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을 위하여 [이기철]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빗방울 일부러 피하지 않고
숯더미 같은 것도 부리로 쪼으며 발톱으로 어루만진다.
인가에서 울려오는 차임벨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가슴은 떨리지만
밤과 느릅나무 잎새와 어둠 속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용한 화해와 순응의 하룻밤을 새우고
짧은 꿈속에 저들의 생애의 몇 토막 이야기를 묻는다.
아카시아꽃을 떨어뜨리고 불어온 바람이 깃털 속에 박히고
박하꽃 피운 바람이 부리 끝에 와 머무는 밤에도
그들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날빛을 맞으며
가을로 간다
여름이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들녘 끝에 개비름꽃 한 점 피웠다 지우듯이
가을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산기슭 싸리나무 끝에
굴뚝새들의 단음의 노래를 리본처럼 달아둔다.
인간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인간 다음에 이 지상에 남을 것들을 위하여
굴뚝새들은 오리나무 뿌리 뻗는 황토 기슭에
그들의 꿈과 노래를 보석처럼 묻어둔다.
- 전쟁과 평화, 문학과지성사, 1985
귤중옥橘中屋* 서신 [박후기]
― 추사가 아내를 생각함
바람 타는 섬에는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뭍에는 없는 것들이 섬에 있어
나인 양 여기며
그나마 위안을 얻고 지냅니다
귤이 그중 하나입니다
속은 희며 푸른 문채를 가진
귤이 나와 같기로서니,
어느덧
뭍에서 가슴에 품고 지냈던
매화, 대나무, 연꽃, 국화가
시들해진 것을 느낍니다
세상에 절개는 흔하네
살림은 어둡기만 합니다
흔한 절개에 쫓겨 내려와
굴원屈原**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자책하고 있습니다
`세상 흐린데 나 홀로 맑고,
모든 사람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에
그래서 쫓겨난 것이라오`***
육백 리 제주 그 어디에도
당신을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망극한 성은과 당신,
소중한 것은 여전히
먼 육지에 있습니다
사랑은 발견입니다
돌과 파도와 비바람 속에서
문득문득
당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 추사거 유배당했던 제주 적소(謫所)의 당호.
** 중국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 전국시대 혼란기에 개혁을 추구 했으나 모함과 배척으로 유배를 반복하다 돌을 안고 강물에 투신.
*** 擧世皆濁 거세개탁 我獨淸아독청 衆人중인 皆醉개취 我獨醒아득성 是以見放시이견방. 굴원의 시 어부사(漁父辭)에서 인용.
- 사랑의 발견 ,가쎄, 2017
세석평전 [이정록]
홀로, 세석평전에 오른다.
내 가슴속에도 밭이 있고 아픈 돌무더기가 있다 홍수가 휩쓴 내 옹졸한 밭에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잔바람에도 자리를 고쳐 앉는 세석 틈으로 눈물을 말리는 억새꽃들. 살얼음을 깨며 돌무더기가 무너지고 있다.
너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갈비뼈 사이로 다시 돌을 쟁이고 흙을 추슬러 올리자, 나무뿌리와 억새의 여린 싹이 드러난다. 산 아래로 하염없이 기운 밭고랑. 저 새순의 젖멍울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닥칠 푸른 봄을 그려본다. 그러나 지금은 억새밭처럼 바람의 나날이다. 누구의 가슴인들 빛바랜 금줄을 두른 고목 한그루 없겠느냐.
내 작은 밭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자꾸 헤쳐보지 마라. 네 불안한 눈초리가 탱자나무 가시처럼 깊다. 그때마다 늑골 사이로 밀쳐 어올렸던 돌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네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조급함이 내 가슴의 분화구에 인두를 들이민다. 불 인두로 내 억새밭을 경작하려 하지 마라. 씨 뿌리지 않은 묵정밭에도 냉이가 자라고 들꽃이 핌을 기다려주길 바란다. 텅 빈 밭에서 겨우내 염소 몇마리가 푸른 것을 뜯어 올리고 있다.
내 마음 안창 어딘가에 봄을 기다리는 세석평전이 있고, 허수아비도 눈발처럼 떨고 있다. 네 가슴에도 허름한 옷가지처럼 사람 하나 펄럭거리고 있음을 안다. 그 옷섶으로 파고들어 뜨거운 살이 되리니,
세석평전에 오래도록 겨울비 오고 있다.
날이 저물도록, 차가운 돌을 날라 갈비뼈를 떠받치는 사람이 있다.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
첫 번째 시집 [김명국]
추수를 막 끝낸 뒤 가을이나 겨울쯤에 나왔으면 좋겠다
생강차나 유자차 같은 게 생각나는 그쯤에,
가시 많은 탱자나무 탱자 열매가 떨어지고
오동통 살이 오른 굴뚝의 참새,
갈퀴나무로 불 때는 집
시골집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때쯤
일 없이 쉬는 날, 간식으로 찐 고구마를 먹고 있을 때
식구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적금 통장을 하나 내밀듯,
나오면 한동안은 꼭 껴안고 잠들리라
눈뜨는 아침마다, 저녁에 잠들기 전 쓰다듬듯 펼쳐보리라
못생긴 제 코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돼지가 낳은 돼지 새끼는 그래도 예뻐 보이는 법이니까
수줍음이 많았던 터라, 만나면 건네주면 될 것을
소포 봉투에 담아 평소 각별했던 지인들에게 몇 권,
청첩장 보내듯 부치고 나면
언젠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시를 사랑하는 모임이라
타이핑해서 영수증을 주었던 우체국 아가씨도
고개를 갸웃거리겠지
목욕탕 사우나를 하고 나온 것처럼 가볍고 시원하려나
소나무에 얹혀 있던 눈이 꺼지듯,
체했던 속이 푹, 내려간 것처럼
점심 한 끼쯤은 굶어도 통 배고픈 줄 모르겠고
맞아도 아프지 않은
너무 일찍 내려버린 것이 흠인 함박눈,
끝까지 걸어가야겠다
하루에도 여덟 대밖에 들어오지 않는 오지(奧地)의 시간 버스,
길 가는 사람을 만나면 자가용 운전자는
한 번쯤 멈췄다 가는 것이 예의인
미끄럽기만 한,
넉넉잡고 십 리쯤은 족히 되고도 남을 눈길을
- 베트남 처갓집 방문, 실천문학사, 2014
매미 껍질 [임영조]
- 곤충 채집 3
늦가을 탱자나무 가지에
해탈하듯 허물을 벗어 걸고
어디론가 잠적한 은자
그가 남긴 구각을 들여다보면
비로소 햇빛 본 유고집 같다
지난 여름 내내
한 소절의 시를 위하여
쓰디쓴 동음어만 반복ㅎ닥 간
음유시인의 애절한 영가
아직도 맴맴 귓바퀴를 돌린다
한평생 집 한칸 없이
세속을 멀리하고 숲 속에 숨어
바람과 이슬만 먹고 산 그는
필생의 마지막 절창을 뽑기 위해
온몸을 쥐어짜며 시를 읊었다
(치뤌 파뤌 치뤌 파뤌
배부르고 편하면 시가 안된다?)
그리하여 이 가을 홀연
장정이 투명하고 광나는
시집 한 권 남기고 갔다
아무도 모르게 열반에 들 듯.
- 귀로 웃는 집, 창작과비평사, 1999
첫댓글 탱자나무 시숲에
감상 잘했습니다
탱자 하나 주무르면 하루 종일 귤냄새가 났었지요.
탱자나무 한 그루 있으면 눈이 참 즐거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