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척은 동해마을 바로 서쪽 병방산 아래 구례읍 신월리(잔수역)에서 구례읍내와 마주보며 화정마을 감남쟁이 나루까지 흘러가는 섬진강변에 있다. 잔수에는 섬진강 48개 줄기에 3,405평방킬로미터의 물이 모여 내리며 하구로부터 56킬로미터쯤 된 곳에 있다. 따라서 섬진강과 잔수역에 관해 역사지리적 사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섬진강은 유역면적(4.897㎢)과 본류의 길이(225km)로 보면 금강 다음으로 4번째나 되는 남도의 젖줄이다. 백두대간의 남단인 지리산에서 호남정맥의 동단인 백운산까지 1천리가 넘는 산줄기 안의 물이 모여 남해로 나간다. 전북 진안1W임실1W순창1W남원, 전남 화순1W장흥1W보성1W곡성1W구례1W순천1W광양, 경남 하동 등 3도 12개 고을에 걸쳐 68개 강줄기가 합류해서 망덕포구 배알도로 나간다.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편에는 잔수진(潺水津)이라는 대목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구례에 있는데, 그 수원이 2개 있으니, 그 하나는 진안 중대산(中臺山)의 물이 서남쪽으로 흘러 임실1W순창을 지나 돌아서 동쪽으로 흘러 남원을 지나 순자진으로 들어가서, 그 하류가 압록진(鴨綠津)이 되며, 도 보성 정자천(亭子川)의 물이 복성(복내) 옛 현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서 낙수진(洛水津)이 되고, 동북쪽으로 흘러 옛 곡성을 지나 압록진으로 들어가서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 남쪽과 순천 북쪽 경계에 이르러 잔수진이 되고, 지리산 남쪽 기슭을 지나서 경상도 진주의 옛 임내(任內) 화개현 서쪽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동남쪽으로 흘러 광양현의 남쪽을 건너 섬진(蟾津)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택리지』나 『연려실기술』에는 발원지를 마이산(馬耳山)으로 보고 있다. 1918년 일제가 만든 『조선지지자료』에 다르면 전북 진안군 우곡리 부귀산에서 발원하여 경남 하동 갈도까지 본류길이는 212.3km라고 기록돼 있다. 이후 건설부에서 만든 『하천편람』이나 수자원공사에서 만든 『전국하천조사서』에도 그대로 쓰고 있다. 이에 대해 이형석씨는 이의를 제기하며 『한국의 하천』에 섬진강의 유래와 함께 발원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동북쪽 봉황산(鳳凰山 1080m) 상추막이골에서 발원, 같은 군 마령면 강정리를 지나 임실군 관촌면에 이르러 오원천(烏院川)이 된다. 운암면 운암저수지를 지나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에서 구림천(龜林川)을 합하고 같은 군 적성면에서 오수천(鰲樹川)을 합하여 적성강(赤城江)이 된다. 순창읍과 남원군 대강면 경계에서 경천(鏡川)을 합하고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 흐르다가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서 옥과천(玉果川)을 합하여 탄진강(誕津江)이 되고 남원군에서 발원한 요천(蓼川)과 수지천(水旨川)을 합하고 곡성군 죽곡면에서 보성강(寶城江)을 압록진(鴨綠津)에서 합하여 구례군 문척면과 구례읍의 경계에서 황전천(黃田川)을 합하여 섬진강이 된다. 구례읍과 마산면 경계에서 서시천(西施川)을 합하고 토지면에서 연곡천(j졡範?을 합하고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에서 화개천(花開川)과 중대천(中大川)을 합하며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과 하동읍 경계에서 횡천강(橫川江)을 합하며 남쪽으로 흘러 하동군 금남면 고포리와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선소리의 사이에서 남해로 들어간다. 길이는 225km이다.
섬진강은 옛날 두치강(豆恥江) 또는 두치진(豆治津)이라 불렀는데 두치진은 하동군 서쪽 5리에 있는 나루터이다. 두치강이나 두치나루의 '두치'는, '도치→도최→도치→도끼'의 변천과정으로 보아, '두꺼비'와 통하는 말로보고 있다.
실제로 다음의 여러 전설과 같이 두꺼비(蟾)와 관련된 이름으로 광양군 진상면 섬거리(蟾居里)에는 두꺼비가 많이 살고 있으며 '두꺼비(蟾)가 산다(居)'는 땅이름까지 붙어 있다.
대게 옛날에는 강이름을 유역권을 통칭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기 고을 앞을 흐르는 구간에 그 지역의 특징을 따라 강물이름을 붙였다. 오늘날처럼 '섬진강'이라고 큰 강 이름으로 일컫는 것은 일제가 1910년대 5만분의 1 지형도 제작과 1920년대 하천조사를 하면서부터이다.
신경준(1712∼1871)은 산수고에 전국 12개 하천의 명칭을 개괄하면서 섬진강을 '잔수(潺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구례의 잔수부근의 중요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이곳은 황전천과 합류하는 곳으로 육로의 잔수역과 함께 포구(浦口)가 설치돼 있어 요충지였다. 즉, 육상교통과 수상교통이 공존해 수송전환지점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영산강에 있어 영산포와 같기 때문이다.
강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이 교통로다. 근대교통이 등장하기 전에는 천연교통시스템이 배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살기 좋은 고을도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곳. 즉, 배가 자주 닿는 곳이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임실 운암진(雲岩津)까지 통항이 가능했던지 강줄기가 두 줄로 그려져 있다.
1929년대 나온『조선하천조사서』에 따르면 섬진강 항로는 유조항로(有潮航路)14.8km, 무조항로 74.6km, 정항로 62.4km였고 취급 화물량은 14,700톤쯤 되었다. 주요 포구가 바로 구례일대로 가항종점이 되었다. 주요화물은 곡물, 잡화, 땔감 등이었다. 바로 구례가 섬진강유역에서 명읍(明邑)으로 꼽힌다고 칭찬한 것도 이점 때문이다. 지리, 백운산골과 구례분지에서 얻는 산물은 교역시킬 수 있는 수운(水運) 때문이었다. 1935년께에만 해도 장선(돛단배)이 압록까지 통항하였다. 이중환(1690∼?)의 『택리지』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구례의 서편은 봉동(鳳洞)이면 천석(泉石)이 기이한다. 동쪽에는 화엄사와 연곡사의 명승이 있고 남쪽은 구만촌(九灣村)이다. 임실에서 구례까지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이름난 구역과 훌륭한 경치가 많고 또 큰 마을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구만촌은 시냇가에 위치하여 강산1W토지와 거룻배를 통해서 얻은 생선. 소금의 이(利)가 있어 가장 살만한 곳이다.
바로 구만촌은 문척 오봉산 북쪽이다. 일명 금환락지(金環落地)라 칭한 명당이라고 소문난 곳이다. 문척을 감도는 섬진강의 북변에 구례읍과 토지면이 있다. 이 구간에 화정진, 용두진, 잔수진 등 큰 포구가 있었다. 그 중 잔수진은 역과 함께 자리하고 있어 구례부근의 섬진강을 잔수강(潺水江)으로 일컫게 되었다.
구례구역에서 막 다리를 넘으면 구례읍 신월리 신촌이다. 바로 이 마을이 잔수역과 포구가 있던 곳이다. 일제 때 땅이름을 바꿔 지금은 잔수마을이 어디냐고 물으면 생소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과 문척사람들은 모르는 삶이 없다.
이곳은 북서쪽 남원 오수역(鰲樹驛), 곡성 지신역(知申驛), 남서쪽 순천 양률역(良栗驛), 남동쪽 하동 악양역(岳陽驛)의 삼각지점 목으로 포구도 함께 있어 물산과 정보의 집산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창활도(昌活島) 관할이다가 『경국대전』에 종 6품인 찰발(察訪) 관할인 오수도 관할역이 되었다. 『여지도서』에 나와 있는 잔수역의 관내 현황은 다음과 같다.
호구는 142호에 남자 269명, 여자 235명인데 역민은 역리 104명, 역노 4명, 역비 1명이었고 말은 4필이 있었다.
그러면 잔수라는 이름내력과 잔수역을 찾아 노래한 옛 시인의 기록을 들춰보자 『명소지명유래지』에는 잔수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례읍에서 남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신월리(新月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앞에는 맑은 섬진강이 굽이굽이 남으로 흐르고 있다. 이 섬진강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원효대사와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불도를 닦으면서도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면서 시중을 들며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 보살펴 드렸다.
원효대사가 오산(鰲山)의 사성암(四聖庵)에서 불도(佛道)를 닦고 있을 때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사성암에 들어가 극진히 보살펴 드렸다.
그런 효성에도 불구하고 대사의 어머니는 노령으로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이 완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보살펴 드렸음에도 날이 갈수록 병세가 더해만 갔다.
대사는 어머니를 위해 열심히 불공을 드렸다. 하루는 불공을 드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때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네 어머니의 병은 하늘에 있는 천도(天桃)를 따다 드려야 나으리라」고 하였다.
대사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대사는 단숨에 열곡사로 달려가 그의 동생 혜공대사에게 꿈이야기를 하고 동생을 시켜 하늘나라에 있는 천도를 따오게 했다.
혜공은 부처님의 은공을 입고 하늘나라의 천도를 따와 어머니에게 드리니 어머니의 병은 거짓말같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느날 밤에 원효대사의 어머니는 잠을 자다 깨어나서 투덜대었다.
「무슨 강물이 이렇게 소리가 클까?」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구나!」
이 말을 들은 대사는 밖으로 나아가 섬진강으로 가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은 밤하늘은 신비스러운 별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사는 조용히 두눈을 감고 두 손 모아 지금까지 닦아온 온갖 부처님의 은덕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면서 하늘을 우러러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괴로움을 덜어드릴 수 있는 힘을 저에게 내려 주소서」
그 순간 시끄럽던 물소리는 한군데로 모여들고 그 소리는 마치 우레와 같아 하늘이 두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굉음을 내었다.
이렇게 원효대사는 도신력(道神力)을 이용하여 물소리를 오산(鰲山)밑으로 모두 가두었으니 이때부터 섬진강 물은 잠자듯 고요하고 잔잔하게 되었다고 하여 잔수(潺水)라고 부른다고 전해진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분화(白賁華)라는 시인이 다음과 같이 잔수역 방문을 노래했다.
아침에 백계산 밑 길로 나와서
저녁에는 찬수역(鑽燧驛) 동쪽 마을에 들었노라
적은 시내에 짧은 배 맑고 얕은 물 비껴 있고
떨어지는 해 외로운 마을은 멀고 아득한 데로 들어가네
절벽에 어지러운 구름은 은(銀) 궁궐이 솟는 듯
먼 산에 타는 산불 화성(火城)이 뻗친 듯,
밤이 깊어 곤하게 누었다가 처음 꿈에 놀라 깨어
벽을 등진 쇠잔한 등불 반쯤 평상에 비치네
찬수(鑽燧)는 즉 잔수(潺水)이다.
그러면 잔수역터와 잔수포구는 지금 어디인가. 이 마을에 사는 김용재(81세)옹과 이성옥(75세)시의 제보를 받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산 중간에 벼랑이 있다. 바위 밑이 비어 있어 저기압 상태로 비가 오려면 욍∼욍∼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산다고 하나 섬진강의 여울물소리가 기압변동해 메아리쳐 나는 소리다. 여름에 비가 올려면 소리가 나고 날씨가 좋으려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마 바위 속이 텅 비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굴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조선후기에 나온 구례현 지도에 오산이 그려져 있고 그 중턱에 산복유석굴하통동해운(山服有石窟下通東海雲)이라 기록돼 있다.)
잔수여울이란 물이 잘잘 할 잔(潺)으로 조용히 흐르는 여울이다. 남쪽 황전쪽과 구례 구역쪽에서 바람이 만나 북쪽으로 휘 불어가는 강바람과 함께 소리없이 흘러간다는 뜻이다. 먼지같은 것도 모두 오산이나 동해쪽으로 불어가고 이곳 병방쪽으로 오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 놓은 순천∼남원간 도로가 바로 잔수앞으로 고가도로가 나고 있어 이쪽은 불어가기 때문이다. 이곳이 여름에는 어찌나 시원한지 여름이 없다고 해서 정자이름도 내가 무하정(無夏亭)이라 지었다.
본래 이 마을은 도선국사가 점지해준 곳으로 옥녀직금설과 함께 행주형이다. 따라서 배가 돛대를 달아야 잘 다닌다고 동네 여러곳에 느티나무를 심었다. 지금 회관 앞에 있는 느티나무도 일종의 그것이다.
이곳은 일제때만 해도 통선(通船)이 다녔다. 이마을 저마을을 연결해 주니 물화(物貨)를 옮겨 주기도 하고 길상사(吉喪事) 때 왕래한다. 압록 서쪽으로는 수심이 얕아 못 들어갔다. 우리 신촌은 무1W배추가 특산물이라 옛날에 진상품도 되었는데 하동으로 실려가니 잡화와 바꿔온다. 배에 사공은 3명으로 앞에 2명, 뒤에 1명이 있다. 선장이 뒤에 있다. 내려갈 때는 강물을 따라 순순히 내려가나 올라올 때는 돛을 달아 돛풍을 이용해야 했다. 유명한 포구로는 용두포구, 동방천포구, 화개포구 등이 있다.
저 앞에 보이는 동네는 동해인데 절이 있다. 옛날에 마호사란 절이 있었다. 잘 알 길은 없지만 마애불과 관련이 된성 싶다. 그 절 뒤에 배바우가 있는데 그곳에 배를 메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빙하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지금은 어림도 없지만(해수면 변동에 대해 그 원리를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옛날 강태공의 하마터라고 하지만 알 수가 없다.
신촌은 이조 중엽 잔수역이 있었는데 위찬수, 아랫찬수가 있었다. 지방 액센트로 찬수라고 한다.(잔수를 찬수라고 한 것은 홍수와 관련이 있는 듯 함) 찬수역은 악양역, 진주역, 부산진역까지 연결된다. 역이 있으면 배가 있어야 한다. 오수역에서 역마타고 오면 배를 타고 건너온다. 따라서 사공은 대기해야 한다. 이때 사공놈아! 외치면 즉시 배를 대야 한다. 주로 관리들이 이용했다 해서 관선진(官船津)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관목이 심어져 있으며 관선들이라 한다.
신월파출소에서 북서쪽으로 100m되는 지점이 관선진으로 민가는 없었다. 여기서 남동쪽 병방산(163m) 밑 지금의 구례 남초등학교자리(신월리 39번지)에 잔수역사 건물들이 있었다. 원래는 계사면(界寺面)의 면사무소 자리였다가 간이 학교에서 출발했다. 강동렬씨 집근처로 역둔토가 있었다. 일명 '고사리밭등'이라 했는데 구례 초대 역장인 심상진씨가 개발 구획정리를 한 뒤 일제때 개인에게 불하되었다. 지금 오세찬씨나 이약국 땅도 역둔토다. 이곳은 땅이 걸어 채전이 잘 되었다.
박병기씨 집 앞 도로건너에는 '뼈새미'라는 우물이 있다. 월계(月桂)마을에 있는데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샘으로 달밤에 부녀자들이 머리를 감기도 하고 농사일을 끝내고 씻기도 했다. 천하에 빼어난 좋은 샘이라 배어날 수(秀)자를 써 빼샘이(秀井)가 되었다고 한다.
(신월리 371-2번지 김용재 옹 제보 : 무하정에서 1995년 8월 1일 채집)
옛날 우리동네 앞에는 짐배가 들어 왔다. 돛단배라고도 했는데 100섬정도 실을 수 있는 배로 3∼5척이 닿기도 했다. 선장은 김선명시였고 김영신, 김두선씨도 있었다. 지금 임춘식씨 집터에는 이때 곡물을 내가기 위해 정미소가 있었다. 정재화씨와 최순칠시가 운영했다. 소방대 자리에는 장(場)이 서기도 했다.
잔수나루는 지금 이현호씨 집 앞에 있었다. 그 부친이 이용수씨인데 사공을 잠시 본 적도 있다.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공은 맨처음 김영도시가 했고, 그 뒤 그 아들 김기석씨, 이후 이개씨가 했다. 그다음 심판례씨가 하다 구례고가 만들어지니(1938년 준공) 그만뒀다. 그러다 6.25때 폭격을 맞아 다리 가운데가 끊어졌다. 다시 나룻배가 다녔다. 이때 서정룡씨가 운영했다. 읍사무소에서 관리했던 성싶다. 이때 이용수씨도 거들면서 배 일을 좀 했다. 건너편 배터는 천일제재소가 있는 곳이다. 당시 배의 크기는 사람은 백명까지도 실을 수 있고 군인 트럭도 한 두 대씩 실어 날랐다. 배를 몰려면 큰 간지대(젠비라고 함)가 필요해서 특별히 단단하고 좋은 제목을 골라서 만들어 썼다. 작은 나루라고 할 수 있는 곳도 있었는데 동해사람들이 병방쪽으로 오는 나루로 초등학생들이 주로 이용했다(남초등학교). 이쪽 사공은 장기동, 이문태, 이영록씨 등이 10년전까지 운영했다.
(신월리 98번지 이성옥씨 제보 : 마을회관 당산나무 쉼터에서 1995년 8월 1일 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