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점찍다
사창굴이 따로 있는가 아파트 단지 뒷길 화단에
때늦은 쪽방만한 매화들 몸 활짝 열었다
무슨 내통이라도 하는지 앵벌이 한 마리 절뚝절뚝 한쪽 발 끌며
꽃에서 꽃으로 방에서 방으로 점, 점, 점 찍듯 들렸다 날아간다
날아가다 또 들른다
무저갱 같은 꽃들의 보지 속에서
반출 금지된 자손이라도 비사입(秘私入)하는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도는 널빤지 구멍 속으로
모가지 한 번 내미는 것이
목숨 점지되는 인연이라는데*
쪽방촌 성폭행범처럼 점점점 씨를 묻으며 드나드는 저 앵벌이 선택은
인연인가 우연인가
매화들 뭇 가지에서 가건물처럼 철거된 빈자리
곧 거북이 모가지만한 열매들 불쑥불쑥 내솟고
그즈음 앵벌이는 또 사창굴 여느 꽃의 곪아 터진 몸 찾아다니며
가장자리 나달나달 핀 종이쪽지 구걸 사연이라도 돌리는가
이 꽃의 음호 속에 저 꽃의 치골 위에
점, 점, 점 우연을 점찍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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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신선 /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196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서벽당집』『겨울섬』『삶, 거듭 살아도』(시선집)『우리 이웃 사람들』『다시 고향에서』『황사 바람 속에서』『자화상을 위하여』『우연을 점찍다』『홍신선 시전집』『마음經』(연작시집)『삶의 옹이』등. 저서 『현실과 언어』『한국사와 불교적 상상력』외 다수. 동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현재 계간《문학·선》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