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순식(王順式)은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사람이다. 본 고을의 장군으로 있으면서 오래 동안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태조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시랑(侍郞) 권열(權說)이,
“아버지로서 아들을 가르치고 형으로서 아우를 훈계하는 일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왕순식의 아비 허월(許越)이 지금 승려로 내원(內院)에 있으니, 마땅히 그를 보내어 아들을 깨우치도록 하옵소서.” 라고 아뢰니, 태조가 그 의견을 따랐다.
이에 왕순식이 맏아들 왕수원(王守元)을 보내어 귀부하자, 왕씨(王氏) 성을 내려주고, 토지와 집도 주었다. 또한 아들 왕장명(王長命)을 보내어 군사 6백 명을 거느리고 입경하여 숙위(宿衛)하게 하였으며, 뒤에 자제들과 함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입조하므로 왕씨 성을 내려주고 대광(大匡)으로 임명하였다.
왕장명에게는 왕렴(王廉)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원보(元甫)로 임명하였으며, 소장(小將) 관경(官景)에게도 왕씨 성을 내려주고 대승(大丞)으로 임명하였다.
태조가 신검(神劒)을 토벌할 때, 왕순식은 명주에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 적과 접전하여 격파시켰다. 태조가 왕순식에게,
“짐이 꿈에 이상한 승려가 갑사(甲士) 3천 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튿날 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는 꿈이 들어맞은 게요.”라 하니 왕순식이,
“신이 명주를 떠나 대현(大峴 : 지금의 강원도 대관령)에 이르자, 이상한 승려의 사당이 나타났으므로 제사를 모시고 기도드린 일이 있었는데, 주상께서 꿈꾸신 것은 분명히 이것일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므로 태조가 기이하게 여겼다.
이총언(李悤言)·견금(堅金)·윤선(尹瑄)·흥달(興達)·선필(善弼)·태평(泰評) 등도 모두 태조에게 귀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