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제 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전쟁의 총합이다.
2차 대전은 크게 영국(+미국)vs독일의 서부 전선과 미국vs일본의 태평양 전선 또한 영국vs일본의 인도-버마 전선
일본vs중국의 중국전선..그리고 독일vs소련의 동부전선,독소전쟁이 있다.
이 많은 전선들중 2차 대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느낀 전선은 무엇이엿을까? 모든 전선이 다 중요했지만
독일과 소련이 싸운 독소전쟁,즉 동부전선은 2차대전의 90%를 차지할 만큼 제2차 대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전선이다.
모든 사람들은 말한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해서 2차대전에서 패배했다고..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소련을 친 것일까?
단지 유럽재패라는 야망때문에?? 사실 나치의 소련 침공은 어쩔 수 없는 예고된 전쟁이였다.
이것은 유럽 역사를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유럽대륙에서 최강으로 떠오른 나라들은 항상 유럽의 양 쪽 끝 때문에 고민한다.
바로 서쪽의 영국과 동쪽의 러시아다. 애초에 유럽은 자원이 부족한 대륙이다. 따라서 유럽을 재패한 국가라도 세계와의 무역을 해야 제국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제국 유지를 가장 힘들게 하는게 바로 해군강국 영국이다.
히틀러의 롤모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을 재패했다. 나폴레옹은 먼저 가까운 영국부터 상대하고 영국을 무너뜨린 후 러시아까지 재패하는게 목표였다. 영국은 중앙유럽과 가까우나 섬이고 전통적으로 영국은 해군 강국이다. 러시아는 중앙유럽과는 머나
너무 넓고 너무 추우며 많은 인구가 있다.
유럽을 거의 통일햇던 나폴레옹은 영국을 무찌르기 위해 해군을 키웟지만 결국 트라팔가 해전에서 그 꿈을 포기하고 영국을 봉쇄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하지만 실상은 강력한 영국 해군에 의해 유럽대륙이 세계로 부터 봉쇄된 것이다.
자원이 부족한 유럽대륙을 영국이 봉쇄하자 전 유럽 국가들의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이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
하지만 해군의 열세로 인해 영국을 손 쓸 수가 없엇고 더불어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무시하자 결국 자원과 프랑스의 위엄을 지키기위해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했고 결국 패배했다. 러시아는 프랑스가 지배하기에는 너무 멀고,넓었으며,추웠고,인구가 많았다.
나치 역시 나폴레옹과 상황이 동일하다. 강력한 영국 해군에 의해 대서양 무역을 못하게 된 나치는 어쩔 수 없이 동쪽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자신은 나폴레옹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독소전 초기에 소련의 300만의 최정예 붉은 군대를 각개격파하면서 독소전쟁은 자신의 승리라고 장담했다. 초기에 파죽지세로 소련을 몰아붙이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기세가 꺾이고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자랑하던 모든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이 전멸하면서 결국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게 됬다.
하지만 많은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만약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만약 영국 미국 없이 독일과 소련의 1:1전쟁이였다면?"와 같은 논쟁을 던진다.
첫번째 논쟁은 의미가 없는 논쟁이다. 유럽의 양쪽 끝을 앞에서 언급했듯이 독소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쟁이다.
영국을 무너뜨리지 못했기 때문에..자원과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침공을 해야한다.
즉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려면 독일이 영국을 점령해서 대서양을 장악해야 가능한 상상이다.
그럼 두번째 논쟁은 어떨까? 독일vs소련의 1:1 전쟁이라는 논쟁에 대해선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결국 한가지 결론으로 수렴한다. "독일은 결코 소련과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즉 제가 이번에 쓰고자 하는 주제는"왜 독일은 소련에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나?" 입니다.
독소전 전개상황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독소전이 어떤 상황이였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독소전은 크게 4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1기:1941년 독소전 발발(바로바로사 작전=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
2기:1942년 스탈린 그라드 전투(독일의 기세가 꺾임)
3기:1943년 쿠르스크 대전투(사실상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4기:1944년 독일 중앙집단군 전멸과 독일 패망(바그라티온 작전=소련의 독일 침공 계획)
1기:1941년 독소전 발발(바로바로사 작전=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
말 그대로 1941년 독일의 소련침공 기간을 의미합니다..당시 독일은 북쪽으로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으로는 모스크바,남쪽으로는 로스토프를 향해 물밀듯이 진격을 합니다. 그 진격 속도는 파죽지세..
독일의 소련 침공 이유
표면적으로는 다름 아닌 생활권 이론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보면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으로
슬라브인들이 장악한 유럽 러시아를 지목했고..이곳에 거주하는 슬라브족을 쫒아내고 게르만인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더 실질적인 이유는..영국의 대서양 봉쇄로 인한 자원과 시장의 부족과 소련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즉 독일은 소련이라는 강력하고 음흉한 강대국이 자신 근처에 놔 두는 것이 무서웟던 것 입니다..
해군의 부족으로 결코 영국을 정복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영국과 싸우는 사이에 자신이 커버할수 없을정도로 소련이 강해지는 것을 무서워했고 결국 미리 싹을 자르기위해 소련을 공격합니다.
즉 소련을 이길 수 있을 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침공합니다. 뭐 그 이외에도 공산주의 같은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 합니다
독일의 준비
강력하고 광대한 러시아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 준비 또한 장대했습니다.. 우선 소련 침공을 위해서 군단급 단위(보통 2-3개의 기갑사단 + 1-2의 차량화 보병 사단)의 기갑전력을 3-4개 단위로 묶어서 운용하는 기갑집단의 개념을 선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갑집단을 무려 4개나 창설합니다. 그래서 이런 4개의 기갑집단에 속한 기갑사단이 무려 16-20여개 사단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갑집단을 주축으로 10여개의 보병사단을 포함하는 군을 조합해서 집단군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이런 집단군을 3개 방면으로 전개 시킵니다.
즉 발트 3국을 통해서 레닌그라드 까지 진격하는 북부 집단군
민스크와 스몰렌스크를 중간보스 느낌으로 모스크바를 최종보스 느낌으로 하는 중부 집단
그리고 키예프와 로스토프를 거처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목표를 삼은 남부 집단군을 준비하고
각 집단군에 1-2개 정도의 기갑집단군과 2-3개 정도의 군을 할당합니다
즉, 독일군은 3개의 집단군을 전개하면서 20여개의 기갑사단을 포함한 170여개의 사단을 소련 침공에 동원합니다
인원수로는 약 370만,전차만 4000대가 넘어갑니다.
독일군 주력 전차인 3호전차
독소전이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간뒤 강력한 소련 전차에 대응하기 위해
3호전차를 대신해 주력 전차가된 4호전차
소련의 상황
당시 소련의 군사력은 어마어마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무장상태가 좋은 군대였을 정도로(사람들이 무장의 질하면 독일을 떠올리는데 사실 소련군이 더 좋았습니다 물론 독소전 초기에 지휘관의 부재로 다잃음...)
전차만 거의 2만대를 운용했죠..물론 상당수가 구형 전차였지만 독일의 주력 전차인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성능을 능가하는
T-34와 KV-1도 엄청나게 많이 보유했죠
한데 왜 독소전 초기에 소련이 그렇게 밀렷느냐?
문제는 장비같은 하드웨어적 요소가 아닌 소프트웨어적 요소였습니다.
우선 우수한 독일 지휘관에 비해서 소련의 지휘관들은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정권에 잠재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 우수한 백계 러시아 제국군 출신 장교들을 전부 숙청하고
이들의 자리에 경험이 전무하고 어린 장교들을 승진시킵니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였고 심지어 10대후반도 상당했습니다.
당연히 이들의 지휘능력은 형편없었습니다....20대 초반 정도인 애들이 무슨 지휘를 합니까?
즉, 소련군은 무장 상태도,장비의 숫자도 병력의 양도 독일을 압도했으나 아무리 무장 상태가 좋고, 장비의 수가 많고 병력도 많아도 숙련된 지휘관이 다루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지휘관이 다루는 것은 숙련된 조교와 갓 들어온 신병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엇습니다.
소련의 주력전차였던 T-34
티거전차를 제외하고 독일의 그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한 전차다
소련의 중전차인 KV-1
티거전차와 88mm 대공포를 지상에 쏘는 것 외에는
독일은 이 전차를 막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1기의 결과
위에서 언급한대로 독일의 승리입니다. 즉 독일군은 프랑스나 폴란드 전투에서 해봤던 몇만명 단위의 포위 섬멸이 아닌
몇십만명~몇백만명 단위의 포위 섬멸전을 훌룡하게 합니다. 특히 키예프 포위전에서 무려 100만명에 달하는 소련군을 포로로 잡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인해 위로는 레닌그라드,중앙으로는 스몰렌스크,남쪽으로는 로스토프까지 진출합니다
독일군보다도 훨씬 장비가 우수했고 수도 많았던 소련군이 지휘관의 부재로 독일군에게 각개격파 세계에서 가장 무장상태가 좋은 총300만가까운 大붉은군대를 모두 잃은 소련은 말그대로 엄청난 위기였고,히틀러는 그 무서웠던 大붉은군대를 격파 이 전쟁은 승리했다는 확신을 합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 진격 방향
북으로는 레닌그라드 중앙으론 모스크바 남으로는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했다.
1기의 양상
하지만 독일군에게도 문제가 있엇습니다..소련은 너무나도 넓었고..뛰어난 작전으로 엄청난 승리를 했지만
아무리 지휘관이 없는 토끼가 지휘하는 사자 소련군이라지만 사자는 사자였기 때문에 섬멸하는데 걸린 시간이 계획된 시간의 2배였습니다.
당연히 진격속도는 느려지고,장비는 고장나고, 병력수는 줄어들고, 결국 10월 이 후 소련의 가을 장마가 시작되어
도로는 진흙탕이되고 겨울이되어 무서운 동장군이 오게됩니다
그 결과 독일군은 진격을 멈춰야 했고 다음년도 해빙기까지 전선은 소강상태가 됩니다.
즉 독일군은 세계 최강 大붉은군대를 상대로 기적적인 대승을 거둿고 많은 소련영토를 점령했지만
결국 궁극적인 목표인 모스크바 공격 전에 동장군을 만나 많은 장비와 인력이 손실된채 소강상태가 됩니다.
즉 독일군은 수많은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결국 겨울전까지 모스크바를 점령,전쟁을 끝낸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이 것은 독소전이 히틀러가 생각하던 단기전이아닌 장기전이 된다는 의미고 이 것은
총 국력이 소련의 상대가 되지 않는 독일에겐 결정적인 약점이 됩니다.
반면 소련은 최정예 大붉은군대를 전부 잃고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소련의 국력은 아직도 강했습니다.
특히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을 격퇴한 건 큰 전략적 승리였습니다.그래서 혹자는 이 당시 소련이 공간을 팔아서 시간을 벌어
군대 지휘계급을 복구하였다고 합니다.
각설하고 1941년은 1기 독소전은 어찌됫건 독일이 기적적으로 大붉은군대를 괴멸,일방적인 독일군의 소련 두드리기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41년 동장군이 온 이후 독일군의 진격은 멈췃고
상대적으로 소련군의 반격은 거세어 졌습니다.
그 결과 독일은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
중부전선에서 상당거리를 후퇴합니다.
2기:1942년 스탈린 그라드 전투
1941년이 지나고 1942년이 해빙기가 되자..독일 소련 모두 공격 계획을 가집니다. 특히 소련이 경우 영토회복을 위해
여러차례 반격 작전을 펼치지만 주력 병력을 모두 잃고 예비 병력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모두 독일군에 저지 당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에 경우 청색작전(블라우 작전)을 통해서 소련의 경제 요충지를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소련의 경제 요충지는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보다 동쪽에 있는 석탄과 철광산지인 도네츠크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카서스 산맥 이남 지역의 유전지대였습니다.
동부전선 전 지역에서 공격을 하는 것은 독일의 국력에 힘들었기 때문에 석유라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가 있는 남부전선에 독일군 최정예 제6군을 보내고 병력을 남으로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독일은 1941년 이루었던 장쾌한 진격전을 남부전선에서 다시 실현할려 합니다.
블라우 작전 당시 독일의 목표
남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독일군 1기갑집단은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소련의 유전지대로 접근합니다.
헌데 독일군 최정예이자 주전력이였던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주춤 소련군에게 역포위 당합니다.
그리고 스탈린 그라드는 독소 양군의 지옥같은 전쟁터가 됩니다.
그렇게 1942년 겨울이 되고 스탈린 그라드를 침공한 독일의 최정예 제6군 과 4기갑군 전체가 소련의 역 포위망에 갇히고
결국 전멸합니다
이 전투로 인해 독일은 우크라이나와 도네츠크 지역,코카서스 유전지대를 점령해서 소련을 경제적으로 붕괴시키겟다는 계획이 무너지게 됩니다.
반면에 소련군은 독일의 최정예 부대를 전멸시켯다는 점에서 매우 큰 소득을 가져갑니다.
즉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소련군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주게된겁니다.
독소전 초기에 잃었던 大붉은군대가 다시 조직되어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서 결국 독일군 전력을 괴멸시키고 계속 공세로 나옵니다.
소련군의 스탈린 그라드 포위
자신들이 소련군에게 써왓던 섬멸포위전에 독일 최정에 제6군은 전멸한다.
3기:1943년 쿠르스크 대전투(사실상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의 남부 집단군은 붕괴됩니다. 비록 붕괴됫지만 독일의 천재 전략가인 만슈타인 장군이
독일을 구합니다. 어차피 남부집단군의 후퇴로는 소련군에 막혀 후퇴할 수 없는 상황이 였고 따라서 만슈타인 장군은 하르코프 전투에서 남부집단군과 소련군을 상잔시켜 소련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힙니다.
독일의 천재 전략가 만슈타인
이 장군으로 인해 소련군 남부방어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남부전선은 소강상태가 됩니다.
이 전투로 인해서 독일은 안정을 찾게 되고 독일 소련 양군은 숨고르기에 들어 갑니다.
하지만 전쟁의 주도권은 점점 소련으로 넘어 가고 있었습니다. 즉 , 총 국력에서 독일을 압도하는 소련의 경우..
독일보다 더 많은 병력,장비,물자를 생상하고 있었고(미군의 랜드리스지원은 당시 소련 생산력의 1%도 안되는 물자엿다)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의 목표는 독소전에서의 승리가 아닌 독소전에서의 정전으로 바뀌게 됩니다..즉 현 전선에서 독소전을 끝낸다는 것이 최선의 전략으로 바뀐 것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독일 수뇌부가 설정해 놓은 전략적 방어선으로 독일군을 후퇴시켜서 철옹성의 방어막을 형성 하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이 기존의 T-34에 더 강한 주포를 단 신형 T-34의 양산 계획을 독일은 알게 되었고 신형 T-34가 양산되면 전선 고착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독일은 전선을 고착화 시키기위해
현 소련군 최정예 부대를 무력화 시킬 필요가 있엇고 무력화 시킬 전장으로 쿠르스크라는 지역을 지목합니다.
즉 쿠르스크로 소련군 기갑부대를 유인해서 우수한 독일 기갑군으로 대 타격을 입혀..시간을 벌어
점차적으로 독일의 전략적 방어선인 팬터-보탄라인으로 국경을 고착화시켜 소련과의 정전협정을 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즉, 독일군 입장에서 이 쿠르스크에서 신형 T-34전차가 합류하기전에 소련 기갑전력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 최 우선의 목표였습니다.. 소련도 이 점을 알고 있엇고 그래서 소련이 독일의 의도를 역 이용 합니다.
소련 기갑군을 미끼로 독일군을 끌어드려서 오히려 독일 기갑군을 소진시키는 전략,일종의 소모전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독소 양군의 엄청난 기갑전이 었습니다..
독일의 경우 3000대가 넘는 전차..독일이 보유한 거의 모든 전차를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했고 소련 역시 6000대가 넘는 전차를 투입했습니다..공중전도 치열했는데 독소 양군 총 6000대에 달하는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였으며 4만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엄청난 수의 장비가 투입되었고 양군이 후퇴없이 치열하게 싸워서 11일만에 100만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상황입니다
독일군은 쿠르스크라는 지역에서 소련군과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투를 벌이고
결과적으로 모든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잃는 대 참사를 겪게 됩니다.
소련군이 묘사한 쿠르스크 전투..
그야 말로 지옥이다..
이 전투에서 사실상 제2차세계대전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독일은 자신의 모든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잃었고 소련 역시 엄청난 숫자의 기갑과 항공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소모된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복구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지만 독일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에겐 오직 보병전력과 포병전력만 그나마 남게 됩니다..
따라서 동부전선을 팬터-보탄라인에서 고착화시킨다는 독일의 계획은 실패하고 소련의 공세에 동부전선 전체가 붕괴됩니다.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독일의 3 집단군 북부 집단군 중앙 집단군 남부 집단군은 모두 해체되고 다 합쳐서 다시 중앙집단군을 만듭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의 진격로
독소전 초기와 달리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훨씬 많이 죽게된다
4기:1944년 독일 중앙집단군 전멸과 독일 패망(바그라티온 작전=소련의 독일 침공 계획)
쿠르스크 전투 이후 모든 동부 전선이 붕괴됬지만 우크라이나 곡창지대 회복이 목표인 소련으로 인해 중앙과 북부전선을 남부보다 평온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독일의 수뇌부들은 소련의 주공이 계속 이런 남부전선을 파고 들어서 동부유럽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생각해 기존 3개 집단군에서 남아있는 병력을 모두 합쳐만든 새로운 중앙집단군을 남부 쪽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소련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 회복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수복되자 중부전선인 벨로루시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이곳을 수복할 거대한 공격 계획을 세웁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바그라티온 작전입니다
이 작전을 위해서 소련은 남부전선에 집중해 있던 각종 기갑전력을 중부전선으로 집중합니다. 그러면서 부대의 이동을 숨기기 위해 각종 교란 작전을 펼칩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거의 모든 항공전력을 잃은 독일은 정찰기가 없어 소련군의 부대이동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 였고
따라서 중부전선에 소련군이 집결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었죠.
그 결과는 3개 집단군의 잔존 전력을 전부 모아 만든 독일 중부 집단군의 파멸이 었습니다.
30여사단이 넘는 독일 중부 집단군이 소련의 기갑,항공전력에 그냥 녹아내렸습니다.. 그나마 독일군 포병들이 분전해서 독일군 10명이 죽을때 소련군 1명이라도 죽일수 있엇습니다. 포병이 없엇으면 독일군 100명죽을때 소련군 1명을 죽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제 독일에는 소련군에 대항할만한 전력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소련군은 독소전 초기의 독일군의 진격속도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베를린을 향해 진격합니다.
1944년도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서 모든 독일군을 몰아내 버립니다.
이 전투로 모든 잔존 전력을 모아 만든 독일 중앙 집단군은 괴멸 합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은 제대로 된 방어전 하나 치루지 못하고
폴란드및 독일 본토를 소련군에게 넘기게 됩니다.
독일이 패배 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애초에 총 국력이 독일은 소련에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스탈린의 지휘관 숙청과 독일의 기습 공격으로
독소전 초반에 그렇게 소련을 이겼지만 말그대로 그건 기적이였을 뿐, 독일의 국력으로 소련을 이기는 건 명백한 무리였습니다.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까지 가지 말고 3개의 집단군을 그대로 유지시켜서 차라리 팬더-보탄라인의 전선을 고착화시
키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였지만 독소전 초기에 너무나도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독일은 정말 자신들이 소련을 이길 수 있다고 여겻고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3개의 집단군을 소련과의 전투에 계속 투입하다 .
결국 3개의 집단군이 붕괴하면서 패배하게 됩니다.
독일의 전략적 실수들
위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독소전의 대략적 전개 상황 입니다.. 즉 독소전 초기에 독일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며 소련 영토 깊숙히 침공했지만,결국 공간을 팔아서 시간을 번 소련이 군 지휘 체계를 회복하자마자 원래대로 독일군이 패배하게 됩니다.
한데 이러한 독소전에서 정말로 독일은 승리할 수 없었을까?
만약 몇 가지 전략적 포인트를 독일이 성공했다면 독소전쟁을 승리하진 못해도 독일 본토만큼은 지키는 상태로 휴전을 할수 있었을 거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전략적 포인트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1기:1941년 독소전 발발의 포인트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스탈린의 지휘관 숙청으로 인해 독일군의 기적적인 승리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데 여기서 독일의 국력 한계가 드러납니다
키예프 포위전
소련 남부전선은 독일 남부집단군이 담당하고 있었고,소련은 남서 전선군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서전선군은
비록 제대로된 지휘관이 없었지만 무장상태가 좋았고 수 도 백만단위의 대군이였습니다. 우수한 독일의 작전으로 180만에 가까운 소련 남서 전선군을 키예프에 가두게 됩니다.
문제는 이 키예프에 포위된 180만의 소련군 입니다. 즉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기 위해서 독일군은 빨리 진격해야했는데,
키예프에 가두어둔 소련군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불안했습니다.
즉,독일군은 키예프에 포위된 소련군을 놔두고 계속 진격을 하느냐 아니면 섬멸을 하느냐 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은 만약 180만의 소련군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하는 것은 배후가 너무 위험하다라는 판단에 어쩔 수 없이 키예프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소련 남서 전선군은 비록 지휘관이 없다지만 무장상태가 좋은 180만의 대군이였습니다. 결국 이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로 전진하던 중앙집단군의 제 2,3 기갑집단을 남부 키예프로 돌립니다.
결과는 키예프 포위전의 대 성공이였습니다. 하지만 중앙 집단군은 제 2,3 기갑집단의 부재로 거의 한달동안 진격을 멈추어야 했고 제 2,3 기갑집단이 다시 중앙집단군으로 돌아와서 진격하게 된 시점은 10월 중순...소련의 가을 장마가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늦어지고..결국 독일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 후퇴합니다.
물론 제 2,3기갑집단을 남부 키예프로 돌리지 않고 그대로 모스크바를 공격했어도 별 다를 건 없습니다. 모스크바를 점령했어도 결국 키예프에 있는 180만의 소련군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나폴레옹처럼 패배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나치독일과는 달리 그냥 모스크바를 가는 길목의 러시아군을 다른 쪽으로 몰아넣은 후 쭉 모스크바를 공격,결국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자신들이 섬멸시키지 않고 몰아넣은 러시아군의 방해로 보급선에 차질이 생기고 결국 광대한 러시아에 홀로 있는 섬이 된 나폴레옹 군은 전멸합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있는 소련군을 섬멸하기로 하지만 결국 섬멸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서 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즉 독일은 키예프 소련군을 섬멸을 해도 패배,섬멸을 하지 않아도 패배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이유는 바로 국력의 차이 때문 입니다.
2기:1942년 스탈린 그라드 전투의 포인트
이 시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군이 전략적 자원을 획득하고 소련의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소련 남부에 전력을 집중했던 시기 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독일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바로 스탈린 그라드를 공격했다는 점 입니다.
스탈린그라드는 돈강과 볼가강에 가장 근접하게 접근한 도시입니다..당연히 수운이 발달한 지역이고 철도까지 놓여져 있으며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많은 전차와 전투기를 생산하는 공업도시였으며 특히 코카서스의 유전이 스탈린그라드를 통과하기 때문에 소련과 독일 양측모두 꼭 차지해야할 도시 였습니다.
독일은 가는 길목의 모든 소련군을 섬멸하여 진격속도가 늦어져 결국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독일은 이번에는 모스크바때와는 다르게 그냥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목의 소련군을 몰아 놓고 바로 스탈린그라드로 가서 점령할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물론 나폴레옹 처럼 고립된 섬이 되지 않기위해 한 곳의 소련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강력한 군단
독일 최정예 제6군을 스탈린그라드로 보냅니다.하지만 소련군의 저항은 거셋습니다. 거기다 지옥같은 시가전으로 스탈린그라드를 도저히 완전히 점령할 수 없었고 독일군들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발이 묶인 사이에 독일군이 몰아 너었던 소련군들이 다시 나와서 오히려 스탈린 그라드를 역포위합니다.
결국 독일 최정예 제6군은 나폴레옹군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전멸합니다.
3기:1943년 쿠르스크 대전투의 포인트
이 전투가 벌어진 1943년 소련이 군대 지휘관 계급은 많은 회복을 합니다..숙청되지 않고 남아있었던 훌룡한 장교들이 다시 장교직에 올랐습니다. 또한 독일 최정예 제6군을 전멸시켰다는 사실로 소련군의 사기가 많이 올라갔습니다.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결정된 시기는 바로 1943년 7월이였습니다.
이 당시 독일은 사실상 독소전쟁 승리를 포기하고 독소전쟁을 휴전시키기위해서 어느정도 자기들이 한번더 기세를 잡아야할 필요가 있엇고 신형T-34와 새로운 전투기들이 양산되기 전에 어떻게든 소련군 주력군에 타격을 주어야지 자신들이 정한 팬더-보탄라인을 고착화 시킬 수 있습니다..그래서 독일은 성채작전을 준비하고 이 것이 바로 쿠르스크 대전투 입니다.
여기서도 독일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시간은 소련군의 편이 였기 때문이죠.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잘아는 소련은 계속해서 '소수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으로 국지전을 벌였습니다. 문제는 소련의 입장에서 '소수의' 기갑,항공전력이였지 독일의 입장에선 상당한 수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이였고 때문에 이러한 국지적 싸움에 상당한 시간이 소모됩니다. 계속된 국지적인 소모전 때문에 독일군 전력은 야금야금 약해져 갔고
어쩔 수 없이 독일은 신형 티거전차 투입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물론 만슈타인은 계속되는 소련의 소모전에 응하지말고 차라리 한번 크게 싸운 후 어느정도 전력을 보존한다음 퇴각해 팬더-보탄 라인을 고착화 하자 라는 주장을 합니다만 소련의 강력한 포병전력 때문에 크게 싸운 후 어느정도 전력을 보존하면서 퇴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을 독일 수뇌부는 가졌고 아예 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이겨야 된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물론 절대 이길 수 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만슈타인말처럼 어느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소련군에게 피해를 줘야 휴전협정을 할 수 있는데. 쿠르스크 전투를 이길 생각으로 티거전차를 기다렸지만 앞서 말했듯이 시간은 소련 편이였고 티거전차가 배치될 때 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소련에게 줘서
결국 티거전차가 배치 됬음에도 그 기간 사이에 소련군은 말도 안되게 강해져서 결국 쿠르스크 전투에서 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보유한 모든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잃게 됩니다...
만슈타인 말대로 차라리 바로 싸워서 (물론 바로 싸웟어도 결국 독일의 패배) 독일군의 피해를 그나마 줄이고 소련군의 패를 그나마 늘려서 휴전협정을 했다면 하는게 더 현실성 있엇죠..물론 소련이 휴전할 이유는 없지만요
4기:1944년 독일 중앙집단군 전멸과 독일 패망의 포인트
여기서는 딱히 포인트가 없네요
앞서 말했듯이 1943년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로 독일에게 남은 것은 오직 보병들 뿐
이에비해 소련은 수천대의 전차와 수만대의 장갑차,수천대의 전투기,수천대의 폭격기,수만대의 포,거기다 수백만의 보병을 보유했으니까요....
독소전은 어찌됫건 결국 소련이 승리할 전쟁입니다..
애초에 총 국력차이가 많이나요..
독일의 결정적인 패배 요인은 초반에 너무 기적적으로 소련군을 이긴 것 같습니다..
독소전 초기의 기적적인 승리가 히틀러에게 소련을 정말로 이길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줫으니깐요..
첫댓글 전투에선 이겨도 전쟁에선 못이김
독일군 전술이 비행기로 털고 전차로 조진다 였는데 후반전으로 갈수록 소련의 미친 물량전으로 우랄산맥에서 한달에 전투기 몇백 몇천대 까지 뽑을 여력이 됨 독일군의 패망은 항공전에서의 패배와 직결 되는듯
무솔리니가 북아프리카에서 뻘짓 안했으면
모스크바까진 함락할 수 있었을 듯
물론 역사에 이프는 없다만
북아프리카 전선 파견 때문에 진격일이 2달이나 미뤄지고 상당수 물자를 북아프리카로 보냈으니 ..
스탈린은 무솔리니에게 엎드려 절해야함
삭제된 댓글 입니다.
@미스터핑크 아님, 소련이 쿠르스크에 전개한 병력을 대부분 소진 해도 뒤로 스텝 방면군의 50만 대군이 추가로 투입 될 예정이었음.
치타델 작전 독일 측 총 병력이 90만이었던 걸 보면 애초부터 독일군은 힘에 부치는 싸움을 억지로 밀어 붙이던 중이었음.
그나마 워낙 남부집단군에 전차,자주포가 1000대 가까이(총 2700대) 밀집하여서 소련이 건설한 총연장 수백키로에 달 하는 참호,대전차호, 지뢰밭, 보병부대를 뚫고 최초 작전 개시선에서 30km나 (!) 진출 하여 오렐에 입성 하려고 하였으나 그 시기 이탈리아 시실리에 상륙한 연합군 때문에 주요 SS기갑사단들이 차출 됨...
히틀러가 후퇴 명령을 내린 건 이 SS기갑사단들임
@미스터핑크 처음 공격을 개시한 발터 모델 장군의 북부집단군은 전투 첫 날 소련의 방어진지를 뚫다가 단 하루 만에 병력 2만5천이 사상되고, 전차,자주포 200대가 넘는 숫자가 고철이 됨.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앉으면서 좃망 함. 만슈타인이 밀어 붙인 것도 보면 쿠르스크 돌출부를 제거 하기 위함인데 위아래에서 밀고 가야 할 것을 남부집단군 혼자서 밀고 올라가다가 미친 소모전 됨. 그러다가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프로호로프카 대전차전이 개시 됨
@미스터핑크 처음부터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나도 이렇게 알고 있음 병력 한쪽으로 집중 못해서 좆망
어짜피 독일이랑 소련이랑 일대일 맞다이 떳어도 독일이 깨짐
덕후들 이걸 다 읽었단 말이냐?ㄷㄷㄷㄷ
미국의 전시물자 대여법에 의해 제공 된 어마어마한 원재료,군수물자가 소련의 1%라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무슨 쿠르스크에서 모든 기갑,항공전력이 괴멸을 햌ㅋㅋㅋㅋㅋㅋ지 좃대로 소련 유리하게 다 해석 해 놓고 뭐 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