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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0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 (누가복음 제 16 강 강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말씀 / 누가복음 9:37~62
요절 /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단국대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삼성전자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졸업한 다음 여름, 가을까지 시간을 보냅니다. 공주대학교 전기공학과 학생들은 오직 ‘한전’에 들어간다고 믿고 준비합니다. 4학년 되면 조금 변화가 있습니다. 학생들이 자격증을 많이 준비합니다. 한국전력은 자격증을 공식 요구합니다만, 일반 기업들은 학생들의 자격증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소지 학생이 프로그램 개발 못합니다. OCP자격증 소지 학생이 데이터베이스 설계 못합니다. 전기기사 자격증 소지 학생이 수변전 설비 도면을 볼 줄 모릅니다. 일 할 줄 모르면 기업들은 그 학생이 자격증 보유와 상관없이 입사 자격이 없다고 판정합니다. 토익 800점인데, 바이어에게 거래 이메일 답장을 못합니다. 토익점수, 자격증, 학부성적들을 갖춰 놓았지만, 기업으로부터 일할 자격이 안 된다고 판정받는 학생들이 부지기수로 많은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떻게 판정받을까요? 크리스찬이라 자부하고 목자라 자부하며 살았는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면 큰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지 배우고자 합니다.
1.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산 아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들고 귀신들리고 상처받은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산 아래 있던 아홉 제자들이 난처한 상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38절에서 40절을 보십시오 그는 귀신들린 아들로 인하여 심정이 타들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귀신을 내쫓고 능력을 행하였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아이를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큰 무리들 앞에 그들의 무능함 때문에 망신당하고 있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믿음이 없고 삐뚤어진 세대" 라는 뜻입니다. 믿음 없을 때 사람은 삐뚤어지고 문제 앞에 성화를 부립니다. 제자들이 믿음 없고 무능하게 된 상황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를 향하여 믿음 없고 삐뚤어진 세대라 하십니다. 영적 지도자인 제자들이 믿음 없으면 시대 전체가 다 믿음 없는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를 데리고 오라 하시자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귀신이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비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전과 달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다른 복음서에는 이 사건 이후에 "우리는 어찌해서 못 쫓았습니까?" 여쭙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말씀하십니다. 기도하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왜 기도하지 못하였을까요? 이들은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가셨을까? 비교하고 시기하느라 기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영적 무능에 빠진 것입니다. 전에는 권능을 받아서 악한 영에 사로잡히고 고통 받는 양들을 도울 수 있었으나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고 양들 앞에 망신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사람을 살리는 영적인 힘은 깨끗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으면, 비교의식, 시기심에 잘 빠지고 결정적인 때 분별력 없이 말실수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과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있는 사람도 희생하거나 헌신할 때 마음이 어려워지는 시험을 당합니다. 이성에 집착 하는 사람도 행여나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갈까, 행여나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가나 전전긍긍하느라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비교, 시기, 질투, 근심, 분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실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제자는 깨끗한 마음을 가져 올바른 기도를 드릴 줄 알고 영적 무능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근본적으로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영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지상 메시야 왕국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상에서 한 자리 차지할 생각 하느라 경쟁심, 시기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귀에 담아 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메시야이신지 십자가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을 얻으십니다.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나를 위한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나도 영접할 길입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을 때, 더 이상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셔서 나의 존재는 가장 존귀하여 졌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어야 한다며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은 깨지기가 어렵습니다. 지금도 예수 안에서 유명해져야겠다고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 잘못된 집착이 얼마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묻기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다만, 지난번에는 반발하였지만 이제 반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말씀에 기초하여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말씀을 기초로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지금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겸손한 사람
46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십자가와 고난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중에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크냐 누가 서열이 높으냐” 하는 것입니다.
논쟁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메시야왕국에 대한 잘못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통일 다윗왕국과 같이 예수님이 임금이 되어 독립된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누가 총리가 될 것인가? 누가 비서실장이 되어 실세로 떠오를 것인가? 제자들은 그 문제로 인하여 논란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위대성을 사람이 가진 지위와 권세로 보았습니다.
둘째는, 동료들을 경쟁상대로 보았습니다. 권세와 지위를 지향하면 필연적으로 경쟁이 있고 가까운 사람들이 경쟁대상이 됩니다. 내가 높아져야 겠고 내가 유명해져야 겠고 내가 더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니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입니다. 원조 헤롯은 아내를 죽였습니다. 아들들도 죽였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까지 죽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명예에 집착했던 사울왕은 패전의 위기에서 구해낸 다윗을 향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로되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는 노래 구절에 확 돌았습니다. 이후 사울은 미친 집착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헤롯의 잘못도 알고 사울의 잘못도 알면서 자기들도 똑 같은 사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헤롯의 잘못도 가르치고 사울의 잘못도 가르치면서 헤롯처럼 자기가 공격받는다고 느끼기만 해도 다른 사람의 인격을 해하고, 누가 말씀 잘 전하고 양 잘 치면 사울처럼 비교하고 시기하며 살아갑니다.
47,4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말씀에서 어린아이는 긍정적인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부담스러운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가지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움켜쥐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입니다. 절제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다툴 때, 그들은 서로를 어린 아이 같다고 여겼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같은 동료들을 영접할 대상으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자라 하십니다. 작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을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지 않고 장점을 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이야기 해주면 잘 받아들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포용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관용과 이해의 인격과 겸손한 내면성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대함의 척도입니다. 천국은 서로 품어주고 포용해주어서 누가 와도 화목하기 때문에 천국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헤롯을 저주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겸손과 이해를 배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울왕의 이야기도 알고 오만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한심하다 하면서 자기들이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큰 자인가 가장 좋은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땅끝까지 낮추셨습니다. 한 아기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마굿간에서 나시고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모두 영접하셨습니다. 비난받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갈릴리 사람이나 이방사람이나 영접하셨습니다. 연약한 베드로도 감당하시고, 예수님을 파는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서 조롱하는 자들을 위하여 ‘저들을 사하여 주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며 품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만유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세우셨습니다.
49절에서 56절은 요한과 제자들의 편협과 교만이 드러난 사건들입니다. 49,50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어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금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12제자 그룹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요한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악한 영이 떠나가는데 기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을 못살게 하는 악한 영이 떠나가는 것보다도 자기 세력이 줄어드는 것이 싫어서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것을 금하게 한 것은 똑 같이 편협하고 교만한 일입니다.
51절에서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단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를 통해서 내려가고자 하시고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습니다. 사마리아 동네가 예수님과 일행을 배척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 났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분을 내는 바탕에 무엇이 있습니까? 편협과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촌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사람에게도 친히 원수 갚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권세와 명예를 위하여 외적 싸움과 경쟁에 힘쓰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외적인 권력과 부를 욕심내지 말고 내적인 겸손을 배워 나가는 데에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기업이 기사자격증이 아니라 일할 능력이 있는지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목자, 지부장, 개척자 타이틀이 아니라 겸손의 내면성을 가진 사람이 합당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만은 불통의 대화법입니다.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알고자 하여야 합니다. 우리시대 크리스천들이 듣는 법을 모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자 하지 않고 이해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죄인이요 저열한 인생들이요 문제 많은 존재라고 단정 내려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꾸려고 하고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도 그런 오만과 편협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줄 압니다. 뜯어고치겠다고 다가오고, 바꾸려고 접근하는 것을 학생들이 다 알고 있는데, 모르는 줄로 여기며 일방적으로 말합니다. 그래놓고는 시대 탓 합니다. MZ세대라서 그렇다고 젊은 사람 탓 합니다. 90년대 말에는 X세대 탓 했습니다. 2000년대에 N세대 탓 했습니다. 지금은 그것 다 묶어서 MZ세대라고 칭하며 신세대 탓, 인터넷 탓, 스마트폰 탓 합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겸손한 인격으로 어떤 세대, 어떤 사람이라도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관계 잘 맺는 말재주를 배우려 하기 전에, 은사 타령하지 말고, 마음 중심에 먼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어린 아이라도 그 존재와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겸손한 말, 살리는 말은 품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
5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으며 영생과 희락과 평강을 무궁히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런 것보다는 지금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에 마음이 끌린 것 같습니다. 곧 대권을 접수할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말씀하십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승리와 영광이 있으나 고난과 희생도 감당하여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십자가와 고난에 대해서 분명한 각오와 자세를 가지고 따라야 합니다.
59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 하시자 자기로 먼저 가서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60절을 보겠습니다.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이는 예수님 따르는 자가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부친의 장례식은 사람이 세상에서 해야 할 많은 일 중에 우선순위가 매우 높은 행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장례를 치르는 일은 율법을 배우는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이 일보다도 더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전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어떤 세상의 의무나 행사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최우선 순서와 최고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61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은 했지만,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하니 가족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는 가서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꼭 나누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2절을 보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한 번 좋은 선택 했다고 해서 완성이 아닙니다. 올바른 가치관이 다른 가치관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서 예수님과 함께 출발했다면 도중에 흔들리거나 오염되지 않도록 영적인 가치관을 견고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가치관입니다. 세속적 가치에 우선하는 영적 가치관을 가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귀하게 여기고 최우선으로 여기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합당한 나라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인간적인 생각을 멈추고 예수님 말씀을 내면에 새겨 두는 사람입니다. 이렇게만 하여도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 어린 양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겸손하게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만 하여도 많은 양들을 얻고 관계에서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일, 세상의 일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말씀 전파와 예수님 사명을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면 범사에 하나님 도우심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존중히 여겨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큰 업적을 세워서 가는 것보다도 하루하루 믿음의 삶이 쌓이고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실천하여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평생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예수님의 이름이 찬양 받기를 기도합니다.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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