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 ― 뒷 이야기 주유성은 다시 무림맹을 향해 움직였다. 과거에는 언제나 무림맹만 가면 귀찮은 일이 산처럼 밀어닥쳤다. 그래서 돌아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혈마라 천마까지 다 때려 부쉈는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별일이 있다고 해도 안 갈수는 없다. 무림은 지금 큰일을 치른 상태다. 하지만 잔당이 워낙 많아 마무리가 되지 않았 다. 그 일의 해결을 위해서 그에게 기대는 사람이 모래사장의 모래알만큼 많았다. "어떻게든 뒷정리는 해야지." 주유성의 일행은 초고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북해빙궁주와 남만독곡주, 그리고 청허자와 취걸개가 직접 동행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주유 성을 제외하고도 현 무림에서 검성을 제외하면 상대할 자가 없는 전력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인 것처럼 위장되어 있었다. 미끼였다. 아가씨들은 데려올 수 없었다. 여자들을 잔뜩 대동하고 다 니면 남들 보기에 안 좋다는 것이 주유성이 내놓은 핑계였다. 사실은 그녀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다. 마침내 주유성 일행은 무림맹이 있는 하남에 들어섰다. 한참을 가다가 주유성이 배를 쓰다듬었다. "배 안 고파요? 밥 먹고 가죠?" 거지 취걸개가 즉시 동의했다. "그거 좋지. 자고로 먹는 게 남는 거라고 했거든." 청허자는 무당의 거친 음식을 싫어한다. 바깥으로 나온 후 에는 기회만 되면 좋은 것을 챙겨 먹는다. "허허. 나야 좋지." 좋은 대접받고 귀하게 살아온 북해빙궁주나 남만독곡주는 말할 것도 없다. "기왕이면 해산물이 좋은데..." "음식에서 좀 독한 맛을 봤으면..." 마차를 몰던 독원동이 채찍질을 했다. "이랴! 서두르겠습니다!" 그들은 곧 큼지막한 객잔을 만났다. 마차에서 내리던 청허 자가 멈칫했다. "객잔 십자생? 허, 이 객잔이 이렇게까지 커졌을 줄이야." 주유성이 옛날에 들렀던 시절에도 이 객잔은 별로 작지 않 았다. 그러나 십장생을 벽에 단 이후로 장사가 잘돼서 객잔은 꽤 크게 확장을 했다. 확장하고도 손님이 넘치니 가게 주인은 입가에 웃음을 달고 살았다. 그들이 어슬렁거리면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마자 객잔의 벽 하나를 채우고 있는 십장생도가 눈에 들어왔 다. 주유성이 과거에 은자 한 냥의 음식값을 채우기 위해서 새겨준 것이다. 귀한 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북해빙궁주가 감탄을 했다. "허어. 좋은 그림이군. 풍기는 느낌이 괜찮아. 그리고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쾌검으로 한순간에 새긴 작품이군. 무림 인의 그림 솜씨가 제법인데?" 옆에서 취걸개가 웃었다. "하하하. 괜찮지 않소? 그래서 늙은 도사는 저걸 반로환동 의 고수가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지. 꽤 오래 그렇게 믿었어." 청허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 그림을 회수하려고 애썼는데, 객잔 주인이 배를 째면서 안 판다고 고집을 부려서 결국 실패했지요." 북해빙궁주가 코웃음을 쳤다. "반로환동? 흥. 저거 만드는데 무슨 반로환동씩이나. 그저 쾌검이나 좀 익힌 정신 나간 화가였겠지. 청허자께서는 꽤나 경솔한 면이 있나 보구려." 남만독곡주는 한술 더 떴다. "흥. 저 정도는 우리 독곡에 가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새 길 수 있지." 청허자가 발끈했다. "저걸 새긴 사람이 바로 여기 있는 주 대협이란 말이오. 젊 은 남자가 저런 깊이있는 것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착각하지 않겠소?" 그가 주유성을 팔아먹자 북해빙궁주의 말이 즉시 바뀌었다. "오, 다시 본 그림 한 획 한 획에 현기가 느껴지는군. 인 세에 다시없을 명품이로다. 이런 객잔에 있는 것이 아까울 지 경이야." 옆에서 남만독곡주도 거들었다. "역시 왕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군요. 그림을 보니 검의 경지가 도에 이르렀음을 알겠습니다. 진정 감탄했습니다." 주유성은 낯이 다 뜨거웠다. '그때는 나도 무림 초출이라서 과하게 한 감이 있지. 쳇, 이거 만들어줬다가 청허자 할아버지 눈을 피하느라고 고생한 거 생각하면 치가 떨리네.' 지나치게 많은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바쁘던 점소이가 뒤 늦게 그들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손님들, 어서 오십시오. 이쪽 자리로 오시겠습..." 말을 하던 점소이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이 년 만에 돌아 온 주유성을 알아보았다. "어... 어... 어...." 점소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주유성은 십장 생 그림 쪽을 보고 있었다. 그림 앞에는 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그림 을 보느라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주유성이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얼른 인사를 꾸 벅하며 말했다. "스승님, 오랜만이네요." 주유성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구장춘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 다. 그가 환히 웃었다. "역시 이건 네 녀석 솜씨로구나." "어쩌다 보니까..." 구장춘이 인상을 살짝 썼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그림이라고 남겨두었느냐? 작품이 되지 못하면 찢어버리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주유성이 머리를 긁었다. "그게요. 그때는 하도 급해서..." "마침 잘 만났구나. 내가 드디어 깨달음을 좀 얻었으니 주 가장으로 가자꾸나. 네게 가르칠 것이 있느니라." 구장춘은 주유성과 헤어진 이후 더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 해서 천하를 주유했다. 당소소가 통 크게 한몫 집어주어 돈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 돈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는 특히 지난 이 년간은 산속을 돌아다니며 대자연의 풍경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제 자기 그 림 실력이 주유성보다 월등해졌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주가장 으로 가는 중이었다. 당연히 산속에서 살았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지 못했다. 청허자와 취걸개, 그리고 북해빙궁주와 남만독곡주가 재빨 리 다가왔다. 그들은 대화 내용을 듣고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란 상태였 다. '주 공자의 스승이라고? 이 사람이 주 공자에게 무공을 가 르쳤다는 말이야?' '지금도 유성이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한데. 그런 유성이를 더 가르치겠다고? 세상에. 이 작자, 아니지. 어르신의 무공이 그럼 얼마나 높은 거야?' '무공을 익힌 기색이 조금도 잡히지 않는다. 천마를 만났 을 때도 이렇게 아무것도 못 느낄 정도는 아니었어. 이 사람 은 반선의 경지에이른 고수다.' '역시 당문의 독왕은 왕을 가르칠 수 없었어. 이분이 바로 독성이시다.' 그들이 일제히 포권을 했다. "인사드립니다!" 구장춘이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그림을 경지에 이 르도록 그리며 익힌 자연스러운 기품이 그의 몸에서 자르르 흘렀다. "뉘신지..." 그 기품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속아 넘어갔다. '이 사람. 진품이다.' 주유성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냥 저랑 같은 일을 하는 할아버지들이에요. 요새 제가 부업을 조금 하고 있거든요." 세상을 구한 것이 일순간에 부업으로 격하됐다. 구장춘이 웃었다. "허허, 녀석. 게으름 병은 고쳤나 보구나. 네가 일을 다 하 고. 부업을 한다면 본업도 있겠지?" "놀고먹는 게 제 본업이죠. 잘 아시면서. 이히히히." 구장춘의 앞에서 네 사람은 기가 죽어 말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 하지만 기 품이 보통이 아니다. '대화 내용으로 보면 틀림없이 주 공자의 사부다. 나와 이 런 격차가 있다니.' '하늘 위의 하늘이로다.' '아아, 독성이시여.' 그때, 점소이의 연락을 받은 객잔의 주인이 화급히 다가왔 다. 그는 주유성을 보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은인께서 오셨습니까?" 주유성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눈만 깜빡거렸다. "은인이라니요?" "이 십장생을 만들어주셨잖습니까? 그 이후로 우리 객잔은 손님이 넘쳐흘러서 지금 이렇게까지 커졌습니다. 어찌 은인 이 아니시라고 하겠습니까?" 주유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객잔은 그가 이 년 전 에 왔을 때보다 아주 많이 커져 있었다. "히히. 그러면 오늘 밥값은 좀 깎아주시는 건가요?" "깎아주다니요. 당연히 공짜로 대접해 드려야지요." 주유성은 신이 났다. 이유있는 공짜는 언제나 환영하는 주 유성이다. 그것이 먹을 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우히히히. 그럼 잘 먹을게요." 주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최고로 대접하겠습니다. 그런데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 다." "네?" "그림만 새겨주고 이름을 남기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림의 끝에 이름을 새겨주시면 그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객잔 주인은 이 년 전부터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십장생도 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다. 이제 이걸 그린 사람 이 왔으니 소원을 풀 기회였다. 주유성이 웃었다. '옛날에야 몰래몰래 하느라 그랬지만, 지금은 얼굴이 있는 대로 팔려서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알았어요. 밥이나 한상 거하 게 준비해 줘요." 주유성이 근처의 젓가락 하나를 슥 뽑아서 십장생 그림의 끝으로 걸어갔다. 나무젓가락에서 검기가 일어났다. 그는 그 것을 가볍게 움직여 자신의 이름을 보기 좋게 새겼다. 객잔 주인은 검기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기쁜 얼굴로 써 놓은 이름을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예, 성함이 그러 니까 주유성..." 객잔 주인이 멍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시끌벅적하던 객 잔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젓가락질 하나 함부로 하는 사 람이 없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주유성에게로 향했다. 객잔 주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 혹시 불세출의 대영웅 잠룡 주유성 대협... 이신 건 아 니시지요?" 남만독곡주가 즉시 나섰다. "왜 아니시겠나? 이분이 바로 그분이시지." 구장춘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주유성은 공부 잘하 고 그림 잘 그리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십 년 동안 머릿속에 박아두던 주유성에 대한 인식과 영웅은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자신이 이해할 만한 것에 관심을 보였다. "하하. 녀석. 잠룡? 너다운 별명이구나. 잠이나 퍼 자는 용 이란 뜻이지?" 그가 진짜 잠룡의 뜻을 정확하게 짚었다. 주유성이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그는 이런 상황이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게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남만독곡주가 한 번 더 확인해 주었다. "이번에 천마를 때려잡고 무림맹으로 복귀하시는 중이시지 요." 갑자기 객잔에서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 주유성 대협이시다아!" 그들은 한상 잘 차려 먹고 객잔 십장생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후 객잔의 간판 옆에 금칠이 된 커다란 간판이 추가로 붙었다. '이 집이 바로 그 집.' * * * 무림맹에서 열화와 같은 환영 행사가 벌어졌다. 그 모든 것 이 끝나고 나서 주유성이 맹주를 찾았다. 이런저런 간략한 보고를 하고 나서 주유성이 물었다. 적명자는 어떻게 됐어요?" "그 배신자는 체포해서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청성이 그 를 직접 처벌한다며 넘겨달라고 조르는구나." "제갈고학은요?" "그 배신자 역시 지하 감옥에 있다. 제갈고학을 닦달하니 제갈세가에서 그동안 저지른 죄를 잘도 불더구나. 명색이 정 파라는 자들이 명성을 이용해서 남들의 뒤통수를 참 많이 쳤 더라. 지금 제갈세가는 그 손해배상을 하느라 기둥뿌리가 뽑 힐 지경이지. 물론 지금까지의 죄에 대한 대가로 십 년 봉문 이 확실시 되고 있다." "신녀문은요?" 검성의 얼굴이 나빠졌다. "신녀문이 소수마공을 익히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소수마공요? 그건 또 뭐예요?" 검성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무공을 익힌 자가 그 무서운 소수마공을 모르다니. 하긴, 세상 편하게 사는 네 녀석이라면 모를 법도 하지." "우이씨. 내가 요새 좀 안 편하게 살았거든요?" "허허. 그렇지. 소수마공은 사람을 마인으로 만드는 진짜 마공이다." "천마 것만큼요?" "물론 천마의 천마심공 같은 것에도 심성을 포악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그건 소수마공의 부작용에 비하면 애 들 장난이다. 소수마공은 화후가 높아질수록 마성에 물든다. 신녀문의 문주는 소수마공을 대성해서 확실히 마인으로 변해 있더구나." "에? 겉보기에는 멀쩡했는데요?" "그것이 소수마공의 무서움이지. 단순한 살인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를 차게 만들거든. 남들은 그 속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내면은 철저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단다. 다른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기 밥 한 끼 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면 만족하는 사람이 되지." "쳇. 마공을 안 익혀도 세상에는 그런 사람 많다고요. 그래 서요?" "심문해 보니, 그들은 삼백 년 전에 그 무공을 얻었다고 하 더구나. 그 일에도 검마가 개입했던 것 같기는 하다. 그 후로 신녀문이 변하기 시작했지. 무림의 신비문파에서 정파를 팔 아먹는 정보 상인으로." "검마 그 새끼는 안 끼는 데가 없었네요. 마지막에 독성에 게 당하지만 않았으면 무림 정말로 먹어버렸겠네. 그래 봐야 뭐 하나.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죽어버렸으니 말짱 도루묵이 지. 그나저나 신녀문이 혹해서 배울 정도면 그 무공이 제법 강하겠는데요?" "소수마공은 그 자체로도 무서운 마공이다. 두 손이 투명 해지면 강기 무공에 버금가는 위력이 나온다." "고생하셨겠네요." "허허허, 고생이라니. 이 녀석, 네가 명성 좀 얻었다고 나 를 무시하는 것이냐? 이래 봬도 내가 바로 검성이다, 검성. 소 수마공 정도는 내 상대가 아니지." "헤엥. 어련히 그러시려고." "이 녀석이 믿지를 않네. 한번 붙어볼 테냐?" 주유성이 씩 웃었다. "제가 맹주 할아버지한테 쌓인 게 좀 많은데, 정말 정식으 로 붙어보시게요? 저야 좋죠." 검성이 갑자기 당황하며 헛기침을 했다. "커허험, 녀석.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맹주 체면에 어 떻게 너와 겨루겠냐?" "쳇. 맹주 할아버지 체면은 다 구겨졌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무슨 체면..." "무, 무슨 소리냐? "맹주 할아버지가 사실은 속으로 호박씨 까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던데요? 신녀문이랑 싸울 때 본색 좀 드러냈다면서 요? 사람들도 참. 어떻게 그걸 이제야 아나." 사실 그 소문은 신녀문과의 일이 있은 이후로 쉬쉬하며 흘 렀다. 그걸 듣자마자 즉시 뻥튀기처럼 튀겨 버린 사람이 바로 주유성 본인이다. 당황한 검성의 얼굴에 땀이 흘렀다. 주유성이 그런 검성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날 부려먹은 대가로는 싸잖아요?' 독원동이 주유성에게 매달렸다. "형님, 이제 무림도 다 정리됐는데 제 독공 좀 회복시켜 주 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냐? 내가 니 독공을 어떻게 되살려?" "형님, 형님이 못하시면 세상에 누가 할 수 있다고 그러십 니까? 그냥 좀 회복시켜 주십시오. 저도 옛날에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반성 많이 하고 있습니다." 주유성이 독원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니가 반성을 많이 했어?" 독원동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앞으로 게속 반성할 테니 이제 그만..." "야, 원동아." "예, 형님." "내가 솔직히 말하는데, 나도 니 독공 어떻게 되살리는지 모른다. 알아야 살려주지. 그러니 그냥 포기해라." "혀, 형님." "닥치고 무공이나 익혀. 독공보다는 무공이지." 독원동이 울상을 지었다. "형님, 우리 독곡은 무공보다 독공을 집중적으로 발전시킨 곳입니다. 이제 무공을 익힌들 독을 중시하는 우리 곡에서 저 는 박대만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저보고..." "그럼 다른 데 가서 배워." "형님, 이 나이 먹고 무공을 새로 배우려고 하면 누가 가르 쳐 준다고 그런 말을..." 주유성의 머릿속에 반짝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녀석처럼 말 잘 듣는 놈도 없지?' "원동아, 너 분광검법 배워보고 싶지 않냐?" 독원동의 눈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분광검법!" 분광검법은 주유성이 익힌 검법으로 주가장의 가전무공이 다. 지금 세상에서는 그것이 주유성의 검법이라는 것으로 크 게 유명해져 있다. '어쩌면 분광검법이 천하제일무공일지도 몰라.' "배우고 싶습니다!" 주유성이 독원동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집에 잘 이야기해 줄 테니까 열심해 해봐. 그리고 우 리 어머니가 독 좀 쓰시거든. 어머니한테도 열심히 충성하면 니 독공도 조금은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독원동은 이제 신이 났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유성은 독원동을 두고두고 부려먹을 생각에 그를 끌어 들였다. 그의 아버지 주진한이 진무경을 제자로 삼은 것과 같 은 이유였다. 멋도 모르는 독원동은 천하제일무공을 배운다는 생각에 신 이 났다.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고 웃었다. 동상이몽이었다. 주유성의 아버지인 주진한은 제법 게으른 인간이다. 주유 성에 비하면 엄청나게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진 무경 가르치는 것이 지겨워 죽을 뻔했다. 애초에 진무경을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도 곁에서 심부름 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그런 그가 새로운 제자를 가르치고 싶을 리가 없다. "이봐, 당신. 그냥 독이나 열심히 수련하지?" 주진한의 반응에 독원동이 머리를 땅에 박으며 외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발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주진한은 영 탐탁지 않다. 독원동은 긴장으로 온몸에 땀을 흘렸다. 그 대화에 진무경이 끼어들었다. "사부님, 그냥 제자로 받아주시죠?" 주진한이 툴툴댔다. "무경아, 내가 소문으로 듣기에 독곡에 독원동이라는 망나 니가 하나 있는데, 예전에 사고깨나 쳤다고 하더라?" "그래도 이제 정신 차리고 하겠다잖습니까?" "그래도 네가 있는데 무리해서 제자를 하나 더 받을 이유 가 있겠냐?" 진무경이 얼른 말했다. "무공은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사부님은 그저 가끔 지적이 나 해주십시오."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말에 주진한이 관심을 보였다. '무경이 이 녀석이 요새 머리가 컸다고 사사건건 개기니까 말 잘 듣는 놈으로 하나 더 얻어봐?' "흐음. 그렇다면야..." 독원동이 즉시 땅에 머리를 박았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사형!" 진무경이 독원동을 보고 씩 웃었다. '사부님이 저지른 일 뒤처리하는 건 이제 끝이구나. 흐흐 흐. 귀여운 놈. 넌 이제 고생 시작이다. 지옥을 보여주마.' 게으른 주진한의 부지런한 제자 진무경. 나이 삼십이 넘어 드디어 사제가 생겼다. * * * 천하제일포쾌 진고불이 황제에게 무림대전의 일을 보고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흥이 돋던 황제의 얼굴이 마지막에 가서 굳어졌다. "진 노사, 그러니까 주유성이라는 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가?" "인중룡이 따로 없습니다." "인기도 좋다고?" "모든 정파가 그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심지어 세외 세 곳에서는 아예 그를 신봉하고 있습 니다." 황제가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봐, 진 노사. 그럼 위험하잖아. 세상에 그런 놈이 존재 하는 건 위험하다고. 황제인 나보다도 더한 명성이라니. 그래 서는 곤란하지." "하지만 그는 욕심이 없는 자로서..." "아니야.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 그가 반란이라도 일으 키면 어쩌라는 건가? 진 노사, 그를 제거해야겠어." 황제의 말에 진고불이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불가합니다." 황제가 인상을 썼다.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를 제거할 방법이 없습니다." "응? 왜 방법이 없어? 자객을 보내면 되지." "중원 살수 단체들에게 절대의뢰불가능 대상이 있는데 그 게 바로 주유성입니다. 살수들이 평가하는 위험등급이 폐하 보다 높습니다." "동창에서 키우는 비밀 살수들을 이용하면 되잖아?" "무림의 살수들도 못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동창의 비밀 살수들도 못 합니다. 오히려 정체만 드러날 공산이 큽니다." "그럼 말이야, 금의위의 고수들을 잔뜩 보내서 머릿수로 누르면 어떨까?" "사황성이 무사 삼천을 풀어 천라지망을 쳤는데도 그걸 농 락해 버린 사람입니다. 금의위의 고수들을 보내도 결과는 마 찬가지입니다." "그럼 국경의 주둔군을 좀 불러들여 쓸어버려야겠다. 십만 대군 정도 차출해서 보내면 제까짓 놈이 어떻게 살아나겠어?" 진고불이 무엄하게 황제 앞에서 피식 웃었다. "폐하, 천하와 싸우려고 하십니까?" "뭐?" "천하가 그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순순히 죽 어줄 놈이 아닙니다. 죽기 싫어서라도 천하를 이끌고 폐하와 싸울 자입니다. 그럼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폐하라고 해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인가? 진정 군대를 보내도 안 돼? 십만이 적어서 그래? 그럼 오십만 정도 동원하면 안 돼?" "잠룡을 광룡으로 만들게 됩니다." 황제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과, 광룡?"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진 노사, 이놈 너무 위험한 놈이다. 나 무섭다." 진고불이 웃었다. 황제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웃음이 나오나!" "폐하, 진정하십시오. 그는 자진해서 전쟁을 일으킬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피로 강을 만들어서 권력을 차지하는 그 런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저 가만두시면 됩니다." "그래도 불안해. 불안해." "차라리 그를 한편으로 만드시지요?" "응? 한편?" "공주라도 한분 보내서 결혼을 시키면, 설마 장인인 폐하 를 공격하겠습니까? 오히려 폐하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큰도 움이 될 수 있습니다." "황제 자리 노리고 장인이 아니라 아버지를 죽이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는 절대로 그런 자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를 사위 로 두는 것은 백만대군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진 노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누구를 보내야 할 까?" 진고불이 진심으로 말했다. "힘으로 밀어붙여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자입니다. 먼 저 공주가 가서 그를 꼬셔야 합니다. 그는 미모를 심하게 따 지는 것 같으니 가장 예쁜 공주를 보내십시오. 그래도 성공한 다고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내가 사위로 삼겠다고 황명을 내리면..." "잠든 그를 깨우는 짓입니다." "알았다, 알았어. 현화공주를 보내지." 황제가 주유성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 * 사백은 마교를 장악했다. 천마가 죽고 주력인 일만 무사가 박살났다. 그중에는 마교 의 날고 기는 마인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돌아온 마교는 무주공산이었다. 더구나 마뇌가 이끌던 참모 부의 사람들은 착실하게 마교 장악 작업을 진행해 놓았다. 그 일의 마무리는 천마를 죽인 사백이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백은 천마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에 백마대가 육십 여 명이나 살아남았다. 참모부와 백마대는 합심해서 마교를 장악했다. 껍질만 남 은 마교는 순식간에 사백의 수중에 떨어졌다. 사백은 신임 마교 교주로서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다. 중원은 아직 시끌시끌하지만 이곳은 너무 멀어 당장 위험은 없었다. 백마대의 대장은 일호가 되었다. 그보다 강한 네 명이 주유 성에게 당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일호는 그것으로 만족했 다. 그는 교주 다음가는 권력을 휘둘렀다. 일단 권력을 만지 자 더 큰 욕심이 생겼다. 그가 사백을 살살 꼬드겼다. "교주님, 중원 재침공은 언제쯤으로 계획하고 계신지요?" "응? 중원 재침공?" "교의 전력을 재건하고 나면 중원을 다시 노려야지요. 제 가 알아보니 우리 교는 언제나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서 노력 했다고 합니다." 일호는 지금의 마교가 좁게 느껴졌다. 마교가 중원을 장악 하고 나면 생기는 더 큰 권력을 원했다.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본 그 화려한 세상이 그리웠다. 사백이 부르를 떨었다. "싫어." "예?" "주유성 그놈이 살아 있는 동안은 발도 안 들여놓을 거야. 그놈 너무 무서워." 일호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백마대에 걸린 세뇌는 교주와 마뇌를 향한 것이었다. 사백 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은없었다. '겁쟁이.' 그 기색을 읽은 사백이 말했다. "야. 일, 아니, 백마대장. 너 천마의 무공이 뭔지 알아?" "그거야 당연히 천마도법, 천마장법, 천마심법 아닙니까?" "내가 교주 자리에 올라오고 나서 그 비급들을 확인했거든? 그거 마지막 초식이 검마가 남긴 거랑 위력이 거의 같드라." "예?" "검마가 남겨준 거랑 천마도법의 마지막 초식의 위력이 같 다고. 그리고 천마는 그걸 완전히 다 익혔다고. 그런데도 주 유성에게 박살나서 죽었어. 나는 살고 싶어. 절대로 그놈과 싸우지 않을 거야. 그놈은 인간이 아니야." * * * 사황성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러나 무림 역사에서 정사대전이 그렇게 여러번 벌어졌어 도 사파의 세력이 완전히 멸절된 적은 없다. 사황성 총관은 혈마만 없었어도 성주가 됐을 거라는 평을 받던 인물이다. 그는 무림맹의 파상공세에서 도망치는 데 성 공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사파 세력을 조금씩 모으며 새로운 조 직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가 아직 망하지 않은 사파 하나의 문주와 은밀한 장소에 서 마주 앉았다. 사파 문주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사황성 대신에 사혈련을 만드시겠다?" 총관이 대답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오. 남은 사파가 힘을 합치지 못하면 우리는 전멸하오." "하지만 정파 놈들이 저렇게 서슬이 시퍼렇게 돌아다니는 데 가능하겠소?" "그러니 더욱 서둘러야지요. 힘이 어느 정도 모여야 그들 과 협상을 할 수 있으니까. 이미 여러 문파가 동의했소. 당신 들도 참여하기를 원하오." 문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이보시오. 우리 솔직히 말해봅시다." "솔직히 말하고 있소이다." "힘을 모아 무림맹과 다시 붙어보고 싶으시오?" "뭐요?" "다 알고 있소. 세력을 모아 무림맹과 다시 정사대전을 벌 보고 싶은 것 아니오? 그래서 내 힘이 필요한 것 아니오? 그렇다면 그 후에 내 몫은?" 총관이 갑자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문주를 쏘아 보며 말했다. "이봐. 당신, 미친 거 아니야?" "뭐, 뭣이?" "당신 설마 주유성 그 인간이랑 싸우려고 하는 거야? 그놈 이 어떤 놈인지 알아?" "그가 대단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 "미친놈. 그런 헛짓 할 거면 너는 우리 사혈련에 들어오지 마. 필요없어." "말이 지나치오!" 총관이 그런 그를 꼬나보며 공력을 서서히 일으켰다. 그 기 세에 문주가 슬금슬금 몸을 움츠렸다. "이봐, 너 잘 들어. 사혈련을 만들려는 건 말이야, 주유성 의 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야. 우리끼리 모여서 건드리면 깨 문다고 위세하는 거란 말이야. 물리기 싫으면 우리 죽이지 말 라고 사정하는 거라고. 그런데 감히 우리가 그놈을 쳐? 사파 의 진정한 멸망을 보고 싶어?" * * * 주유성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된 산동의 어촌은 급속도 로 발전했다. 어촌에는 남해검문의 보수각 사람들이 나타나 서 대형 선착장과 창고 등을 만들었다. 그곳으로 남해의 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중원 의 물자들 역시 그곳을 통해서 남해로 이동했다.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돈만 해도 막대했다. 어느새 어촌의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어촌 옆에 어주문이 큼지막한 장원을 지었다. 어주문의 문주인 어현권은 무림맹 어사의 직위를 정식으로 받았다. 더구나 그의 뒤에는 주유성이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버티고 있다. 감히 어주문을 건드리는 자 없었고 제 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거기에 무림맹의 고수 몇이 어사 호 위를 명분으로 찾아와 어현권을 도왔다. 어현권은 뿌듯한 얼굴로 어촌을 보며 말했다. "정말 내 고향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줄은 몰랐습니다." 옆에서 촌장이 행복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게 다 잠룡대협을 구한 덕분이지요. 그건 정말 용왕님 이 주신 행운이었습니다." "하하. 촌장님, 감히 용왕님이 주다니요. 그분이 바로 남해 의 해신 아닙니까?" 옆에서 곱게 차려입은 어현권의 아내도 한마디 보탰다. "정말 고마운 분이지요." "허허. 부인은 그를 내쫓으려고 하지 않았소?" "그, 그거야... 지난 일을 들추시니 창피합니다." "그나저나 우리 중근이는 잘하고 있나 모르겠군." "잠룡대협이 알아서 챙겨주시겠지요. 천하제일창을 만들 어준다며 일부러 데려가신걸요." * * * 주가장이 있는 서현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중이다. 유동 인 구도 크게 늘었다. 사람이 늘어나니 음식점도 늘고, 그러다 보니 고기의 소요량도 많아졌다. 서현의 탈수푸줏간은 오늘도 바빴다. 전 탈명수라대장 수 라쌍검 소중도의 두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의 앞에 놓여 있던 고깃덩어리가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났다. "정수야, 이거 배달해라. 용정루에서 오늘 오향장육 만든 다고 좋은 부위로 골라달라고 하더라." 전 탈명수라대원 성정수가 고기를 잘 포장하며 말했다. "바빠 죽겠는데 사람들이 왜 자꾸 고기를 그때그때 주문한 답니까? 고기는 거기 주방장이 큰 덩어리 가져다 놓고 자기가 직접 썰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소중도가 칼 두 자루를 탁탁 치며 말했다. "그게 다 내 칼솜씨가 좋아서 그런 것 아니냐? 내가 자른 고기가 거기 주방장 것보다 낫다는 소리지. 으허허허." "가게마다 다 그러니 배달하는 사람이 모자라잖습니까?" "예끼. 이 녀석. 장사 잘되면 좋지. 이제 숨길 것도 없는데 귀장군보라도 써서 후딱 갔다 오너라. 그나저나 다른 녀석들 은 다 어디 갔어? 배달 내보낸 지가 언젠데 왜 안 돌아와?" "어디 가기는요? 밍밍이가 다 빌려갔어요. 지금 배달은 저 밖에 없다고요." 무림의 여러 아가씨들이 주유성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 만 그중에 오빠라고 부르며 적극적으로 달라붙는 아가씨는 단 두 명뿐이다. 냉소미는 원래부터 개방적인 북해빙궁 출신이라 주유성에 게 접근하는 것이 거리낌이 없다. 다른 무림문파의 아가씨들 은 체면치레도 하고 관습에도 얽매이지만 그녀는 주유성만 발견하면 팔에 매달리기 일쑤다. 밍밍이 주유성을 오빠라고 부르는 다른 한 사람이다. 그녀 역시 주유성의 팔에 매달리고 싶은 것을 참지 않는다. 지금의 이 싸움은 두 사람이 동시에 주유성의 팔에 매달렸 던 것 때문에 일어났다. 한 팔씩을 차지하고 서로 노려보던 그녀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미 주유성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도망친 후였다. 하 지만 두 아가씨는 서로를 노려보며 말싸움을 벌이다가 이제 그것이 힘 싸움으로 번지고 있었다. 냉소미는 북해빙궁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어지간한 다른 아가씨들의 배경보다 월등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아가씨들 중에서 꽤나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 그녀가 북해의 호위무사들 삼십 명을 거느리고 길 한 복판에 섰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밍밍이 서 있었다. 밍밍은 무공도 익히 지 못했고 가진 것은 꼬치구이집이 전부다. 그러나 그녀는 주진한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주진한이 그녀의 상재를 크게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배경의 가치로 따지면 냉소미의 북해빙궁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전 탈명수라대원 여덟 명이 서 있었다. 냉소미가 호위무사들을 동원하자 밍밍도 질 수 없어 급히 불 러 모은 사람들이다. 냉소미가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꼬치나 굽는 것이 감히 하늘을 노려?" 밍밍은 지지 않았다. "넌 니네 집에 가. 여기는 우리 동네야!" 똥개도 자기네 집 앞에서는 절반을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발끈한 냉소미가 호위무사들을 가리켰다. "내 호위무사들은 우리 빙궁에서도 정예로 뽑힌 사람들이 야. 그 푸줏간 점원들로 상대가 될 줄 알아?" 밍밍은 조금도 지지 않았다. "우리 아저씨들은 나쁜 놈들 잡는 전문가야. 어디서 북해 촌뜨기들 데려와서 큰소리야?" 냉소미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초, 촌뜨기? 이년이 어디서! 뭣들 해? 혼내줘!" 밍밍도 외쳤다. "아저씨들!" 주유성의 집 앞에서 살인을 할 간 큰 인간은 없다. 그들은 서로 주먹을 들고 달려들었다. "백정 놈아!" "촌놈아!" "내가 바로 북해... 컥!" "내가 바로 탈명... 윽!" 수십 명이 패싸움을 벌이는 와중에서 밍밍과 냉소미만 서 로를 노려보았다. 추월은 소원대로 서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무림맹에 서 다년간 귀한 손님을 시중든 경험을 기반으로 작은 고급 찻 집을 열었다. 그리고 검옥월이 그녀에게 공짜로 빌붙었다. 추월이 검옥월에게 말했다. "검 아가씨, 검각으로 돌아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응? 왜?" "가서 각주 경쟁에 참여하셔야..." "아아, 괜찮아. 그거 하나도 안 급해졌단다." "그래도 일단 각주 경쟁에 참여하면 그만둘 수 없다고 하 셨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시작했으면 그만둘 수는 없어. 나를 믿고 모든 걸 맡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여기 계시면 어떻게 해요? 각주가 되시려면 검각 에 들어가서 살아주는 남편을 얻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아 니면 혼자 사시던가. 그런데 우리 공자님을 자꾸 보게 되면 검 아가씨 마음만 아플 텐데..." 추월은 검옥월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검 옥월이 아무리 예뻐졌어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검옥월이 예쁘게 웃었다. "상황이 변했단다." "예?" 검옥월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지금 각주님의 딸로 상미라는 아이가 있는데, 고것이 지 금 서현에 와 있거든." "예에?" "고것이 감히 주 공자를 노리고 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겠니?"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검옥월이 환하게 웃었다. "가장 강력한 후보 두 명이 모두 주 공자를 원한단다. 그리 고 주 공자가 보통 사람이니? 우리 검각도 함부로 못하는 사 람이지. 그래서 우리 검각은 이번만 특별히 예외로 인정하기 로 했어. 주 공자만은 검각에 들어와서 살지 않아도 남편으로 인정해 주기로." 남편이라는 말을 한 검옥월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두 손바닥으로 뺨을 가렸다. "어머나. 내가 무슨 말을... 하여간 그래서 나는 서현을 떠 날 수 없단다." 추월이 울상을 지었다. '최강의 경쟁 상대가 나타났다.' 서현에 미녀가 늘었다. 주유성이 미녀를 좋아한다는 잘못 된 소문이 돌아서였다. 주유성을 노리고 오는 여자들은 다들 쟁쟁한 배경이 있다. 최소한 오협련의 금지옥엽 정도는 되는 아가씨들이다. 심지 어 황제의 딸까지 있다. 그런 아가씨들은 당연히 자기 세력을 수십 명씩 끌고 왔다. 공주는 수백 명을 데려와서 커다란 장원을 지었다. 그 많은 아가씨와 수행원들이 살 공간이 필요했다. 서현에 건설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사람이 늘어난 만큼 서 현의 시장과 객잔 등도 성업을 했다. 푸줏간 탈수는 바빠서 정신이 없었고 추월의 고급 찻집도 성황을 이루었다. 무림에 유명한 여자들이 늘어나자 그녀들과의 교분을 쌓으 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만큼 서현의 인구가 늘었다. 서현의 발전은 가속화되었다. 이제 서현은 사교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전에 주유 성이 어슬렁거리던 작은 서현은 더 이상 없었다. 그 서현의 구석 술집에서 북해빙궁의 냉소천과 남궁세가의 남궁서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크으. 남궁 형, 술맛이 정말 쓰구려." "마음이 쓰니 술맛도 쓰겠지." "아, 정말 외롭구려. 서현에 미녀가 이리도 많은데 주 공자 는 그중 하나 골라서 얼른 결혼이나 하지. 그래야 송 소저가 나에게 돌아올 텐데. 우리 소미는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 지..." "그러게 말이오. 우리 서린이가 꼭 성공해야 할 텐데. 그래 야 밍밍 아가씨가 내 품에... 크윽, 술이나 마십시다." 서현이 발달하고 음식점이 많아졌으니 주유성의 입을 즐 겁게 해줄 요리도 늘었다. 그러나 주유성은 그걸 먹으러 갈 수 없었다. 주유성이 뭐 좀 먹어보겠다고 떴다 하면 사람들이 수백 명 씩 몰려들었다. 잠룡 주유성은 유명인이다. 더구나 극성스러운 아가씨들 때 문에 사생활이 보장되지 못했다. 주유성이 주가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석에서 기름에 튀긴 통닭을 뜯었다. 진무경이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이게 뭔 닭튀김이냐?" 주유성이 툴툴거렸다. "닭튀김 처음 봐?" "나가기만 하면 온갖 산해진미가 쌓여 있는데 여기서 튀긴 닭이나 뜯고 있으니 한심해서 그런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모 든 걸 받아들여라. 흐흐흐." "시끄러워. 그런데 중근이는 어때?" 진무경이 신이 나서 말했다. "막내 사제? 그 녀석, 근성이 있더라. 원동이 녀석 따위하 고는 마음가짐이 달라." "어느 정도인데?" "모든 면에서 원동이보다 낫다. 물론 원동이가 무공 배운 기간이 훨씬 기니까 지금은 실력이 더 높지만 이대로 가면 몇 면 내에 역전될지도 몰라." "와아. 정말 대단하네." "더구나 사모님이 막내 사제를 에쁘게 보셔서 독이랑 암기 도 조금씩 가르치시는데, 그것도 쏙쏙 잘 배우고 있거든. 자 질도 좋고 근성도 있는 데다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마음까지 있으니 최고지. 특히 내 심부름을 잘해." "잘됐네. 천하제일창이 꿈인 녀석인데. 나중에 무공이나 좀 봐줘야겠다." "그 녀석 근성에 네가 봐주기까지 한다면 꿈으로 끝나지 않 을걸? 언젠가는 천하제일창 자리 꿰찰 거다. 더구나 검과 독에 도 재능이 있으니 잘하면 미래의 삼절서생이지 뭐. 흐흐흐." "그런데 무경이 형 요새 뭐 좋은 일 있어? 왜 그렇게 계속 웃고 다녀?" 진무경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너 덕분에 우리 서현에 미녀가 늘었잖느냐? 내 눈에 차는 아가씨들이 많아졌다. 나도 장가갈 날이 다가오는구나." "착하고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 "그렇지. 그런 아가씨가 많으니 설마 그중 하나 안 걸리겠 냐?" "좋기도 하겠네. 귀찮게 여자는 무슨 여자야? 어지간하면 그냥 혼자 살아." "이 녀석아. 너도 모든 걸 받아들이라니까? 이제 그만 포기 하고 무림의 영웅이 되어라. 사람들이 너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장가도 가고." 주유성이 닭뼈를 던졌다. "무경이 형, 나는 정말 조용히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다고." 씨도 안 먹히는 소리다. 그러던 어느 날, 주가장에 난리가 났다. 주진한이 놀라서 말했다. "유성이가 사라져?" 진무경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조용해지면 돌아올 테니 찾지 말랍니다." 주진한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그 녀석이 숨으려고 하면 찾기 힘들겠지? 이거 곤란 하게 됐군." 당소소는 가만있지 않았다. "흥. 제까짓 녀석이 뛰어봐야 이 어미 손바닥 안이에요. 어 이, 거기 원동이 너. 서현에 온 무림 아가씨들 좀 불러 모아오 너라. 하나도 빼놓지 말고." 서현의 마당발이 된 독원동이 잠시 뛰어다니자 즉시 서현에 있는 무림 아가씨들이 모여들었다. 당소소가 그녀들 앞에 서서 말했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내가 유성이 에미다." 아가씨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당소소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나에 대해서 알아볼 만큼 알아봤겠지? 그럼 유성이가 내 말에 껌뻑 죽는다는 것도 알겠지?" 아가씨들이 긴장된 얼굴로 서 있었다. 여기에 그 정도 사전 조사도 안 한 아가씨는 한 명도 없다. 당소소가 기다란 두루마리를 하나 확 펼쳤다. 사람 이름이 잔뜩 적힌 두루마리였다. "이게 뭔지 아니? 내 며느리 후보 명단이야." 아가씨들의 눈이 반짝였다. 모두 그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명단 첫 번째에 이름이 써져 있는 화산파 백미화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나!" 단지 가장 먼저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것뿐이지만 그걸 모 르는 그녀는 기뻤다. 반면에 명단에 이름이 없는 남궁서린은 울상을 지었다. 당소소가 다시 말했다. "유성이를 찾아오는 아이의 이름이 이 명단 가장 위에 올 라올 거야. 제일 위에 올라가면 내가 그 아이를 적극적으로 밀어줄게." 좌중에 긴장감이 돌았다. 반면에 이름조차 올라가 있지 못 하던 남궁서린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리고 유성이의 마음을 얻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명단과 상관없이 즉시 내 며느리가 될 거야. 다들 알다시피 유성이가 처첩을 거느릴 만큼 부지런한 녀석은 아니지? 누구 든 그 아이의 마음만 얻으면 혼자서 독차지할 수 있어." 이제 아가씨들은 희망으로 들떴다. 당소소가 거기에 찬물 을 끼얹었다. "그런데 어쩌나. 소문 들었다시피 유성이가 지금 집을 나 갔네? 혹시나 그 아이가 세상을 떠돌다가 엉뚱한 아가씨와 눈 이 맞으면 어떻게 되겠어? 다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이 되겠지?" 아가씨들의 얼굴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그러니까 재주껏 그 녀석을 잡아와. 세력을 동원하든, 사람 을 사든 상관없어. 수단은 알아서 강구해. 일단 잡아서 끌고 와 내 앞에 대령해. 그럼 명단의 가장 위에 이름을 올려주겠 어." 아가씨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당소소에 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앞 다투어 주가장을 빠져나갔다. 당소소가 그런 아가씨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들아, 이제 그만 부귀영화를 좀 누려봐라. 집구석에서 뒹굴지만 말고." 모든 아가씨들이 자기가 가진 힘을 동원했다. 돈이 있는 자 는 현상금을 걸었고, 공주는 관청의 힘을 동원했다. 온 세상 이 주유성을 찾는다고 들썩거렸다. * * * 평화로워진 무림맹에서 검성은 여유를 즐기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청허자와 취걸개가 그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었다. 그런 그에게 무사 한 명이 달려왔다. "맹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림에 무슨 큰일이 남았다고 큰일이라는 거냐? 호들갑 떨지 말고 말해보아라." 무사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서장 포달랍궁이 침공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 다. 놈들의 침공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첩자의 보고입니다." 검성이 벌떡 일어났다. "뭐가 어쩌고 어째?" 청허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서장의 포달랍궁이라면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취걸개가 맞장구를 쳤다. "가볍게? 그놈들은 포달랍궁이라고. 기괴한 무공을 익힌 고수도 많고 거느린 무사 수는 셀 수 없어. 마교와 사황성을 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놈들이야. 이건 중원의 위기라고." 검성이 화를 냈다. "포달랍궁. 이것들이 단체로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었나 보군. 전부 박살을 내버리겠다!" 그가 무사를 보고 명령했다. "즉시 최고의 무인들을 모아라. 무림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은 전부 모아. 소집이 가능한 무사들도 전부 모아라. 전쟁이 코앞이다." 청허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후에는 어찌하시려고요? 혹시 선제공격을 하시려는 겁 니까?" 무림맹주 검성 독고진천이 무사에게 다시 명령했다. "사람들을 모두 모으면 그들을 중원 전체에 풀어서 유성이 를 찾아라." 의외의 명령에 무사가 더듬거렸다. "자, 잠룡 주유성 대협 말씀이십니까?" 검성이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그렇지. 건방진 포달랍궁 놈들. 유성이만 뜨면 니들은 다 죽었어!" * * * 주유성은 어느 마을 한구석에 돗자리를 펴놓고 뒹굴고 있 었다. 하늘은 맑았고 햇볕은 따뜻했다. 그의 손에는 근처에서 산 싸구려 꼬치 하나가 들려 있었다. 꼬치를 하나씩 빼먹는 주유성은 만사가 편했다. "내 팔자 진짜 좋다.' 길을 가던 두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젊은 놈이 저게 무슨 짓인지." "구걸 바가지조차 없군. 정말 게을러터진 거지로군." "게으름 하니까 생각났는데 말이야. 이보게, 자네 주유성 대협 알지? 내가 얼마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네. 사실 은 그가 상당히 게으르다더군. 그의 십절 중 제일절이 바로 게으름이라고 하던데?" 같이 걷던 사람이 대답했다. "주유성? 영웅이지. 하늘이 내린 사람이야. 그 사람 게으르 다고? 에이, 난 그런 소문 안 믿어. 게으름뱅이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들을 해?" "하긴, 그렇지? 그럼 이번에도 그분이 세상을 구해주겠지? 다들 그냥 주유성 대협만 믿고 갔으면 좋겠다." "당연하지." 그 소리를 들은 주유성이 꼬치를 물고 울상을 지었다. 終 |
첫댓글 즐독입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ㅎ지금까지 잼나게. 잘읽고 갑니다 다음 편이 아주 기대되네요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