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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불가, 불교방】 스크랩 韓國佛敎淨化運動에 있어서 東山스님과 범어사의 役割
黃仁圓(황인원) 추천 0 조회 22 15.07.24 10: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韓國佛敎淨化運動에 있어서 東山스님과 범어사의 役割

 

 

• 목 차 •

 

 

 

 

Ⅰ. 동산스님의 출생과 성장 및 학문수업

 

Ⅱ. 동산스님의 출가와 수행, 그리고 정화운동

 

Ⅲ. 맺는 말

 

 

Ⅳ.영문요약

 

 

 

 

 

 

 

 

 

 

 

 

 

 

 

 

 

 

 

 

Ⅰ. 동산스님의 출생과 성장 및 학문수업

 

동산스님께서는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 244번지에서 父 河聖昌, 母 鄭敬雲 양주분을 인연으로 서기 1990(庚寅)년 2월 25일에 태어나셨다.

 

이 해는 일본의 日蓮宗이 1887년 부산, 1880년 원산, 1884년 인천에 別院을 세워 한국의 항구도시를 장악하고 드디어 1890년 지금의 서울에까지 별원을 설립, 우리나라의 수도를 일본불교가 점거한 의미있는 해였다.

 

스님은 이미 7세 때 단양의 지방 교육기관인 鄕塾(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는데, 그 깨우침의 속도가 빨라 神童이란 소문이 난 가운데 四書三經과 歷史 등을 7년 동안 이수하고 신 교육기관인 益明 普通學校에 입학하니 그때 나이 15세였다. 담임은 周詩經선생이었으며 이 인연은 스님이 민족사관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어서 경성의 유학길에 올라 中東學校에 입학하셨으며, 이때 친 고모부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吳世昌선생의 도움이 컸다는 말씀을 누차하였다.

 

1910년(庚戌) 8월 29일은 韓日合邦條約이 선포된 날로 김석진․황헌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국민 전체가 나라 잃은 비탄에 젖어있을 때였다. 그 해 3월 스님은 中東學校를 졸업하고 총독부 의학전문학교에 진학, 의술공부를 하였는데, 이는 당시 대덕스님이셨던 용성대선사께서 고모부인 오세창 선생과 자주 교류하면서 국사를 걱정하고 국민을 염려하였다. 그러다 우연히 용성스님이 당시 동산스님에게 “인간의 신병은 의술로 고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고치겠소?”라고 묻는 말씀에 충격과 감동을 하여

“불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병을 고치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용성스님과 오세창선생은 동갑내기로 절친한 사이여서 동산스님은 두 분의 심부름도 하고 자연스레 교분이 두터워갔다.

 

스님의 세수22세 때인 1911년(辛亥)에 안창호선생 등이 경성부 흥사단 내에 국어연구회를 설립하니 동산스님은 여기에 나가 우리의 국어와 민족사상에 대한 공부를 병행하는 중 장차 은사가 되실 용성스님께서는 서울 봉익동 1번지에 大覺寺를 창건하였으며, 일본은 6월 3일 법률로 사찰령을 반포하여 본산의 주지는 총독부에서 발령하고, 31본산 외의 사찰은 지방장관에서 인가를 받도록 규정하니 이로부터 일본의 불교탄압의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Ⅱ. 동산스님의 출가와 수행, 그리고 정화운동

 

서기 1912년(壬子) 스님의 세수 23세 때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용성큰스님을 은사로 금정산 범어사에 내려와 삭발 출가, 한암스님에게 四敎와 禪을 배우고 범어사 강원에서 永明大講伯으로부터 󰡔�華嚴經󰡕�을 배우며 대교과 2년을 철저히 공부하며 경학과 참선공부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드디어 1919년(乙未)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울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니 총 참가자는 136만 명이고 피살자는 6,670명이며 부상자가 14,600명, 투옥된 사람이 54,730명이나 되었다.

 

이때 은사이신 용성선사는 33인 민족대표의 한 분으로 투옥되었으며,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3년의 실형을 언도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동산스님은 이때 대각사와 도봉산 망월사 등에 기거하며 은사스님의 옥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는데, 만해스님의 上足인 春城스님도 동산스님과 함께 은사의 시봉에 전념했으며, 면회날짜가 돌아오면 옥중의 스승을 찾아가 새 옷을 전하고 눈물로 상봉하면서도 조금도 예의에 벗어나지 않았다.

 

옥바라지는 3년간 계속되었으며, 1921년 3월 은사스님이 출옥하여 4월에 대각사에서 창립된 ‘三藏譯會’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역경사업에 착수하였고, 이때 大覺敎를 창립하였다. 1911년 6월 3일 사찰령이 선포되고 승려들이 차츰 娶妻하는 비율이 높아지자 소위 취처승, 倭色僧과 결별하기 위하여 정통불교를 표방하며 대각교를 창립케 된 것이다.

 

동산스님은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 들어가 줄곧 장좌불와로 용맹정진하며 三冬安居를 성만하고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천선원, 태백산 각화사에서 안거를 성만하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서기 1927년(丁卯) 스님의 세수38세 때 여름인 7월 5일, 평소 좋아하시던 범어사 대숲을 걸으시면서 활연대오하시어, “西來密旨가 眼前에 明明하였다”라고 깨달으시며 한 소식을 하셨다.

 

畵來畵去幾多年 그리고 그린 것이 그 몇 해이던가

 

筆頭落處活猫兒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있는 고양이로다

 

盡日窓前滿面睡 하루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夜來依舊捉老鼠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

 

의사의 꿈을 저버리고 출세간의 장부로서 만중생을 고해로부터 건지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禪․敎를 겸하며 수행한지 어언 15년, 비로소 안식처를 찾으신 것이다. 곧 바로 은사 용성스님께 이 말씀을 드리니 즉석에서 인가해주시며 용성선사의 法脈을 師資相承하게 되었다. 범어사 동쪽 대나무 숲에서 悟道의 인연이 있은 후 스님은 그 대밭은 특별히 아끼시며 자신의 別號를 스스로 筍窓이라고까지 쓰셨다.

 

일제가 불교탄압을 하면서 재산을 수탈하고 왜색승려와 연계, 비구스님들을 괴롭힐 때 은사이신 용성선사께서는 1926년(丙寅) 5월 한국불교가 일본 식민지 정책으로 망해가는 것을 개탄하여 조선총독 齊藤實과 내무대신에게 建白書를 제출하니 왜색불교를 없애고 민족정신을 되살리려는 의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이어서 제2차 건백서를 9월에 또 보내어 일본으로부터 불교탄압과 왜색승려(대처승)을 철저히 구제토록 강력히 건의하였던 바 이때 동산스님은 은사의 뜻을 깊이 헤아리고 마음속 깊이 불교정화의 결의를 다졌다.

 

동산스님의 세수 51세 때인 서기 1940년(庚辰) 2월 24일, 은사이신 용성스님이 법을 전수한지 꼭 5년만에 큰스님의 세수 77세요, 법랍 61세에 홀연 입적하시니 동산스님은 이제 용성문도의 首長으로 불교정화의 임무와 문중 결속등 대소사를 총괄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41년(辛巳) 3월 13일 선학원에서 개최되었던 高僧法會에 등단, 설법하셨는데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아 祖師의 종풍을 일으켜 세울 것을 역설하시며 梵網經을 통하여 취처승(왜색승)들이 왜곡하고 있는 진정한 大乘戒律이 무엇인가를 크게 질책하고 천명하시어 은사 용성선사의 유지봉대에 역점을 두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참선공부에 정진하시며 1942년 경남지방 3본산의 대표들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일본불교를 살피시고 그곳의 선사들과 法擧場도 하셨다. 이때 한국불교는 절대로 일본불교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으시고 “한국불교정화를 반드시 이루어 宗風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결의를 공고히 다지며 귀국하셨으며, 세수 54세(1943)에 처음 戒壇일에 참여하시고 七佛禪院의 瑞相戒脈을 전수받았으며 범어사에서 전래되어오던 중국 法源寺의 계법까지 永明스님으로 부터 전수받아 이 해부터 범어사 金剛戒壇의 壇主가 되시어 傳戒大和尙으로 계를 전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1945년 스님의 세수 56세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방송을 함으로써 우리나라는 드디어 해방이 된다.

 

해방과 더불어 8월 17일 조계종 종무원장 李種郁과 함께 일제하의 종단 책임자들이 모두 사임함과 동시에 불교혁신운동이 일기 시작하여 9월 22, 23 양일간에 걸쳐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었고 사찰령, 태고사법, 31본 말사법이 폐지되고 조선불교 교헌이 선포되며 중앙총무원과 각도 교무원이 설치되었다.

 

해방이 되던 해 우리나라 불교는 왜색불교의 혼탁으로 뒤덮여 아내를 거느린 승려가 1만 2천여 명이나 되었고 독신 수행승려는 고작 8백 명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숱한 受侮와 苦楚를 감내하시며오로지 정진으로 일관, 참선납자들을 지도하셨다. 평소의 말씀이 “닭이 천 마리면 鳳이 한 마리”라고 하시며누구보다도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신 것도 어쩌면 대처승들로부터 겪은 수의 열세에서 받은 고난이 마음속 깊이 남아있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1950년 스님의 세수 61세(庚寅) 때에 6․25 동란이 일어나니 정부는 대전으로, 다시 부산으로 이전하고 서울은 함락되었으며 부산에는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범어사는 피난 온 사람들이 가득하고 배가 고파 참선하겠다고 찾아온 승려들로 붐비니 스님의 會下에는 운수납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金魚禪院은 靈山會上의 재현이라 하며 모두 환희하며 칭송하였고 결제와 해제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당시 비구 승려로서는 범어사 동산혜일 큰스님을 거쳐가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조선의 마지막 임금 純宗妃인 尹大妃가 6․25 사변으로 구포에 피난 와서 은거하는 중 수시로 스님을 친견하며 법문을 듣고 많은 위로와 마음의 안식을 찾은 바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1952년 6․25 동란이 소강상태를 이루면서 운수납자들이 참석하여 무차대법회가 이어지던 6월 6일 현충일에 정부의 주관으로 범어사에서 전국군경합동위령제를 거행토록 되었는데, 이 때 범어사 조실로 계시는 스님께서 법주가 되어 이 위령제를 봉행토록 정부의 요청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이 맺어지는데 당일 오전 10시까지 도착하여 위령제를 함께 지내도록 이승만대통령과 약속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11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11시가 훨씬 넘어서야 중절모를 쓴 채 유엔군 사령관과 외국의 외교사절들이 대통령과 함께 도착, 범어사 대웅전 앞에서 참배도 않고 대통령이 손가락으로 대웅전을 가리키며 뭐라고 설명을 하는 광경이 스님의 눈에 보여 평소의 곧은 성품대로 호통을 치시기를, “소위 일국의 대통령이란 분이 불전에 와서 중절모를 쓰고 손가락으로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은 어디서 배운 예의냐?”고 사자후를 하시니, 대통령은 즉석에서 사죄하고 법당에 참배한 후 위령제를 지냈다. 이 인연으로 뒷날 전 내무부장관이었던 白性郁박사를 내려 보내 국무총리를 맡아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 있었으나, “승려는 山門을 지켜야하고 부처님을 도외시하고 범어사를 떠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백성욱 박사는 스님보다 7살이 연하였지만 서로 신뢰하는 사이로 형제처럼 도반의 돈독한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미8군사령관인 벤프리트 장군의 아들이 공군대위로 한국전에 참전하였다가 실종, 미국에 있던 벤 장군의 부인이 급거 來韓하여 백방으로 시신과 사고요인을 규명코자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벤 장군 내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위령제라도 지낼 것을 원하자 이승만대통령은 1953년 1월 10일 다른 사찰들은 공산군이 점령하여 가지 못하므로 경주 불국사와 범어사를 참배코자 경무대 1호차를 타고 백선엽 장군의 경호를 받으며 벤 장군 내외를 대동하고 범어사에 와서 아들의 위령제를 지냈다.

 

이때 동산스님은 눈이 30cm나 쌓였고 소한추위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가운데 현 범어사 일주문 앞에서 거의 한시간을 서서 불국사로 떠나는 이승만대통령에게 대처승(왜색승) 정화에 대한 의지와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대통령은 대처승이 무엇이냐고 동산스님께 물었고, 스님은 왜색승이 만들어지고 1만 6천명이나 되는 대처가 있으며 수도승은 고작 800명뿐이라고 보고하니, “해방된 지가 언제인데 왜색승이 있고 어찌 청정 비구스님들이 절을 지켜야 하는데 취처를 한 승려가 절에 있을 수 있느냐”며 비분강개하였다.

 

이날의 대화에서 동산스님의 불교정화운동은 시작되었고 최소한 삼보사찰(통도사․해인사․송광사)만이라도 수도승이 살 수 있도록 선처를 당부하였더니 이승만대통령은 “내가 경무대에 올라가서 불교담당 주무부처인 문교부장관을 범어사로 보낼 테니 정화의 당위성과 계획을 자세히 설명주시고 불교정화의 대작불사를 반드시 동산스님께서 관철하세요”라 하고는 벤 장군 내외와 불국사로 떠났다.

 

이것이 바로 불교정화의 시초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승만대통령의 모친께서 파주의 미륵부처님께 기도를 드려서 그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파주 보광사로 기억되는데),

 

어느 가을날, 파주 절을 참배하고 나오는데 절의 빨랫줄에 아이의 기저귀가 널려있어 연유를 물으니 비서가 대처승이 절에서 살게 되니 자식을 낳아 기르게 되어 그렇다고 보고하자 그 즉석에서 수행진에게 엄명하여

“그것이 소문으로만 알았는데 사실이구만! 즉시 관계부처에 연락하여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고 수도승에게

 

사찰에서 수행토록 조치하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때부터 “佛法에 帶妻僧은 없다”라고 수도승들과 불자들은 외치며 정화의 횃불을 드높였던 것이다. 그 때 동산스님의 덕화가 이승만대통령을 감화시켰고 스님이 정화불사에 정진하고 계실 때 대통령이 무려 여덟 차례나 “帶妻를 한 왜색승려들은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유시를 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비구승들의 승리로 정화를 끝맺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로 인해 동산스님 문하에 수많은 참선납자들이 모여들게 되어 事判僧들의 위상은 더욱 낮아져 범어사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던 왜색승들이 위기를 느껴 선원을 폐쇄하고 동산스님을 축출하려는 계책을 꾸미는 등 갖가지 박해를 가해왔으나 스님은 때로는 덕화로, 침묵으로, 어느 때는 염불로서 일관하시니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54년(癸巳) 4월 불교정화를 논하기 위하여 통도사에서 전국승려대표자 대회와 고승대회가 개최되고 이해 5월에는 왜색 사판승들의 행패가 극악무도해짐을 보고 도저히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어 전국의 납자들에게 격문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나라가 해방된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불교는 아직도 왜색 사판승들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국 비구승들은 더욱 단합하고 분발하여 1천 6백년간 지켜온 불교의 청정계맥을 바로 세우고 흐트러진 승풍을 진작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방의 납자들은 스님의 격문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정법구현을 위한 살신성인의 결의로써 정화불사의 횃불을 드높이 밝히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범어사의 사판승들은 대처승측 총무원과 합세하여 범어사 선원을 閉鎖하고 조실스님을 추방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함에 비구승들은 조실스님을 중심으로 선원과 동산스님을 지키며 갖은 고초를 감내하였으나 수적인 열세와 힘의 부족으로 1차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동산스님은 하는 수 없이 영천 은해사로 옮겨와 새로운 회상을 만들고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金法麟과 錢鎭漢이 이 사실을 알고 범어사로 내려와 대처승들을 설득시키고 회유하여 동산스님이 범어사로 다시 돌아오시니 이 기간이 3개월이나 걸렸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전국 각처에서 비구스님들과 대처승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며 드디어 사회문제로 비화되었고 정부가 개입하여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제1차 한국불교정화에 대한 유시’가 내려지며 “대처승들은 사찰에서 물러가고 사찰소유재산은 즉시 반환하라”는 엄중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폭행과 음해가 끊이지 않아 불교계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다. 급기야 서울 안국동 소재 선학원에서 원로 비구스님들이 회동하여 불교정화운동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다음날 교단정화운동추진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7월 2일에 동산스님과 효봉․적음스님의 이름으로 ‘전국비구승 대표자대회’ 개최를 공문으로 발송함에 드디어 8월 24, 25일 양일간 선학원에서 64명의 비구승 원로대덕이 참석하여 제1차 전국비구승대표자 대회를 열고 불교정화의 철저한 신념과 방침을 결정한 것이다. 이어서 9월 30일 제1차 불교정화중앙종회를 열고 10월 9일에는 조실(동산)스님 등 300명의 비구승이 단식에 돌입, 11월 3일 제2차 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종단의 임원진을 구성하니 종정에 河東山, 종무원 도총섭에 李靑潭스님이 선출되었다. 이때가 큰스님으로서 처음 종정이 되신 해이며 이에 더욱 불교정화에 대한 주도적 역할을 遂行하셨으며 모든 난관을 스님의 덕화로 극복하시고 이후 두 번이나 더 宗正에 추대되셨다.

 

동산 스님은 대통령의 육성 유시가 4, 5차나 발표되었지만 불교정화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대처승쪽 기세는 더욱 당당하였다.

 

이에 스님은 소승(백운스님)을 앞세우고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고자 경무대를 찾아갔으나 1차에도 부재중이라는 이유로 만나지 못하였고 이어서 2차 대통령 접견을 위해 또 경무대를 방문하였으나 경호실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고 세 번째 선학원에서 동산스님을 모시고 경무대를 방문하였으나 헛수고였다.

 

번번이 대통령 접견이 좌절되자 수소문 끝에 고모부인 오세창선생의 아들 한 분이 대통령 비서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동산스님과는 내․외종 형제지간임을 의지로 삼아 돈화문 앞에 사는 고종사촌 長兄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반갑게 맞아주며 “경무대의 대통령비서는 막내동생”이라며 고종사촌 큰형이 직접 동생집으로 전화를 하여 “외사촌형인 범어사의 동산스님이 대통령을 만날 일이 있으니 가능하다면 안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弟嫂氏에게 연락을 해 놓았다.

 

소승(백운스님)은 동산스님을 모시고 선학원으로 돌아와 2~3일쯤 기다리니 동산스님의 고종사촌 동생이며오세창선생의 막내아들로 경무대의 대통령 비서관이 선학원으로 찾아와 동산스님께 큰 절로 인사를 드린 후대통령을 만나고자 하는 사유를 세밀히 들은 뒤 “형님 !제가 경무대에 들어가 각하의 일정을 봐서 형님과 만나도록 주선해 놓고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경무대로 들어오십시요”하고 선학원을 나간 지 10여일 후에 경무대에서 연락이 왔다. 하루가 여삼추같던 스님에게는 마치 부처님께서 온 소식인양 즉시 소승(백운)이 모시고 경무대에 갔더니 비서실에서 소정의 수속을 밟고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이승만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국가가 어려울 때 좀 도와달라고 부탁(국무총리를 맡아달라고 백성욱박사를 범어사로 보낸 일)했는데 그것은 들어주지 않고 종단의 급한 일로 나를 만나러 오셨습니까?”하며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서로 손을 잡고 너무도 반갑게 맞이하여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 한시간이 넘도록 독대로 대화를 한 결과 “대처승 문제는 제가 책임지고 처리할 테니 동산스님은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오히려 대통령이 스님께 위로와 격려를 함에 기쁜 마음으로 선학원으로 돌아오셨다.

 

그 후 3일이 지났는데 당시 종로경찰서 형사계장 김대홍 경위가 선학원 동산스님을 친견하며 “경무대 경호실에서 ‘비구승과 비구종단을 특별 경호하라’는 엄명이 떨어져 선학원 부근에 형사들을 배치했다”는 보고에 동산스님은 “아! 이제 한국불교의 정화가 되는가 보다”하시며 기뻐하셨다. 이런 일이 있은 후 1955년(乙未) 1월 1일 동산스님께서는 효봉스님과 청담스님을 대동하고 소승(백운)이 시봉하여 경무대로 새해인사를 갔는데 동산스님과 독대로 30분, 효봉스님 20분, 청담스님과 5분씩 대화를 나누고 불교정화에 대한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를 스님들께 피력하였다. 3월 달이 이승만 대통령 생일이었는데 이때는 스님께서 金烏스님과 大義스님을 대동하고 생일축하연에 참석, 이대통령은 각료와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신익희선생보다 더 상좌에 스님일행을 모셔서 환담하니 경무대 직원뿐 아니라 각료나 장관들까지 스님께 국가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하였다.

 

전국비구승대회는 2차, 3차, 4차로 이어졌고 이럴수록 대처승들은 더욱 완강히 버텼다.

 

이에 따라 대통령의 유시도 2차, 3차, 4차로 이어졌지만 대처승들의 사찰점거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비구승들을 적대시하고 절에서 쫓아내고자 혈안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8차까지 유시를 발표, 동산스님의 정화의지에 크나큰 힘을 주어 사실상 이승만 대통령과 불교정화를 함께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님은 堪․忍․待, 즉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정신을 전 비구승에게 지도하니 대처승들의 모진 박해를 이겨낸 정신적 기둥이 된 것이다.

 

동산스님은 당대 최고의 지혜와 복덕을 갖추신 승려로서 霜松潔操와 水月虛襟의 자세를 견지하시어 후진을 제도하고 가르치는 잣대로 삼으시니 이러한 행적과 학식 및 덕망을 대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어른인 것이다.

 

스님의 세수 66세인 1955년(乙未) 수 차례의 비구승 결집대회와 정화불사의 원력모임이 이루어졌으며 이 노력으로 인하여 8월 1일부터 1천여 명의 승려가 참석한 전국 비구승대회가 얼렸고 대회 이틀째인 8월 2일 새로운 임원진 구성에서 동산 큰스님은 다시 종정으로 추대되시었다.

 

1955년 8월 4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치안당국의 저지로 회의 진행이 불가능하리라고 예측되던 전국승려대회는 3일에도 무난히 개최되어 서울 조계사 법당에서는 오전 10시 30분부터 질서정연한 가운데 약 8백 명의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회의를 계속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과거 총무원측(대처승)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고 임원개편과 전문101조와 부칙으로 되어있는 종헌개정안도 아울러 통과시켰다고 보도하였으며 임원진을 詳記하였다.

 

그 내용은 종정 河東山, 총무원장 李靑潭, 총무부장 高景德, 교무부장 金相鎬, 재무부장 朴淇宗, 감찰원장 鄭今烏, 감찰부원장 金瑞雲이었다. 스님은 두 번째 비구승대회를 끝내고 六祖壇經을 설하였는데 2일간 계속되었으며, 8월 12일, 그동안 비구승측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의한 모든 사항을 국가에서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며 최종 임원진을 구성하는 자리에 정부 대표로 문교부장관이 임석하여 축사를 하는 것으로 한국불교의 정화는 그 종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불교정화가 비구승단의 승리로 완결되자 스님은 모든 공직을 내놓고 다시 범어사로 돌아오셨으며 그 해 9월에는 조실로서 정화불사 승리 이후 초대 범어사 주지를 겸임하시고 예전처럼 선원 중심의 원융살림과 납자제접에 힘을 기울이셨다.

 

1956(丙申) 11월 15일에서 21일까지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효봉스님, 청담스님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시니, 이때가 한국불교로서는 세계불교와 가진 첫 번째 교류로서 이 대회 참석을 계기로 한국불교의 정화불사를 세계만방에 인식시켰으며 귀국길에 인도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고 12월 15일 범어사에 돌아오시니 오늘날 한국불교를 이처럼 반석 위에 놓으신 불세출의 스승이신 것이다.

 

서기 1959년(己亥) 70세 고령이심에도 불구하시고 종단과 사찰운영을 염려하시어 각도에 종무원이 있고 그 종무원에서 해당 도(道)의 사찰을 관장하던 제도를 9월 12일 대한불교조계종 宗正 河東山스님의 명의로 종령 제3호를 내려 전국 24개 首寺刹制度로 전환, 나머지 여타한 중소사찰들은 24개 수사찰(지금의 교구불사)에 알맞도록 배정하여 수 사찰에서 관장토록 하였으니, 이 제도가 오늘날 시행되는 전국 조계종25교구본사제도인 것이다.

 

다음해인 71세 되시던 해(庚子) 1월 1일에 종단의 기관지인 대한불교신문, 현재의 불교신문을 창간하여 43년 문서포교의 당간을 세우셨으며, 이 題號를 부산 대한불교신문에서 1989년 다시 사용하여 동산스님의 상좌인 흥교스님이 발행인으로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일이며 先師 동산스님의 업적을 계승하는 일이라 하겠다.

 

그 해 4월 24일 서울 조계사에서 보살계 수계식이 있었는데 정화불사의 성공을 축하하여 수많은 불자들이 운집, 동산스님의 법어를 경청함에 많은 동참금이 들어와 당시 총무원의 인쇄비 등 많은 부채를 이때의 동참금으로 모두 변제하니 경제적 빈곤과 보릿고개로 배고픈 중생들과 스님들의 공부 뒷바라지에 동산스님의 하루는 寧日이 없었다. 이 해에 4․19가 일어나 불교정화에 큰 힘을 경주하셨던 이승만대통령은 급기야 하야하기에 이르렀고 스님께선 시류의 흐름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계사 법회를 마치고 범어사로 내려와 강진 백련사에도 며칠씩 다녀오시며 나라와 불교의 소망이 담겨진 법어를 휘호로 남기시니 그 글귀는 다음과 같다.

 

瑞草生嘉運 상서로운 풀은 좋은 운수를 만들고

 

林花結早春 숲 속의 꽃은 이른 봄을 가져온다.

 

73세 되던 壬寅년 1월 20일 문교부장관의 종용에 의하여 통일종단의 설립을 위한 불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종정 하동산스님과 당시 대처승측 종정 국묵담스님이 그 대표가 되었으며, 2월 12일에 비구․대처 양측이 8년만에 회동하여 불교재건비상종회가 개최되었고 4월 1일에는 비구․대처의 통합종단이 구성되었다. 이에 스님은 종정의 소임을 깨끗이 사임하시고 범어사로 내려와 堂宇를 일신하고 납자교육에 전념하시며 국내외의 포교와 법문을 수 없이 내리셨고, 범어사 보제루를 중수, 낙성하였으며 천왕문을 재건하셨고, 충북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 미륵불상을 점안식에 증명대법사로 사자후를 설하셨다.

 

1965년(乙巳) 세수 76세에 이르러 3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의 65회 보살계 산림을 맞이하여 설법하신 후

 

당시 교수아사리였던 석암스님에게 범어사 금강계단의 전계사를 전수하시고 “이 자리에 다시는 오르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시며 하단하였다. 3월 23일, 다음의 임종게를 남기시고 영원한 寂靜三昧에 드시었다.

 

元來未曾轉 원래 일찍이 바꾼 적이 없거니

豈有第二身 어찌 두 번째의 몸이 있겠는가

 

三萬六千朝 백 년 3만 6천일

 

反覆只這漢 매일 반복하는 것 이놈 뿐 일세.

 

세수는 76세요, 법립은 53세였으니, 5만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다비한 후 영골사리를 거두어 금정산 남쪽에 비석과 탑을 세워 크신 무량광대한 덕을 기리었다.

 

Ⅲ. 맺는 말(스님을 추모하며)

 

동산스님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시어 조선의 5백년 세월이 끝날 무렵에 태초의 출생을 알리시고 21세에 한일합방을 맞았으며 일제의 36년 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았으며, 은사인 용성선사로부터 유훈 받은 불교 건백서의 실천을 위해 정화불사를 시도하시다가 6․25동란을 맞고 국정이 급변하는 가운데 종풍을 쇄신하고자 역대 선사들의 덕풍교화를 기리시며 정화불사를 주도하여 마침내 그 원력을 이루셨다.

 

4․19혁명과 5․16의 혼란한 세월을 사시면서도 단 한번도 다른 길을 가지 않으신 채 부처님의 정법을 스스로 시현하셨으니, 그와 같은

 

세월들을 모두 접고 큰 고요 속에 不生不滅의 法身으로 길이 안주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 스님께서 완성하신 이 보제루에 편히 앉아 先師 東山大宗師님의 정화불사를 소승의 입에 담으니 생전에 시봉했던 생각이 감회를 더하며 다시 한번 은사스님을 추모하며 불전에 합장는 바이다.

 

동산스님의 주석처요, 정화의 산실인 이 범어사가 앞으로는 문중의 단합으로 일취월장하여 총림을 이루는 청정대찰로 우뚝 서길 이 자리에서 염원하며 서툰 발표를 접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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