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집안 역사(도예종 열사님이 저의 작은할아버지 되십니다.)를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고 죄송합니다.
억울하게 독재자의 손에 희생당하신 그분들의 정신 계승, 진상 규명, 명예 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회원 여러분에게 글을 올립니다.
4월 9일 4.9통일열사의 묘소인 칠곡 현대 공원 가는 길, 차창 밖으로 잔득 흐린 날씨지만 봄이 한창이다.
우리역사 속에서 4월하면 흔히들 4·3 제주 항쟁과 4·19혁명을 떠올린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역사, 이른바 ‘인민혁명당사건’(이하 인혁당 사건)이 있다. 불행한 시대, 금기에 도전했던 그들의 삶을 찾아가는 것은 그 금기에 대한 도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가야할 길은 아닌가하는 생각에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곳이라 불리는 대구. 하지만 대구가 우리 현대사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보수적인 곳은 아니었다. 대구는 해방기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사회운동이 왕성하던 곳이다. 1946년 10월 미군정에 강력하게 반대해 일어났던 ‘10월 항쟁’과 분단 이후 최초의 집단적인 시위인 학생 데모가 일어난 곳도 대구였다. 전국을 지도할 만큼 선진적이었던 학생운동과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던 대구의 교원노동조합도 그것을 증명한다. 활화산처럼 들끓었던 대구경북지역이 사회문제에 대해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곳으로 싸늘히 식은 것은 두 차례의 ‘인혁당사건’때문이 아닐까?
1964년 일어난 1차 인혁당 사건은 굴욕적 한일회담을 강행하던 박정희정권이 ‘6·3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낸 전형적인 정치적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선로동당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으로 발표 하지만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들은 고문에 의한 조작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공소를 유지할 수없다며 기소를 거부하다 사표를 냈다. 초유의 ‘검찰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세칭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불리는 2차 인혁당 사건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지르고도 간신히 김대중 후보를 이긴 박정희정권이 불안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위해 만들어낸 사건이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의 시위로 촉발된 반유신 투쟁이 1974년 봄 개강을 통해 전국적 시위로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 박 정권은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이하민청학련)’사건을 발표했다.
민청학련 배후에는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지만 인혁당의 조직 결성을 나타낼만한 강령, 규약, 조직, 문서 등이 없자 관련자들의 진술을 유일한 증거로 삼고 무리하게 전기고문, 물고문등으로 사건을 조작한다. 심지어 “국가변란을 획책하여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하 지 않았느냐” “인혁당재건위를 결성한 사실이 있느냐”등의 주요 혐의 사항에 대해 관련자들은 부인했으나 시인한 것으로 공판조서를 날조해 죽음으로 몰아갔다.
1, 2차사건 모두 주모자로 몰려 불귀의 객이 되신 도예종선생님은 1924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구대학교 경제학 강사를 지냈다. 상주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던 중에 4·1 9를 맞은 그는 경북 영주군 교육감 선거에 나가 당선됐으나 민주당 정권에 의해 젊다는 이유로 발령을 받지 못했다. 이후 민주 민족청년동맹에서 경북간사장을 맡아 일하다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됐으며 출소 후 뚜렷한 공식 활동 없이 회사생활을 하던 중인 1974년‘인혁당재건단체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유명을 달리했다.
도예종 열사의 부인이신 신동숙 유가협 회장은 이렇게 그 시대를 회고 한다.
“그 세월을 어떻게 말로 다합니까….
도선생님이 잡혀간 뒤 몇 번이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남편은 빨갱이다’라는 조서를 쓰라고 강요당했습니다. 고문도 말도 못하게 당했죠. 하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경찰들이 동네주민들에게 ‘간첩 가족’이라고 소문을 내 아무도 저와 얘기하려고 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공안 정국만 되면 중정에 끌려가서 고문당해 혈변과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시며 몸저 누우신 기억이 납니다.)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는 신 여사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도 선생님,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분이었죠. 책 읽는 걸 좋아해 어떤 땐 아침에 밥상머리에 앉아 꼼짝 않고 저녁까지 책을 읽곤 했습니다. 밥상에 반찬 한 가지만 있어도 군말 없이 수저를 들만큼 검소한 분이기도 했고요.”
도예종 선생은 ‘더불어 사는 것’을 중시했다. 신동숙 여사가 구미의 아천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주인집에서 불이 났는데 셋방살이하던 신여사는 놀라고 무서워 자기 짐 몇 가지만 챙겨 몸을 피했다. 그 얘기를 들은 도선생님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쳐 나오면 되느냐”라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평화통일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얘기한 것이 박정희정권에겐 그렇게도 용납 못할 일이었는지….” 신 여사는 꼭 ‘도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조국을 위해 살다간 도예종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라고 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신동숙여사. 원망이 생길 법도하다.
“주변에서 재혼하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았죠. 하지만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위해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껏도 선생님에게 누가 되지 않게 살려고 애썼는데 그게 억울하게 먼저 간 그분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될른지요? ”
4월 9일 오후 1시, 2.28 기념공원에서 ‘4·9 통일열사 30주기 추모제를’을 마친 유족과 추모제 참가자들은 미리 준비된 버스를 타고 경북 칠곡에 자리한 현대공원묘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추모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격세지감을 얘기했다. 입 밖에도 내지 못하던 인혁당 사건을 공식적으로 추모하게된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 있은 후인 1989년 경북대에서 였다.
하지만 경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에 세운 추모비는 경찰이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철거할 만큼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추모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2002년 4월 5일에는 대구 시내 한복판인 중앙파출소 앞에서 시민대회도 열고 인혁당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시청에서 가졌고 올해의 30주기 추모제를 이렇게 성대하게 열수 있을 줄이야 몰랐다는 것이다.
1시간쯤 달렸을까. 버스는 현대공원 묘역 입구에 다다랐다. 하지만 곡절 많은 사연 때문인지 묘역 입구에 닿고도 버스는 구불구불한 비포장 길을 몇 번이나 돌아서야 겨우 희생자들이 누워 있는 5번 묘역에 닿을 수 있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무덤들 속에서 인혁당 희생자들의 무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또 놀라는 일이 일어났다. 김근태 장관이 먼저와 유족들과 참배객을 격려하고 위로 하고 있는 것 이었다.
김근태 장관은 여기에서 인혁당 사건 30주기를 맞는 소감에 대해 "30년이 된 사건이 아직도 진실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민주주의 수치"라면서 "억울한 목숨이 대법원의 사형 판결 다음날 집행된 것은 정치적인 사형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조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인혁당 사건의 해법과 관련해 김 장관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정원이 진실과 화해를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지만 더욱 과거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면서 "진실이 규명된 토대 위에서 가해자가 진정한 반성을 해야한다"고 밝혔다.
일부에서 제기되는 박근혜 대표의 사과 주장에 대해서 김 장관은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지금으로서는 박 대표가 직·간접적인 연관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책임질 일은 없다고 본다"면서도 "하지만 과거 유신독재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지 밝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추모제를 준비한 대구지역 사회단체간부들의 안내로 ‘통일열사’ 도예종·하재완· 여정남이라는 검은 묘석이 세워진 무덤 앞에 도착했다. 송상진 열사의 묘는 한 줄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는 나란히 묘자리를 쓰려고 했는데 땅이 없어 위로 가게 됐다고 한다.
‘4·9 통일열사 30주기 추모제’라고 적힌 현수막을 거는 동안 향불이 피워지고 잔 8개가 무덤 앞에 놓였다. 한 사람 한사람 이름을 낮게 읊조리며 잔을 채우고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아 고생하셨던 전창일 선생님은 전 날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열린 추모제에서의 조사를 직접 해 주셨다. 이 분들과 사과, 돼지고기, 떡등의 제물을 차려 놓은 뒤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회를 보는 김찬수님의 진행에 따라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 묵념과 절을 올렸다.
김근태 장관이 마지막 잔을 올리는 순간 대경 민자통 의장이신 류근삼 선생님은 김장관에게
“국가보안법 폐지 않으면 장관이고 정치인이고 없어요”하시면서 보안법 폐기를 강력히 주문 하셨고 이에 김장관은 "이러다 또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거 아니지 모르겠다"고 말해 주위 사람들이 웃겼다. 또 다른 참석자는 “하시는 일 모두 이루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힘써 주시고 민족통일을 위해 힘써 달라"고 말했다. 예년과 달리 30주년 추모제는 엄숙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 할 수 있는 자리였다.
8인이 희생된 1975년 4월 9일은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협회가 명명한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다. ‘인혁당재건단체 사건’에 연루된 도예종선생님등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확정이 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19시간 만에 그것도 동이 터기도 전인 신새벽에 사형이 집행됐다. 일반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면 구치소에서 가족에게 처형 사실을 알리고 사체를 인계하는 것이 관행이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 가족들은 라디오를 통해 처형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1975년 4월 9일 아침 관련자 가족들은 여관방에서 재심을 어떻게 청구할 것인가 대책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시쯤 라디오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절망에 빠진 가족들을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은 것은 장례식도 온전히 치르지 못한 것 이었다. 박 정권은 서울 천주교 응암동성당에서 장례식을 가지려는 대구지역 관련자가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제로 대구로 사체를 이송했다. 그것도 모자라 박 정권은“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라고 한 도예종 선생님의 유언을 “조국이 하루 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조작하기까지 했다.
평소에 늘 존경하고 깊이 따르면서 모셨던 분들,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분들, 갈라진 조국을 가장 슬퍼했던 분들, 반민족 세력을 가장 미워했던 분들이 1975년 4월 9일 독재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열사들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염원의 지극히 높고 아름답고 존경스런 정신을 이어 받읍시다. 열사님들의 염원인 조국의 완전한 통일과 민족의 자주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겠습니다.
중음신이 되어 떠돌고 있는 8인의 혼백들을 불러 모으는 향불이 지긋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추모객들은<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뜨거운 맹세만 남기고 그들은 갔는가? 주먹을 움켜쥐고 노래를 부르던 이들 중에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 속에 참배객들의 헌화와 참배가 이어 졌다.
추도식에 참석한 사회단체 회원들은 진상을 제대로 밝혀 재심에서 꼭 승리하고 밝은 모습으로 다시 묘소를 찾을 것을 다짐했다.
추도식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차려진 제물로 음복을 하면서 그때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현대공원 5묘역에는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8인의 시신 중 4인의 시신만이 자리잡고 있다. 나머지 희생자들은 각기 고향인 경남 창령(서도원), 의령(이수병), 함양(김용원), 서울(우흥선)로 뿔뿔이 흩어졌다. 현대공원에 묻힌 이들도 다 뿔뿔이 흩어질 뻔한 것을 신동숙, 이영교 여사 등이 의논을 해서 경찰 모르게 한 사람씩 무덤을 만든 것이다.
신동숙 여사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무덤을 만들면서 묘비에 ‘민주투사 누구 누구’라고 쓰려다가 안될 것 같아 ‘민사 누구 누구’라고 썼습니다. 경찰이 우리가 무덤을 모아놓은 것을 알고 찾아 와선 ‘민사가 뭐냐?’라고 다그쳐서 ‘민간인이 죽어서 민사다’라고 얘기해 줬죠. 그런데 비석글씨를 쓸 때 맡겨놓은 원본이 들켜 경찰이 비석을 다 뽑아 버렸죠.”
그 뒤 20년 동안 비석 없이 지내다 지금의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95년. 시인 배창환이 글을 짓고 김병길선생이 글씨를 새겼다. 연관된 사건인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활동은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되어 당시의 활동에 대한 보상까지 이뤄졌지만 불의에 희생된 8인의 인사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민청학련과 당시의 학생운동이 민주주의의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면 인혁당 관련자들은 그 뿌리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화려한 꽃과 단디단 열매의 맛에만 취해 뿌리를 잊어선 안될 일이다.
근처 다른 묘역에 있는 전 민주주의민족통일 대구경북연합 이영기 의장님의 묘소와 류한종님등 다른 민주 투사의 묘소를 안재구교수님(전 경북대 교수, 세계적인 수학자, 남민전사건), 류근삼님(대경 민자통 의장), 전무배님(전 민족일보기자, 1차 인혁당사건), 전창일님(통일연대 고문, 2차 인혁당사건)등과 같이 참배하고 어둠 내릴 때 묘역을 내려왔다.
8인의 희생자들이 간지 30년, 그들이 바라던 자주통일의 세상을 아직 만들지 못한 탓인지 추모제에 참가한 분들은 쉬이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겨진 자의 짐이 너무 무거운 탓일까. 아니면 먼저 간 열사들의 빈자리가 아쉬운 탓일까.
첫댓글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고인들의 영혼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야 공개적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니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암흑속에서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대구의 중심가에서 시민대회도 열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도 했다니 생각할 수록 슬픔과 분노심이 치솟네요...
박정희를 지지하는 분들은 유신 망령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글에서도 밝혔지만 죽은 사람의 비석에 비문도 새기지 못하게 했던 박정희는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그런데도 여론조사 때마다 박정희가1위를 하고 있으니 우리 국민들 고생좀 더해야 정신을 차릴 모양입니다..오죽하면 이렇게 몹쓸 생각까지 하겠습니까..ㅠ
개인적인 아픔을 지닌 초석님게 먼저 위로를 드립니다.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분들 덕분에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세상이 되었음을 새삼 다시 느낍니다. 아직도 사회전반에 걸쳐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국민들이 다른 생각하지 못하도록 엉뚱한 이슈만 부각시키고 있으니...
첫댓글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고인들의 영혼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야 공개적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니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암흑속에서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대구의 중심가에서 시민대회도 열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도 했다니 생각할 수록 슬픔과 분노심이 치솟네요...
박정희를 지지하는 분들은 유신 망령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글에서도 밝혔지만 죽은 사람의 비석에 비문도 새기지 못하게 했던 박정희는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그런데도 여론조사 때마다 박정희가1위를 하고 있으니 우리 국민들 고생좀 더해야 정신을 차릴 모양입니다..오죽하면 이렇게 몹쓸 생각까지 하겠습니까..ㅠ
개인적인 아픔을 지닌 초석님게 먼저 위로를 드립니다.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분들 덕분에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세상이 되었음을 새삼 다시 느낍니다. 아직도 사회전반에 걸쳐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국민들이 다른 생각하지 못하도록 엉뚱한 이슈만 부각시키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