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날 노래가사
윤극영 작사, 작곡
1절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2절~~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 내시고
우리들의 절 받기 좋아하세요
어린 시절,
까치 설날 노래를 목청껏 불렸던 윤극영 선생님 작사, 작곡의 동요이다.
윤극영((尹克榮) 선생.
우리나라 최초 동요작곡가이며, '설날, 까치설날, 반달, 따오기, 고드름, 할미꽃, 고기잡이, 꾀꼬리' 등을 작곡했다.
1903 9. 6. ~ 1988년. 서울 태생
조선 말기의 승지 윤직선(尹稷善)의 손자이다.
세칭 반달할아버지로 불렸다.
한성부 출생으로, 1922년 도쿄에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다음해에 〈반달〉, 〈고드름〉, 〈설날〉을 비롯하여 30여 편의 동요를 작곡.
1926년엔 한국 최초의 동요작곡집 《반달》을 출판.
8.15광복 후 만주 지린성 룽징과 중화민국 허베이 성 톈진에 있다가 1947년 월남하여 ‘노래동무회’를 조직했으며, 동요 100여 곡도 작곡.
동요 이외에도 신석초등학교, 고명중학교의 교가를 작곡.
1988년 11월 15일 향년 86세로 별세.
노래 :
제비 남매, 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외나무다리, 담모퉁이, 반달, 설날, 까치까치 설날, 할미꽃, 고기잡이, 꾀꼬리, 옥토끼노래, 고드름, 따오기을 작곡.
작곡가. 동요작가, 동요작곡가, 아동문화운동가.
1924년에 '반달'을 비롯해 '설날', '할미꽃', '고기잡이', '꾀꼬리', '옥토끼노래' 등의 창작동요를 발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 '고드름', '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여 동요보급운동을 전개했다.
점층수법에 의한 동요 창작과 작곡을 통해 초창기 아동문학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설날'은 1924년 어린이들이 설에 일본 음악을 듣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작사 작곡.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라 할 수 있는 <반달>을 작사 작곡하여(1924. 9) 확산시킨 결과 큰 호응을 받아 빠른 속도로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에까지 전파.
일제강점기 시기로 한국 노래를 탄압하던 일본인도 이 노래를 불렀다.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작곡된 17곡의 창작동요를 엮어 1926년에 반달이라는 동요집을 내고,
같은해 동요 레코드도 출반하였다.
인터넷으로 까치 종류를 검색한다.
'까치, 때까치, 물까치, 산까치(어치), 땅까치, 칡때까치, 재때까치, 노랑때까치, 노랑부리까치, 검은부리까치' 가 있다.
'산까치(어치)'는 '까치'보다 몸집이 작다.
* 위 사진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참고용이기에 용서해 주실 게다.
새들의 모습과 차이를 더 확인하기 바란다.
1.
어제는 2023. 1. 21.(음섣달그믐) 토요일. .
섣달그믐은 일명 '까치설날'이다.
음 섣달그믐날은 내 돌아가신 어머니 생일날이다.
어제는 양력 1월 21일.
내 양력 생일(음력은 섣달 스무사흘)이다.
어제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하룻밤을 지낸 오늘은 계모년 정월 초하루.
나는 올해에도 서울에서 차례를 지냈다.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그리고 쌍둥이 동생 등등...
그 위대는 시향으로 모셨기에 설 추석 차례는 간소하게 지낸다.
충남 보령 웅천 구룡리 화망에서는 큰당숙, 사촌동생들이 선산에 들러서 절을 올렸을 것 같다.
어제 여든다섯 살인 큰당숙이 서울 나한테 전화 주셨다. 선산에 들러서 절을 올리겠다고.
아내, 큰딸, 막내아들. 나. 넷이서 설 차례를 간소하게 지냈다.
오후에 인도 사돈 두 명이 왔다.
이들한테서 세배를 받고는 나는 세배돈을 주었다.
그들은 선물꾸러미를 잔뜩 가져왔다. 한국산 곶감, 인도에서 가져 온 요리 등.
세째사돈이 최근에 인도에 다녀왔다고 한다. 어머님이 조금 편찮으시다고 한다.
그들은 바쁘다며 이내 되돌아갔다.
오늘은 음력 설날.
나는 어제까지 집나이 일흔다섯살.
오늘서부터는 집나이 일흔여섯살이 시작되었다.
하루내내 아파트 안에서만 머물렀다.
어제는 '까치설날'이었고, 오늘은 음력설날이었고....
나중에 보탠다.
1.
세계일보, 인터넷 뉴스에서 퍼 왔다.
<102세의 사할린 동포, 다 잊어도 ‘아리랑’은 기억에 남겼다>
사할린 동포 강제 이주는 1938년부터 1945년 이뤄졌다.
당시 사할린 남쪽을 통치하던 일본은 오랜 전쟁 속에 목재업과 탄광, 어업 등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다. 이에 1938년 4월 물자와 노동력을 총동원하는 ‘국가총동원령’을 발표했다.
이어 1939년 7월 ‘국민징병령’을 발표했다. 또 사할린에 있던 이주 한인들에게도 ‘국가총동원령’으로 이른바 ‘현지 징용’했다. 당시 강제 동원된 한인은 15만여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패전한 일본은 한인들을 방치한 채 자국민만 배에 태우고 떠났고 노동력이 필요했던 옛 소련은 한인들의 귀향을 막았다. 이때부터 4만여명의 한인은 무국적 상태로 사할린 코르사코프항구에서 오지 않는 귀국선을 눈물로 기다렸다.
사하린 : ?.
이 섬은 원래 시베리아 등의 다양한 원주민들이 살던 곳이었지만, 제국주의 시대가 되면서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이 각축을 벌였다. 결국 러시아 영토로 되었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북위 50도를 기준으로 남쪽을 얻었다.
1945년 2차대전 패전 후 일본은 러시아에 넘겼다?
일본은 점령 이후 질 좋은 석탄이 많고 풍부한 산림과 수산자원이 있는 사할린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를 위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강제동원으로 인하여 이곳 사할린에 많은 조선인들이 왔고, 그렇게 간 이들의 가족들도 이들을 찾아 사할린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점령으로 일본땅에서 소련 땅으로 편입되면서 사할린에 남게 된 조선인들을 우리는 사할린 동포라 합니다.
1.
자랑스러운 지역?
인터넷에 오른 네티즌 글....
신천지 총회장 이만희 =경북 청도
빤스목사 전광훈 =경북 의성
세월호선장 이준석 =경북 칠곡
숭례문 불지른 채종기 =경북 칠곡
어금니아빠 이영학 =경북 영주
트렁크 살인마 김일곤 =경북 경주
정인이 양부모 고향 =경북 포항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 =대구
외딴집 할매 6명살인 지춘길 =대구
여친부모 잔혹살인범 장재진 =대구
알바여대생 성폭행살인 조명훈 =대구
동대구일대 4명살인 이승수 =대구
여고생 성폭행살인 김수길 =대구
8살친딸 성폭행 에이즈 감염자 =대구
김태완 어린이 황산테러사건 =대구
2023. 1. 22.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