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급락, 현재 어떤 상태인가?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건 역시 국제유가 3종 세트(WTI, 브렌트유, 두바이유)의 현재 상황이다. 보나마나 모두 줄폭락하고 있다.
WTI, 두바이유, 브렌트유 현물가격 추이(모두 주봉, 단위: 배럴당 달러)
이것은 현물 가격이라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선물시장의 낙폭은 이것보다 훨씬 심했다. 특히 지난주 금요일 장중에 보인 움직임은 쇼크, 그 자체였다. 10%에 가까운 대폭락을 기록했던 것. 올해 마지막으로 열린 OPEC(석유수출국 기구) 회의에서 회원국들이 원유 생산량을 줄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엄청난 투매를 촉발시켰다. 시장의 반응이 이토록 난폭(?)했다는 것은 국제유가 하락에 마땅한 대응을 하지 않는 OPEC에 대해 투자자들이 단단히 실망감을 표출한 것으로 해석된다.(만약 코스피가 하루만에 10% 폭락했다고 상상해보라. 조금 실감이 날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주 금요일 선물시장 반응은 이랬답니다. WTI 선물차트(녹색원 주목!)
이번 폭락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아래 그래프에 잘 드러난다.
지난주 금요일까지 최근 4일간 국제유가 선물 등락율 추이(27일은 미국 휴장관계로 뺐음)
사실 국제유가가 이렇게 폭락한다고 해서 일반 투자자들이 손해보는 건 없다. 이들은 오히려 두손 들어 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동네 주유소 기름 가격이 낮아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반 투자자들이 이번 폭락으로 가장 많이 피해보는 분야는 어디인가? 당연히 석유관련 업종, 회사에 투자했을 경우다. 현재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한 주가 손실은 국적, 기업규모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BP, 로얄더치셀, 엑손모바일은 물론이고 그보다 규모가 작은 기업들의 주가까지 초토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4년 이후 글로벌 메이저 석유업체 주가 추이(단위: 달러)
이들의 주가가 최근 얼마나 많이 떨어졌는지 보여드리기 위해 역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그래프를 그려봤다.
지난주 금요일까지 최근 4일간 글로벌 메이저 석유업체 주가 등락율 추이(27일은 미국 휴장관계로 뺐음)
세상에...국제유가가 폭락했다고는 하지만 하루만에 주가가 30%나 빠진 기업도 있다. 그렇다면 위에 나온 회사들은 각각 어떤 사업을 영위하는가? 이에 대한 설명없이 무작정 주가부터 보여드린 이유가 있다. 바로 주가가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
우리가 매일 접하는 가격이란 요소는 펀더멘털에 심리적 요소가 더해져 나오는 결과물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릇 가격이라 함은 경제 내지는 기업 펀더멘털의 결과가 될 뿐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특정 경제 현상이나 기업 펀더멘탈에 변화가 있을 때 주가가 움직이는 법이지, 주가가 먼저 움직여서 경제 펀더멘털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부의 효과같은 경우는 예외적 특성이다.) 한마디로 주가는 종속변수일 뿐 독립변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과는 반대로 주가에 독립 변수적 특성을 부여해 경제 및 기업을 역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바로 지금 필자가 사용하려는 방법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시 그래프를 보자. 위에 나온 기업들은 모두 국제유가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특성을 띈다. 하지만 각기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기업은 역시 BP나 엑손모바일 같은 글로벌 석유업계에서 공룡으로 통하는 민간기업들이다. 프랑스 토탈도 석유화학 업체이긴 하지만 이들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그 다음은? 바로 국영 석유회사들이다. 대표적인게 스탯오일이다. 이 회사는 노르웨이 국영 석유회사로 과거 국제유가가 조정을 받을 때마다 민간 석유회사들에 비해 그 충격을 적게 받곤 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 이번 폭락의 유탄을 더 크게 맞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이 남았는데 그래프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휘팅(화이틴이라고 표기)과 코디악이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방금 전 필자가 말한 내용, 즉 주가를 종속변수가 아닌 독립변수로 치환시켜 경제현상 해석에 활용해보기로 하자. OPEC 발표가 난 이후 가장 많이 폭락한 주식이 무엇인가? 바로 미국 셰일오일 회사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논리를 세울 수 있다.
1단계: OPEC이 지난주 감산결정을 내리지 않고 현 생산쿼터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함에 따라 국제유가 시장은 폭락했다.
2단계: 이 여파로 글로벌 석유업체들의 주가가 모조리 폭락했다. 그 중에서도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의 폭락이 유독 심했다.
3단계: 그렇다면 미국 셰일오일 회사들이 이번 OPEC 결정의 최대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주가에 가중치를 둬서 경제현상이나 기업의 속살을 파악하는 방법은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이론과 배치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학창시절 공부할 시간이 없을 때 요긴하게 사용한 방법이 있었다는 걸 잘 안다. 그건 바로 문제를 직접 풀지 않고 문제집 맨 뒤에 있는 해답과 해설을 먼저 본 다음 문제로 돌아와 해답에 맞게끔 풀이 과정을 정립하는 이른바 '통밥'의 지혜였다. 이 방법은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엄청나게 절감시켜주었는데 무엇보다 객관식 문항에 특화된 국내 교육환경에 최적화된 방법이었다. 재미있는 건 학창시절 우리가 공부를 잘한다며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우등생들 중 이 방법의 달인이 의외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지금 국제유가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의 주가폭락에는 엄청나게 많은 원인이 있다.(여기선 거론하진 않겠지만 이들 회사의 자금조달 방식과 헤지펀드들의 투자현황, 그리고 회사채 시장 움직임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들 회사의 주가가 유독 지난 주말을 전후해 폭락했다는 건 OPEC의 생산쿼터 유지 발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OPEC 발표와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OPEC의 깜작 발표! 그 내용은?
OPEC의 발표는 미국시간으로 추수감사절 휴일이었던 목요일에 나왔다. 12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OPEC은 원유 생산량을 줄이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말 그대로 '전격 발표'였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날 OPEC이 감산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개월째 이어져온 국제유가 하락의 원흉으로 꼽히던 게 '과잉공급'이었기 때문이다. 즉 공급의 키를 쥐고 있던 OPEC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공급량을 줄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반전이 난무하는 막장 드라마 최종회를 연출하려는 듯 시장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아무튼 시장이 이번 회의를 앞두고 예상했던 바는 이랬다.
-국제유가 급락이 산유국의 재정수입을 악화시키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응책이 활발히 논의될 것이다.
-가격 후려치기 전략을 구사해 미국 셰일오일 업계를 곤란하게 만들더라도 우선은 공급과잉을 해소하는 게 맞다.
-전세계 석유 공급과잉에 따른 고통분담 차원에서 OPEC은 회원국들의 협조를 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제유가는 큰 폭의 반등을 보일 것이며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로 하여금 생산량을 더더욱 늘리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다.
-OPEC 회원국들 중 이라크, 이란, 리비아는 감산 조치에 반대를 표하고 있지만 대다수 회원국들은 소폭 감산에 동의할 것이다.
-결국 OPEC은 큰 폭까지는 아니더라도 소폭의 감산 조치를 발표할 것이다.
그렇다면 OPEC 회원국들이 이번 회의(생뚱맞게도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됐다.)에서 합의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이 직접 발표한 성명서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해봤다.
-2015년에는 전세계 원유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비 OPEC 국가들의 원유 생산량 증대(140만 배럴/일)에 의해 금방 상쇄될 것 보인다. 현재 주요 선진국들의 원유 재고가 늘어나고 있고 심지어 이들의 원유 비축일수는 최근 5년 평균치를 크게 웃돌고 있는 상황이므로 국제석유 시장의 공급과잉 상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개월간 국제유가가 급락한 것에 대해 우리 회원국들은 우려를 표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안정화된 국제유가가 전세계 경제 성장의 필수 요소라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적'이라는 단어는 글로벌 경제 성장동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원유 생산국들로 하여금 준수한 수익과 미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를 보장해주는 가격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시장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지난 2011년 12월에 합의된 1일 생산량, 즉 3천만 배럴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이번 회의를 단 2줄로 요약한다면?
-지금까지 국제유가를 폭락시킨 공급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 OPEC은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로 했다. 즉 2011년 12월 이후로 유지되어온 1일 원유 생산량, 3천만 배럴을 그대로 유지한다.
-다음 회의는 내년 6월에 개최한다.
첫번째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두번째에 주목하길 권하고 싶다. 이 말은 추후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다음 회의가 열리는 2015년 6월까지 약 7개월간 현 생산량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빨리 생산량을 줄여 공급과잉을 해소해도 될까 말까 한 판국에 오히려 한발 더 물러나 느긋하게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결정을 누가 정상적이라고 보겠는가?
어쨌든 이런 발표가 나온 직후 WTI는 2010년 여름 이후 최초로 70달러 벽을 깨고 추락했으며 브렌트유와 더불어 6% 넘게 폭락하고 말았다. 추수감사절 하루 뒤인 금요일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미국시장이 단축 매매로 오후 1시에 마감되자마자 WTI는 66달러선까지 하락해 2010년 5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말았다. 퍼센트로 환산할 경우 10%를 초과하는 말 그대로 폭락, 그 자체였다.
*OPEC의 노림수는?
그렇다면 OPEC이 국제유가가 떨어지는 걸 그대로 방관하겠다는 이유는 뭘까?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OPEC을 주도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회사로 치면 대주주나 마찬가지다.)와 관련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 셰일오일 업계를 궤멸시킴과 동시에 미국내 자국산 석유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원유 감산조치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정조준하고 있는 미국 셰일오일 업계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진다. 미국과 캐나다 내 셰일오일을 대규모로 추출할 수 있는 지역은 3~4군데 정도 된다. 셰일오일을 전문적으로 추출, 생산해내는 회사들도 이미 수십개나 있다.(관련업체를 더하면 이보다 훨씬 늘어난다.) 하지만 이들 회사의 경쟁력, 즉 셰일오일을 추출할 때 들어가는 생산원가는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 중 고비용 구조를 지닌 회사들의 경우 수지타산이 안맞아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들이 감내할 수 있는 국제유가 마지노선은 각기 다르다. 어떤 곳은 100달러만 되도 수지가 안 맞는 반면, 어떤 곳은 80달러까지 국제유가가 하락해도 충분히 수익을 남겨 먹을 수 있다. 이것은 회사 규모와 셰일오일을 추출할 때 사용하는 공법, 재무구조, 착공시점, 환율 등 복잡한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OPEC 회원국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라이벌로 급부상한 이들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을 자의든 타의든 제거할 수 밖에 없고 그 수단으로 자신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물론 과거에 비해선 현저히 약해졌지만) 국제유가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아래 그래프를 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런 비정상 회담, 아니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까닭을 잘 알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너 죽고 나 죽자'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 원유 수출지역 비중 그래프
(출처: OPEC)
그래프 맨 왼쪽 2004년도를 보자. 당시 사우디의 원유 수출 비중은 아시아 지역에는 대략 40%, 북남미 지역에는 32%, 유럽지역에는 23%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어떤지 보자. 한눈에 보기에도 아시아로 수출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반면 북남미와 유럽지역의 수출 비중은 크게 줄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상품도 아닌 석유를 수출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한 지역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도 커지기 마련이다. 무릇 주식투자가 그렇듯 한 국가의 수출에 있어서도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하는 게 안전하다는 뜻.
그렇다면 사우디아라비아를 초조하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였을까? 다름 아닌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이었다. 이들은 2008년 금융위기 직후 본격적인 셰일오일 개발에 착수, 현재는 미국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버금가는 세계 제 2위의 원유 생산국으로 만들었다.(이 대목에서 깜짝 놀란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잠깐? 미국이 세계 제 2위의 원유 생산국이라고? 분명 맞는 사실이다.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는 쿠웨이트나 이란, 이라크가 2위일 거 같지만 2009년 이후로 이런 추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그 바탕에는 역시 미국 셰일오일 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놀라운 원유 생산속도(단위: 천배럴/일)
위 그래프를 해석하면...
1. 최근 몇년간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폭증했다.(빨간 부분)
2. 지금까지도 폭증했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내년에는 생산량이 현재보다 100만 배럴 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하루 기준) 장기적으로 봤을 경우 2020년대까지는 최소 60만 배럴 정도가 더 생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3. 결국 국제석유 시장의 공급과잉 상태는 점점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석유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고 있는 OPEC 회원국들이 미국의 이러한 생산량 폭증을 모를리 없다. 그렇다면 과거와 똑같은 방법-생산량을 줄여 국제유가 하락을 방지한다-을 사용하는 대신 간접적이고 더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그게 바로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OPEC이 사용하고 있는 일명 '너 죽고 나 죽자' 방법이다. 이는 국제유가를 최대한 낮춰 미국 셰일오일 업계를 고사시킨 후 가격 주도권을 회복해 권토중래를 노리겠다는 술수다. 조금 더 유식한 표현을 쓰자면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 셰일오일 업계에 '치킨게임'을 선포한 상황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OPEC의 노림수는 제대로 통할 것인가? 수급적 측면에서 따져보면 그리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현재 미국내 원유생산량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고 심지어 이 증가폭이 최근 몇년간 OPEC 회원국들이 감산한 양을 훨씬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2008년 이후 OPEC이 국제유가의 지나친 하락을 막기 위해 수차례 감산을 결의했지만 이들이 줄인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석유가 미국에서 생산돼 OPEC 회원국들을 뻘줌하게 만들었다는 얘기. 물론 OPEC의 감산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60~90년대 OPEC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에 비해 생산량 감소 효과가 훨씬 줄어든 것만은 분명하다.
OPEC이 주도권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사우디를 추월해버린 미국내 원유 생산량(1일 기준, 단위: 천배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꽃도 열흘이면 시들고 권력도 길어야 10년을 넘기지 못하는 법이다. 이는 검은 황금이라 불리는 국제 석유시장 패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현재 OPEC의 파워는 과거만 못하다. 국제유가가 하락한다고 해서 OPEC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 국제유가 시장을 움직이는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 국제유가가 자신들의 수입에 큰 타격을 준다고 판단되면 회원국들은 가차없이 생산량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현재: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었기에 자신들이 공급을 줄여봤자 효과를 보기는 커녕 역효과를 볼 확률만 높아졌다.
사회나 정치구조 상에서 쓰이는 '패러다임 쉬프트' 현상이 국제석유 시장에도 일어난 셈이다. 이렇게 시장을 지배하는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었는데 사용하는 방법이 수십년 전과 똑같다면 백날 노력해봐야 허사일 뿐이다.
OPEC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런 냉엄한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나름 최선의 필살기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현 시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노리는 바를 요약해보겠다.
-미국 셰일오일 붐으로 자신들의 가격결정권 파워가 현저히 약해졌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했음.
-가격을 낮춤으로써 자신들의 수익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을 비롯한 세계 석유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는 방법을 선택함.
-게임이론에 비춰 보자면 현재 을의 입장에 서있는 사우디 및 OPEC 회원국들은 가격을 더 낮추는 전략을 선택하는 게 당연함.
과거에는 갑 노릇을 하던 OPEC이 이제는 을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인생사나 국가간 관계나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감상적인가?
*국제유가 하락, 어떤 파급효과가 있나?
이제 슬슬 글을 마무리할 때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국제유가가 하락한다면, 또 현 레벨에 오랫동안 머무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유소 기름 가격이 내려간다거나 해외여행 시 지불하는 유류할증료가 낮아진다는 1차원적 답변은 삼가하도록 하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국가들의 소비자들이 '세금 감면' 효과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얘기가 약간 달라지는데 미국의 소비지출 및 경제성장율이 둔화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미국의 에너지 업계가 애시당초 계획했던 고정설비 투자를 취소하거나 미루게 됨으로써 미국 경제에 악양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특히 미국 주식시장 및 경제회복에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미국 대기업들, 특히 에너지 기업들의 고정설비 투자 비율(GDP대비)은 여전히 낮은 국면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들이 언제 지출 승인 버튼을 누르느냐에 따라 주식시장은 물론 경제 성장율의 궤적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더구나 미국 고정설비 사용연한이 현재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이들의 투자시기와 액수에 미국의 경제성장율이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소비자들의 지갑 두께가 두꺼워져 소비가 늘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소매업과 오락산업이 수혜를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주: 어디까지나 미국 기준이다.)
이렇게 좋은 측면이 있으면 나쁜 측면이 존재하는 법. 이번에는 나쁜 측면을 살펴보겠다.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석유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국가들의 정정이 불안해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사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건 몇년 후 국제유가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폭등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물론 이게 몇년 후가 될지 몇달 후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국제유가가 계속 하락하게 되면 전세계적으로 석유 관련 투자욕구가 줄어들게 된다.
2. 그렇다고 석유에 대한 수요가 급등하는 상황도 아니어서 석유 생산 시설의 노후화는 당분간 계속된다.
3. 공급이 어느 시점에 가서 줄어들게 된다. 저유가로 미국의 원유생산도 예전만큼 못하게 된다.
4. 특히 다른 상품과 달리 석유의 공급 증가율은 한번 추세가 꺾이면 다시 회복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특성을 띈다. 석유 생산량 증가폭이 점점 떨어지게 되면 이를 회복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뜻.
5. OPEC이 향후 감산을 결정한다면 공급은 더더욱 줄 수 밖에 없다.
6. 석유를 구입할 때 보조금으로 국민들의 주머니 부담을 줄여주는 국가들(대표적인 게 나이지리아, 베네수엘라다.) 이를 유지할 여력이 없어지게 된다. 이미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수출액 감소,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적자 덕분에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정부가 보조해주는 돈마저 줄어든다면 민심이반, 정정불안으로 이어져 이들이 퍼올리는 원유 생산량은 줄어들게 된다.
8. 결국 국제유가는 폭발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공급이 줄어드는 이유를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1. OPEC의 가격 결정권이 점차 축소되고 있으므로 국제유가의 변동성은 자연스레 커질 수 밖에 없다.(원래 시장의 주도세력이 교체될 시에는 극심한 변동성이 수반된다. 이는 국내 코스피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주도 장세에서 기관 장세로 넘어갈 때 시장의 변동성은 커지기 마련이다.)
2. 이렇게 국제유가의 변동성이 커지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세력(OPEC)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아는 글로벌 석유 업체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결국 관련 투자를 취소하거나 삭감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계속 이어지면 석유 생산에 들어가는 투자가 더욱 위험해지고 비싸지게 된다.
3. 결국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사우디 및 OPEC 국가들보다 높은 생산비용 구조를 가지고 있는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이 될 것이다.
4. 전체 석유시장에서의 공급이 줄어들 게 된다.
5. 국제유가는 폭발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참고로 이번 유가폭락과 관련해 베네수엘라라는 나라에 대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겠다. 베네수엘라는 수출액 중 무려 94%를 석유로 채우고 있는 비정상(?) 국가다. 현재 물가상승률이 60%에 육박하며 수출은 4년래 최저치를, 외환보유고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외국 투자자들은 베네수엘라 국채를 투매한지 오래다. 이런 이유로 이번 OPEC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원유 생산량 감산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국가가 바로 베네수엘라였다.
그렇다면 베네수엘라의 국채시장 혼란을 막고 정상적인 재정운영을 가능하게끔 만드는 국제유가 최저치는 얼마일까? 배럴당 84~86달러다. 한마디로 지금의 국제유가 레벨로는 정상적인 국가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현재 국제유가는 70달러 이하다.) 베네수엘라에선 화장실용 휴지와 같은 생필품이 부족한 지경이라 국민들이 국영 슈퍼마켓 앞에서 장시간 줄을 서야 겨우 한통 살 수 있다고 한다.
베네수엘라의 두 얼굴
(좌: 휴지를 비롯해 생필품이 동나버린 슈퍼마켓 진열대 / 우: 베네수엘라 미녀들)
아무튼 국제유가 하락은 이처럼 각양각색의 파급효과를 내고 있다.
*최종결론과 전망
-국제유가는 당분간 답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단 지금이 역대 바닥권 레벨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얼마 전그래프 분석을 통해 살펴본 바 있다.
-OPEC 혼자서 국제유가 급락에 대응하는 건 한계가 있다. 조만간 러시아, 노르웨이, 멕시코와 같이 OPEC 회원국은 아니지만 국제유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가들과의 협력체계 구축이 주요 아젠다로 떠오를 것이다.
-현재 OPEC은 갑이 아닌 을의 입장이다. 국제 석유시장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인정하고 비 OPEC회원국들은 물론 미국 셰일업체들에게 철저히 을의 입장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관심을 끄는 건 비 OPEC 국가들과의 협조는 커녕 OPEC 내부에서도 여러 불협화음이 나오고 있다는 것. 사우디아라이바의 눈치를 봐야 하는 힘없는 산유국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국제유가가 추세적 상승으로 돌아서기엔 지금 메이저 플레이어들이 시장을 짓누르고 있는 게 어마어마하다.쇼킹한 소식, 예컨대 일부 국가가 OPEC을 탈퇴한다던지 사우디가 갑자기 긴급 회의를 소집해 감산을 결의한다던지 식의 뉴스가 나오니 않는 한 국제유가는 하향 안정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단 앞서 살펴본 것처럼 폭등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리는 국제유가가 낮아져 돈 아낀다고 좋아하고 있지만 지구 반대편에선 이로 인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있기 마련이다.
*보너스
지금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해외업체가 아닌 국내 석유업체 주가다. 그렇다면 현재 관련 종목들의 주가추이는 어떨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지난주 금요일 종가까지 반영한 그래프다. 하지만 현재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한 치의 부족함도 없다고 생각한다. 눈여겨 봐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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