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도착한 편지 [이민아]
나를 찾기가, 어쩌면 퍽 어렵겠지요 도회의
이름 긴 간판이 이곳엔 없지요 낡은 혁대처럼
끊기고 구겨진 도로 아홉시면 버스가 길을 버리는
마을 방기防氣, 어둠에 익은 눈도 많이 밝아졌네요
이곳에선 쓸쓸한 것들의 뒷태를, 볼 수 있죠.
더딘 회복 끝에 만약 내가 혹은 그대가 편지를
보낸다면, 휘황한 단청은 없지만 보광사普光寺 대문에
제비표페인트 락카로 그려둔 비천의 옆모습
신묘한 구름의 데칼코마니를 꼭 한번 보고가세요
보름달은 방기갤러리 유일한 조명입니다,
눈물 많은 것들은 천천히 말리는 법이라나요
억새밭 지나 윗 블록으로 걷다보면, 새벽 이슬에
눅눅해진 삭정가지만 소목소목 그러모아 옹기가마
속 불 넣는 화법火法의 소유자, 알락도요 둥지 같은
흰수염 노인장 담 없는 도요지도 굴뚝을 세웠네요
까치머리 사내아들놈 볼에 옴팡지게도 입 맞추는
시골 어무이들 도톰하니 붉은 고 입술로
낮 동안 속닥속닥 깨를 말리면, 도리깨 작대기
능청스레 채잡고 휘휘 돌리며 며느리 말릴 깨를 터느라
두 손 가득 못 잽힌 할마이들도 밤새 쑥덕쑥덕
핏빛 물든 박제된 천형이 아니라 발그레 상기된
속내 여린 얼굴들 콩잎처럼 열리는 붉은 십자가 교회도
하나 솟아 있습니다, 경건하되 위협적이지도 않고
비밀스러워 새침해 보이지도 않은 그 풍경에
안개조차 얼려버리는 골바람도 혹 멎습니다
세상을 잊은 사람들, 무시로 숱이 느는 억새며
짝을 버린 애꾸눈 암고양이 마리가 오늘도 압정마냥
엎드린 배나무 정수리에 올라 그렁그렁 눈매로
당신 오는 그 길목 애써 지켜 개밥바라기하는, 여
언제고 한 번 다녀가세요, 숨이 꺽 막힐 때
해 노을이 남루한 이부자리의 전부인 누렁소처럼
나는 방기放棄를 살고 있습니다
- 야왜나무 앞에서 울다,신생, 2013
미래는 허밍을 한다 [강혜빈]
빛의 벙커로 내려간다
기계들이 기다리는
잠들 줄 모르는 백야 속으로
강가에
배나무 흔들리는
그대의 집
그리운 산책로
배꽃이 피었겠지
도둑도 경찰도 없는
유령 도시의 안전한 밤
어린 별들만이 수런거린다
걸으며
뒤돌아보겠지
차가운 밀실 안에서
인류를 구하겠지
세상은 타버린 베이글 같아
발보다 작아진 구두 같아
늙지 않는 시계
건전지들의 서바이벌 게임 같아
지상의 나는
너에게 노래를 줄게
벌들의 윙윙거림
바람이 사각거리는 소리
앰비언트 음악과 닮은
최소한의 내일을
여름의 싱그러운 무릎을 줄게
돌아올 집을
수플레케이크의 환대를
20미터 아래에서는
아포칼립스의 시나리오를 준비해
기계들의 웃음소리가
벽에 부딪힐 때
빗소리보다
작은 노래를 줄게
돌멩이의 닫힌 결말을
사랑을 기념하는 세리머니를
빛의 벙커로 손을 내밀고
미래를 구할게
강가에
배나무 흔들리는
그대의 집
그리운 산책로
배꽃이 떨어졌겠지
지상의 나는
허밍을 멈추지 않을게
그대의 빈집이 될게
- 미래는 허밍을 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閑題(한제) 五話(오화) [박남수]
音樂(음악)
내가 아지랑이 속에 있소. 어쩌면 요지경으로 조용한 들녘입니까. 말하자면 음악과 같은 것이지요. 복사나무는 복사나무의 작업을 하고, 배나무는 배나무의 작업을 하고...... 가시내사 가시내의 구실을 시키시구려. 푸른 열매를 먹으면 좀 조용도 해지리다.
無題(무제) 1
그저 한 귀가 모자라는 나날을 살다가 보면, ......푸면 다시 고이는 우물물처럼 충만한 게 부러워지오. 두레박으로 푸시지만 마시고, 가다가 하늘과 맞보는 충일로도 두어주십시오, 제가 무엇으로 넘치고 싶으오. 오늘은 참말 무엇으로 넘치고 싶으오.
無題(무제) 2
종달새는 어디까지 오르려나. 꺼질 듯 꺼질 듯 하늘로 點(점)져가는 종달새는 하늘 그 너머가 보고 싶은가 보오. 나도 잠시면 지구를 좀 떠나보고 싶소. 어쩌면 성층권쯤에서 家鄕(가향)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보고 싶어질는지도 모를 일이오.
祈禱(기도)
뺨이야 부빌 수 있습니다. 부둥켜안기사 더욱 쉽습니다. 그저 당신이 하듯이 사랑할 수가 도무지 없습니다. 내 가슴에 파묻혀 귀기울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키는 일만도 여간이 아닙니다.
-이런 이제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만이라도 해주십시오.
한 모금의... 물
처녀야 물 한 모금만 다오. (한 바가지의 우물을 주었습니다.) 처녀야 네 웃음도 조금만 다오. (웬지 복사꽃의 그 부끄러움을......)
- 모두 그렇고 그렇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미래사, 1991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1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南風) 불 제 나는 좋대나.
2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를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