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년과 1742년에 각각 출간된 2권의 바흐 「평균율 곡집」은 모두 48곡의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되어 있다. ‘평균율’ 이란 한 옥타브를 12개의 반음으로 고르게 분할한 조율법을 뜻한다. 그런데 바흐는 종전의 조율법에 의해 제한된 조성의 작곡에서 탈피하여 모든 조성의 연주가 가능하고 조옮김이 자유로운 이 조율법을 실험하기 위하여 24개의 장단조 조성을 사용해 이 「평균율 곡집」을 작곡했던 것이다. 슈만도 「평균율 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가장 이상적인 음악으로 생각하였고, 베토벤과 리스트 역시 이를 즐겨 연주하였다. 특히 쇼팽은 연주회 전에 평균율을 조용히 치면서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평균율 곡집」은 많은 작곡가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테크닉적 모델이 되어 왔다. 오늘날의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역시 ‘구약성서’로 일컬어질 정도로 중요한 이치를 차지하고 있는 「평균율 곡집」에는 바흐의 다른 건반음악에 나타난 광범위한 스타일과 테크닉을 모두 찾아볼 수 있어 가히 바흐 음악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대위법적인 바로크 음악에 있어 왼손의 테크닉은 너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왼손의 역할이 오른손과 동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흐 음악에서의 왼손의 기능과 테크닉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각 곡의 대위법적 구조와 바로크 음악의 다양한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전주곡’ 이란 원래 자유로운 형식의 즉흥곡으로, 「평균율」의 전주곡은 토카타풍, 아리오소, 인벤션, 춤곡 풍의 다양한 스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전주곡은 스타일에 따라서 왼손의 해석이 달라지는데, 모방대위가 아닌 즉흥적인 아르페지오 또는 음계 부분이나 선율을 밑받침 해주는 부분에서 왼손은 화성적 기반을 형성하는 베이스 역할을 함으로써 곡 전체의 구조와 진행을 이끌어가게 된다. 「평균율」의 푸가 역시 옛 리체르카에서 화려한 이탈리아 풍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성에서 5성까지 모든 성부에서 주제가 차례로 모방되는 엄격한 모방대위법의 형식을 갖고 있다. 푸가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푸가 형식에 대한 이해와 각 곡에서 주제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지를 파악하여 성부간의 상호관계를 성공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또한 뚜렷한 주제의 성격과 주제 성부의 선명한 부각, 섬세한 프레이징을 위해서는 음량의 대비뿐 아니라 정확하고 섬세한 아티큘레이션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때로는 한 손 안에 둘 이상의 성부를 동시에 진행시켜야 하는 이 까다로운 음악을 연주하려면 무엇보다도 열 손가락의 독립이 필수적이다. 결국 이러한 대위법적 작품에서 왼손의 역할은 오른손과 동등한 우치에 있으며 모든 음악적, 테크닉적인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스타일이 다른 몇 곡을 예로 들어 왼손에 나타나는 다양한 주법과 해석, 그리고 연주시 유의하여야 할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제1권 1번 이 곡은 구노의 「아베마리아」반주로 너무나 유명한 곡인데 끊임없이 전조되는 분산화음의 연속으로 각 화음의 베이스 진행에 유의해야 하는 대표적인 곡이다. 테크닉적으로는 수월하게 보이지만 흔히 오른손에 있는 화음만 크게 부각이 되는 실수를 범하기 쉬운 곡으로, 좀더 깊게 울리는 왼손의 베이스와 섬세한 뉘앙스를 지닌 오른손의 분산화음이 조화롭게 연결되어야 한다(악보 1). 제1권 2번 토카타 풍의 곡으로, 짧은 에튀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양손의 고른 손가락 테크닉과 가벼운 터치를 요구한다. 손가락 번호에 따라 섬세한 아티큘레이션의 변화가 생길 수 있음을 감안하여 주의 깊게 손가락 번호를 정해야 한다(악보 2). 제1권 21번 위의 곡과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첫 부분의 걷는 듯한 베이스(walking bass)는 스타카토의 표시로 인해 너무 짧게 사라지지 않도록 한다. 또한 베이스는 빠르게 움직이는 화성 진행을 이끌어 나가므로 선율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중간에 삽입되는 토카타의 전형적인 빠른 음계와 아르페지오 음형을 양손이 번갈아 가며 연주할 때 이음새가 보이지 않도록 한 흐름이 되어야 한다(악보 3). 제1권 16번 이 곡은 3성부의 아리오소로 왼손에 나타나는 긴 트릴은 종종 연주자를 경직시켜 지나치게 빠르고 크게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트릴의 속도는 크기, 긴장도와 관계가 있으므로 음악의 흐름에 맞추어 속도에 변화를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절해야 한다. 이 곡에서는 16분음표로 진행되는 성부가 충분히 들릴 수 있을 정도에서 약간 느리게 시작하여 조금 빠르게 다시 긴장을 늦추어 다음 프레이즈로 연결시키는 것이 좋겠다(악보 4) 제2권 2번 2성부의 인벤션. 16분 쉼표 다음에 시작하는 주제로 인하여 프레이징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둘째 마디 왼손의 첫 번째 C음은 앞 프레이즈의 끝 음인데도 강박의 위치로 인해 오히려 강조되기 쉽다. C음이나 G음 어느 음도 악센트가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첫 마디 왼손에 도약하는 8분음표는 춤곡 성격을 나타내어 너무 투박하지 않게 끝까지 일관되어야 하며 이 곡 역시 양손의 고른 손가락 테크닉이 필요하다(악보 5). 제1권 17번 <악보 6>은 각 손이 두 성부를 치면서 거의 매 음씩 주제를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 가며 연주해야 하는 어려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양손으로 이 주제 성부만 따로 레가토로 연주해 본 후 다른 성부들을 하나씩 첨가하여 연습하는 방법으로 주제 성부가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제2권 9번 이 4성부의 푸가는 단조로운 리듬과 순차적인 5음으로 이루어진 주제로 인하여 르네상스의 거장인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푸가는 주제의 전개에 있어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복잡한 구조를 투명하게 연주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치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처럼, 긴 음표의 음이 피아노 위에서는 실제로 사라진 후에라도 마음으로 나머지 소리를 들으며 성부를 진행시켜야 한다. 이것은 음표의 길이를 정확히 지켜 철저한 레가토 주법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때 페달은 손가락으로 연결이 불가능한 경우만 조심스럽게 사용하여야 한다(악보 7). 제2권 11번 빠르고 경쾌한 이 푸가에서는 민첩한 손가락과 가벼운 터치가 요구된다. 6/16박자의 빠른 2박에서 다양한 리듬들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강박을 탄력있고 정확하게 지켜나가야 한다(악보 8). 제2권 14번 이 곡은 주제가 세 개인 트리플 푸가이다. 각 주제는 차례로 소개되며 때로는 두 주제가 충돌하기도 하는데, 맨 끝 부분에서는 세 주제가 3성부에서 동시에 등장하게 된다. 비교적 길이가 긴 이 푸가에서는 구조적인 클라이막스를 향한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또한 리듬과 아티큘레이션에서 대조적인 주제들을 잘 구분하기 위해서는 각 주제의 성격을 분명하게 설정해야 한다(악보 9). 제2권 15번 시종일관 가벼운 스타카토 터치로 쳐야하는 이 곡은 왼손의 테크닉이 특히 요구되는 곡이다. 스타카토는 지나치게 짧지 않아야 하며 레가토로 칠 때와 같은 방향감과 프레이징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곡은 주제 뿐 아니라 대주제(counter subject)를 선명하게 부각시켜야 함에 유의하도록 한다(악보 10). 제2권 20번 이 푸가에서는 4분음표에서 32분음표로 구성된 다양한 리듬으로 성부 진행에 균형을 잃기 쉬운 곡이다. 음의 길이와 강도와의 관계를 잘 고려하여 긴 음표는 좀 더 길게 음이 울리도록 강하고 깊은 터치로, 바르게 움직이는 음들은 가벼운 터치로 연주하면 성부 간에 또는 한 성부내에서 선율적인 균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악보 11). 끝으로 바흐의 뛰어난 해석자로 알려진 랄프 커크패트릴(Ralph Kirkpatrick)이 이야기한 「평균율 곡집」 연주에 필요한 테크닉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그는 각 손가락의 독립이 잘 되어 있을수록 다성부 음악을 잘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민첩하고 독립적인 손가락 테크닉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완벽한 손가락의 컨트롤은 건반을 누르고 떼는 정확한 타이밍과 함께 뉘앙스에 관한 것이다. 그 자신은 이러한 테크닉을 얻기 위한 훔멜의 연습곡(1828년)을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손가락 동작을 강조하였는데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하기 위해 한 동작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두 번으로 나누어 하는 것을 절대로 피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détaché(‘분리하여’ 라는 뜻으로, 논 레가토와 같다)로 연주하는 부분에서도 레가토를 연주할 때와 같은 손가락 번호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한번 주의깊게 정한 손가락 번호는 일관적으로 사용케 하였다. 실제 연주하는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음악의 지속적인 흐름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마음속으로 끊임없는 원을 그려 보도록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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