열에서 장악을 하고 있었고,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그리고 이청천의 광복군을 원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김원봉은 좌절하지 않고 중국공산당과 우호관계를 지속하고 미국과 영국 연합군과 관계를 강화하여 민족혁명당 독자적으로 협력하였다. 한국독립당과 광복군사령부는 민족혁명당과 미와 영이 협력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으나 민족혁명당은 1942년에 두 명의 대원을 인도에 파견하였고, 1943년 5월 영국군과 12개조의 협정을 맺어 협력을 하였다. [17]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의원 겸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 김원봉은 한국 광복군과 화북지대에 있는 조선의용군이 합작하여 하루빨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할 것을 김구,김규식에게 수 차례 제안했으나, 임정내 보수세력들은 '사회주의자들과는 연탁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8][19]
1944년 중화민국군으로 있다가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온 장준하 등을 영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노력을 거절하였다. 뒷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20] [21][22]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으로 입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그가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23]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이청천에게 보고하였다.[23] 이청천은 광복군을 직접 사열하였다.
실제로 김원봉은 '임정은 조선의용군과 합작을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하루빨리 추진할 것'을 김구와 김규식한테 설득,제의하였고, 일제 패망이후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장병들에게 거처를 마련하는 한편, 고국으로 가는 배편을 마련하는등 강구 및 노력하였다.[24][25]
이후 임시정부 군사부장을 역임하다가 1945년 8월 사천성 중경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 제2진으로 귀국했다.[26] 귀국당시, 그는 고향 경상남도 밀양을 방문하였었는데, 당시 밀양에는 10만여 명 인파가 운집하여 그를 열렬히 환호하고 맞이하였다 한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을때, 김원봉은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27] 당시 귀국을 놓고 임정은 서로 이놈, 저놈 이라며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민혁당 측에서는 한독당의 1진 귀국을 허용하는 대신 민혁당 위원장 김규식을 1진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고, 한독당에서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무난히 처리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의 양보를 후일 중차대한 실수라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12월 3일 김원봉은 상하이에서 국민당 관계자와 전별하고 비행기에 탑승, 신익희, 홍진 등 임정 환국요인 제2진과 함께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였다. 그러나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은 1진에 비교하여 호응이 없었다.
12월에 귀국한 뒤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여 민족통합을 위해 좌익쪽과 협상을 해서 좌우합작 노선으로 갔는데,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문제안을 놓고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게 되면서[15], 한민당과 우익계열등 독단적인 행보와 임정의 파벌싸움등 지켜본 그는 실망감을 안게 된다. 이미 여운형(呂運亨)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되었는데, 그는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946년 1월, 김성수가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은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28] 이어서 리극로(李克魯)와 함께 태고사에서 5당회의를 계획했으나, 우익청년단체의 습격으로 실패로 돌아가 버리자, 그는 1946년 2월 14일 임시정부를 탈퇴, 김성숙, 장건상 등과 함께 민족주의민주전선 준비에 가담하였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2월 14일 민족주의 민주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고[29] 이어 5인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추대되어 활동하였다.[15]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결별한 후 김원봉은 우익, 친일파 등으로부터 수 차례 정치테러를 당하는등 계속된 시련을 겪게 된다.
민전 탄생 직후, 그는 지방순회단을 조직하고 1946년 2월말부터 3월초 까지 민전 결성을 경남 지방민에게 알리고 그 정당성을 홍보하며 민심파악 및 민전의 정당성과 자신의 존재와 주장을 홍보할 목적으로 부산, 마산, 진해, 진주를 순행하였다.
46년 7월 22일 모스크바 및 북조선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30]이 민전 협의회 석상에서 좌우합작에 반대하며 5개항을 제시했다. 민전 회의에서 좌우합작에 참여 여부는 표결로 결정되었다. 박헌영은 다수결에서 패배하자 5개항을 지지할 경우 합작을 지지하겠다고 제의했다.[31] 그러나 김원봉은 여운형과 함께, 박헌영의 5개항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5개항 가운데 토지몰수 조항이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는 조항, 입법기구 수립 반대 조항은 곧 합작반대로 비춰질 수 있으며 우익 측에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31] [32] 그러나 박헌영은 이를 듣지 않고 단독으로 5개항을 발표한다.
1947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산하 단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24시간 총파업 발생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노덕술에게 '빨갱이 두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종로경찰서에서 뺨을 맞게 되는데 김원봉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33][34] 이는 일제치하에서도 당하지도 않은 수모를 해방이후 조국에서 친일 경찰출신한테 잡혀 치욕을 겪은 일이다. 김원봉은 이 치욕을 당한것에 매우 상심하게 된다. 의열단출신이자, 김원봉과 친분관계가 있는 유석헌은 김원봉이 이때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하였다.
김원봉은 붙잡혀 갈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제 경시 출신 노덕술이 그대로 수갑을 채워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다. 이어서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서는 사흘을 꼬박 울었다 한다. 그는 울면서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했다.
의열단 동지 유석헌의 회고 증언내용中..
김원봉 체포는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어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그는 친일파와 우익들의 정치테러 표적이 되어 있었다.[33]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고, 구심점 역할을 해오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의 죽음에 분노에 찬 애도문을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35][36] 그러나, 이후에 그는 우익세력과 친일파세력들의 테러의 위협에 시달렸다.
1948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때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조선으로 넘어간 뒤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월북 인사가 되었고,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내각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그가 월북하게 된 이유는 남한에서 미군정 치하의 경찰에 붙들렸을 때 친일 경찰로 유명한 노덕술에게 공개적으로 조롱을 받고 수 차례 고문을 받은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데,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보호를 받으면서 권세를 득세하는 잘못된 사회 흐름에 매우 크게 실망한 것이 월북의 한 동기라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친일파와 우익 양측의 정치테러 표적이 된 그는 거처를 5개를 마련하고 테러를 피해 항상 옮겨다니며 잠을 자야 했다.[33] 한편, 김구의 임시정부의 보수세력은 역시 그를 경계하였다. [15]
1948년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37], 9월, 북조선에 정권이 수립되면서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38]
1950년 한국 전쟁때, 김원봉은 김일성의 정책과 남침에 반대한것으로 알려져 있다.[39] 1950년 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를 주관, 만포진 부근의 야산에 안장해주었다.
한국 전쟁의 과정에서 그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몰리거나,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한국 국군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그 학살의 과정에서 동생 김봉철, 김학봉만이 살아남았다. 그의 아버지 김주인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 [40]
한국전쟁 이후로도 그는 납북된 인사들(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스위스같이 중립국 평화통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1952년 5월 내각 노동상,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지내면서 고위직을 거쳤다. 1957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41] 1958년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북조선 정권으로부터 노동훈장을 수여받았다.[33]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의 외당숙이었다.[42] 김원봉과 친분관계가 있던 그는 김원봉에게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사위"라고 언명하기도 했다.[42] 이러한 친분관계는 김원봉이 재혼한 뒤에도 이어졌다.
1957년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다.[41] 그리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그러나 1956년 종파사건계기로 김일성(金日成)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延安派)가 숙청되면서, 그도 역시 1958년에 실각했다. 1958년 10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41] 1958년 11월 이후, 그의 행적은 강등되어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과 자살설, 총살설 등이 떠돌아 실각직후 곧바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자세한 사망 시기나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은것으로 추정하고있다.[43] 일설에는 김일성이 '장개석의 국민당 사주를 받은 간첩, 종파주의자'라고 몰아붙혀 김원봉은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김원봉은 정치보위부 감옥에서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44][45][46]
첫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낸 박차정[47]으로 1931년에 결혼하였으나,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이어, 두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48]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1945년~)이고 둘째는 김철근(1947년~)이다.[49] 북에 최동선이 낳은 그의 두 아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남에서 가족들중 남동생들은 모두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했다. 유일하게 여동생 학봉(1932년~)씨와 남동생 봉철씨가 생존해있다.
여운형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인사들에게 협력을 요구했을 뿐이지 그가 실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였는지는 의문이다.[54] 이를 근거로 1925년 동아일보자 사설란에 '합치되는 두 운동'이라는 내용을 실은적이 있엇는데, 김원봉은 독립운동에 대한 노선을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운동선상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두가지 풍조가 나뉘어 있는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근일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토론한 문자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간단히 말하면, 우리 조선 사람의 처지로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락과 합동이 있어야 한다기 보다는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 민중의 생존번영 자유평등을 위하여 분토노력한다는 그 실질문제에서 두가지 운동이 다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하나는 형식이 종족의 투쟁으로 나타나고 하나는 계급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하여 두가지 운동의 차이점을 말할 수 있겠지요. (중략) . . . 즉, 이 두가지가 조선에서는 합치한다고 생각합니다.[55]
그리고 한가지 더 근거를 들자면 1945년 8월 광복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하고 있을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소위계급 황용주(뒷날 MBC사장)는 김원봉하고 오랜시간동안 얘기나눴다는데, 황용주에 의하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고하였다. [56]
무장독립투쟁에서 큰 활약을 했으나, 활약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김산은 그를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아나키스트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4] 김산에 의해 묘사된 그의 모습은 웃는 법이 없었고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4]
김규식은 '약산은 혁명가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자 지도자이지만, 정치적인 인물로는 입지를 못잡아 아쉬운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57]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일제감정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이자, '김원봉에 대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삼웅의 말에 의하면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또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후 박헌영 등 남로당을 숙청한 후 김원봉은 마지막 남은 라이벌 같은 존재였고 이 때문에 김원봉을 배제시켰을 개연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이어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58] 하지만 과연 사회주의자냐 아니냐의 문제가 독립운동가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근거가 되느냐, 그리고 사회주의자면 독립운동자체도 낮게 평가받아야만 하는 필연적 논리가 성립되느냐는 문제자체가 근본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는 김원봉의 독립운동 경력이 인정되고 있는 추세로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 2005년과 2007년에는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씨가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을 수여해줄 것을 신청하고, 그의 독립운동활동에 관한 공적자료를 함께 대한민국 정부에 제출했던적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원봉이 1948년 남북협상 이후 북에 잔류하여 북조선에서 주요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수여를 불인정했다.[59] 그러나, 김원봉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힌적이 있었고,[60][61]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무장투쟁노선에 가장 구심적인 활동을 해왔었던 공산주의자가 아닌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였다는 관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재평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있다.[62] 실제로, 남한과 북한 그 어느곳에서도 김원봉에 대해 기념하는 어떤 묘소도 기념비도 없다.
일본 학도병 출신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영하여 중국군으로 합류, 한국 광복군에 편입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학도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고 비판하였다.[63] [64][65] 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정내 보수세력인 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이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드는 것을 거슬리게 생각하였으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15]
1990년대 초반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복권노력이 추진되었다. 1995년 본처 박차정이 건국훈장을 수훈하였으므로 김원봉의 건국훈장 서훈 노력도 추진되었으나, 국가보훈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발적 월북자이고, 북조선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하여 2005년 건국훈장 서훈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뒤 사단법인 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와 여천 홍범도 기념사업회(회장 이종찬), 도마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회장 함세웅) 등 항일운동기념단체 11곳이 주축이 돼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서훈을 추진하고있다.[66]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의 군사부장에 선출되었다.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국 제2진으로 환국, 인공 내각으로부터 취임 요청을 받았으나 그는 인공 군사부장직에 취임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친일경찰 노덕술
노덕술(盧德述, 일본식 이름: 松浦鴻, 1899년 ~ 1968년 4월 1일)은 일제 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경찰 간부였다. 일제강점기때 고등계형사로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하며, 해방이후 대한민국정부 수립 때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반공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에 반민특위로 체포된바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창씨개명은 마쓰우라 히로 (일본어: 松浦 鴻).
생애
1899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들아가 졸업을 하고, 경찰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경남 경찰부 보안과를 시작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하여, 울산경찰서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순사부장이 되었고 1934년에 평안남도 보안과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고등계형사로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가혹하게 고문하고 취조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그의 악명높은 고문, 취조등에 못이겨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착착 승진을 했다. 그가 얼마나 악랄했는지는 그 당시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고문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였었다.
해방 이후, 잠시 평양에서 경찰서장을 맡고 있다가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나고,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등을 주도하였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한현우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해방이후 극우 반공주의 활동 및 경찰 활동지내면서 이승만으로부터 '반공투사'라는 찬사를 얻기까지한다. 1947년 3월에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체포하고, 공개적으로 조롱하고 뺨을 때리는 등 온갖 모욕을 주었다. 또한, 그는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1]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알려지면서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틀 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이후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그러던중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노덕술은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칩거하면서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첫댓글 대한민국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다 친일파 후손입니다.
미안합니다. 술처먹은 리모콘 ...너무 답답한 마음에....
대한민국에 살아있는 사람 모두라기 보다는 정, 재계에서 돈과 권력을 주무르는 인사들의 대부분이라고 봐야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