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술 시집 해설>
함께 하는 슬픔과 혼자 하는 그리움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김대술 시인은 성직자다. 특별한 성직자다. 속인인 필자가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는 여느 성직자들과는 달리 성스러운 초월적인 세계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진탕 속에서 부처를 발견하고 시장 바닥에서 예수를 찾는 그런 성직자다. 민초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들과 함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그가 가고자 하는 성직의 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번 시집에는 이런 그의 삶의 행적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 시집의 시들에서 두드러진 정조는 슬픔과 그리움이다. 다소 낭만적이고 감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 두 가지의 정서는 사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역사 변화를 이끌어 온 가장 큰 정신적 원동력이기도 하다.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인간은 항상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고 이 결핍으로 슬픔을 내재화한다. 우리의 삶에 슬픔이 편재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슬픔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한다. 때로는 그 그리움을 현실화시키는 사회변혁을 꿈꾸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리워하는 세상을 재구성한다.
이 슬픔과 그리움이 김대술 시인의 시들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까? 이 시집 맨 앞에 실린 다음 시가 그 모습의 일단을 보여준다.
상처 없는 나무 어디 있을까
길 가다 문득 돌아보며 서 있는
오래된 나무가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당당한 열망의 시간이 지나
계절의 흔적 이어 붙여 떨리는 연녹색
이제야 장하신 숲이 되어 나무들 생각한다
…(중략)…
숲은 생각하며 가고 오는 길인지
향긋한 기억의 숲길 그대 오시면
문득 그러면 어때 안녕 잘 놀았다고
잃어버린 그리움 주실지 모를 일이다
- 「숲은 생각하는 길」 부분
시인은 우리 모두가 다 상처 입은 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이 상처가 주는 고통과 슬픔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시인은 문득 상처 입어 오래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 숲길을 따라 잃어버린 그리움을 다시 회복하고자 한다. 이런 생각으로 시인은 자신을 돌아본다. 삶의 고통으로 상처를 입고 있지만 이 고통과 슬픔이 나만의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두의 것이고 이 슬픔의 숲에 우리 모두 함께 있다고 생각할 때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열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시인은 믿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성직자로서의 길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타인의 슬픔을 우리의 슬픔으로 확장하고 나의 그리움을 이 슬픔을 치유하는 믿음으로 확대해 가고자 하는 시인이 “향긋한 기억의 숲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이 시에서 떠올릴 수 있다.
시인은 그 길에서 나 아닌 타인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내면화한다. 다음 시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저 저것들 그냥
뒤돌아보는
길
어느 먼
어떻게 가야 하는
피부에 달라붙은 두려움 밀쳐내도
배고프지 않을
사막의 별들아
매혹적인 도시의 밤 생각하는
숨 한 번
실에 올라탄 외줄
바람의 저항 늘 웃고 있다지
가혹한 것들아
슬픈 기도 옆에 있어도
이름 붙일 수 없어 사라지는
- 「길」 전문
길을 가다 시인은 자꾸 뒤돌아 본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슬픔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 슬픔의 근원에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두려움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매혹적인 유혹과 항상 우리를 위협하는 “실에 올라탄 외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시인은 이 가혹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이름 붙일 수 없어 사라”져가는 많은 생명들을 포기할 수 없어 함께 품고 가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시는 이러한 길을 가는 시인 자신이 왜 시를 쓰는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잠 못 들어 늦은 밤 국물 준비에
파도 타면 작은 바다가 어디 있겠냐마는
다시마 냄새 올라온다고 세상의 갯가 나풀거리는
포자 하나의 눈동자 대양을 향해 가난하게 떠돌며 어디
멸치 떼 몰고 온 작은 눈구멍에
화전민 구렁 구렁 불빛 여윈 그림자 가득한
위태로운 전깃줄에 걸린 겨울 위이잉 어떤 발자국인지
나무와 다리를 허공에 묶은 거미의 저 눈
왕거니 안 걸리고 가만히 빠져나가는 바람은 먼
쓰다듬어 준 적 없는 공장 구석 퉁이 묶였던 개
어느 처음인지 흘레 붙어주고 떠난 눈동자에 아련한
혹시 혹시나 다음 생이 있다면
- 「그래서 시인들은」 부분
이 시에 그려진 풍경처럼 세상은 온통 가난과 허무가 지배하고 있다. 가난한 화전민에게는 불빛마저 여위게 보이고 전기줄에 부는 겨울 바람이 삶의 위험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공장 구석에 묶인 개처럼 한 차례의 헛된 욕망으로 혹시나 하는 다음 생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시인은 자문하고 있다. 시가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이 의문을 의문으로 남겨둔다. 바로 이 의문이 시를 쓰게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들은” 시를 쓰는 것이다.
이런 시 쓰기는 필연적으로 그리움으로 연결된다. 가난과 결핍으로부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충만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도 구름이어야 하는지
거기 지상에서 어떤 영원을 사모할 수 있는
도대체 살아온 날들 그런 마음이었을까 뒤돌아보아도
하염없이 빛나던 눈빛으로
가야국 천년을 쫓던
사람은 무슨 그리움 모를 일이지만
저 임윤찬 피아니스트 우륵을 생각한다는
달의 빛깔 건반에 떨어지며 스친 가을 오시더니
고구마 굽는 냄새의 저녁 무채지도 빙긋하게 익어간다는
갔다가 다시 올 일 없는
정령들 두런두런 강들의 먼 기억 띄울 때
백제금동대향로에 침향 애간장 태우며 범종 울리는
날마다 세상 곳곳의 서럽고 서러운 것들 어떻게 하냐는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외로운 벗님 저 밤이 들리도록
먼지 인연 흩날린 사리 어느 떠도는 별이 되어
풍경소리 고요한 바람 길에 한 두 소절 보태더니
기러기 줄지어 만들어둔 탑에 반짝이는 그 먼 아늑하고
- 「임윤찬 피아니스트 천 년에」 전문
시인은 임윤찬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다시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피아노 연주가 그리움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임윤찬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우륵을 생각하고 백제금동대향로와 범종의 소리를 떠올린다. 그것은 달빛처럼 충만한 세계의 이미지들이다. 이 충만함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서럽고 서러운 것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물론 한 곡조의 피아노의 연주와 한 편의 시가 이런 충만함을 완벽하게 수행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풍경소리”가 “고요한 바람 길을 한 두 소절 보태” 듯이 슬픔을 치유하는 충만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아가는 탑을 쌓은 노력이 될 수 있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시인은 이 그리움이 하찮은 것이지만 세상을 적시는 봄비가 되리라 확신한다.
시인 나부랭이 어느 먼 날들의
오래간만에 긴 밤 잠 못 자고
첫 개구리 소리도 놀란 새벽에
겨울 덮던 이불 속 흙도 덩달아
화성에도 봄비 오시는 그리울
- 「봄비」전문
“시인 나부랭이”가 된 시인은 밤을 새워 그리움에 잠 못 이룬다. 하지만 이런 그리움의 몸살이 “첫 개구리 소리”처럼 세상을 깨우고 흙에 생명을 부여하는 봄비가 되어 내릴 것임을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비는 희망이 되어 물도 생명도 없는 황폐한 “화성”에까지 다다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움을 희망으로 전환하는 시적 에스프리가 빛이 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는 혼자 쓰는 것이다. 공존과 연대를 위한 사회적 활동과는 달리 시인의 내면의 그리움을 자신의 언어로 사용한다. 그렇게 해서 구체성과 현실성을 구현한다. 이 혼자의 언어가 가진 진솔함을 잃지 않을 때 시는 정치구호나 이념의 깃발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김대술 시인의 시가 성직자로서 또한 사회활동가로서의 자기 신념의 표명이 아니라 온전히 한 시인의 언어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음 시에서 이 점을 잘 확인할 수 있다.
뒤꿈치 닳은 신발들 꿈꾸다 깬 듯 여름철 장마 생각의 빗줄기 굵다. 처마 밑 웅크린 덧니로 빛나는
온수리 온천수 뒤틀리듯 읍내로 가는 전등사 옛길 도편수만 그랬을까. 손때로 붉은빛 목상은 앵두 냄새 붉다. 붉어
노스님이 주신 막걸리 두어 병 부족한 취기 핑계 삼아 담배 사러 갔지요. 편의점에 발목 묶인 고양이 시름 쌓이듯. 쳇바퀴 풍경소리 티브이 화면 속에서도 현기증 피어오르고요. 담벼락 모퉁이 돌아가는 암고양이 속내로 무너져가는 먹이 따라 어슬렁어슬렁 걷는 듯
- 「강화읍 야행」 전문
시인은 혼자 밤에 나와 강화읍을 어슬렁거린다. 혼자 밤에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낮에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우리는 대낮에 깨어있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이 올바로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밝은 이성의 세상에서는 항상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퉁이 돌아가는 암코양이”로 표상되는 바로 어둠의 시간이고 정념의 세계이다. 시인은 바로 이 캄캄한 어둠의 세계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자 한다. 남들이 그려놓은 규범과 질서 속에서 도를 구하고 길을 찾는 삶이 아니라 암중모색의 헤매임 속에 자신의 삶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 혼자만의 그리움의 실천이 김대술 시인의 가장 중요한 시적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자기 고백을 하고 있다.
짬 모르고 입은 숙명의 검은 사제복. 잠들지 못한 새벽 찬 공기 가득히 안고 들어와. 달콤한 고운 여인의 붉은 포도주 서러운 입술에 가시 박혀 아파하듯. 문득 크게 걱정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 어느 먼 저것들 생각에. 세상의 모든 해지고 달만 뜨면 심장 무너지며 이런저런 조각조각 구름 몰려와. 어이할 수 없는 나는
- 「햇살」 부분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지만 “고운 여인의 붉은 포도주 서러운 입술”을 지우지 못한 시인은 “심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어이할 수 없는” 심정을 몰려오는 구름처럼 주체할 수 없다. 이 “어이할 수 없는” 혼자만의 그리운 마음으로 시인은 시를 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시인은 “햇살”이라는 희망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온전한 혼자만의 그리움이 익어 갈 때 또 다른 그리움과 연대하게 된다.
겨울눈 전설 볼 수 없듯
가득한 눈망울 속에 흐르는
아주 멀리서 단 한 번 고개 돌리는
시리고 아린 바람의 비릿한 것들아
아직 오지 않아 어스름 붉은 얼굴 있는
- 「그 먼 어느 젊은 별에게」 부분
젊은 것들은 아직 그리움이 많기 때문에 젊은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그리움으로 이 비릿한 젊은 그리움들과 만난다. 이 그리움들이 함께 슬픔을 달래며 “아직 오지 않아 어스름”한 붉은 희망의 빛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시인은 믿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그려내는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고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성직의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