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517. 묵상글 (부활 제6주간 수요일. - 모든 진리 안에 하나의 진리로. 등)
----------------------------------------------------
230517.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모든 진리 안에 하나의 진리로
부활 6주 수요일-2017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오늘 주님 말씀을 풀어서 이해하면 이런 뜻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알고 계신 것과 그래서 당신이 알려주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은데
그것을 지금 알려주어도 그 모든 것을 지금은 감당할 수 없는 우리이기에
지금은 알려줄 수가 없고 나중에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진리의 성령께서 친절하게 알려주실 거라는 말씀인 듯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당신의 때가 아니라 성령의 때에
당신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알려주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든 진리는 무엇입니까?
낱낱의 진리의 집합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도 진리, 저것도 진리인데 그 모든 진리를 모아놓은 진리 말입니다.
그런 뜻이기도 하지만 모든 진리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모든 진리이시고 하느님 안에 모든 진리가 있다는 얘기이며,
그러니 무릇 모든 진리란 하느님 안에 있어야만 진리라는 얘기입니다.
실로 많은 진리가 있고,
이것이 진리라는 주장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진리도 있고 주장되는 진리도 있기에
어떤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주장되는 진리라는 말이며
어떤 진리가 참 진리라면 하느님 안에 있어야 진리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진리, 무신론적인 진화론이 있습니다.
거기서 얘기하는 것이 진리를 얘기하는 것일 수 있고
실제로 진리를 말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일부 진리를 가지고 모든 진리라고 말하며
더욱이 모든 존재들의 생성과 진화가 하느님 밖에서 이뤄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부 진리를 가지고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꼴이며
그래서 그런 주장은 진실이 아니고 진리와 진실을 부정하는 오류입니다.
또 불교도 진리를 말하고, 유교도 진리를 말하며,
이슬람도 진리를 말하고, 그리스도교도 진리를 말합니다.
불교와 유교는 하느님을 입에 꺼내지도 않고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는 하느님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그들의 말에 진리가 없다고 유신론의 종교들이 얘기하고
하느님을 얘기하지만 이슬람에는 진리가 없다고 그리스도교가 얘기한다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고 주장하는 진리 하나만 가지고
그 많은 진리와 그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이런 그리스도교 주장이 진리가 아니고 오류입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진리를 그것도 다 알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되고, 주장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보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겸손하게 진리를 소유했고 더 보편적인 진리를 소유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들만 하느님을 소유했고 선택받았다는 유대인들보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신 너머로 모르는 신이 있음을 인정하는 아테네인들이
오히려 진리에 더 가깝고, 더 올바른 신앙인이라고 평가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고
모든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며
모든 진리 안에서 한 진리를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시민이 모르는 그 신 안에서
우리는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고 얘기하고,
주님께서도 진리의 성령이 모든 진리를 알게 해주실 거라고 얘기하지 않고,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이고,
진리의 영이 오셔야 그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겸손한 우리가 오늘 되어야겠습니다.
----------------------------------------------------
230517.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만도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요한 14,16-17,14,26,15,26-27,16,7-11,16,12-15).
사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인데,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인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또 “그 뒤에 바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마르 10,12)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인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겠다.”(루카 24,49)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6,1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0-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귀고 아빠스는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유 없는 독서는 쓸데없다. ~성령의 도유야말로 구원을 촉진시키는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되새겨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30517.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 방식의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어떤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의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만장일치로 모든 사람의 의견이 통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렇게 진행되기가 어려운 것이 또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수가 선택한 의견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소수의 의견이 현실적인 정확한 답과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신부님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신부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하 아사감방(餓死監房)에서 1941년 8월 14일 운명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수용소 소장에게 지목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의 “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제겐 아내가 있고 불쌍한 자식들도 있습니다. 제발...”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대신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할 수 있도록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십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를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4-1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영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 “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한때‘다빈치 코드’소설이 영화 되어 상영되고,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허구는 허구요, 픽션은 픽션일 뿐입니다. 근래에는‘신천지’라는 이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와 굴곡 된 성경해석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무리 흔들고 뜯어고치려 해도 진리입니다. 거짓 논리를 통해 진실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지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데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어 구원을 얻길 바라십니다.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1,17).“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17,17).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미사성제 안에서 당신을 내어 주시며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은 자유를 줍니다. 말씀, 예수님, 사랑 안에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517.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몇 번 왔습니까?” 제가 여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 가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자주 오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감사하게도 제게 기회가 몇 번 더 주어졌습니다. 저는 복음화학교의 지도신부를 10년 이상 함께 했습니다. 복음화학교에서는 매년 졸업생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지도신부로 함께 했기에 다른 분들보다는 성지순례의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맛 집이 단골이 되듯이 성지순례를 가신 분들은 기회가 되면 또 가기 마련입니다. 복음화학교에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성지순례에 함께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다른 곳은 몰라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기회가 주어지면 함께 하였습니다. 성지순례에서 겉모습만 보는 사람은 매번 같은 성지순례라고 하겠지만 성지순례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얻는 사람에게는 매번 새로운 성지순례가 될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목표는 ‘멈춤, 만남, 변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먼저 일상의 삶에서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순례를 하면서 세상의 것들과 계속 접속하려고 하면 진정한 성지순례가 되기 어렵습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멈추어야 합니다. 성지에서는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성지만 본다면 그것은 여행과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지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만나기 위해서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없으면 표징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했듯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했듯이 성지순례를 통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다면 변화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이스라엘 순례 중에 ‘깔멜’산을 다녀왔습니다. 깔멜산은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였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오신 하느님입니다. 싸움에 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 신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이면서 제단에 제물을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은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지만 제단의 제물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예언자는 제단에 물을 부었음에도 하느님께서 제물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 왕에게 말하였습니다. “외교에는 양다리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에는 양다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일에는 양다리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일이 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양다리가 아니라, 다섯 다리라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단 하나라도 하면 안 됩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기를 청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230517.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생 때,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영화가 생각납니다. 바로 홍콩 영화입니다. 코믹 쿵푸 영화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많이 인상 남는 영화는 현대식 무협이라고 할 수 있는 느와르 장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정을 위해 총격전을 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 남기는 말은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영화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도박이었습니다. 도박의 승부를 퉁홰 나쁜 악당을 응징하던 모습은 통쾌함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패를 가졌다면서 회심의 미소를 띠는 악당, 그런데 최후의 승자는 주인공이 더 높은 패를 꺼내면서 승리합니다. 때로는 악당의 속임수를 더 큰 속임수로 이기기도 합니다.
그때 보았던 영화 장면을 떠올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패를 펼쳤는데, 상대의 패와 똑같다면 어떻게 될까요? 카드가 잘못되었다며 무효 처리가 될 것입니다. 카드는 모두 달라야 게임이 공평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모두 달라야 우리 각자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과 같은 패를 받고 싶은 것 같습니다. 저 사람처럼 능력이 있었으면 싶고, 저 사람처럼 돈이 많았으면 싶고, 저 사람처럼 몸이 건강했으면 좋고…. ‘저 사람처럼….’이라는 말로 같은 패를 같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삶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이 다름으로 인해 부러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을 내 삶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면 나만의 삶을 멋지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교하지 말 것, 쓸데없는 판단을 하지 말 것, 나를 특히 나의 삶을 사랑할 것. 이런 사람만이 자기 삶 안에서 주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약속해주십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만 집중합니다. 성령을 받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변화될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이 세상을 남처럼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모두 성령의 진정한 역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 참 진리의 삶인 주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저 남처럼 풍요하고 화려하게 살기만을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마음으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의 삶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
손해 본 일은 모래 위에 새겨 두고, 은혜 입은 일은 대리석 위에 새겨두라(벤저민 프랭클린).
------------------------
----------------------------------------------------
230517.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만을 찾는
신망애(信望愛)의 삶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답은 ‘진리의 영’, 성령뿐이다-
하느님 안에서 참 다양한 삶입니다. 하느님안 한가족같습니다. 진리의 영의 인도따라 각자의 제자리, 꽃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며 참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혼자의 외딴 섬이 아니듯 공동체도 고립단절의 외딴섬이 아닙니다. 세상과 떨어져 있는 듯 해도 세상 한복판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여기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어제 저녁 식탁을 보니 모두 18명이었습니다. 수도형제11명, 외부손님형제들7명! 참으로 세상에 활짝 열린 환대의 집 수도원임을 입증합니다. 전체의 1/3이 손님입니다. 하느님의 대가족을 상징하는 정주의 요셉수도원입니다. 아, 그런데 한 형제는 배밭일에 더위를 먹었는지 배탈이 나서 쉬고 있는 듯 했습니다. 얼마나 넓고 깊은 하느님의 품인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 하느님입니다. 수도원의 정주영성은 그대로 환대영성으로 직결됨을 봅니다.
“소백산 등산후 부석사로 부처님을 찾아서 탐방하고 남한강을 만나러 여주로 왔어요. 오월인데 어딘들 예쁘지 않은 곳이 없어요.”
서울교대 동창으로 은퇴후 6명의 정다운 도반들과 자주 여행길에 오르는 스테파노 형제의 공동 카톡방에 6개의 아름다운 사진과 올린 글이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움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들입니다. 신록과 꽃의 계절, 요즘의 한국은 어디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어디나 하느님 계신 지상천국입니다.
“오늘도 영적승리의 삶을 살려고 나름 애쓴 하루였습니다. 그 와중에 야간진료 끝나고 본 신부님의 축복 메시지가 저에게 감동을 넘어 눈물을 쏟게 했네요. 예수님의 축복으로 느껴져서 더욱 뭉클했나 봅니다.”
잠깨니 야간진료중인 치과의사 형제로부터의 메시지였습니다. 얼마전 “설레다”란 말과 더불어 “뭉클하다”는 우리 말마디가 참 반가웠습니다. 진리의 영 따라 살 때 자주 겪을 설렘의 삶에 뭉클함의 체험일 것입니다. 즉시 드린 답글입니다.
“아, 힘든 그러나 최선을 다한 하루였네요. 하루하루 온몸과 온맘으로 사시는 무죄한 삶, 정직한 삶, 감동적인 삶, 예수님께서도 감동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엊그제 멀리 평택에서 4가지 기적 체험을 나누러왔던 부부도 생각납니다. 듣고 보니 신비로운 사랑의 기적에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한달 미사중에 일어난 기적들이니 더욱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드리는 부부였습니다. 한밤중 일어나 강론을 쓰는 이 시간에도 투병으로 온힘을 다쏟는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어제도 예전에는 건강했던 분인데 지금은 3년째 암투병중인 형제의 방문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바라는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엾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런 고통스런 삶중에도 참으로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이 참 거룩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한번 여행했던 곳에는 가고 싶지 않듯이 이 삶도 다시 살라하면 못살 것 같습니다. 다시 살라해도 이렇게뿐 못살것이니 살고 싶지도 않고 다만 남은 동안 인생휴가 끝내고 하느님의 집에 귀가할 때까지 정말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살고 싶습니다.
지금 열독熱讀중인 책은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조선 후기, “백성을 사랑했던 지성” 정약용 요한에 관한 “다산 평전”입니다.요즘 제가 즐겨 읽는 책은 위인들의 평전이나 자서전, 고백록입니다. 또 한권은 하느님의 수도승, 토마스 머튼을 참으로 치열하게 공부하며 쓴 안셀모 신부의 박사학위 논문,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입니다.
성인들은 물론이고 참으로 치열하게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만을 찾는 제 주변의 형제자매 도반들입니다. 저를 포함해 이분들의 삶빼기 하느님하면 남는 것은 무지와 허무의 어둠뿐일 것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은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이자 모두가 되는 분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정말 불행중의 불행, 재앙중의 재앙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입니다. 아무리 세상 학문에, 철학에 정통해도 하느님을 모르면 헛되고 공허한 삶입니다. 평생 진짜 해야할 평생 공부는 단 하나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아는 공부뿐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아테네에서의 바오로 사도의 선교가 실패로 끝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명이 찬란하게 꽃폈던 학문과 예술, 철학의 중심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의 그 멋지고 감동적인 설교에도 아테네 시민들은 마이동풍입니다. 참으로 무지로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를 통한 겸손과 지혜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회개의 은총이 절실합니다. 아테네에서의 선교를 끝내고 고린토로 향하는 바오로 일행입니다. 아마 이때의 체험을 반영한 다음 고백일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1,22-25)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인지요! 하느님의 힘이자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찾고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대우(大愚)의 사람들인 듯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지(大智)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참 지혜로운 아테네 사람들인 듯 하지만 어리석은 무지의 헛똑똑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평생공부보다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께로 이끄는 진리의 영, 성령뿐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그러니 진리의 영, 성령과의 일치의 삶이 제일입니다. 곧 성자 그리스와의 일치, 성부 아버지와의 일치도 저절로 뒤따를 것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주님께 성령의 은총의 선물을 청하도록 합시다. 성령의 인도따라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아멘.
----------------------------------------------------
230517.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진리의 영 곧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경험이나 체험이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어느 날 기도 하는데 갑자기 그동안 들었든 혹은 읽었든 성경의 말씀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의 감동은 말씀의 한 구절이 아닌 다른 구절들과 연결되어 하나씩 하나씩 각기 다른 말씀들이 함께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꼭 고구마 하나를 깨려고 호미를 땅속에 밀어 넣었는데 고구마가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형국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실제 고구마를 캐는 기쁨보다 더욱 크고 깊으며 그 향 또한 진합니다.
모두 이런 체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영적인 선물은 우리는 감동케 하고 더욱 하느님의 사랑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인 체험이라고 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면 우리는 그 선물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너무나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또 다른 선물을 찾아 나서거나, 선물을 달라고 보챈다면 우리는 하느님 자체가 아닌 선물만을 바라는 선물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우리를 메마른 사막과 같은 영의 공간으로 초대하시기도 하시고, 하느님 사랑의 오아시스로 초대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히 그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무엇을 만나든 무엇을 체험하든, 그것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든, 가슴 깊이 올라오는 처절한 통회의 아픔이든, 우리는 그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진리의 영을 따라 한결같이 나아갈 수 있다면 진리의 영은 우리에게 더욱 진하고 감미로운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으십니까?
하느님을 찾으십니까?
그럼 바라보세요.
오늘을 바라보고
내 안을 바라보고
내 밖을 바라보세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고
나를 사랑해주는 모든 것을 바라보세요.
그렇게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이 보일 거예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바라보시는
그분이 보일 거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