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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비의 그늘에서 꽃처럼 사는¹ 현모양처가 되길 소망했던 날이 있었다.
그래서 유학을 빙자하여 방랑하는 정혼자를 10년 넘게 기다려주었다. 순진하게도 운명적인 사랑,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믿었다.
저 멀리서 바라볼 황태자 전하의 혼례식만큼 성대하고 화려하지 않겠지만 달포 후에 맺어질 혼인에 설레었다. 메마른 정혼자의 손을 잡은 채로 축제 구경을 가던 걸음마다 행복한 꿈을 꾸었다. 이른 새벽, 아직 달빛 머무르는 부엌에서 소박한 밥을 짓고 낮에는 화초를 수놓으며 책을 읽는 여느 부인의 생을. 밤에는 도란도란 하루의 일상을 나누다가 잠들며 평범한 내일을 희망할 거라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나는 화원에 아들, 딸 나란히 뛰어 놀 것이고 오늘처럼 구름 없이 화창한 날엔 나란히 손을 잡고 소풍을 가는, 흔한 부부의 나날을 살아가리란 다부진 마음을 가졌다.
대검의 벼린 칼날이 햇빛에 반짝이기 전까지는. 사신 행렬들은 무장한 군사였고 면사포에 가려진 소료 황녀의 손엔 꽃이 아닌 검이 있었다. 눈을 가리는 자욱하고 흐린 연기에 사람들의 함성은 비명으로 퍼저갔다. 달려드는 군화의 소리가 도망치는 이들을 멈추게 했고 귀가 찢어질 듯한 치열한 포화가 축포처럼 터졌다. 어느 순간 정혼자의 손을 놓치고 망연히 서있던 여자는 흔적도 없이 인파 속에서 사라졌다. 그 여자의 이름은 초연. 평범한 생을, 사랑을 원했던 초연의 소망은 참혹한 전쟁으로 처절히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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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승기를 잡은 소료의 전쟁은 끝났다.
허나 패자로 남은 피사국의 전쟁은 여전히 끝날 줄을 몰랐다. 소료에 끌려온 처음엔 초연도 죽기 위해 버둥거렸다. 피사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기를 바랐다. 깊은 밤, 옷고름에 닿는 어느 남자의 손가락을 도려내기도 했다. 같이 도망치다가 혼자 다른 길로 가며 목표물을 자청하다가 잡혀본 것도 수차례였다. 그러다 수라도에서 마주친 정혼자는 이미 피사국을 배반하고 소료에 투항하여 포로를 바치는 자가 되었다. 무수한 것을 베어낸 은장도로 그의 목을 겨누었던 순간, 비겁하게도 그는 목숨을 구걸하면서 초연의 부모와 여동생이 살아남았다는 걸 고했다.
그 날부터 살기로 했다. 사는 것인지 살아남은 것인지² 모르겠지만. 부르튼 손, 입술, 채찍 자욱이 사라지지 않은 맨발은 소료의 겨울을 견디기엔 버거웠다. 평범한 나날은 저 머나먼 시간에 흘려보내고 피사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기를 바랐다. 노예시장에 나선 것도 좋은 주인을 만나 속환이 되길 바라서였다. 황홀한 구원 따위 없다는 걸 알았다. 값을 치르고 초연을 패물처럼 산 것에 불과한 이는 이국의 침략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럼에도 초연은 그 남자의 발치에, 그림자에 매달려 애원했었다.
여덟 번째든 여든 번쨰든 부인으로 둔다고 데려와준 것이니 자비를 바랐던 걸까. 겨우 피사국, 고향, 가족들을 입에 올리던 떨리는 목소리는 흩어지고
「부인.」
그의 낮은 목소리가 초연의 심장에 정을 박는 것처럼 아프게 박혀왔다.
「피사는 없소.」
연이은 비극에도 나지 않았던 눈물이 메마른 볼을 타고 한 방울 흘러갔다.
「피사가 아니라 패주라고 부르지.」 ³
여전히 초연의 생은 어느 기억에서 멈춰버린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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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희제曦霽 .
그리고 찬다라劗多臝, 백리 초연白莉 苕渁
피사국에서도 평범한 귀족가의 부모에게서 난 장녀로 살아왔다. 희제는 비가 갤 정도로 빛나는 생을, 초연이란 이름은 못가에 피어난 능소화 나무를 뜻한다. 맑고 꽃피는 삶. 못처럼 어딘가에 고인 채로 머물기를 바라는 아담한 익애가 자리했다. 전쟁의 화포 아래 모든 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작은 연못에 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그렇게 이뤄지지 못할 꿈이 메마른 초연의 생애에 아른거리다가 잠식하는 무수한 밤이 있었다.
따스한 봄에 펼쳐진 꽃무더기를, 무더운 여름을 적시는 냇가를, 수풀이 우거진 가을의 숲길을, 서늘한 겨울의 하얀 설원을 헤치며 저 먼 어딘가를 향해서 달려가는 꿈. 고운 청목당혜가 벗겨진 채 초연은 맨발로 잊혀진 제국, 폐허가 된 파사의 바다에 가닿을 것이다. 하여 부르튼 손에 피가 흐르는 것도 잊을 만큼 젖은 모래로 쌓아올린 텅 빈 봉분들 가운데서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기를. 혼을 기리는 비석은 두지 못했으나 달빛 저무는 어느 밤, 홀로이 두 눈을 감고 숨결이 잠기며 잠드는 걸로 끝나는 꿈을.
다만 깨어나면 펼쳐지는 내당의 풍경은 지옥과도 같았다.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할 혼례식 날이 멀지 않았다. 길게 드리운 붉은 면사포는 초연의 얼굴에 점철된 핏자욱이 되어 설운 눈물 한 자락 가려주기를. 적빛 능라로 지은 활옷은 피사로 가는 밤에 입어야하는 수의, 반짝이는 보석 목걸이는 옥에 갇힌 죄인의 칼, 팔찌는 쇠로 만든 수갑, 그리고 혼약을 약조하며 나누어 마실 세 잔의 합환주는 달디 단 사약에 불과하겠지. 평범한 생을 염원했던 미망은 세차게 부는 바람에 흩어지니 잔혹한 그는 볼모로 잡힌 가여운 신부, 정경부인이라는 허울에 가려진 제단 위의 제물로 올려 여덟번째 화촉도 사그라지길 바랄 테지만.
초연은 치욕을 머금고 거짓된 혼인 서약을 메마른 입술 위에 맺히게 해서라도 살아, 남아
제 꽃무덤을 패망한 조국, 피사가 아닌 낯선 땅에 두지 않을 거라 제 숨결에 아로새겨 맹세했다.
첫 혼례가 아닌 이른 영결식을 올렸다. 하여 그의 시선이 아니라 저 먼 풍경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초혼⁴을 했다.
그러다가 마주한 그의 눈길 하나에 초연의 여린 숨결이, 서글픈 운명이 사슬 없는 족쇄에 얽혀서 사로잡히고 말았다.
¹ 미스터션샤인
² 키워드
³ 안류님 설정글 차용
⁴ 초혼(初婚) : 첫 결혼 / 초혼(招魂)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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