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일인가요?
만48세가 되기 하루 전 캘거리 공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얼굴도 몰랐던 고교선배님이 공항에서 부터 임시 거주할 다운타운 아파트 까지 짐을 운반해 주시고....
조언도 많이 해 주셨습니다.
이게 한국사람들의 끈끈한 정이지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 인터넷을 통해 동문이라는 것 하나만 알고도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문화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고층 아파튼데 얼마나 덥고 건조하던지 저는 잠을 상당한 기간동안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도 건조해서 밤에 젖은 수건을 널어 놓으면 아침에 완전히 말라 있더군요.
창문을 열고 자면 얼마나 밖이 시끄러운지....싸우는 소리, 전철 소리.....
이거.....저 같은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악조건이었습니다.
안전하다는 캐나다에 살인사건등 강력사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거........ 잘못 선택했다...............
그러나 일단 이곳에 발을 디뎠으니 일단 살아 보아야 하겠다는 의지가 생기더군요. 한국의 명문대학에 다니던 막내(?) 아이를 휴학시키고 무료 어학연수겸 해서 같이 왔습니다. 한국서는 집안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던 아버지가 캐나다에 들어오니 위치가 많이 변화가 되더군요.
말이 되어야 집에서도 대장의 위치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지요. 오히려 자식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곧바로 영어교육을 받기 위해 이민자 영어교육을 위한 쎈터(IRVAC)를 찾았습니다.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쓰기, 듣기, 말하기, 문법등을 보는데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과목으로 정합니다.
그런데 Level 3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창피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죠.
NE지역으로 가서 교육을 받으라고 합디다. 가서 한동안 교육을 받았습니다. 소위 LINC 라는 이민자 무료 영어교육과정입니다. 거리도 그렇고 시스템도 그렇고 특히 위치가 상당히 좋질 않았습니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도 저에겐 좀 그랬습니다.
한국가게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연락을 해서 주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급 10불...그나마 그 당시에는 앨버타주의 경기가 상당히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Hiring 광고가 붙어 있었지요. 한국인들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가게를 하기가 힘들다고들 했습니다. 저는 한국인 가게에서 일을 하면 다른 한국인들을 만날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을 찾게 된 것입니다.실제 한국인들의 삶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열심히 일한다고 했지만 아마도 주인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생전 처음 그런 일을 해 보는 것이니까요.
좋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제 마음도 편했습니다. 제가 인수할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너무 이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달에 아마 1500불 정도 받았겠지요.
그걸로도 둘이서 렌트비 내고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환경이 좋다는 SW지역의 다른 한국식품점으로 옮겼습니다.
규모도 더 크고 조금 더 일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어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학교 비슷한 시스템입니다. 학교 비슷한게 아니고 학교에서 하였습니다.
그곳에 가기 전에 상담을 했었는데 베트남 출신의 신사가 그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아주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고 패망 후 난민으로 이곳에 와서 공무원으로 자릴 잡은 사람입니다. 그 기관의 이름은 잊어 버렸습니다. 지난 제 글을 보면 찾아낼 수 있겠지만 게을러 지는 군요.
시눅러닝센터(Chinook Learning Centre)라는 학교에서 영어교육( LINC )을 받으면서 일을 하였습니다. 이곳은 캘거리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캐나다 학생들 중에서 학교를 마치지못한 아이들이 나머지 과목을 이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는 영어를 제법 잘하는 축에 들었습니다. 한국인들이야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문법이나 단어는 제법 남들 보다는 잘 하는 편이지요. 그리고 30년 전이지만 아이들 영어과외도 하면서 학교 다녔으니까요.
그러다 제이슨 이라는 영어이름을 쓰는 중국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 너는 여기서 교육 받지 말고 ESL 학교로 가라."는 겁니다. 시험을 보고 거기로 가랍니다. 거기 다니면 생활비도 무상으로 준다는 겁니다. 셤을 봤습니다. 물론 조건이 있었습니다. 선생의 추천을 받거나 아니면 수험비를 내야 한다고 합니다. 선생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했더니 제인이라는 그 백인 여선생이 해 주더군요.
그 시험을 보는데 제가 영어실력이 정말 미천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독해실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시계도 가지고 가지 않아 시간 관리도 못했습니다.
그곳도 같은 이름의 교육기관입니다만 이곳은 전문대학이나 대학을 가기 위한 고교영어 교육과정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합격(?)을 했다고 언제 오라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Level 4부터 그곳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Level 6부터 한다고 하는 거 같습니다. 정부의 예산이 달려서 그런다고 합니다.
펀딩 담당자가 먼저 불러 만났습니다. 이 여자가 교육비와 생활비를 받을 수 있게 심사하고 관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인도 여잔데 얼마나 딱딱하던지....
"당신도 이민자출신이면서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말이 목구멍 까지 올라 오지만 참았습니다.
밉보여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아...빠진게 있군요.
그 사이 한국가게에 주인도 바뀌고 특히 저 같은 사람에게는 젊은 친구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그만두고 이곳의 수퍼스토어라는 곳에 취직을 했습니다.
시급이 아마 11불 몇십쎈트에서 시작을 한 거 같습니다. 정말 죽도록 일했습니다.
잘리면 쪽(?) 팔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하니 무슨 말들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일만 하는 거죠. 그랬더니 한달 반 정도 지나니 매니져가 부르더군요. " 너 여기서 Meat cutter 해볼 생각이 없냐?"고요.
그래서 물었죠. 그거 하면 뭐가 좋냐고
그랬더니 일단 수입이 상당히 높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trainee가 먼저 되어야 하는데 시급이 14불에다 자기가 2불을 더 받게 해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급 16불....ㅋ
무조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길 게 써서 오늘은 여기 까지 쓰겠습니다.
시간 나면 다시 연결해서 올리겠습니다.
여긴 일요일입니다.
한국은 월요일이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저에게는 너무 많은 스토리가 이곳에서 있답니다.
여기 저기 이 일 저 일로 부딪히고 문제도 일으키고 .......
오죽하면 아직도 저 보고 동갑짜리 백인친구가 Trouble Maker라고 하겠습니까?
첫댓글 매니져가 처음에 저에게 지어준 이름이 I can do.였습니다. 항상 제가 그렇게 말을 해서 그렇지요. 님은 You can do.....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늘 결과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목표가 너무 작아 쉬운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표를 좀 높고 크게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나이가 이젠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한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씀 하시지만 당시엔 정말 힘드신 나날 이셨을거란걸 글에서 느낄 수 있어요. 존경스럽습니다.
드디어 비자가 나와서 캐나다로 가게 되었답니다. 저흰 핼리팩스라는 곳으로 갑니다. 카펜터님을 본 받아 열심히 제2의 인생을 설계해 보려구요. 항상 좋은 인생의 모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얼굴 뵙고 이 말을 전할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늘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거긴 더 추운 곳 아닌가요?
캘거리에 들어온지 이제 4년이 되었습니다. 이젠 한번 더 점프를 해야 하는데.... 목표가 잘 보이지 읺습니다. 만만치가 않아요.....
그래도 긍정적이심니다. 많은 이민자들에게 귀감이 되심니다.
저도 팬입니다! 다음 편도 기대됩니다!
제가 글을 잘 쓰는 재주가 있다면 재미 있게 쓸텐데 그렇지 못해 죄송합니다.
쓰신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내년 초 켈거리로 갈 생각중인데... 인연이 닿으면 한번 뵐수도 있겠죠? ^^
항상 건강하십시오~
오시면 연락 한번 주세요^^
생동감 넘치는 글,,,멋지신 도전 전율이 느껴집니다.
올해 봄에 켈거리 갔을때 카펜터님 생각나더군요~~ 내년 초쯤 예상하는데 좋은 인연바랍니다. ^^
어이구..연락 좀 하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