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1
십자가 처형을 전후한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를 기록한 보고서
일찌기 오쇼 라즈니쉬 선생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않았다"라는 발언으로 서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예수를 사랑하는 어떤 대 부호와 빌라도 총독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 예수를 죽이지
않고 구출하는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고, 드디어 예수는 은밀한 곳으로 빼돌려져
치료를 받은 뒤 인도로 탈출하여 캐시미르 지방에서 112세에 열반에 들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쇼는 직접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 보았고, 조상 대대로 예수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문의 도움을 받아 예수의 묘비에 숨겨진 의미를 연구하였다고도 한다.
예수는 인도로 온 후 더 이상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저 지인들과 조용히 기도하며 평화롭게 살았을 뿐이다.
이러한 내용은 비단 오쇼 라즈니쉬 선생의 단독 주장만이 아니다. 예수와 인도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은 이미 중세 이전부터 존재했었고, 여행술의 발달에 따라 대륙간의 이동이
활발해 지자 그러한 시도는 더욱 용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기에
좀처럼 예수의 본 모습은 세간에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 드디어 니콜라스 노토비치라는 러시아 기자에 의해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라는 기록이 공개되기에 이르렀고,
종교계와 학계의 뜨거운 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노토비치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와 티벳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이때 티벳의 라마 승려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 사원에 머물면서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던 성자 이사(Issa)의 생애를
적은 <이사전>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티벳에서는 예수를 '이사'라고 불렀으며,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성의껏 기록한 내용이
바로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였다.
인도에서의 예수 행적은 <보병궁 복음서>라고 불리우는 신비로운 책에도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리바이 도우링'이라는 미국의 목사가 천상의 아카식 레코드로 부터 직접 받아 적은
채널링 성경인데, <내안의 나>, <기적수업>,<끝없는 사랑> 같은 채널링 성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귀한 기록물이다.
<사진> 인도 캐시미르 지방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사진> 예수가 안장된 석관
그리고 지금 소개하려는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은, 이러한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1973년에 독일인 '홀거 케르스텐'이 직접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이스라엘, 인도, 티벳 등을
여행하며 몸소 체험하고 밝혀낸 기록을 적은 생생한 보고서이다.
정통 기득권 종교계에서는 이러한 모든 주장들을 신비주의에 빠진 미친 소리라 일축하고
있지만, 다음의 구절을 들여다보면 홀거 케르스텐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예수의 역사적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마치 원자의 미립자를 찾아 그것의 대전(帶電)된 상태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입자 자체는 직접 볼 수 없지만, 일련의 실험 과정 속에서 그 운동경로를
그려낼 수있다. 이 운동경로들이 생기게 된 원인을 추적해가면 입자의 운동을 야기한 힘을
계산할 수 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습을 그리고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경우에는 두 가지 난점이 따르게 된다. 그 첫 번째는 교회가 예수의 생애를
둘러싼 역사적 증거들을 모두 파기해 왔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예수는 자신을 박해하던
자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비밀(실제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정통 신학대학을 다녔으며, 그 후 학교에서 종교 교육 교사를
했던 지성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사이비에 빠져 예수를 욕되게 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일단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예수를 욕되게 하기는
커녕 더욱 존경스러워질 정도로 예수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절절히 느껴진다.
이 책에는 예수의 무덤이 인도에 생기게 된 발자취는 물론,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예수의
기적과 힌두교의 상관관계, 석가모니와 크리슈나와의 비교 등을 통해 점점 예수라는 인물의
실체를 매우 입체적으로 독자들에게 밝혀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혹시 기득권 세력의 권세에 압도당하여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감겨져 버린 것은 아닐까?
독일의 대 문호 괴테는 눈이 멀어버린 우리들에게 이렇게 사자후를 토해낸 적이 있다.
내가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 일어나 반론을 펴라!
전 교회의 역사는 오류와 권세의 뒤범벅이니...
책의 저자인 홀거 케르스텐은 진정한 예수의 실체를 볼 수 없는 눈먼 우리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구구한 설명을 늘어놓느니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과연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말하려 하는지 느낌이 오실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적인 예수보다는 내안에 깃들어 있는
그리스도 정신이 더욱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가볍게도, 너무 무겁게도 보지 말고
그저 편안하게 읽고 있노라면 마치 탐정 추리 소설을 보는듯 흥미진진함이 느껴질 것이다.
평범한 신학생이었던 한 독일인이 어떻게 예수의 숨겨진 생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떤 고생을 하며 밝혀나가는지 성스러운 이 여행에 동참해 보는 것도
각자의 구도 여정에 있어 나름 의미있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목차
제 1 장 알려지지 않는 예수의 생애
-니콜라이 노토비치의 발견
-보병궁 복음서
-세속적인 자료들
-증인 바울
-나의 히말라야 여행
제 2 장 모세와 하느님의 자녀들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마누-마네스-미노스-모세
-모세는 누구인가?
-케시미르에 있는 모세의 무덤
-정복에서 유수(幽囚)까지
-이스라엘 자손들
-케시미르에서 홍수가 났다
-케시미르는 약속의 땅인가?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부족
-불교의 전파
-예수는 정통 유태인인가?
-붓다와 예수의 비교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불교사상
제 3 장 서양에서의 동양의 지혜
-동방박사의 별, 동방박사는 누구인가
-어떻게 신의 화신을 찾는가?
-예수의 이집트 피난
-나자렛파 예수 / 에세네파 /
-예수 이전의 기독교
-쿰란에서의 에세네파의 가르침
제 4 장 예수의 비밀
-예수의 비밀
-신약성서에서의 사후재생
-예수의 기적과 인도에서의 기적
-크리슈나와 그리스도의 유사성
제 5 장 예수의 죽음
-재판과 처형
-수의의 연대와 과학적 분석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부활
-바울,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를 만나다
제 6 장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예수 다시 동방으로 가다
-이슬람의 진정한 예수
-캐시미르에서의 예수
-슈리나가르에 있는 예수의 무덤
Written by mulder (2011.7.28)
네이버 리뷰 블로그 멀더의 다락방 서재 ( http://blog.naver.com/i33man )
마음공부 카페 명상 오컬트 아쉬람 ( http://cafe.naver.com/occultmuld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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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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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예수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않았다..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보병궁 복음서)
-교리해석 문제를 둘러싼 분쟁,
-성스러움은 유토피아처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개개인의 안에 있다.
-자아실현과 종교적 계몽을 위한 연구, 개개인의 존재들은 우주의 구성물로 하는
신비한 모든 것을 포함한 비전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은 관조, 자아성찰,
그리고 명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종교의 내면화에 대한 결정적인 힘은 동양에서, 특히 인도에서 비롯되었다.
동양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적 경험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즉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다시 동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악들은 사라지리라.
참으로 깨달은 자는 의연하며, 무명의 구름을 걷어 버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빛나듯이. <붓 다>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한다. 달라이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다.
-이사(Issa: 예수의 아라비아 이름 중의 하나)는 위대한 예언자로서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그 어떤 달라이 라마보다도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신(神)의 영적 본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도했고, 방황하는 영혼을 하느님의 가슴 속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창조주의 자비를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선(善)과 악(惡)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의 이름과 그의 공적은 우리의 거룩한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티베트의 라마승이 기독교인에게 한 말-
-영혼이 육체라는 조잡한 껍질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자
멀리 이스라엘에서 성스러운 아이가 태어나 이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열 세 살 되던 해
초에 상인들을 따라서 신드 지방(인더스강 유역)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완성시키고 위대한
붓다의 진리를 배울 생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땅에 즉, 아리안족들 사이에 정착했다.
어린 이사는 인더스강의 다섯 개 지류가 흐르는 펀잡 지방을 여행하고,
<미혹된 자이나교도들>과 잠깐 머문 후, 자가나트로 가서 그 곳에서 바라문교 사제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그 곳에서 이사(예수)는 베다(인도 종교경전)를 읽고 해석하는 법을
배운 뒤,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노예계급)에게 경전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지위와 권력이 위협 당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브라흐만 계급의 불만을 사게 된다.
그 후 이사는 성스러운 여러 도시에서 6년을 보내면서
카스트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 하느님의 기적은 우주가 창조되었을 때 처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매일 매순간 일어납니다. 그러한 기적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 중 하나를 빼앗긴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사는 히말라야산이 있는 네팔로 간 다음 그곳에서 6년(26세) 동안 머무르면서
불교경전 연구에 몰두한다. 그가 그곳에서 펼친 가르침은 간단하고 명료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핍박받는 사람들과 약자에게 사제계급의 위선과 불성실을 폭로한다.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어떠한 자료나 복음서의 이야기들도 첨예한 관건이 되고 있는
예수의 이 시기(대략 12살에서 30살 사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마치 예수의 삶이 그가 30세가 되던 해부터, 즉 그가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은 이후부터
시작된 듯하다. 누가복음에서만 다음과 같은 간결한 문구를 읽을 수 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누가복음 2장 52절)"
보병궁(寶甁宮) 복음서
-리바이의 유일한 저서 <보병궁 복음서: 1978, 안동민 옮김, 성음각>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12살부터 29살까지의 삶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리바이는 조용한 시간에 깊은 내적 명상 속에서 계시를 받는다.
그리고 아카샤(원시 본질)의 방법에 의해 기록을 하는데
히브리의 교사들은 이 아카샤를 <신의 기록책>이라고 불렀다.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예수는 자가나트 사원의 학생으로 받아들여져 마누법전과 베다를 열심히 공부한다.
-.예수는 그의 영리하고 깊이 있는 대답으로 스승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공공연한 비평으로 브라만들의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는 진리와 지혜와 권력과 이해와 신앙과 인간의 개념에 대해 철학적으로 연구한다.
-보병궁 복음서의 제 7부는 예수가 광대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티베트 지방으로 여행한
사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만약 예수가 실제로 인도에 간 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수정해야 할 것이다.
예수에 대한 자료는 이미 찾아낼 만큼 찾아냈으므로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활을 상상에 의한
추측으로 몰아 부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의 학문을 예수의 사실성(史實性)
연구로 향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2.복음서 들
오늘날 예수에 관한 전공논문은 적어도 십 만 부 정도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연구결과는 실망만을 줄 뿐이다.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자료들은
한결같이 예수가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반박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신앙서로서만 이용돼 있으며, 진정 객관적인 자료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예수의 정확한 탄생 년도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유력한 연도는 현재 추정하고 있는 해로부터 4내지 7년 전이다.
예수는 확실히 B.C. 4년에 사망한 헤롯의 치하에서 태어났다.
예수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은 가장 잘 알려진 복음서 속에서도 전적으로 무시되어 있다.
그렇지만 인생의 유년기는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그가 대중들과 함께 보낸 짧은 시간에 대해 애매하게 설명하는 가운데도
단지 몇 시간, 그리고 며칠간의 일상모습만이 묘사되어 있다.
당대의 역사가들은 예수를 아예 들어본 적도 없거나,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인물로 간주한 듯하다.
역사가들이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그 모든 공상적인 기적과 일상에서 벗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전혀 주목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유대 역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A.D. 93년경에 <유대 고대사>라는 훌륭한 저서를
발간했다. 그것은 창세기로부터 네로 황제의 치하까지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서술한 일종의 개괄서이다. 그는 세례 요한과 헤롯과 빌라도는 정치와 사회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예수에 관한 한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유대인 작가 유스투스는 예수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예수가 종종 체류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카버나움근처 티베리아스에서 살았다. 그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살았던 시대에 이르는
방대한 연대기를 썼으나 단 한 번도 예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유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학자 필로의 현존하는
기록은 다섯 권의 책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필로는 성서 기록과 유대교 분파에 관한 전문가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예수에 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복음>, 즉 <가스펠>의 그리스어는 <에반 첼리온>으로서 '복되고 즐거운 소식들'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기독교가 그것을 예수의 메시지에 적용시키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지상의 구세주>로서 불리어졌으며,
그의 생일은 <복음의 날>이라고 일컬어졌다.
현재의 기독교의 분열상은 가히 맹수들의 싸움과도 같다. 이러한 결과는 4권의 복음서와
편집과정에서 빠져버린 외경의 해석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성서를 다시 재구성해서 하나로 묶음으로써만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복음서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판별해 내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원문이 아니며, 도대체 그것은 원문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적이 있었는지를 나타내 줄 만한 증거조차고 없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A.D. 70년 이전으로,
마태복음에 수록된 것들은 A.D. 70년 이후로,
그리고 누가복음은 A.D. 75년에서 A.D. 80년 사이로 잡고 있다.
그리고 다른 복음들은 A.D. 100년경에 나타난 것으로 보여지며,
요한복음은 A.D. 110년까지에도 씌여 지지 않은 듯 하다.
-예수는 그가 메시아임을 밝히지 않았고
사실상,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였다(마가복음 8장 30절).
-오늘의 역사가들은 빌라도나 헤롯의 생애를 매우 상세하게 다시 기록할 수 있다.
당대의 다른 인물들, 특출난 사람들에 관한 자료도 풍부하다.
하지만 예수의 30세 이전의 삶에 관하여 현재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주석도
달려 있지 않은 몇 줄의 기록뿐이며, 그것들조차도 자료로 이용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16.예수의 비밀
교회가 예수의 생애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들을 재구성하게 해 주는 모든 증거물들은
파기해 왔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인가"(마태복음 4장 41절)
"예수께서는 자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마가복음 8장 30절)
"......자기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마가복음 1장 34절)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마가복음 5장 43절)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으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마가복음 7장 36절)
"......자기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마귀들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장 34절)
즉, 예수 제자들, 병이 나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귀신들까지도 그의 행적을 알리지 말고
침묵하기를 종용 받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을까!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 오너라 하셨다"(마가복음 9장 19절)
이로 미루어 보아 팔레스타인에서의 그의 체류가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언젠가는 인도로 돌아갈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그가 처음으로 공공연히 모습을 나타낸 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그의 나이 30세면 이미 그 지방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얼굴이 알려진 상태로
부친의 목공소 일을 하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이런 평범한 출신의 예수가
그토록 환영을 받아야 했을까?
그가 팔레스타인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그가 오랫동안 그 지방을 떠나 있다가,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가르침과 비범한 수완을 갖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25.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로마에서의 사형선고는 다음과 같이 내려진다.
<피고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라.> 십자가 형은 가장 굴욕적이고 잔인한 처형법이었다.
로마시민들에게는 이러한 처형법이 결코 행해지지 않았지만, 로마집정관하에 속박되어 있는
국가들에서는 저항세력을 잠재우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
한편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고, 돌로 쳐서 죽이기, 태워 죽이기,
목을 베어 죽이기, 그리고 목을 졸라 죽이기 등을 합법적인 사형형태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신을 모독한 자는 이미 죽은 뒤에도 나무에 매달 수 있었다.
이렇게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니…….(신명기 21장 23절)
십자가형은 분명히 안식일에는 집행될 수 없었다. 안식일은 그 하루 전인 준비일의 저녁부터
시작되었는데 바로 그 준비일 날이 처형이 집행된 날이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과의 불화를 피하기 위해 그들의 종교적 관습과 습성을 묵인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형집행은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이루어졌다. 십자가형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그 고통이 오래 지속되는 형벌이었다. 그러나 이 집행의 궁극적 목적은 처형자들 이외의
또 다른 저항세력과 선동자들을 축출하는 데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가 손목만으로 체중을 지탱할 경우, 대 여섯 시간 후에 초래되는
그의 죽음은 심한 출혈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아마 질식으로 인한 것이기 쉽다.
십자가형과 같은 상황에서의 신체 상태를 보면 심한 호흡곤란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빠른 사망을 막기 위해서, 처형자의 발밑 높이에 작은 보조디딤대를
수평으로 설치하여, 기력이 남아 있을 동안 버티게끔 하였다.
그러나 예수 발의 상처로 미루어 볼 때, 이 디딤대는 설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다만 발에 박은 못으로만 지탱하여 질식을 막았던 것 같다.
희랍 정교회에서는 십자가형에 항상 작은 디딤대가 설치되기 마련이다. 때로는 임시 의자로
사용되기도 하는 <사제석>이 죄인의 뒤쪽에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일시적인 고통을 덜어
주기는 했지만, 그 고통은 더욱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네로 황제의 궁중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생명을 잃어간다.
(에피스툴래 101장 14절)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6번째 시각인 정오에 십자가에 못 박힌 후 9번째 시각인 오후 3시에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후 해질 무렵인(누가복음은, 삼중성이 안식일의 시작을 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녁 6시에는 완전히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어 그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다.
복음서의 설명이 맞다면 적어도 3 시간 동안 죽은 채로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십자가형을 받을 때는 대게 처형자의 발밑에 기록판을 설치하여 죄인의 이름과 죄명을 알린다.
예수의 기록판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아람어로, <예수, 나자렛파, 유대의왕>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면 보통 라틴어 표기로 약자인
INRI -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 만을 쓰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에 대한 죄명이 그가 나자렛파였다는 것이다.
더욱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가 3시간 후에 사망했다는 것인데,
나자렛파들은 에세네파와는 달리 금욕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마태복음 11장 19절)
79kg의 예수가 그토록 연약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요한복음은 예수와 같은 날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그 날은 과월절 준비일이었다. 다음날 대축제일은 마침 안식일과 겹치게 되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시체의 다리를 꺾어
치워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병사들이 와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차례로 꺾고……(요한복음 19장 31∼32절)
결국, 그때 처형된 강도 두 명은 다리가 부러져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질식사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에게 가서는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요한복음 19잘 33절)
예수의 명백한 죽음에 대해 29절과 30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꿔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복음 19장 29∼30절)
그 신 포도주가 예수로 하여금 곧바로 <숨을 거두셨다>에 이르게 하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 신 포도주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신 포도주는 냄새를 풍기는 소금같이 자극적인 효능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배를 젖는
노예들에게 원기를 북돋게 하는 강장에로도 사용되었다. 병자에게는 이것을 먹여 기운을
솟구치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반응은 그 정반대인 것으로 나타난다.
신 포도주를 마시자마자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숨졌다.
생리학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사형에 처해지는 죄인에게 몰약과 향을 섞은 포도주를 주어 가벼운 마취효과로서
고통을 덜게 하는 것은 분명히 유대의 관습이다. 탈무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처형되는 자에게는 포도주와 함께 향료가 주어져 그가 의식을 잃게 하였다.
로마군병들은 마취성 음료를 예수에게 마시도록 허용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들 중 누군가가 그것을 예수에게 복용하도록 도왔다
(마태복음 27장 48절, 마가복음 15장 36절, 누가복음 23장 36절, 요한복음 19장 29절).
인도의 그 신성한 즙액 음료인 소마즙을 접한 사람은 며칠간을 죽은 듯이 지내다가
그 후 수 일 후에는 원기왕성한 상태로 깨어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종교적 무아경에서
고도의 자각의식이 표출되어 새롭게 얻어진 힘을 과시하게 되었다.
소마즙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스클레피아스 아키다와 대마, 그리고 또 다른 약용식물들이
이용되었다(조로아스터의 음료와 그 처방법이 비슷하였다).
로마의 지하무덤 카타콤에 있는 초기 기독교도들의 무덤 근방에 가면 인도의 이런 식물들에
대해 알 수 있다. 바로 그곳에 아스클레피아스 아키다가 긴 모양의 과일들을 가지각색으로
달고 있는데,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아버지여(아바Abba),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가복음 14장 36절 ; 마태복음 26장 29절; 누가복음 22장 42절)
예수께서는 마음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굽히지 않고 더욱 열렬하게 기도하셨다.
그러는 동안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다.(누가복음 22장 44절)
죽음을 눈앞에 둔 순교자라면 철학적 명상과 더불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호소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였다.
즉 십자가형은 결코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가 그렇게 슬퍼할 만큼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
(이후의 일들이 증명 되듯이).
세 편의 공관 복음서에서는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크게 소리내어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완전히 지친 상태에서, 그것도 대부분의 의학 전문가들이 사망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는 질식상태 직전에서 그와 같이 크게 소리 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만일 예수의 시신이 유대의식에 의해 매장되었다면 시체는 먼저 따뜻한 물로 씻겨졌을 것이다.
그런 후, 연고와 발삼으로 칠해지고 부패를 지연시키기 위해 모든 인체의 구멍을 보하게 된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알몸에 한 번 더 옷을 입히게 된다. 그런데 안식일이 이미 시작되어
매장의식을 하는 것은 위법이므로 이 의식을 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분명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미시나 샤베트 트렉테이트》
23장 5절에 따르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에 대해서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의 매장에 관계된 사람들은 유대의 규율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예수는 3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죽은 채로 있어야 했다.
이로 인해 생긴 결과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사망에 관련된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망 후에는 근육이 경직되는 과정이 따르게 된다.
이 과정은 사망 후 30분 후에 시작되어 주위의 온도에 따라 3~6시간 후에 끝나게 된다.
---온도가 높으면 속도가 훨씬 가속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의식을 잃은 후, 몸 전체가 아래로 축 처지게 되었다.
(발에 박은 못으로 지탱한 채). 따라서 다리가 심하게 구부러졌다.
결국 전체 하중이 손에 박힌 못에 의해 지탱되었다.
머리는 앞으로 떨구어져 턱이 가슴에 와 닿았다.
3∼4시간 후, 이런 상태에서 그의 몸은 당연히 경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의(壽衣) 위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등과 머리 그리고 넓적다리와 정강이까지
수의(壽衣) 위에 아주 평평하게 눕혀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스테리 - 예수의 결혼 - '예수, 그는 과연 십자가에서 죽었을까'에서 그림 참조).
팔의 모습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양팔은 마치 처형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듯 보인다.
어느 수의(壽衣) 연구 전문가들은 아마 두 손목이 묶여 있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일 손목이 묶인 상태라면 손바닥에서의 출혈의 흔적을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로마의 수의(壽衣) 연구 센터의 연구원인 몬시뇨리 줄리오 리치는
이 문제에 대해 역시 비슷한 제안을 하고 있다.
경직되어 구부러진 몸을 수의(壽衣)로 단단히 쌓서 밴드를 부착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역시 이 설명에도 문제는 있다. 왜냐하면 수의에 있는 자국으로 미루어볼 때,
수의는 몸 아래 위로 곧게 평평히 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신체상의 심한 굴곡이 확연히 드러났을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로부터 내렸을 때 명백히 사후경직이 없었다는 사실로 보아
그가 죽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더욱 유력한 증거는 세마포 위에 나타나 있는 핏자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의에는 분명히 다른 두 가지 형태의 핏자국이 있다――
- 십자가형 중에 흘렸던 말라붙은 피와
- 집행 후에 수의 위에 수평으로 눕혀진 뒤에도 계속 흘려서 남은 새로운 핏자국!
우선 머리에서의 출혈을 보자. 예수의 머리 위에 씌어졌던 가시면류관의 날카로운 가시는
얇은 머리 가죽 위에 작지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것을 머리 위에 쓰고 있는 동안,
지름 1∼2mm의 상처가 선명히 새겨졌다. 가시 바늘 주위로 스며나온 소량의 피는 곧 응고되어
머리카락 주변에 뭉쳐 있게 되었는데 수의에 나타난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수의 위에는 사방 팔방으로 퍼져 나간 마른 핏줄기의 자국이 남아 있다.
면류관이 벗겨지고 시체가 세마포 위에 눕혀지기 전까지는 이 피들이 수의에 묻지는 않았다.
머리 가죽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계에서 피가 공급되는 매우 가는 혈관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심장이 멈춘다면, 피하의 모세혈관으로부터 약간의 피가 빠져나가게 된다.
(순환계에서의 반대압력 때문에 피는 더 이상 심장과 같은 혈압은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안색은 <죽은 듯이 창백>해진다.
사망한 뒤에는 내부 혈관의 응고로 인해 그와 같이 작은 상처에서는
더 이상의 출혈이 있을 수 없다.
세마포 전면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면 앞 이마 옆으로 세 갈래의 출혈 자국이 나타난다.
이 특이한 모습은 우리가 쿠션에 기대어 있을 때와 같이 머리를 다소 기울이고 있을 때에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 끈적한 피는 출혈이 계속됨에 따라 앞이마의 첫 번째 주름살까지
뻗어 있었고, 거기서 다소 퍼진 뒤 계속 해서 두 번째 주름까지 이르고 있었다.
역시 가시면류관에 의해 생긴 앞이마의 상처는 눕혀진 자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상처이다. 시체의 다른 더 큰 상처에서 출혈이 일어난 상태라 할지라도,
누워 있는 신체상의 가장 높은 지점인 앞이마까지 피가 흘러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마에서의 그와 같은 출혈은 원활한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요한복음 19장 34절)
군병이 창으로 찔렀다는 내용은 그리스 성경 원본을 번역 하면서 왜곡되었음을 주지해야 한다.
불가테(4C에 된 라틴어 역의 성서)의 역자들 조차도 원문을 오역하였다.
희랍어 동사는 단지 가볍게 긁거나 찰과상을 입히는 것, 혹은 찌른다는 의미를 보여줄 뿐,
힘 있게 찔러 깊은 관통상을 입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길이 4.5cm의 상처에서
그 경위에 대한 약간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 당시 로마군병들이 사용한 창은 일반적으로는 <헤스타>또는 <필럼>이었는데,
25∼40cm 길이의 얇은 날에 손잡이 부근이 넓적한 형태였다.
그처럼 송곳 같은 날을 이용해 더 이상 반응을 하는 가를 알아보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행위였고, 아마도 복음서에 언급된 처형장의 감독이
그 확인을 한 것 같다. 만일 숙련된 병사가 이 일을 맡아 했더라면
오른 쪽 가슴이 아닌 왼쪽 심장을 관통시켰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묘사된 <피와 물>에 대해서도 수많은 이론이 있어왔다.
물은 아마 혈액의 성분 분해가 시작되면서 생긴 단순한 혈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분 분해현상은 사망한 뒤 적어도 6시간은 지나야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부활
예수의 처형과 매장에는 <새로운 연약>의 일원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관계되어 있었다.
매우 중대한 결과를 낳게 한 신 포도주를 예수에게 주었던 로마의 백부장(百夫長),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그를 찔렀던 군병,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백부장,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마태복음 27장 54절, 마가복음 15장 39절, 누가복음 23장 47절)>,
이 세 사람 모두가 동일한 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빌라도의 외경에는 백부장이 십자가형을 책임지고 감독하는 롱기누스로 언급되어 있다.
희랍의 전설 <롱기누스의 순교>에서는 그를 카파도시아의 샌드라엘에서 온 골고다의
총독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무덤을 감시하는 군병들을 감독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니사의 그레고리 교리서에 따르면 롱기누스는 부활이 있은 후에 상으로 그 귀중한
수의(壽衣)를 받았으며, 카파도시아 주교의 성지의 성직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예수를 처형시키게 한 적(敵)에서 기독교 주교로의 신분변화는 이미 처형이 있기 전부터
백부장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어떤 교섭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처형장에서 군병들을 지휘하기는 했지만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자신의 감정을 위장한
한 로마의 관리가 그 당시의 십자가형을 관장했다고 생각해 보면, 십자가형을 둘러싼
그 모든 신비스러운 일들의 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더 이상 지나치게 과장된 공상물로만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에세네파인들은 노련한 치료사였으며 외국의 약품과 놀라운 치료방법 등에 익숙하였다.
아직까지도 알로에즙과 물약은 외상을 치료하는 데 효과적인 약으로 여겨지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는 구약에서 아바림 abarim이라고 불리며 얇게 갈아 향내 내는 파우더로 쓰기도
하는 소위 알로에나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 잎이 넓은 나리과(科)의 식물로부터
얻은 약용 알로에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의약용 알로에의 진은 B.C.2∼3천년 가량부터 인도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디오스커라이드와 대(大) 플리니에 따르면 처음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었던
대부분의 알로에즙은 인도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 후 증세에 접어들면서 상처에 바르는 연고로 유럽에 소개되었고,
오늘날에는 동종(同種)요법 치료에 계속 사용되고 있다.
사흘 후 몇몇 여인들이 무덤에 접근하려 했다.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야곱의 어머니인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를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에게 발라 주기 위해 향유를 지니고
왔었다고 한다.
- 마태복음에서는 두 여인이 무덤에 왔었다고,
-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라만이 왔었다고 전한다.
- 흰옷을 입은 천사의 수가 다르다는 점 외에,
- 네 복음서에서는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점에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천사라는 것은 항상 흰 옷을 입는 에세네파 사람이었을 것이다.
에세네파 사람들이 이 신비스런 사건의 비밀을 지닌 유일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부활이 있기까지의 정확한 기간을 확인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대두된다.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이에 사흘이 경과했다고 하나, 3이라는 숫자는 과거의 부활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신비적인 수이다. 아마 예수는 더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그 후 차츰 그의 추종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여튼 그를 접촉한 자들은 매우 적은 수였고 만났더라도 은밀히 만났던 것 같다.
분명히 예수는 공공연히 나타날 수 없었다. 곧바로 다시 붙잡힐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부상이나 기적적인 회생이, 혹은 대단히 성스러운 모습이 그의 외관을
다소 바꾸어 놓았을지라도----사실 이로 인해 그의 측근들도 예수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제자들은 낙담하여 종교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그들의 전직으로 돌아갔다.
(시몬 베드로, 도마,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은 어부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