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실록 11년 4월 기사에 한강 잉화도의 풍습에 대해 언급해 놓고있는데
그중 남녀가 서로 안거나 등에 업고 강을 건너는 품이 야하기 그지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잉화도는 지금 여의도다.
한강에 물길이 얕아지면 사람을 업어 도강시키는 직업적인 삽수꾼이 있었다.
물을 건네준다는 뜻인 섭수에서 비롯된 말일것이다.
잉화도에서 삽수꾼이 도강하는 것을 보고
성안에 사는 소수의 양반들 눈에 야하게 비쳤음직하다.
한강 도강료는 이 삽수꾼까지 소급된다 할 것이다.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1902년의 일이다.
내탕금에 굶주리던 황실에서는 한강을 건너는 모든 사람에게
나룻배 삯말고도 도진세라는 미명의 도강료를 얹어 받았던 것이다.
나룻배의 발착장에 가가를 지어놓고 도강료를 받았는데
불만이 비등하던차에 드디어 폭발, 반란으로 번지고 말았다.
동기는 도강료받는 관리가 아기 밴 부인으로부터는
도강료를 태중 아기 몫으로 반 값을 더 요구했기 때문이다.
관리란 예나 지금이나 명분만 있으면 민원과는 아랑곳없이
거두고 보는 것이 생리인가보다.
이에 성난 나룻배의 승객과 인근 주민이 합세하여
도강료받는 가가를 불지르고 소동을 벌였던 것이다.
한강에 사설 다리를 놓고 도강료를 받은 사실도 있었다.
1910년 우에다라는 일본 상인이 마포에서 여의도까지 배다리(주교)를 놓고
마포쪽에서는 우에다 자신이, 여의도 쪽에서는 우에다 부인이 거적대기 깔고 앉아
도강료를 받았던 것이다.
배다리란 나룻배를 줄줄이 연결시켜 그 위에다 상판을 깔아 건너다니게 하는 임시가교다.
한번 건너는데 현금일 경우 8전, 현물일 경우 쌀 반되값이었다하니
착취에 가까운 도강료였다 할 수 있다.
이 배다리 도강료에도 민원이 맥락되어 폭동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배다리로 생업을 잃은 것이 마포 서강의 삽수꾼과 나루꾼들이었다.
이들과 망국의 울분을 못가누던 나루 백성이 합세하여
이들을 저지하는 일본 무장군과 도강료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바로 강제 병탐당하던 해 5월의 일이었다.
이처럼 민원에 그뭣보다 민감한 한강 도강료요,
그래서 피로 얼룩진 역사가 깔려있음을 알아야한다.
여당의 정책으로 2인 미만으로 한강을 건널때는
1천원씩의 과적 도강료를 물리기로 입안되었다던데
한강 도강료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민원을 유발할수있는 소지가 있는 발상이다.
돈 천원이 별스럽지않은 상류층에 교통난을 덜어주기위해 돈 천원이 별스러운 서민층이
희생하는 결과가 될것이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