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생각의 차이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조금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있다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 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성당에서 뒷자리 아줌마의 엉터리 성가가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일궈진 불평불만들. 바꾸어 생각해보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17일
설렁탕 국물
어느 열심한 신자가 설렁탕 집을 인수받아 운영하게 되었다. 그는 설렁탕 집을 열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을 예수님 대접하는 것처럼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주방장은 이전에 하던 대로 커피에 넣는 크림으로 하루 종일 팔 만큼의 설렁탕 국물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 뼈다귀를 오래 우린 진국같이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그것을 본 그는 그 날 음식점 문을 닫고 문에 글을 써 붙였다.
“오늘 하루 쉽니다.”
그리고 기도하였다.
“하느님!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을 예수님처럼 모시기로 하였는데 어떻게 예수님께 크림 국물을 설렁탕 국물로 속여서 대접하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설렁탕 국물을 모두 쏟아버렸다. 그 후, 그는 양심적이고 신앙적으로 음식점을 운영하였다. 이 소문이 주위에 퍼졌고 이 음식점은 대단히 번성했다. 하느님께서는 정직한 사람을 축복하신다.
당신의 사업은 어떤가?
18일
실패는 좋은 스승
유대인들에게 가장 성대한 종교기념일은 과월절이다.
이날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노예로 포로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 밤이 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 날을 기념하는 식사를 한다. 이 날 유대인들의 식탁에는 맛소라는 빵과 쓰디쓴 잎사귀와 알라라는 차가 나온다. 맛소라는 옛날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할 때 먹었던 딱딱한 빵이다. 그들은 이 딱딱한 빵을 씹으면서 그 시절 선조들이 맛보았던 굴욕을 다시 한 번 되씹는다. 쓰디쓴 잎사귀를 먹고 알라차를 마시면서 그들은 그 시절 자기 민족이 겪었던 고투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오직 성공한 것만을 기억하고 있는 자는 또 다시 실패한다. 성공은 종종 사람을 해이하게 만들고 안심시키기 때문이다.
유대인 기업가들은 지금도 자신의 사무실에 사업에 실패했던 당시의 계약서를 걸어두고 일한다고 한다. 실패는 좋은 스승이고 좋은 학교다.
19일
위기를 기회로
1967년에 이스라엘의 총리로 당선된 사람은 골다 메이어 여사다. 그녀가 죽은 후에 발간된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얼굴이 못난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못났기 때문에 기도했고 못났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나의 약함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실망은 하느님의 부르심이었다.”
골다 메이어는 수상 자리에 있는 12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백혈병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하느님을 붙들고 직분을 잘 수행했다.
제자들은 갈릴래아 바다의 풍랑과 밤을 새워 싸우면서도 한 치도 전진하지 못했다. 제자들이 한계에 부딪힌 그 순간에, 밤 가장 어두운 순간에 주님께서는 풍랑 사이로 걸어오시어 제자들과 함께 해주셨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느님 없이 잘 살 수 있다고, 한계 없이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인생의 풍랑을 만나고 삶의 위기에 직면하면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며, 나아가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렸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위기는 우리 한계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느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시에 낙심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한계에 부딪힌 그 순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신 순간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순간이다.
20일
인정받는 삶
옛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챔피언은 링 안에서 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거기서 인정될 뿐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제 세상 안에서 진실된 삶을 통해 인정받는 일만 남았다. 그 방법은 우리의 빛을 사람에게 비치게 하여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영광이란 말은 헬라어로 ‘독사’(doxa)다. 이 말은 ‘인정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면, 즉 하느님을 인정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여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21일
자녀가 아직 품에 있을 때
한 소년의 초·중학교 생활기록을 소개한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4학년 때까지의 대체적인 평가는 <다투기는 하지만 열심히 노력함>이었다. 5학년 때는 <어른스럽다>, 6학년 때는 <안정감이 있다>라고 평가돼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의 기록은 <의리가 있고 활발함>이었고 2학년 때는 <책임감이 있고 규칙을 잘 준수함>, 3학년 때는 <근면 성실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항상 중간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이었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개근상을 받기도 했다.
지극히 평범한 이 소년의 기록은 예전 연쇄살인범으로 검거된 사람의 것이다. 아무리 흉측한 범죄자도 처음부터 그렇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끔찍한 범죄를 멀리 있는 일이며 남의 일로 여기지 마라.
자녀가 아직 품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심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관을 세워주어야 한다.
22일
자신의 은사를 아는 것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셔서 당신 일을 하는 데 사용하신다. 기계의 각 부품이 하나의 완성된 제품 안에서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각 지체들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적인 은사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재정적인 능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은사를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수행할 때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들이 무능하거나 쓸모없거나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걷어 내면, 누구에게나 그 속에 한 가지 이상의 재능이 묻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런 재능을 인정하고 교회를 튼튼히 세우는 데 사용할 때, 우리에게 있던 많은 부정적인 감정은 사라지게 된다. 우리의 경험과 재능, 심지어 고통까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할 때, 이것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인도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하도록 준비시키시고 능력을 부여하신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참된 보람을 발견하는 길이다.
우리는 하느님 뜻 가운데 다른 지체를 돕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