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에 이르는 연습
오늘날 기독교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영성이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영성이 약화된 한 가지 증상은 경건의 상실입니다.
경건의 상실은 세속주의가 범람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대신 이 세상의 일에 모든 관심이 향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관심보다는 일상적인 관심에 사로잡힐 때 경건한 삶은 공허하게 됩니다.
그러면 경건의 삶이 약해진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단적으로 영적 훈련의 부재가 오늘의 기독교 영성을 약화시켰습니다.
신학자 알버트 데이는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오늘의 개신교 신도들은 훈련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영적 통찰력이 많이 부족하고 도덕적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세기의 순교자로 알려진 본 훼퍼도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영적 훈련, 금욕 생활,
명상과 묵상 같은 훈련을 위한 연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오늘날 급격히 약화된 기독교의 영성을 회복하려면 경건의 훈련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경건의 훈련을 강조하였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안”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Godlineess"인데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어떤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를 확인해 보십시오.
세상의 것으로 출렁출렁 거리고 탐욕과 야망과 허영,
염려와 근심으로 차있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에서부터 조용히 감사와 기쁨이 솟구쳐 오르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 원한다면
그것이 바로 경건의 모습입니다.
이런 경건의 삶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끊임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이란 단어의 원어는 ‘굼나제’이며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체육관을 뜻하는 ‘짐네지움’으로 단어입니다.
'굼나제'는 운동 선수들이 체육관에서 경기를 위해 피눈물나게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육체의 연습하듯 경건의 연습을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연습은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훈련을 합니다.
영적 지도자는 스스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묵상이란 하나님 앞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말씀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조용히 만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자신의 뜻과 행동을 고쳐 나갑니다.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고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것을 사모합니다.
세상의 학문과 지식과 재물과 즐거움보다 일생동안 신령한 세계를 사모하며 삽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마음의 성전을 세웁니다.
마음의 성전은 누구도 대신 지어줄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마음의 성전은 너무나 초라하고 빈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경건의 연습은 여러분의 영혼을 하늘의 생수와 보화로 채울 것입니다.
이제부터 경건의 연습을 시작하십시오.
경건의 훈련은 범사에 유익하며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과 성품과 생활을 변화시켜
예수님을 닮은 영적 거장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는 묵상
이 시대의 영성신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포스터는 그의 저서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이 시대의 비극은
피상성이라고 말하면서 다음 같이 말하였습니다.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사상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는 사람은 지능이나 재능의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그의 지적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깊이보다는 표피적인 재미를,
영적 세계보다는 육적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피상성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영적 현실을 직시하고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문안하며
교회에 주신 많은 은사와 모든 지식에 풍족함을 감사했습니다(고전1:4-7).
고린도교회는 영적 체험이 많고 은사와 지식까지 갖춘 탁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육적이며 영적 어린아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3:1-2).
그 증거로 바울은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과 파당이 있고
심지어 음행과 송사가 있고 우상을 섬기기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영적 미성숙의 근본적 이유는 영적 지도자가 없었고
영적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기독교가 현대판 고린도교회 같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심각한 영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현재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16세기 초의 종교 개혁 직전의 암울했던 시대와 똑같은 상황에 있다고까지 합니다.
그 근본적 이유는 그동안 한국 교회가 양적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교인 하나 하나에 대한 영적 훈련을 소홀히 하여 질적 성장이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물량주의와 세속주의가 만연되어
한국 교회는 영적 미성숙의 덫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특징은 지나친 감정주의와 이에 따른 반지성적 신앙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인의 성화된 삶을 강조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신앙적 미성숙성을 극복하려면
영적 훈련을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고대 교부들이나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은
지,정,의가 조화된 전인격적 영성이었고
깊은 영성의 묵상이 동반되는 영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하루 빨리 기독교의 본래적인 영성을 회복하기 위한 영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영적 훈련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삶을 개발하여
그리스도인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고요한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영적 훈련의 핵심은 말씀 묵상입니다.
다양한 말씀 묵상법 중에서 단순한 방법 하나를 소개합니다.
베네딕트의 묵상법입니다.
그가 처음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 수도원은 개인기도를 강조하였습니다.
베네딕트는 매일 7시간의 개인기도 명령을 받았습니다.
기도 골방에 들어간 그는 모든 기도 제목들을 기도했으나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간단하면서도 영적 성장에 필수적인 묵상법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묵상법은 삼단계입니다.
첫째 한 구절을 천천히 읽습니다.
둘째 그 구절의 뜻을 조용히 묵상합니다.
셋째 그 구절의 뜻으로 기도를 만들어 기도합니다.
이런 묵상으로 형성된 베데딕트의 영성의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와 섬김입니다.
이런 수도의 생활로 그는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웁니다.
그가 세운 수도회는 전도 뿐 아니라 서구 문명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말씀 묵상은 영적 우물에서 생수를 퍼올림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하셨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경건에 이르는 묵상의 생활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영혼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면 교회와 온 세상이 정화될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
낙타는 사막을 횡단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황량한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는 눈썹이 깁니다.
작렬하는 태양을 가려주는 긴 눈썹이 없다면,
열기로 이글거리는 사막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낙타 등에는 볼품 없이 불쑥 솟아오른 혹이 있습니다.
흉물스럽고 무겁게 보이지만 물을 저장하는 혹입니다.
낙타는 그 혹이 있기 때문에 신기루를 보고 따라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인생 여정도 사막의 길입니다.
행복을 꿈꾸고 이루어진 수많은 가정들이 메말라 갑니다.
희망을 향해 달려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합니다.
현대인들은 풍요 속에서도 빈곤으로 고민하고 목말라 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것들을 소유했습니다.
그럼에도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언제나 목마른 자들입니다.
이 목마름은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이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고는 사막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사막 같은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신 밖에서 물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낙타처럼 선인장처럼 자기 안에 물을 저장해야 합니다.
자신 안에 물이 없으면 결코 사막 같은 인생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채워야 할 물은 영적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력이 고갈되면 영혼은 신호를 보냅니다.
걷잡을 수 없이 두렵고 불안하고 고독하며 절망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물을 저장하게 하는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영적 훈련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영적 훈련을 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거나 기도원에 가거나
거창한 신학적 지식을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훈련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가사를 돌보며,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 속에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적 훈련은 즐거움과 웃음을 거두고 철저한 규칙을 따라
자신을 억제하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훈련의 기본은 기쁨과 감사와 자유입니다.
철저히 이기적이며 탐욕과 세상의 관심사로 얽매인 자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 훈련의 시작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수도원에서 주방 일을 했습니다.
그는 어떤 신학자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수도사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주방에서 식사 준비하는 일이나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아는가?”
로렌스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합니다.”
영적 훈련의 시작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주제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김종학 화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연과 사랑을 한다. 아니 연애를 한다.
자연은 남자 화가는 여자, 자연이 잉태시켜줘야 생명을 낳는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화가의 숙명적 책임이라 생각한다.”
화가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이 없다면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는 창조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기까지는 영혼에 기쁨이 없고 영혼의 강이 흐를 수 없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세상과 자기를 추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실력과 인기와 권력을 얻어 인정받는 중요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탐욕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불태우며 파멸시키는 최후의 유혹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채우는 하나님의 임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줍니다.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훈련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는 방법으로 영적 삶의 훈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은 우리를 채우십니다.
영적 훈련의 대가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86:4).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 훈련이 바로
사막 같은 세상을 계속 걸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넘치는 경건에 이르는 길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하여
2002년도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더 플레이”란 작품이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의 첫 이야기인 “떡볶이”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저녁 무렵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한 병원 환자가 제안한 최면 실험에 흥미를 느끼고 수락합니다.
환자가 건 최면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그 무언가를 “떡볶이”라고 말하고,
“빵”소리를 5회 연속으로 들어야 최면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중학생은 연예인을 보고, 여자 청년은 인터넷을,
해병대 사병은 애인을 떡볶이라고 합니다.
한 바람난 주부는 옆집 아저씨를, 할아버지는 건강을 “떡볶이”라 부릅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날 사람들이 사소한 것에 중독되어
참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음과 그들의 인생의 우상들이 무엇인지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참된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나의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일 뿐 현실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맥도날드 햄버거 체인점의 창업주였던 레이 크룩은 다음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맥도날드에 대하여 마치 종교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내 가족을 믿고 맥도날드를 믿는다.
그런데 일에 임해서는 그 순서가 바뀐다.”
그는 자신과 사업이 우선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레이 크룩의 인생의 ‘떡볶이’는 맥도날드 곧 사업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선 하는 인생은 결국은 자신과 영혼을 파괴하게 됩니다.
간디는 세상에는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것 7가지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일하지 않고 얻은 재산, 양심이 결여된 쾌락, 성품이 결여된 지식,
도덕이 결여된 사업,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원칙이 없는 정치,
그리고 희생이 없는 종교입니다.
마지막 지적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아프게 찌릅니다.
적극적인 교회 활동은 큰 희생이 없이 가능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따르려면 희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 외의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국 내용 없는 형식적 신앙인,
열매 없는 공허한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항상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생활이 가능합니다.
옛날 어느 수도원장이 한 제자를 편애하였습니다.
그는 못 생기고 머리도 별로 좋지 않은데 편애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불만이 대단하였습니다.
어느 날 원장님은 제자들을 불러 서 새 한 마리씩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새를 죽인 후 가지고 다시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곧 죽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편애를 받는 제자는 새를 죽이지 못 하고 도로 가져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비웃었습니다.
원장님이 왜 죽이지 못 하였냐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을 찾아 다녔는데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사람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매우 적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진정으로 사모하는 자가 참된 신앙인입니다.
중세의 조지 허버트란 목사는 ‘연금술’이란 제목의 기도문을 썼습니다.
“나를 가르치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시여, 만물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하여 하듯 하게 하옵소서.”
중세 기술자들은 보통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 기술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허버트는 ‘주님을 위하여 하듯’ 일하겠다는 기도야말로 연금술이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주님 앞에서 살고자하는 기도는
평범한 일을 기쁨으로 바꾸며
일상적인 인생을 하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축제로 바꿉니다.
어둠과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적 침체를 경계하십시오
문자조차 없는 오지의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의 선교사들은 부족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움과 동시에 성경 번역 사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통역 없이 그들의 말을 배우는 훈련,
문자를 만들어 성경을 번역하는 훈련, 부족인들을 위한 의료기술 등
오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각종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이 부딪치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선교사 자신의 영적 침체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교단체의 선교사들은 치열한 영적 전쟁의
싸움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철저한 영적 훈련을 받습니다.
영적 침체는 선교사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게 찾아옵니다.
영적 침체 현상은 암과 유사합니다.
모든 사람의 몸 속에는 암 세포가 있습니다.
암이 발병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면역력이 약해지면 암 세포가 증식하기
시작하고 5 - 6년이 지난 후에 감지할 수 있는 크기로 됩니다.
암은 머리의 명령과 통제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자라서 주위의
모든 세포를 잠식하고 몸 전체를 죽이고서야 자신도 소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영적 침체의 원인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와
죄들이 영적 침체를 일으키게 합니다.
영적 침체는 거창한 죄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죄들이 서서히 하나님과 관계를 아주 멀어지게 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면 예배에 열정을 상실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줄거나 사라집니다.
영적 침체가 깊어지면 다른 영혼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기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영혼은 불안하며 고통 속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 생활의 기쁨을 상실하고 영적 상태가 낮아지게 됩니다.
청교도들은 영적 침체 상태를 4 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의 감격을 느끼지 못 한다.
둘째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능력을 사용하지 못 한다.
셋째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지 못 한다
넷째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
영적 침체는 일단 발생하면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앙 생활의 여정에는 언제나 영적 침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미리 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언급한 선교 단체의 선교사 훈련을 통해
영적 침체를 막는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선교 훈련을 4년 동안 3단계 과정으로 받습니다.
먼저 성경학교 과정을 2년에 걸쳐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합니다.
첫 학기에는 빌립보서 전체를 암송하는 과정도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 학교 과정을 통하여 치열한 영적 싸움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성령의 검을 준비합니다.
다음 1년 동안 문화 적응 훈련을 받습니다.
실제적인 오지 생활 적응 훈련입니다.
타문화의 적응과 이해를 위해 강의와
실제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생활하는 훈련을 통해서
타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 번역 학교의 과정을 통해서
성경 번역과 교회 개척에 구체적인 기능을 익히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들은 문자가 없는 종족을 위한 효율적인 문자 교육법 등도 배우고
선교 사역지에서 평생 함께 할 팀과 공동 사역 훈련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영적 침체를 막기 위해 철저한
말씀 훈련, 생활 훈련, 전문 훈련을 받습니다.
영적 침체가 일어나는 이유는 영적 이유만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 하거나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실력을 갖기 못할 때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도 영적 침체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면
말씀과 기도의 깊은 훈련과
동시에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실력을 함께 배양하여야 합니다.
즉 통전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준비할 때 치열한 영적
전쟁에 승리함을 기억하며 철저히 준비하여야 합니다.
영적 침체를 극복하십시오
할리우드의 노 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지난 1995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으로 인해 언어 능력을 잃고
몸도 가눌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적 처지에 빠진 자신을 비관하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총 자살을 시도했지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거의 시체처럼 잠 만 잤다고 합니다.
그러나 뇌졸중을 극복해 가면서 그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에게 중풍병은 행운을 무더기로 몰고 온 불행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변화된 것은 그의 애완견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의사 소통을 하던 개가 문을 열어 달라며 낑낑대는 것을 보고
불현듯 “모든 생명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들였고 오럴 에어로빅 훈련을 거쳐 말을 다시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스카 수상식 때 멋진 연설을 했으며
영화 다이아몬드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경험을 담은 책 “시련은 곧 희망입니다”가 국내에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책에서 병과 싸워 이기는 실행 매뉴얼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늘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음을 기억하라.
둘째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셋째 유머 감각을 잃지 말고 자신을 향해 웃어 주어라
넷째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좌절을 털어 버려라.
그는 정신적 깨달음으로 중풍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영적 침체의 시간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영적 침체는 경건한 수도사들에게도 찾아옵니다.
그들은 영적 침체를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겨울’ 등으로 표현합니다.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영적 개방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영적 폐쇄성입니다.
곧 자기 세계 속에 갇힘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침체를 극복하려면
하나님과 이웃과 세상으로 영혼의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서
고참 사단이 조카 사단에게 가르쳐 준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그 중의 일부분입니다.
“환자(그리스도인)의 관심을 내면 생활에 집중시켜라.
그의 회심이 자기 내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심리 상태에 관심이 쏠려 있다.
이런 현상을 부추기도록 하라.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등한시한 채
가장 어렵고 영적인 의무에만 마음 쓰게 하라.
다른 사람은 훤히 다 알고 있는 결점인데도
정작 본인은 한 시간이나 자기 성찰을
하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수준까지 끌어내려야 한다.”
루이스는 영적 침체는 자기 집착 또는 자아 몰입현상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 하고
영적 폐쇄 상태에 빠진 것이 영적 침체입니다.
현대인들이 병적으로 “자기”에게 애착하는 자아 열중이
바로 영적 침체의 원인입니다.
이런 영적 침체를 극복하려면 자기에게서
관심의 방향을 외부로 돌려야 합니다.
곧 하나님, 이웃, 세상을 향해 방향을 돌리면 생명의 빛이 비추게 됩니다.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향상하고,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섬김의 생활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침체를 극복하려면 병적 자아 추구를 중단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추구할 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딘 셔만은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6가지 원리를
“TRIALS”이란 단어로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불평하기 보다 감사하라(Thank).
둘째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억하라(Remember).
셋째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Implore).
넷째 하나님의 인도를 인정하라(Accept).
다섯째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라(Leave).
여섯째 예수의 성품을 추구하라(Seek).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을 회복하면
영적 침체는 절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영적 동기를 점검하십시오
생명을 돌보는 의사는 고귀하며 신성한 직업입니다.
그러나 매일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다 보면
기대와 감격으로 시작한 일이 지루한 반복이 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럴 때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묵상하며 의료 행위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의사들은 그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치며 양심과 위엄으로 의술을 베풀고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며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다고 엄숙히 서약합니다.
이러한 의사의 순수한 동기를 망각하면 고귀한 일의 보람과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행동의 배후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동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동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행동을 판단하려면 먼저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악한 동기로 나타나는 행동은 결코 선할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악한 동기로 행해지는 행위들은 결국 악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동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평범한 지방 사람들이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매력을 느끼고 따르려 했던 탁월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바르지 못 할 때 결국은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병들고 연약한 자들은 병이 떠나고 강건해졌습니다.
슬픔과 아픔을 가진 자들은 위로 받고 치유되었습니다.
절망과 문제 속에 있던 자들은 소망을 얻고 해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따랐던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열정적이며 활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동기가 바른지 영혼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마음의 동기를 타락시켰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의 그릇된 동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기를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이기심으로 나타나며 성공을 추구하는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은 사해처럼 받아들이기만 하고 주는 법이 없기 때문에 고이고 썩게 됩니다.
둘째 권세에 대한 무한한 욕망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고 더 큰 권세를 가지려는 탐욕을 가진
사탄의 동기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습니다.
셋째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입니다.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인정을 받으려는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키워 가는 사람의 영혼에는 만족이 결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적 활동의 중심이 자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돈이 동기가 되고 자기 인정이 동기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선교단체의 경우 돈을 위한 단체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명성에 대한 유혹을 받아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들이 세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움직이는 동기와 원동력은 믿음이 아니라 그들이 세운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님 때문에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님이셔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사역의 동기의 원천이어야 합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인구조사를 강행한 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7만 명이 온역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은 다윗의 동기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인구조사의 동기가 자기의 힘과 권세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집중하는 대신 자신과 권력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행위보다는 동기를 보셨기 때문에
무서운 심판으로 그의 실수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한 외국 선교사가 한국 교회를 이렇게 진단하였습니다.
한국 교회의 절반은 변화를 원하나 방법을 모르고, 절반은 깊이 병들었는데,
교회가 변하려면 제도가 아니라 내용이 변해야 하며
깊은 회개와 부흥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순수한 동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가 동기요 목표인 교회와 성도로 거듭나야 합니다.
영적 원칙을 준수하십시오.
유럽에서 시작된 광우병은 세계 육류업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 병의 증상은 소 뇌에 구멍이 생겨
갑자기 미친 듯이 포악해지고 불안해하다 죽습니다.
인간에게 감염되면 뇌가 스펀지처럼 구멍이 나고 죽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광우병은 원래 양에게만 발병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양떼들이 이 병으로 죽자 아까운 나머지 폐기처분하지 않고
사료로 만들어 소에게 먹여 발생하였습니다.
광우병은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 일어난 재난이며
하나님께 창조하신 자연의 원칙을 어김으로 일어난 병입니다.
원칙은 변할 수 없는 삶과 사물의 법칙입니다.
이 원칙은 누구도 어길 수 없습니다.
원칙을 어기면 바른 삶을 살 수 없으며 결국 파멸하게 됩니다.
원칙을 어기면서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원칙을 거부하고 변경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원칙을 그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영적 원칙을 무시한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중에서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었으며
그의 키는 모든 백성보다 컸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권력과 매력적인 외모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연설하였을 때 단번에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만큼
감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보다 탁월했으며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 국가와 자기 경영의 영적 원칙을 내버렸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희생 제사를 직접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일은 왕의 직무가 아니라 제사장의 직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영적 원칙을 어겼습니다.
원칙을 어긴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인정과 도우심을 잃어버린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한 나머지
다윗을 쫓아다니는 불행한 왕이 되었습니다.
영적 원칙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려면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 된 모습을 겸손히 고백하여야 합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영광을 보이시며 은혜를 주십니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의 삶에는 항상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영적 원칙을 어기면 탐욕이 들어오며
이런 은혜들은 보이지 않고 불평과 욕심으로 일그러진 인생을 살게 됩니다.
최근에 모리스 버만이란 사람이 미국 문화의 몰락이란 화제의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로마 제국이 멸망하듯 미국 문화도 멸망을 길을 걷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저자는 오늘의 미국 문화는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진정한 삶의 본질을 잃고 상업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방종과 자아도취증으로 중심을 잃고 자멸하고 있으며
저속하고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것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로마가 멸망기에 접어들었을 때 수도원을 중심으로 문화가 보존되고
후대에 전해졌던 것처럼 신 수도사적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참된 인간과 사회를 회복하기 위한 원칙과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운동이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영적 원칙을 확고하게 지킬 때
이 원칙이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가난해지심으로 사람을 부요하게 하셨고,
낮아지심으로 사람들을 높여주셨고 죽으심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신앙인의 영적 원칙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신앙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궁핍하든지, 풍부하든지
언제든지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미 주님께서 주신 구원을 기뻐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것을 유일하며
완전한 원칙과 행복으로 아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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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