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의 전통사찰은 12곳이며 널리 알려진 사찰은 오어사와 보경사이다.
남구(해봉사, 선암사, 용운사, 일출선원, 진불사, 오어사 등 6곳)
북구(무학사, 보경사, 법광사, 임허사, 천곡사, 죽림사 등 6곳)
보경사는 1989년 경, 오어사는 1994년 경 처음 보고 이후로 가끔 산행이나 여행 중 들렸다.
나머지 사찰은 인연이 닿으면 들릴 것이다.
내연산 보경사(內延山寶鏡寺)
-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03년(신라 진평왕 25) 지명법사가 창건.
지명법사가 진나라(중국)에 유학, 백마사에서 가져온 8면경을 왕에게 아뢰고, 왕의 후원을 얻는다.
명당을 찾아 다닐 때 하늘에 오색 구름이 떠있고, 구름을 따라 내연산에 도착하였다.
1만 2천 봉, 12폭포가 있고 또한 큰 연못이 있어 그 못에 8면경을 넣고 목을 메우고 대가람을 건립하였다.
<보경사금당탑기>에 나오는 창건 연기 설화
마등(摩騰), 섭마등(攝摩騰), 가섭마등(迦攝馬騰)과 법린(法藺)이 제자인 일조(日照)에게 8면원경을 주며,
"동국 조선의 해 뜨는 지방에 있는 종남산 아래의 100척 깊이의 연못이 있는데 그곳이 동국 제일의 명당이다.
그 못을 메우고 보경을 묻고 법당을 창건하면 만세 천추토록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가르침대로한 까닭에 보경금당(寶鏡金堂)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옥룡자산수비기>에 실린 창건 연기 설화
진평왕 25년에 왕이 신하들과 지명법사를 거느리고 동행안을 순행(巡幸)하다가 해아현(海阿縣)에 이르러 산정에 오색 구름이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산 아래 이르자 큰 연못이 있었다. 지명법사가 그 못이 불법이 불멸할 명당이라 아뢰자
왕은 그 못을 메우고 지명법사가 진나라에서 구해온 팔면보경을 그 못 가운데 묻고 금당을 세웠는데 이를 보경사라 이름하였다. 그 뒤 고려 고종 때 원진국사를 비롯하여 오암대사 등 많은 호국 승장과 고승들이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일주문, 해탈문, 천왕문, 산신각, 명부전, 팔상전, 영산전, 대적광적, 대웅전 등이 있으면 중요 문화재로는
원진국사비, 원진국사부도, 동종, 괘불, 오층석탑 등이 있다.
(보경사 홈페이지)
* 보경사 홈페이지엔 섭마당(攝摩騰)이라 표기.
* 문화콘텐츠 용어어사전엔 '가섭마등(迦葉摩騰)'으로 표기. 마등이 가섭마등을 가르침.
* 보경사금당탑기와 옥룡자산수비기는 언제 쓰여진 것인지 인터넷 검색을 하여도 나오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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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년(진평왕 25)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大德) 지명(智明)이 창건.
지명은 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그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해아현(海阿縣)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金堂)을 건립한 뒤 보경사라 하였다.
723년(성덕왕 22)에는 각인(覺仁)과 문원(文遠)이 금당 앞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
745년(경덕왕 4) 철민(哲敏)이 중창,
1214년(고려 고종 1) 주지 승형(承逈:圓眞國師)이 승방 4동과 정문 등을 중수하고 종·경(磬)·법고(法鼓) 등도 완비하였다.
1677년(조선 숙종 3)에는 도인(道仁)이 중창 불사를 시작, 1695년 가을에 준공, 삼존불상과 영산전(靈山殿)의 후불탱화도 조성.
(인터넷, 백과사전 발췌, 수정/백과사전 - 참고 문헌 : 보경사의 사적과 사화, 한국사찰전서)
주) 1. 백과사전에는 '~의하여'라 표기를 하지만 이는 왜색이기에 '~따라서' 등 적정히 수정하였다.
2. 진평왕 25년은 서기 603년 또는 602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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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 문화재 관람료가 대폭 오른 것일까? 무려 3,500원(포항 시민 2,000원)이다~!
보통 2,000원이나 2,500원 관람료를 낸 것 같은데..... . "우~씨" 불평이 입에서 나왔다.
오늘 나처럼 절을 보려고 한다면 입을 다물어야 하지만 절엔 관심없고 12폭포를 보려는 이들에게는 불만이겠다.
범어사, 부산시와 잘 타협이 이뤄져 문화재 관람료를 받지 않는다. 부담없이 언제나 들릴 수 있다.
산악회에서는 단체 산행 시 이 관람료가 부담스러워 보경사를 들머리로 삼지 않겠다.
오른 관람료에 절 볼 기대감보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든 것은 내가 속인이라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창건 이후 사찰명이 바뀌지 않고 그 이름 그대로 쭉 법등을 이어온 사찰은 드물다.
주차장에서 보경사 가는 길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날이 흐리다. 오전 9시 15분이다.
일주문
매표소 앞에 있다.
해탈문
꿈이 이루어지는 보경사, 무슨 꿈이 이뤄진다는 말인가?
공덕비? 염불비?
용트림의 소나무가 일품이다.
설산당 장욱선사 공덕비, 보경사가 지금의 모습을 갖도록 힘을 많이 쓴 승려이다.
탑 구조물
12폭포에서 촬영한 영화와 TV 드라마. 연산폭에선 대왕의 꿈, 잠룡폭에선 남부군.
천왕문
1686년~1688년에 처음 건립, 1761년 중건, 사천왕상은 1980년에 제작.
문지방 옆에 이런 조각상이 있다. 적광전 앞에도 있다. 벽사의 의미일까?
보경사 오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
고려시대 작품으로 일명 '금당탑(金堂塔)'이라 한다.
앞과 뒤에 자물쇠 문양이 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범종루
적광전 /보물 제1868호
보경사 내 가장 오래된 건물. 1677년(조선 숙종 3) 중건, 주불은 비로자나불, 협시로 보현과 문수보살.
문에 붙여져 있어서...수행은 특별한 행위가 아니다. 삶 속에 늘 해야 하는 일이다.
적광전 벽멱의 그림
보경사 불교대학교 건물
대웅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1호
1677년(숙종 3) 중건,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1932년 대대적으로 중수, 양식적 특징이 대체로 남아 있다.
일로향각
팔상전, 산령각, 원진각, 영산각, 명부전, 원진국사비 등
팔상전
산령각
원진각
진영각 대신에 원진국사의 시호를 따라 원진각이라 현판을 달았다.
지명법사 진영, 원진국사 진영과 상, 송계대선사 진영
은암대선사, 연파대선사, 신파대선사, 설산대선사(장욱) 진영
오암대선사, 영월대선사 진영
동봉화상, 설월대선사, 영호대선사, 사허대선사 진영
청허대선사(서산대사), 사명대사 진영
오암대선사 진영에 있는 '진영찬'이다. 나는 이를 풀이할 실력이 안 된다.
원진국사비 /보물 제252호
원진국사 승형(1171~1221)은 보경사를 중창한 승려이다. 입적 후 국사로 추증되었다.
전문가가 탁본하여 뜻을 풀이한 비문도 있겠다. 비문은 해당 승려의 삶에 대한 내용이다.
영산전
영산전에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
보경사 탱자나무 / 경상북도 기념물 제11호
장독대 옆에 오래된 탱자나무가 있다. 수령이 400년 전후로 추정한다.
원진국사탑으로 가는 길에.
보경사 승탑 /보물 제430호
원진국사 승형의 부도이다. 높이 4.5m. 탑신 한 면에 자물쇠 문양이 있다. 화려해 보이지 않으며 간결한 모양이다.
서운암
서운암은 잠겨 있다. 서운암 안에 여러 승탑이 있다. 주위를 돌았지만 철조망이 넘으려는 발목을 잡는다.
승려가 없는 것일까? 아님 출타 중일까? 평소에도 이렇게 문이 닫혀 있을까? 아쉬움에 발길을 돌린다.
오후 1시가 넘었다. 오어사는 다음에 인연을 만들고 귀가하였다. 6박 6일의 여행을 마친다.
통도사 서운암은 나를 즐겁게 하였는데, 보경사 서운암은 나를 서운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