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은 충절의 고장이라고 한다. 다른 어느 고장보다 충신열사가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으뜸을 꼽으라면 포은 정몽주 선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개성 선죽교에서 충절의 피를 뿌렸고 용인에 잠든지 600여년이 지났다. 선생의 절의와 도학은 용인정신의 바탕이 되어 지금도 면면히 용인땅에 흐르고 있다.
선생의 묘소가 용인에 정해진 이후 후손들이 들어와 세거하여 용인지역의 유력한 명문이 되었는데, 선생의 음덕을 생각하면 후손들이 번성을 이룬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지주사공파와 감무공파로 대별
▲ 충렬서원
영일 정씨의 시조는 신라 때 호장이었던 종은이다. 또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정씨들은 신라초기 사로육촌의 촌장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지백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은은 지백호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세계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종은의 후손 또한 계보가 실전되어 고려 인종 때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습명을 시조로 하는 지주사공파와 정극유를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로 크게 나뉘며 자피를 시조로 하는 양숙공파가 있다.
지주사공파의 시조인 정습명은 패랭이꽃을 노래한 ‘석죽화’라는 시를 지어 인종으로부터 “아직도 사마상여(중 국 한무제 때의 문인)가 있었단 말인가?”라는 극찬을 듣고 중용되었다고 하는 인물이다.
지주사공파의 후손 가운데 포은 정몽주 선생이 으뜸이고, 감무공파에서는 조선시대의 송강 정철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두 집안 사이엔 항렬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본관만 같을 뿐 족보나 종친회 활동과 같은 것을 따로 하고 있다.
영일 정씨가 배출한 인물을 들면 단연 포은 선생이지만 선생의 9대손 유성이 헌종 때 우의정에 올랐고 청빈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하곡 정제두는 강화학파의 태두로 주자학 일색이던 당시 사회에 지행합일의 양명학을 일으켰다. 양명학은 조선사회에서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어 탄압을 받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를 무릅쓰고 학문에 정진한 기개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또 감무공파의 후손으로 송강 정철이 유명하며 특히 가사문학의 발전에 큰 자취를 남겼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예
임고서원 포은영정
용인지역에 세거해온 영일 정씨는 대부분 습명의 후예인 지주사공파의 후손들이다. 주로 모현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하여 유력한 가문을 형성하였는데 일부는 용인이나 청덕동, 광주 등지로 이거하기도 했다.
영일 정씨가 모현 일대에 세거하게 되는 것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가 모현면 능원리에 있기 때문이다. 포은 선생은 선죽교에서 순절한 뒤 처음에는 풍덕에 장례하였다가 신원된 뒤 고향으로 천장하였는데, 상여가 수지 풍덕천을 지날 때 명정이 날려 떨어진 곳이 선생의 유택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러나 영일 정씨가 실질적으로 용인에 정착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은 선조 이후라고 한다. 특히 포은 선생의 손자인 설곡 정보가 단종복위운동의 주역인 사육신을 옹호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는 사건도 영일 정씨가 뒤늦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
설곡 정보는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사헌부감찰로 있을 때 사육신과 더불어 벗으로 사귀었으며, 사육신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는 분개하여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서매가 한명회의 첩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누이를 찾아보고 “명회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누이가 “대궐에서 죄인들을 국문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내가 하는 말을 그에게 전하라. 명회는 만세의 죄인이라 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한명회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왕에게 아뢰니 세조가 친히 그를 국문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나는 항상 성삼문, 박팽년을 정인군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말을 하였다”고 하였다. 왕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수레로 찢어 죽이는 형벌(거열형)에 처하도록 명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저 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정몽주의 손자”라고 대답하니 왕은 급히 명령을 내려 이를 중지시키면서 이르기를 “충신의 후예는 차마 죽일 수 없다”고 하고는 마침내 영일로 유배하였다.
그러나 유사가 영일은 그의 관향지이니 그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은 불가하다고 건의하여 다시 단성으로 옮기니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만약 설곡 정보가 사육신에 연루되어 화를 입지 않았다면 영일 정씨의 입향과 정착은 더욱 빨랐을 것이 틀림없다. 또 아무리 포은 선생이 만고의 충신이라 하더라도 왕조시대에 조정의 공식적인 평가와 예우가 없이 백성들의 칭송만으로는 후손들의 관계진출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정철수 유고집-한 학도병이걸어온 길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시로 했던 왕조이다. 비록 포은 선생이 왕조 개창에 반대했지만 국가가 안정되고 성리학이 뿌리를 내릴수록 충과 효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고 이와 비례하여 포은 선생에 대한 평가와 예우가 높아졌다고 생각된다. 실제 후손들이 이런저런 제약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것은 숙종 때 사패지를 받고 난 이후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주요 3대 소파
포은 선생의 6대손인 진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 아들 응선의 후손들은 별좌공파, 둘째 명선은 판서공파, 셋째인 종선은 포천현감을 지내 포천공파를 이루게 된다. 이후 다시 여러 소파로 분파되는 등 문중이 번창을 이루게 되지만, 크게 보면 위의 세 파를 중심으로 용인일대에 서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종손인 응선의 후손들은 주로 모현면 능원리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지를 형성하였고, 둘째인 명선의 후손들은 고개 너머 기흥구 청덕동으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이루게 되고 능원리에는 일부만 남게 된다. 셋째인 종선의 후손들은 모현면 왕산리 왕곡마을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는데 종선의 손자인 지한이 왕곡마을로 이주한 이후 능원과 더불어 대표적인 영일 정씨 세거지가 된다.
위의 후손들 가운데 일부는 처인구 남동 동진마을이나 광명시 철산동, 여주 대신면, 평택, 진천, 소래, 심지어는 울산, 영천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이거 정착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인의 영일 정씨는 모현을 중심으로 세거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연안 이씨와 해주 오씨, 진주 류씨, 전주 이씨 등과 통혼하면서 명문의 위치를 지켜왔다. 그중에도 연안 이씨와의 관계가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은 선생과 증손주 사위인 저헌 이석형 선생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포은 선생 절의의 실천 애국지사 정철수
용인의 영일 정씨가 배출한 인물 가운데 무엇보다 포은 선생의 종손인 철수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포은가의 대종손이면서도 일제의 강제에 의해 일본군에 끌려가자 산동성 제남에서 탈출을 감행, 항일투쟁에 평생을 바쳤는데 학병 가운데 탈출 1호라고 한다. 팔로군지역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공산진영에서 주로 활동했고 중국에 정착했다가 1980년대에 귀국했다. 하지만 광복군지역으로 탈출했다면 또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외에도 우국지사 정일영, 의병 정철화가 포은 선생 절의의 맥을 이었고 효자 정한영이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 정덕화는 용인지역 유림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였고 정운영은 모현농협 초대 조합장으로 농협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정춘영 또한 모현농협 조합장을 지냈고 영일 정씨 포은공파 이사장을 맡아 종사에 헌신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선생의 묘역에서 포은문화제가 열린다. 이미 10여회를 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제로 자리잡았고 금년 봄에는 대한민국축제콘텐츠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포은아트홀과 포은대로에도 선생의 호가 들어가 있다. 이는 선생이 유덕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결과로 생각되며 용인지역 영일 정씨 문중의 긍지이자 용인의 또 다른 자랑임에 틀림없다.
이종구(향토사학자) webmaster@yongin21.co.kr
출처 : 용인시민신문(https://www.yongin21.co.kr)
[출처] 용인의 세거성씨, 충절의 고장 용인에서 번성한 충신 정몽주 후손 영일정씨|작성자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