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도법 법우님이나 여기 카페의 공부가 깊으신 법우님 만큼은 초기삼장까지 다 읽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점 죄송하며,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초기경전 3장을 모두 읽고 익히고 수행토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저나 법우님들이나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는,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말씀이라면 법우님들도
따르시리라 믿고 스승님들의 고귀하신 가르침을 올립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공부방의 2번 글에서, 또한 “아비담마 길라잡이” 책의 6페이지에 나와 있는
초기불전연구원 원장님이신 대림스님의 고귀하신 발간사의 가르침을 소개해드립니다.
---------------------발간사 시작(글쓴이 : 대림스님)------------------
발간사
‘빠알리 삼장의 한글 완역’을 근본 설립취지로 하여 초기불전 연구원이 이제 돛을 달았다. 순풍이 불던 역풍이 불던 저언덕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저언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항해도가 있어야한다. 그 항해도로 초기불전 연구원에서는 위숫디막가(청정도론)와 아비담맛타 상가하(아비담마 길라잡이)를 택했다.
이 둘을 항해도로 하여 빠알리 삼장은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휩쓸려들지 않고 이 시대까지 순조롭게 전승되어왔기 때문이다. 초기불전 연구원에서는 이 두 책을 먼저 출간하고 난 후에 빠알리 삼장을 계획대로 한 권, 한 권 출간해나갈 것이다. 이미 장부 중부 상응부를 위시한 경장의 많은 부분은 기초 번역이 끝난 상태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아비담마나 아비담마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남방 상좌부의 주석서(Atthakatha)들만이 초기불전을 이해하는 유일한 체계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남방의 의식이 있는 스님들조차도 아비담마를 부처님 직설이라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분들은 아비담마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심도깊이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집대성한 가르침이라고 자랑한다. 그리고 그런 아비담마를 몇 천년 전승해온 자기 전통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비담마는 초기불교를 이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진지한 체계이다. 초기불전 연구원은 초기불전을 대하면서 먼저 이런 전통적인 견해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받아들이자는 입장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철저할 때 초기불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 깊어지고 더 체계적이게 된다고 믿는다. 그 후 비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비판할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초기불전을 이해하려드는 것은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경국지색(janapadakalyani)의 비유(D9/i.193; M79/ii.33)’처럼 환상에 사로잡혀 바른 방법(naya)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초기불전 연구원은 거룩하신 부처님 말씀을 국역하는 가장 의미있는 불사를 진행하면서 이런 것을 경계할 것이다.
아울러 초기불전 연구원에서는 시간이 주어지고 역량이 갖추어지면 반야, 중관, 유식, 구사 등을 포함하는 산스끄리뜨 불전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그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저 바닷물이 온통 짠맛이듯 불법대해는 그것이 북전이든 남전이든 모두 열반을 향하는 것으로(nibbananinna) 일미평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불교의 전개를 이해하는 중요 문헌인 베다, 우빠니샤드, 바가왓기따, 육파철학의 수뜨라들, 자이나의 중요 경전들 등 인도의 여러 고전들도 여력이 생기는 대로 번역하고 불교의 입장에서 해설과 비판을 해나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부처님의 가피가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부디 제불 보살님들과 호법선신들의 가피력이 초기불전 연구원에 함께 하시어 부처님 법이 이 시대, 이 땅에 바르게 유통이 되고 다음 세대로 면면히 전승되기를 기원한다.
Ciram titthatu lokasmim sammasambuddhasasanam.
(이 세상에 부처님 교법이 오래 머물기를!)
불기 2546년 10월
초기불전 연구원 합장
----------------------------발간사 끝-------------------------------
다시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님이신 각묵스님의 고귀한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출처는 “초기불교” 공부방의 561번 글입니다.
----------------------------각묵스님의 가르침 시작---------------------
***(이름은 생략) 불자님,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메일까지 보내주셔서 더욱 고맙고, 열심히 정진하시는 불자님을 뵈니 저도 신심이 솟는 듯합니다.
초기불교와 후기불교의 교리적인 측면에서 다른 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 두 페이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후기불교도 반야/중관 - 유식 - 여래장 - 밀교 - 선불교 등으로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고 그리고 이들 불교 안에서도 또 다양한 부파와 견해들이 표출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다른 점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도 결코 호락호락한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질문을 해주셨기 때문에 개략적으로 간단하게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초기불교와 후기불교를 나누는 교학적인 근거가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먼저 불교역사에 전개되어왔던, 특히 인도에서 전개되었던 불교의 흐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불교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들이 <교리적으로 뭐가 다른지> 이들 불교의 특징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학자들은 인도에서의 불교의 흐름을 초기불교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 - 여래장 - 밀교의 6가지로 봅니다. 정토계열의 불교는 여래장에 포함시키며 중국에서는 다시 선불교가 흥기합니다.
이 가운데 초기불교는 니까야(빠알리)와 아함(한문)으로 전승되어 옵니다. 남북으로 전혀 다른 곳으로 전해진 이 두 자료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불교에서 전승되어오는 법(dhamma/dharma)을 생명으로 삼고 진지하게 궁구하는 불교가 바로 아비담마/아비달마입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라는 말 자체가 법(dhamma/dharma)에 대해서(abhi-)라는 뜻이며 그래서 현장스님은 구사론에서 아비달마를 對法으로 옮겼습니다. 이 아비담마/아비달마 불교의 기본 논서가 바로 남방의 청정도론이고 북방의 아비달마구사론입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 불교는 소위 말하는 부파불교인데 저는 부파불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은근히 비하하는 듯한 냄세가 나기 때문입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 불교의 특징은 법들을 고유성질(sabhaava, 自性)을 가진 것(任持自性)으로 정의하여 각각의 고유성질이 다른 법들을 82법이나 75법 등으로 분류해냅니다. 이렇게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분류해서 보면 제법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특히 무상을 찰나로 이해하여 법으로 해체해서 보면 제법은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며 그래서 무아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존재를 온/체/계/근/제/연 등의 법들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그래서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철견함으로 해서 염오-이욕-해탈-해탈지견이 일어나서 해탈/열반과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교학적인 기본 가르침인데 아비담마에서는 이것을 제법을 82법이나 75법 등으로 엄정하게 분류하는 것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 법을 분류하는 기준은 고유성질(자성)이고 이렇게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해체헤서 보면 제법의 무상/고/무아라는 보편적 특징(共相)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체계입니다.
이처럼 아비담마/아비달마 불교는 그들의 생명인 법을 이해하는 기준으로 고유성질의 특징(自相, sabhaava-lakkhan*a)과 보편적 특징(共相, saaman$n$a-lakkhan*a)이라는 술어를 개발하여 사용합니다. 그리고 아비담마/아비달마 불교에서 개발해낸 自相과 共相 즉 개별적 특징과 보편적 특징이라는 이 두 술어야말로 불교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自相과 共相에 대한 이해 없이 초기불교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 - 여래장 계열의 교학의 차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 불교는 <자상을 통한 공상의 확인>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저희 까페의 <묻고 답하기 모음>에서 자상이나 自相 등으로 검색해보시면 제가 올린 여러 글들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실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반야/중관과 유식과 여래장을 우리는 대승이라 부릅니다. 교학적으로 반야/중관은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 개발한 고유성질(자성)의 특징(自相)을 비판하면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법의 共相(보편적 특징)을 직관, 특히 공(空, s#uunya)에 대한 직관으로 체득할 수 있다는 주장과 논리를 폅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가 해체와 분석적인 방법으로 제법의 자상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이것을 토대로 제법의 찰나성과 무실체성 즉 공상을 체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면 반야/중관은 직관을 통해서 바로 空性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야/중관이 自相을 이야기 하지 않느냐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반야부의 몇 경들에서는 아비담마/아비달마와 꼭 같이 오온 각각의 自相을 말하고 나서 다시 이들의 共相을 이야기 합니다.(自相謂一切法自相。如變礙是色自相。領納是受自相。取像是想自相。造作是行自相。了別是識自相。如是等。若有為法自相。若無為法自相。是為自相。共相謂一切法共相。如苦是有漏法共相。無常是有為法共相。空無我是一切法共相。-『대반야바라밀다경』)
물론 반야/중관에서는 共相인 空性과 무아의 직관을 훨씬 더 강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후대 반야/중관에서는 自相을 강조하는 아비담마/아비달마를 두고 너희는 아공법유를 말하니 소승이요 우리는 아공법공을 말하니 대승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 자상을 강조하였다고 해서 법유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법도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며 특히 조건발생이고 상호의존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아비담마/아비달마가 고정불변하는 법의 실체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특히 이 점은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주 투철합니다. 아무튼 아비담마/아비달마는 자상을 통한 공상의 확인으로 설명할 수 있고 반야/중관은 共相의 직관을 강조하는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식은 아비담마/아비달마의 입장과 같이 법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5위 100법을 주장하는데 이런 면에서 유식을 두고 대승의 아비달마라고도 합니다. 유식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 대상을 <식전변에 의한 非有의 境(대상)의 似顯>으로 정의하여 외부대상이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식에 의해서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를 중국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아뢰야식(제8식)을 비록한 모든 식(심)과 심소법들(심리현상들)은 모두 사현된 것이 아니라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전변을 거듭하는 것, 즉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유식은 ⑴ 외부 대상을 식의 사현으로 정의하고 있으며(유식무경) ⑵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아뢰야식과 말나식과 제6식과 전오식이 매찰나에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전변하는 중층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반야/중관과 유식은 법을 중시하는 체계이며 그래서 역시 법을 중시하는 초기불교 - 아비담마/아비달마의 흐름과 같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여래장 계열의 경론들인데 모든 불교학자들이 설명하듯이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법을 중심으로 한 체계가 아니라 믿음(信)을 중심으로 삼는 체계이며, 여래장 계열의 대표 논서는 바로 대승기신론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믿음의 문제를 핵심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불성이나 여래장이나 일심 등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자칫 잘 못 받아들이면 외도의 자아이론과 같아지게 되며 그렇게 되면 모든 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아에 정면으로 위배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묻고 답하고 모음> 게시판에서 불성이나 여래장으로 검색해보시면 제가 올린 글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밀교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초기 - 아비담마/아비달마 불교와 후대 대승불교의 가장 다른 점은 대승불교는 불교 실천의 주체로 보살을 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보살은 부처님이 깨달으시기 이전의 상태를 지칭하는 술어로 여러 초기불전에 등장하며 특히 자따까(본생담)에서는 부처님의 전생도 보살이라 칭하고 있으며 보살의 다양한 보살행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보살의 개념을 확대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부처님이 보살행을 실천해서 부처님이 되신 것이라면 누구든지 깨달음을 실현하기로 발원하고 내 이웃의 행복을 증장시키려는 보살의 행을 하는 사람은 모두 보살이라 불러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대승경전에서는 이러한 보살과 보살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아비달마 불교는 이웃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소승배 불교인가요? 만일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불교를 이렇게만 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지요. 초기불전 도처에는 부처님과 스님들의 이타행이 언급되고 있으며 지금 태국이나 미얀마 스님들이 대승불교라 자처하는 한국 스님들 보다 훨씬 이타행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은 태국이나 미얀마를 가본 사람이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대승불교는 이웃을 돕는 이타행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대승이 이타행을 강조했다고 해서 그 이전의 불교에는 이타행이 없었다는 식의 유치원 아동들 보다 못한 유치한 발상을 하면 안될 것입니다.
간단하게 적는다고 해놓고 적다보니 말이 자꾸 길어지고 현학적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할 이야기는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대신에 일본의 平川 彰(평천창) 교수님이 짓고 이호근 거사님이 번역한 <印度佛敎의 歷史>(전2권, 민족사 간)를 읽어보실 것을 간곡하게 권합니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인도에서 발전된 불교역사를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시면 <초기불교와 후기 불교를 나누는 근거>를 보다 더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빨리 적다보니 너무 두서없는 글이 된 듯합니다. *** 불자님이 대표로 질문해주신 리더스 클럽 불자님들의 질문에 조금이라도 답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
-----------------------------각묵스님의 가르침 끝----------------------
이상의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말씀에서 저는 큰 가르침을 받았으며 모든 불자를 화합하려는,
심지어 다른 종교까지도 이해해보려는 두 스승님의 크신 가르침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우리는 초기불교의 제자로서 열심히 교학을 배우고 수행하여 나갈 뿐입니다.
신시다물 법우님의 귀하신 가르침대로 정법과 비법을 가려 나가는 것은 중요하며 정진의 요소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산 법우님 말씀대로 여기 “초기불교” 공부방은 회원가입을 안해도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성격의 공부방에서, 대승불교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심은
우리 초기불교 제자들 스스로를 욕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두분 거룩한 스승님들을 욕보이는 행위라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디 화합을 주장하는 초기불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행선(송영상) 법우님의 귀하신 가르침대로 화합을 하면 향상이 있고, 그렇지 못하면 퇴보가 있을 뿐입니다.
법(法)은 보편적 특징인 무상, 고, 무아의 삼특상 즉 공상(共相)으로 하나라는
그리고, 불법(佛法 부처님 법)은 해탈 열반의 대해로 인도하는 것으로서 하나라는
두 분 스승님의 가르침을 소개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자진경 합장
첫댓글 무자진경 법우님의 진실하신 노력에 감사드려요^^* ()
대선화법우님~늘 감사합니다. 게으름에는 희열을.. 들뜸에는 평온을.. 용맹정진 하겠습니다._()_
부처님 법은 해탈·열반의 대해로 인도하는 것으로서 하나이며, 법은 무상·고·무아로서 하나라는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큰 가르침을 다시 일깨워 주신 무자진경 법우님의 자비하신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_()_
대반열반경에서 분열하지 말고 화합하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마지막 유언을 잊지 않겠습니다. _()_
밖으로 말로 몸으로 마음으로 행하기 전에, 먼저 항시 안으로 저 자신의 신수심법(몸과 마음)에 마음챙기라는 간곡한 말씀, 실천으로 옮기기 어렵네요.
오늘 일 참회합니다. 앞으로 그러도록 더욱 노력할께요. ()
대선화법우님의 정진력과 바른 견해에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_()_
그리고 불법을 수호하시고 정법을 바로 세우시려는 법우님의 열의에 찬사를 보냅니다._()_
언제나 저를 향상으로 이끄시는 무자진경 법우님께 감사드립니다.![굽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0724/texticon_8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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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굽던노인 법우님께 희열의 염원을 보냅니다._()_
몸맘 평온하시옵고
지혜로움으로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댓시 감사드립니다. 푸르른법우님도 행복하시길 염원드립니다. _()_
무자진경님의 뜻에 동의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둘이 아니다'는 말을 '하나다'로 해석 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회장님과 도법 법우님이 말씀대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대림스님과 각묵스님께서 둘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시고 '둘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점도 있고 같은 같은 점도 있지만 같은점을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는 2천5백년의 세월동안 각기 다른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면서 역사적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큰 맥락에서 법의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고 탐진치를 소멸하여 해탈 열반에 이르
고자 한다면 불교로 볼 수 있다는 견해에 저는 동감합니다. 그 어디에도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백퍼센터 온전히 전승되어 온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닿는 곳 까지 부처님의 원음이 무엇이었는지를 탐구하고, 그리고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비추어 검토한 후 받아들이 것이 이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 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는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검토한 후 수용 여부를 결정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삶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은 무자진경님이 말씀 처럼
불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다른 가르침도 모두 공부하여 수용하려는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법 법우님 처럼 철저하게 차이를 드러내어 치열하게 공부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카페에서 다소 거친 입장으로 기성 한국 불교 교단에 대한 태도를 가진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분들은 그 만큼 기성 교단에 많은 애정을 가졌던 분들이 아닐까 합니다. 공부의 과정으로 생각하시고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제 넘게 설이 길었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호시우행 법우님 가르침 감사드립니다.![굽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0724/texticon_8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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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법우님의 바른 견해에 동의 합니다. 다만, 지혜로운자는 장점만 보고 거친자는 허물만 본다는 부처님의 가르침데로 우리는 청정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야 함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있다는 인식에서 나와 남을 비교함은 자만입니다. 우월.. 평등..열등감이죠. 이 자만에서 분별하고 비교하고 분열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는 두분 스승님께서는 화합을 강조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순응해야 합니다.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대립시키고, 분열시킴도 모자라서, 초기불교내에서도 동호회와 비동호회로 분열시킬 우려가 있는 불선업까지 두려움없이 행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_()_
저의 글로서 불선업을 행하시는 법우님께 송구럽습니다. 더이상의 불선업은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한 저의 누행을 부처님전에 참회합니다._()_ _()_ _()_
부디 거친 마음을 거두시고 평온하시기를... _()_
남북방 불교를 치열하게 고뇌하신 스님견해와, 이제 막 초기불교를 배우러 와서 성자가아닌 다수의 우바새(우바이)의 견해가 상충하면, 누구의 견해를 따라야 할까요.
단 한분의 스승이라도 당연히 스승을 따라야 겠지요. 자명하고 간단한 문제입니다.
제가 경험한 남방 상좌불교는 너무나 자애로워서 역시 상좌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포용성에 감탄했었습니다.
권위는 배타성이 아니라 포용성에 있다는 걸 또렷히 배웠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더욱 하나님의 믿음이 증장되도록 수행방법을 도와드리고,
간화선 수행자에게는 더욱 간화선을 잘할수 있도록 수행방법을 도와드리고,
또다른 이타행은 두말 할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또다른 불교가 있는지 싶을 정도로 느껴집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다른점이 있고, 불교와 기독교가 다른점이 있다는 것을 누가 모릅니까.
시대는 소통과 화합이, 종교뿐 아니라 사회 전분야에 매우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소통과 화합 안에서 차별성이 존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수행법우님의 지혜로운 견해에 찬사를 보냅니다. 권위는 배타성이 아니라 포용성에 있다는 상좌불교의 가르침 명심하겠습니다. _()_
아울러, 시대는 소통과 화합이 종교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중요하다는.. 소통과 화합안에서 차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르침 명심하겠습니다. _()_
푸하하, 저에게 뭔 가르침? 명심?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견해가 상충되고 있다기 보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법을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상대방의 주체적인 선택을 존중하셨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입장을 포용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많은 숙고가 필요합니다. 발전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심이 어떨지요?
호시우행님 말씀처럼 발전해가는 과정이라 하시는데 충분히 공감합니다.
전체를 보는 견해와 일부를 보는 견해의 시각차이라 보여집니다.
전체를보는자가 포용할수밖에 없겠지요. 초기불교가 전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손자가 할아버지 엉덩이흔들어 보라하면 버릇없다 혼낼게아니라 얼마든지 흔들어줘야 공부좀 하신 어른아니겠습니까.
(저는 도법 법우님이나 여기 카페의 공부가 깊으신 법우님 만큼은 초기삼장까지 다 읽지는 못하였습니다.).... 저도 4부니까야 이외의 쿳다까니까야나 율장,아비담마 7론까지는 읽지못했습니다. 그 분들은 어떻게? 초기삼장을 빠알리어원어?로 읽으셨는지 경이롭습니다?ㅎㅎ 저는 빠알리 원어로 읽을 실력은안되고 한글로 번역된 빠알리 삼장도 자료를 찾아보는데 찾기힘들군요,더욱이 주석이 곁들여져 있는것은 더더욱 찾기 힘들더라구요, ....빠알리 삼장중에(4부니까야는 제외) 한글로 번역된 것이 있거나 혹은 읽어보신게 잇으시면 같이 그정보를 공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
[이점 죄송하며,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초기경전 3장을 모두 읽고 익히고 수행토록 노력하겠습니다]...무자진경님 글잘보았습니다. 무슨수로 초기삼장을 다 읽으시는지혹은 읽으셨는지 도무지 궁금합니다.ㅎㅎ저는 불교서적을 다뒤져도 못찾겠던데.....도법법우님이나 무자진경님께서 초기불전3장을 모두 읽기를 원하시는 것 만큼 저 역시도 그러합니다. 다만 어디에 그런자료가 있는지 알수없을뿐이지요. 초기 삼장의 번역서나 주석서등등의 자료나 책이 있다면 소개좀 부탁드립니다._()_
_()_ 그만 끝내려 하였는데 도저히 그만 끝낼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다시 한 말씀 드립니다.
"무자진경"님께서 "둘이 아니다"라 하셨습니다. 제가 분명히 2000여년 동안의 "대승"이라 자칭하는 북방불교에서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자진경"님께서는 그부분에 대해서는 "오해다" 그리고 "소승이라니 말도 않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참으로 간단하게 넘어가시고서는
지금 "저의 글로서 불선업을 행하시는 법우님께 송구럽습니다. 더이상의 불선업은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한 저의 누행을 부처님전에 참회합니다. 부디 거친 마음을 거두시고 평온하시기를..." 하셨습니다.
자신 스스로는 다른 회원들의 문제 제기가 불편하여 다른 답글 형식으로 다시 두분스님의 글을 찾아 본문글로 올리시고,
자신의 글에 반론을 하신분들에 대해서는 "불선업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무자진경"님의 글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이 "불선업을 행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가지 추가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한명의 불자일 뿐인 "무자진경"님의 글에 문제 제기를 하신 분들이 "불선업을 행하신" 것이면 2000여년 동안을 타 종파에 대해서 문제 제기 정도가 아니라
비하하고 폄훼를 해온 "대승"이라 자칭하는 북방불교는 얼마나 오랜세월, 얼마나 엄청난 "불선업을 행하신" 것일까요?
한번이라도 이런 생각 해보신적 있습니까?
"둘이 아니다"라는 두분 스님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무슨 말씀이 됩니까? 지금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둘이 아닌걸로 되려면 둘이 되어야 했던 이유를 소멸시켜야 된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으십니까?
한쪽은 여전히 "너희는 소승 나는 대승" 또 이제 초기불교가 확산되니 이번에는 "초기불교가 발전한 것이 대승불교"라고 하는 상황에서
"무자진경"님께서 말씀하시는 "둘이 아니다"가 맞습니까? 아니면 "둘이 아니다"가 됩니까? 그리고 그 문제를 지적하면 "불선업을 행하신"것이 됩니까?
"무자진경"님 스스로도 자신의 글에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 제기나 반발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시고 여기까지 오셨으면
2000여년 동안 행해진 그 "불선업을 행하신" "대승"이라 자칭하는 북방불교의 잘못은 어찌 되어야 하겠습니까? 또 어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누천년 더 악업을 쌓으라고 버려 두어야 합니까? 계속 "불선업 행하시"라고 잘못을 지적도 하지말고 버려 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타 종파를 비하하고 폄훼할 권리가 "대승"이라 자칭하는 북방불교에만 있어 이외의 종파들은 반론도 하지 말아야 하고, 문제 제기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 여기, 저나 "도법" 법우님이나 "호시우행" 법우님의 "무자진경"님의 글에 대한 댓글이 "무자진경"님의 말씀대로 "불선업을 행하신"것이면
"대승"이라 자칭하는 북방불교에서 2000여년 동안을 행해온 언행들은 무엇이라 해야 옳지요? "무자진경" 법우님께서 "불선업을 행하신" 것으로 정의하시는 그 기준으로 정의 해 보시지요.
"무자진경"님께서 그것을 "선업을 행하신"것이라 보십니까?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가 되어야 된다고 보십니까?
어제 마지막 댓글을 달아놓고 나서 이참에 남방불교-북방불교가 "둘이 아니다"라는 주제에 대해서 한번 본문글로 올리려 하였는데
오늘 들어와 보니 참으로 멀리까지 오셨네요.
부디 자신의 글에 대한 댓글의 "불선업" 유무만 보지 마시고 "대승"이라 자칭하는 북방불교에 2000여년 동안 횡횡했고, 지금도 횡횡하고 있는 엄청난 "불선업"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고쳐져야 "둘이 아니다"도 되고, 우리나라 불교의 미래도, 전체 불교계의 미래도 밝아 질 것입니다.
여기글을 보지 못하고 이 댓글을 쓰기전에 "초기불전연구원동호회" 게시판 176번 글에 제가 올린 댓글이 있는데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_()_
"대승"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기에 앞서 지금 초기불교동호회 법우님들.. 스스로를 먼저 돌아 보셨으면 합니다. 신시다물님은 도법님이 쓰신["대승동질이", "대승동질이들이 카페를 점령했다"]라는 내용에 대하여 ["단어들, 아주 대우해서 선택한 어휘들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인정합니다. 긴 댓글, 아주 부드러운 표현이었습니다.]라고 동조하셨습니다. 부디 마라의 장애로 부터 벗어나시길... _()_ 부처님 제자 답게... 두 분 스님의 얼굴에 먹칠 하는 행동은 삼가 하셨으면 합니다._()_
저야 떠나면 되지만, 도산법우님과 대선화법우님,cd굽던노인법우님,반달법우님이 무슨 이득이 있기에 카페를 점령하겠습니까?
부디 부처님께서 분열하지 말고 화합하라고 말씀하신 유지를 받들어 올바르게 동호회를 이끌어 주십시요._()_
여러 법우님들 그 동안 많은 신세 받고 갑니다. 이번 생 해탈 열반의 성스러운 토대를 만드시길 염원합니다._()_
두 분 스님께 삼배 올립니다. _()_ _()_ _()_
삼보께 귀의하옵니다. _()_ _()_ _()_
같은 장소, 같은 때가 아니라도 함께 부처님 정법을 공부해 나가는 도반끼리 때로는 열의가 지나칠 수도 있으나, 서로 그럴 때 조언해주고, 서로를 존중하고, 토론이 향상으로 나아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무자진경님의 취지는 어떤 불교이든 간에 방법은 달라도 무상, 고, 무아의 관문을 통해 해탈·열반의 길로 나아가자는 목표가 있다면,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들을 초기불교를 하는 제자가 잘 포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여기에 신시다물 법우님과 도법 법우님은 초기불교와 다른 불교를 완전히 같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취지 같습니다.
저에 대해서 무자진경님께서 언급을 하시니 초기불교와 다른 불교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의견을 참고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①무상, 고, 무아의 관문을 통해 해탈·열반의 길로 나아가는 목적으로 그렇게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도록 실천하여 해탈·열반으로 나아간다면, 부처님께서 목적이라고 알려주신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②그런데 그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방법과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부처님 원음을 따르는 초기불교와는 다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경험하기에는 그랬습니다. 저는 초기불교를 배워 기존의 방법으로 얻지 못한 많은 향상이 있었고,
지금도 큰 기쁨과 행복한 찰나에 머물기 위해 정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선한 향상이 오지 않는다면 그 도를 배울 필요를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겐 초기불교가 부처님 원음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무상,고,무아의 관문을 통해 해탈·열반으로 나아간다면 불제자로 보고 화합하자는 무자진경님의 주장에 대하여, 모든 불제자에 대하여 초기불교의 부처님 원음을 전법해보려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찬탄올립니다. _()_
다만,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그 방법이 해체하고 분석적인 초기불교와는 다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라는 말씀도 또한 언급을 해주었으면,
죻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또한 들었습니다.
그리고 도반끼리 서로 바른 말로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의견을 내 놓을 때, 저의 의도가 "[청정한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을 되새기가 토론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의견이 저의 의도와 상충할 때, 상대방의 말이 청정한 진실을 알려주고 있다면, 상대방의 말을 수용하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면 "아니다"라고 하지 않고, "의견 감사합니다."하고 일단 적어놓고 보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 니까야 경전과 그에 적힌 주석을 찾아보고, 아비담마 길라잡이와 청정도론을 찾아봅니다. 그래서 모르겠으면 좌정하고 실천해보려 노력합니다.
그래도 모르면 보류하며, 저에게 퇴보를 가져오면 과감히 버립니다. 여기 항시 니까야와 아비담마 길라잡이와 청정도론에 입각하여 검증해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된 듯 합니다.
저는 "[청정한 진실(도道)]"을 알기 위한 의도이외에는 질문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가 '내(我) 가 [원하는 답을 얻고 싶다]'고 의도를 갖고, 질문을 하고 토론을 하였다면, 이미 '나'라는 아상이 뿌리 박혀 있기에, 저도 역시 상충하는 반대의견이 나온다면, 성냄에 뿌리 박은 마음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 나름대로 법담에 임하기 전에 사전에 '나(아我)'라는 관념을 뿌리부터 없애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샘입니다. 그리고 토론 할 때는, 찰나찰나 틈틈히 자신의 신수심법을 바라보며,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보고, 또 그에 반응하는 저의 신수심법을 보면서 거친 마음이 일어나면 청정도론 제3장의 위빳사나의 가르침대로 거친 마음을 제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지만, 습관이 되도록 평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대상(색,성,향,미,촉,법)은 이미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의 가르침을 저는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무상, 고, 무아 등의 좋은 인식을 닦기에 여념이 없어, 요즘은 토론에 임하기도 어려운 듯 합니다.
저는 이미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점점 생겨나, 먼저 저 자신을 완성해 보고자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이 바로 두 분 스님과 초기불전연구원 관계자분들과 저를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신 여러 법우님들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의 교학과 수행에 전념하는 한편,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 스님을 도와드리려는 일념이 일어나 이렇게 나마 카페를 지켜보고 가끔 처음 초기불교를 접하시는 분들에게 조언을 드리고 있으니 널리 양해 바랍니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과 방법은 달라도 부처님 정법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한결같다고 이해하면 감사하겠습니다.
토론에서 상충하는 의견이 나올 때, 그 뜻을 자신의 인식으로 갈무리 하기 전에, 신수심법을 제어한 뒤, 그러한 말을 왜 하였는지 예의를 다해 여쭈고, 풀고, 초기불전에 비추어 검증해보고, 맞으면 인정하는 등 [청정한 도]를 [알아서]는 [향상으로 가는 법]을 [얻으셨으면] 하는 간절한 염원을 올리면서, 부족한 제자 도산 이만 인사 올립니다.
모든 법우님께서 행복하시길, 고통이 없으시길 염원 올립니다. _()_
_()_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기를, 행복하시기를.....
항상 좋은 글로 많은 이들을 향상으로 이끌어 주시는 도산님께 감사드립니다.
글에 제 필명이 거론 되었기에 댓글 올립니다.
"도산"님 께서 "여기에 신시다물 법우님과 도법 법우님은 초기불교와 다른 불교를 완전히 같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취지 같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잘못 추정하신 것입니다. 제글 어디에도 같다거나 다른것에 대해 문제 제기한 바가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2000여년 동안 지속되어 이제는 거의 일상화된 타 종파에 대한 비하의식을 만들어가는 북방불교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다"가 되려면 그 부분 부터 해소 되어야 될것이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화합이란 말로서 아무리 외쳐봐야 공허한 것이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고, 버릴 것을 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합에 의한 "둘이 아니다"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아니다, 그런데 너는 소승" 이건 아니고, 아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늘 좋은 글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시는 "도산"님께 합장 올립니다. _()_
신시다물 법우님의 우려에 동의하며, 좋은 말씀에 감사의 합장 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