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장 떨어진 별
①
지난 한 달 사이 무림군왕성에서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중 세인들의 관심을 크게 끌었던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궁세가의 종복에 불과했던 종리무가 전격적으로 신분이 격상된 사실이었다.
그는 남궁소연의 정혼자로 결정됨과 동시에 공석중이던 금붕단의 단주(壇主)에 발탁된 것이다. 세인들은 그의 눈부신 변신에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아울러 불우한 환경을 딛고 신분의 수직상승을 이끌어낸 그의 놀라운 인내와 자질에 너나없이 존경을 보냈다.
그밖에 생소한 두 인물이 무림군왕성에 들어와 지고(至高)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두 명으로 남궁청운에 의해 무림군왕성에 없었던 부성주(副城主)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은 만화루의 예군향이 천거한 신비인물로, 기이한 것은 부성주가 된 후 성내의 대소사를 일일이 간섭해 나갔을 뿐더러 총관 소손방조차 그들의 명에 절대복종한다는 사실이었다.
무림군왕성의 이런 변화는 기존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오랜 세월 동안 충성을 바쳐왔던 백호단주 포곤명과 철사단주 섭우송 등은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기는 이내 꺾이고 말았다.
그것은 부성주에 오른 두 인물과 새롭게 금붕단주가 된 종리무의 눈부신 활약 때문이었다.
두 부성주와 종리무는 그간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던 녹림과 십정회의 연합맹과 교전을 시작하면서 놀라운 전공을 계속 수립한 것이었다.
그들이 나서자 녹림과 십정회는 연신 패퇴를 거듭하여 머지않아 백기를 들고 투항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기까지 했다.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무림군왕성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무림의 일각에서는 머지않아 무림군왕성이 무림을 일통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뭐? 홍루부인이 오셨다고?"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허리를 아래로 찍어가던 종리무의 몸이 굳어졌다.
"하아... 좀더......."
종리무의 아래에서 막 절정의 쾌락에 도달해 가던 남궁소연은 갑자기 그가 동작을 멈추는 바람에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강하게 껴안았다.
"그만."
종리무는 매정하게 말하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남궁소연은 허무하게 손으로 허공을 젓다가 맥없이 온몸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종리무는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반면 남궁소연은 끝내 도달하지 못한 춘정(春情)의 아쉬움에 한숨을 쉬며 불만스럽게 물었다.
"대체 홍루부인이 누군데 이러세요?"
그녀는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방금 전 종리무가 격렬하게 애무한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는 젖가슴에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 필요 없어. 곧 돌아올 테니 잠시 기다려."
허리춤을 졸라매며 종리무는 황급히 침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남궁소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체념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제는 종리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과거에는 종복에 불과했던 그였으나 이제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는 여자의 기쁨을 알게 해주었고 이후로도 영원히 그녀의 중심이 될 것이다.
과거는 흘러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옛날을 생각하지 않았다. 종리무는 과거의 때를 완전히 벗어버렸다. 무림군왕성의 중심인물로 부상했을 뿐더러 나날이 그 위상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종리무에게 절대복종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자신에게 거친 말을 해도 조금도 원망스럽지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종리무에게는 특별한 취향이 있었다. 그는 정력(精力)이 끝없이 강한 인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사를 강요했다. 처음에는 그를 상대하기가 벅찼지만 그녀도 서서히 그와 닮아가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온갖 기괴한 체위를 강요했다. 남궁소연은 명가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예(禮)에 바른 삶을 살아왔으므로 종리무와의 그런 행위들을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아니, 도리어 종리무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모진 수모를 받으며 성장한 그에게 한(恨)이 쌓였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라주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종리무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의 의로움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대신 화살을 맞았다. 더구나 춘약에 중독된 자신이 그토록 매달렸음에도 의를 지키기 위해 한사코 거절하며 도리어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종리무의 의기(?)가 그녀를 감동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순결을 바치면서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가 되어 평생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리라 맹세한 터였다.
'곧 돌아오실 거야.......'
남궁소연은 침상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곧 돌아오리라는 말만 믿고 그녀는 옷을 입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면 다시 뜨겁게 서로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며 그녀는 스스로 가슴을 어루만지며 체온이 식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리무는 반 시진이 지나도록 깜깜무소식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까부터 참았던 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탁!
탁자로 걸어가던 그녀의 발길에 채이는 것이 있었다.
"......?"
그것은 비단천으로 감싸여 있는 물체였다. 그녀의 발길에 채이는 바람에 비단천이 약간 풀려 있었다.
그녀는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아마도 허겁지겁 달려 나가느라 종리무가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인 듯했다.
그녀는 그것이 종리무에게 소중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옷을 벗다 떨어진 것을 종리무가 황급히 갈무리하는 것을 보았었다.
남궁소연은 조심스럽게 비단천을 끌러 보았다. 호기심이 일어난 것이다.
잠시 후,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아!"
비단천을 끄르자 하나의 옥잠과 금적(金笛)이 나타났다. 소중하게 보관된 옥잠은 바로 그녀의 것이었다. 금적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으로 용봉칠영의 일원인 금적수재 당세곤의 것이었다.
"......!"
남궁소연의 몸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옥잠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과거 자신이 머리에 꽂고 다니던 것이었다. 언젠가 신도문에서 목욕을 하던 중 누군가 훔쳐보는 것을 알고 엉겁결에 암기로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 그럼 그때 날 훔쳐보던 색한이 바로......?'
그녀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번에는 금적을 어루만졌다. 분명 당세곤이 무기로 사용하는 피리였다.
'이것이 왜 여기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을 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당세곤의 모습이 통 보이지 않았다.
남궁소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영상이었다.
얼마 전 숲속에서 당세곤과 힘겨운 몸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당세곤의 집요한 애무에 정신이 몽롱해 있던 그녀는 어딘가에서 들렸던 인기척 때문에 정신을 차렸었다.
그 바람에 극적으로 당세곤을 걷어 찬 후 그녀는 달아났었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반라의 몸으로 무작정 달아나고 있었을 때 뒤에서 당세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은 듯하기도 했다.
'그럼......?'
그녀는 가공할 두려움에 온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당세곤을 죽이는 광경이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다. 그 인물은 바로 종리무였다.
"아!"
남궁소연은 그만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②
"성주는 어디 있나요?"
"황보세가에 갔습니다."
"그곳엔 왜 갔지요?"
"요즘 들어 그자는 부쩍 엽색질에 빠져 있습니다."
"흥! 결국 죽을 날이 다가온 모양이군."
코웃음치는 여인은 아름다웠다.
피부색은 약간 가무잡잡했으나 윤이 날 정도로 반들거려 육감이 물씬 풍겼다. 반듯한 콧날에 터질 듯해 보이는 앵두 입술, 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찬빛이 흘렀다.
검상(劍傷)인 듯 왼뺨에 희미한 선으로 남아있는 상흔이 도리어 묘한 육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일신에는 타는 듯이 붉은 홍의(紅衣)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나이는 아무리 많게 보아도 이십도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앞에 부복한 소손방과 종리무는 감히 고개를 쳐들 생각을 못했다.
지금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는 성주가 앉는 태사의였다.
소손방은 보충 설명을 했다.
"근자 들어서 그자의 엽색행각은 그 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내 무사들의 부인과 여식들마저도 가리지 않고 겁탈하고 있습니다.'
홍루부인의 눈에서 한광이 번쩍 솟았다.
"무림지존 남궁청운이 어쩌다 그 꼴이 됐지요?"
"예, 그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소신이 몰래 넘겨준 마공비급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소신은 그자의 마성을 좀더 빨리 격발 시키기 위해 일부러 주위에 여러 명의 계집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무분별한 방사(房事)를 치르면 치를수록 그자는 점점 더 색광(色狂)이 될 뿐더러 마성에 젖게 됩니다."
"흥! 죽기 전에 호강은 다 하는군요. 한데 황보세가는 이미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그곳엔 무슨 일로 간 거죠?"
"예, 어젯밤에 그자는 백호단 소속의 한 향주 부인을 농락하다 말고 느닷없이 황보수선이란 계집을 만나야겠다면서 그 길로 말을 타고 달려나갔습니다."
"벽월선자 황보수선 말인가요?"
여인의 흑진주 같은 눈에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부인께서도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그 계집이옵니다."
홍루부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자 혼자 갔나요?"
"아닙니다. 부인께서 행차하신다는 전갈을 받고 두 분 존장께서 쫓아가셨습니다. 곧 그자의 목을 잡아끌고 오실 겁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예군향도 함께 갔으니 그자는 빠져나갈 길이 없을 겁니다."
홍루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자는 반드시 내 손으로 천참만륙 내야 해요. 그렇다면 벽월선자에게는 별 일이 없겠군요?"
소손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분명 황보수선이 남궁청운에게 큰 봉변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설사 그의 마수를 피할 수 있다해도 여색이라면 밥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육마존이 뒤따라갔으니 정절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였다.
홍루부인은 천외천주의 마지막 부인이었다. 동시에 가장 총애를 받는 부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 해도 그에게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황보수선을 염려하는 듯한 말을 하니 그는 저으기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말이 없자 홍루부인은 차갑게 내뱉었다.
"안되겠어요, 내가 직접 황보세가로 가야겠어요. 어차피 주상께서도 이번 길에 남궁청운의 목을 베어오라 하셨으니 하루라도 빨리 그자의 숨통을 끊어놓고 싶어요. 게다가 그 일은 성내에서 보다는 외부에서 행하는 게 나을 거예요. 난 바로 황보세가로 달려가 두 분 마존의 도움을 얻어 남궁청운을 처단하겠어요. 물론 그 일은 십정회가 한 짓으로 위장할 테니 총관은 후임성주의 등극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으세요."
소손방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미 속하는 여기 있는 종리단주가 후임성주에 오를 수 있는 명분과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무림군왕성의 무사들도 대부분 남궁청운의 죽음을 반길 것입니다. 아무 심려 마십시오, 부인."
"종리단주, 총관의 말이 사실인가요?"
홍루부인은 처음으로 종리무에게 물었다.
"예, 홍루부인. 마음놓으시고 편히 다녀오십시오."
첫 대면을 하는 홍루부인 앞에서 좀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은 종리무였으나 슬쩍 고개를 들어 마주보다가 급히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자신을 쏘아보는 홍루부인의 눈빛에 지독한 냉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좋아요, 그럼 믿고 다녀오겠어요. 그자의 목을 베는 대로 바로 돌아올 테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이목이 있으니 배웅은 생략하세요."
홍루부인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네 명의 시비와 이십이 인의 천외천 소속의 위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라졌다.
'이상한데?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인데 기억이 나지 않으니.......'
종리무는 눈썹을 찌푸리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분명 홍루부인의 모습은 낯이 익었다. 그런데 도무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소손방에게 말했다.
"주상께서는 별난 취향을 가지고 계시군요. 저렇게 눈빛이 차가운 여인을 가까이 하시는 걸 보니......."
"이놈아, 주둥아리 닥쳐라.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제 성내에 들어와 있는 천외천의 형제들이 수백 명이 넘지 않느냐? 자칫 실수하면 그 순간 목이 달아날 것이다."
"후후! 알겠습니다. 입조심 하지요."
종리무는 짐짓 괴소를 흘리며 돌아섰다.
"이놈아! 어딜 가는 거냐? 해야 할 일이 산적하거늘?"
"알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다 만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흐흐......."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사라지는 종리무였다. 소손방은 그만 혀를 찼다.
"저런... 네놈이 하다만 일이 뭔지 알만 하다. 그러다 복상사라도 하면 어쩌려고."
소손방은 쓴입맛을 다셨다. 워낙 오랜 세월 곁에서 두고 본지라 그에게 있어 종리무는 아들과도 같은 존재인 듯했다.
③
마군자 사마을지는 흐뭇한 마음으로 청죽림 사이의 소로로 들어섰다.
그의 양손에는 두 개의 제법 묵직한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그 속에는 청아에게 주기 위해 산 비단옷과 꽃신, 그리고 몇 가지의 장신구들이 들어 있었고, 또 다른 보따리에는 생선과 닭고기, 신선한 과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외천의 군사로서 다망한 시간을 보내느라 오랫동안 청아를 보지 못한 그는 큰 마음을 먹고 낙도서원(落島書院)으로 돌아온 것이다.
'허허, 깜짝 놀랄테지. 놀람이 가시면 그땐 내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마구 두들길 것이고... 이내 뾰로통한 어조로 묻겠지? 식사는 하셨느냐고. 하지만 대답도 듣지 않고 부엌으로 달려가 정성껏 상을 차릴 게 분명해.'
늘 그렇듯이 청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훈훈한 온기로 채워졌다. 그는 소박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유유히 청죽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사마을지의 몸이 굳어버렸다.
낙도서원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막 서원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는 것은 청아가 아니라 음침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폭이 좁은 한 자루의 괴도(怪刀)를 어깨에 꽂은 키가 칠 척이 넘는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일신에는 회색의 장삼을 입고 있었다.
사마을지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천외천의 팔대봉공 중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과거 오봉공과 함께 살막을 몰살시켰던 위인이었다.
"늦었구려, 군사."
"이곳엔... 어인 일이시오?"
사마을지의 안면 근육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포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염왕도(閻王刀)란 별호를 지니고 있었는데 늘 오봉공 사승(死僧)과 함께 붙어 다녔다. 그런데 유독 오늘은 혼자였다.
'그렇다면......?'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염왕도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잘 아시리라 믿소만."
"무슨 말씀이신지......?"
"쯧쯧, 군사답지 않소. 결심이 섰기에 그런 일을 저지르셨을 텐데 노부를 대하고도 의연할 줄 알았소."
쿵!
사마을지의 손에 들려있던 보따리 두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서원의 한 방으로 날아 들어갔다.
"청아!"
한 방문을 열어젖힌 그는 벼락을 맞은 듯이 전신을 떨어야 했다.
그가 들어간 곳은 하나의 침실이었다. 방안의 침상 위. 한 소녀의 시리도록 흰 나신이 하반신은 바닥에, 상반신은 침상에 걸쳐진 채 길게 뻗어 있었다.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아니, 비참한 모습이었다.
청아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두 다리를 벌린 채 죽어 있었다.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로는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려 눈부시게 흰 허벅지를 타고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나이 스물둘.
일곱 살 어린 나이에 그를 만나 십오 년이란 세월 동안 그의 딸이자 연인이었던 청아는 그런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사마을지의 전신이 격렬하게 떨렸다.
"조금만 일찍 왔어도 좋은 구경을 했을텐데... 안됐소이다. 군사. 아미타불."
정이라곤 한 점도 깃들어 있지 않은 누군가의 음성이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
오봉공 사승이 침상 곁에서 검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사마을지의 눈은 여전히 청아의 시신에 못박혀 있었다. 그의 눈은 청아의 작은 젖가슴에 멎어 있었다. 사과처럼 동그란 청아의 젖가슴에 시커먼 손가락 자국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흐흐, 기껏 즐기다가는 군사의 음성이 들리니 갑자기 혀를 깨물더군. 아무튼 계집들의 앙큼한 속은 알 수가 없단 말이오. 클클!"
사마을지는 후들거리는 걸음을 옮겨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는 사승의 존재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사승이 손바닥을 칼처럼 세워 그의 목을 치려는 순간, 염왕도가 문가에 나타나며 턱짓을 했다.
사승은 순순히 옆으로 비켜주었다.
"......."
사마을지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금침을 끌어당겨 청아의 나신을 덮어주었다. 그의 노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청아의 창백한 뺨을 쓰다듬는 동안 눈물이 뚝 떨어졌다.
"군사, 유감이오. 적어도 노부와 즐길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다섯째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오. 허허."
염왕도의 말이었다.
사마을지의 눈까풀이 부르르 경련했다. 그렇다면 사승에 앞서 염왕도도 청아를 범했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두 분... 잠시만 비켜주시겠소?"
염왕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승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마지못한 듯이 방안에서 나갔다.
사마을지도 방안에서 물러났다. 그는 마당에 떨어져 있는 보따리를 챙겨 다시 청아의 침실로 들어갔다.
사마을지는 마치 의식(儀式)을 치르는 것 같았다.
먼저 그는 깨끗한 천으로 청아의 나신을 닦아내었다.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선혈은 물론이려니와 젖가슴에 찍혀있는 손가락 자국까지도 지워버리려는 듯 천으로 몇 번이나 닦아냈다.
이어 방금 사온 새옷을 청아의 몸에 입힌 후 발에는 꽃신을 신겼다. 또한 비녀와 노리개 등 각종 장신구로 그녀를 정성스럽게 치장해 주었다.
청아의 창백한 얼굴에는 분도 발라주고 화장을 해주었다. 늘 낡은 옷만 입고 있던 그녀는 비록 죽은 몸이었으나 이렇게 치장해 놓고 보니 화사한 미모가 돋보였다.
사마을지는 밖으로 나가더니 서원에 있는 모든 촛를 가져와 침실 안에 밝혔다. 수십 개의 촛불로 인해 침실 안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마지막으로 청아를 반듯이 눕힌 후 그녀의 곁에 누웠다. 그는 한손을 그녀의 머리에 받친 후 가볍게 끌어안았다.
"청아야, 날 용서해다오."
휙!
입김을 불자 촛불이 쓰러지며 불이 확 붙었다.
화르르륵!
침실 안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수십 개의 촛불이 쓰러지며 붙기 시작한 불은 눈깜짝할 사이에 먼저 침상을 태웠으며 곧이어 서원 전체로 번져나갔다.
"사랑한다... 청아야......."
화염 속에서 마군자 사마을지의 음성이 울렸다.
④
슈아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두 개의 환(環)이 날아갔다. 그것은 동그란 고리의 형태로 강기( 氣)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상대는 유령 같은 신법으로 강기환을 피해냈다. 그러나 강기환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이 집요하게 그를 쫓아갔다. 마침내 상대는 쌍장을 뻗었다.
기이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형상도 뻗어나오지 않았다.
콰앙!
고막을 터뜨릴 듯한 폭음이 울렸다. 그러자 두 개의 강기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크윽!"
남궁청운은 비명을 지르며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방금 전 펼친 것은 그의 최후의 비공(秘功)으로 위력이 절륜한 만큼 내공의 소모가 극심한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은 것이다.
"흐흐! 꼬마야, 이제 밑천이 떨어졌느냐?"
상대는 조소를 날리고 있었다. 당대무림의 지존이자 무림군왕성의 성주인 남궁청운에게 꼬마라고 부르다니!
그는 최근 무림군왕성의 부성주에 오른 자로 실제로는 천외천의 팔대봉공 중 육좌(六座)를 차지하고 있는 구지신마(九指神魔) 탁정(託程)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가 붙어 있어 손가락이 아홉 개밖에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불구를 딛고 그는 무공광(武功狂)으로 한평생 수만 종의 무공을 익혔다.
또한 그는 색마(色魔)이기도 했다. 여자라면 처녀건 유부녀건 가리지 않고 탐하는 작자였다.
지금 그는 육장으로 남궁청운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남궁청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몇 달째 황음(荒淫)에 빠져 진기가 혼탁해진 그는 구지신마를 맞이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 그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심적인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예군향을 비롯한 두 명의 부성주, 총관 소손방과 종리무 등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흐으.........."
그는 괴성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군향과 두 명의 부성주 외에도 낯익은 무림군왕성의 무사들 수십 명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는 양자강의 도도한 강물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황보세가가 있는 무한(武漢)과 불과 십여 리를 둔 채 절대절명의 상황에 봉착해버린 것이다.
막 도강(渡江)하려던 그를 멈추게 한 것은 그의 뒤를 쫓아온 예군향이었다. 그녀는 급한 전갈이 있다며 이곳 강변으로 그를 유인했다.
그런데 강변에 도착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두 명의 부성주와 수십 명의 무사들이었다.
예군향은 그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무림군왕성은 천외천이 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이용한 괴뢰에 불과했으며, 남궁청운 또한 그들의 이용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림군왕성은 이미 천외천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는 말까지 하며 그를 마음껏 비웃어댔다.
남궁청운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그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동안 무림군왕성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은 결국 천외천의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총관 소손방의 손에서 놀아났으며, 그의 꾀임에 빠져 결과적으로 부친을 시해하는 천륜까지 범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누이인 남궁소연마저 종리무의 음모에 빠져 순결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남궁청운은 미쳐버리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흐으... 왜 날 죽이지 않느냐?"
그는 마기(魔氣)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구지신마를 노려보며 물었다. 기실 그는 최후의 비공을 쏟아낸 뒤로 손가락 하나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웬일인지 구지신마는 살수는 가하려 들지 않았다. 마치 그가 탈진하여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흐흐, 네놈이 좋아서가 아니다. 네 목을 원하시는 분이 계셔서 잠시 유보해둘 뿐이다."
남궁청운은 자신의 목을 원하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는 서서히 결심이 굳어져 갔다. 놈들에게 끌려가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산화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흐으, 어차피 죽을 것! 혼자 가진 않는다.'
그의 눈에서 마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구지신마를 노려보며 은밀히 패왕수라공을 운기했다.
패왕수라공은 소손방이 그에게 건네준 비급으로 익힌 마공(魔功)이었다. 패왕수라공으로 그의 무공은 속성(續成)으로 증진되었으나 그 바람에 마성에 빠졌었다.
그는 상대가 준 마공으로 마지막 앙갚음을 하기로 결심했다.
스스스!
그의 머리 위로 시커먼 묵기(墨氣)가 분출되었다. 구지신마는 한눈에 알아본 듯 괴소를 흘렸다.
"흐흐! 패왕수라공을 펼치려고? 가상한 놈이로구나."
구지신마는 조소를 흘리면서도 은연중 공력을 십이 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도 패왕수라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감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패왕수라공의 위력은 가히 패도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면으로 격돌한다면 둘 중 한 명은 무사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남궁청운의 목만은 남겨두어야 하는 임무를 완수치 못하게 된다.
구지신마는 눈알을 굴리며 자신의 최대절기인 혈겁폭(血劫暴)을 끌어올렸다. 독문신공인 혈겁폭을 펼치자 전신 모공(毛孔)으로부터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우와아아악!"
돌연 천지를 흔드는 듯한 괴성이 남궁청운에게서 터져나왔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포효와 함께 전신이 갑자기 배 이상 부풀어 오른 것이다.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사방으로 휘날리고, 입고 있던 장삼이 공처럼 부풀어오르며 찢어질 듯 나부꼈다.
"크으으으... 죽이리라! 모두......!"
남궁청운의 눈에서 시커먼 묵광이 뻗은 순간.
콰콰콰쾅!
"헉!"
구지신마는 대경실색했다.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남궁청운은 자신의 몸을 산화시키는 동귀어진의 길을 택한 것이다.
"빌어먹을! 피... 피해라!"
그는 고함을 치며 신형을 뒤로 날렸다. 그러나 늦었다.
콰르르릉!
천지가 붕괴되는 듯한 폭음과 함께 사방이 온통 칠흑 같은 묵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엄청난 강기에 뿌리째 뽑혀나가는 나무와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가는 바위들, 터져 오르는 흙덩이, 그 속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인육(人肉)들.......
"크으... 이럴 수가!"
구지신마는 연달아 이십여 보나 밀려나간 후 가슴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강기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난 후 주위는 온통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바닥은 온통 폭풍을 맞은 듯 파헤쳐져 있었고, 수십 명의 무사들이 걸레쪽처럼 찢겨져 사라졌다. 남궁청운은 벌렁 넘어가 있었다. 그의 가슴과 복부가 온통 터져나간 듯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패왕수라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내공을 고스란히 밖으로 배출해버린 것이었다.
예군향은 이봉공의 품에 안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이봉공도 내상을 입었는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으으, 정말 지독한 놈이로군.... 놈을 너무 과소평가했어. 그나저나 홍루부인께 뭐라고 말해야 하지?"
구지신마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내뱉었다.
그러나 걱정은 나중이었다. 그도 내상을 입었으므로 먼저 몸부터 추스려야 했다. 그는 곧 바닥에 주저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며 단전에서 생성되는 진기를 사지백해로 돌려나갔다. 그런데 운기조식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던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
남궁청운이 쓰러져 있는 뒤쪽은 양자강이었다. 강상에 한 척의 나룻배가 미끄러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룻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강안에 닿았다. 나룻배로부터 방갓을 깊숙이 눌러쓴 사공이 신형을 날리더니 단숨에 남궁청운의 곁에 떨어져 내렸다. 이십여 장의 거리를 세 번 뛰어서 도달했다.
그는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는데 태연히 남궁청운을 들더니 어께에 걸쳐멨다.
구지신마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운공조식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그는 분노한 표정을 지을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멀뚱히 사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였다.
"놓아라!"
슈슈슈슈슉!
이봉공이 대갈을 터뜨리며 검을 전개했다.
사공은 흠칫하더니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이봉공은 검의 달인이었다. 그의 검은 어검술(馭劍術)의 경지에 달해 있어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이 사공의 등뒤로 빛살처럼 날아갔다.
"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허공에 피보라가 뿌려지며 사공의 왼쪽 발이 발목째 잘려 떨어졌다.
그러나 사공은 놀랍게도 남궁청운을 꼭 껴안은 채 하나뿐인 다리로 신형을 그대로 날려 배위에 떨어졌다. 이어 황급히 노를 저으며 강상으로 사라져버렸다.
방금 전 울린 비명소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사공이 여인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아니... 저 계집은 누구길래......?"
막 운기조식을 끝낸 구지신마는 벌떡 일어서며 황당한 듯 소리쳤다.
쿵!
둔중한 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이봉공이 큰 댓자로 쓰러져 있었다. 그는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어검술을 전개했기 때문에 그만 혼절해버린 것이었다.
구지신마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둘째 형, 괜찮으십니까?"
혈도를 때리자 이봉공은 눈을 떴다.
"괜찮네.... 자네는?"
"예, 소제는 다행이......."
"허허! 좋은 경험을 했네. 정말 대단했어."
뜻밖에도 이봉공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구지신마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아니? 이 지경이 되고도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괴수신의 못지않은 친구가 또 있다는 것이 노부는 기쁘네. 언제고 기회가 닿는다면 좋은 승부를 나눌 수 있을 거야."
"아니, 둘째형! 그럼 남궁청운이란 놈이 살아날 것이란 말입니까?"
"그야 힘들겠지. 녀석은 패왕수라공을 완전히 배출시켜 버렸으니......."
이봉공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팔대봉공의 두 번째 서열인 검공(劍公)이었다.
평생을 검도(劍道) 외길만 걸어온 그는 좋은 적수를 만나는 것이 꿈이었다.
"이거야 원... 죽어도 탈이고 살아나도 탈이니......."
구지신마 탁정의 투덜거림에 검공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우?"
"홍루부인의 부탁을 어겼으니 말하는 게 아닙니까?"
검공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우리는 최선을 다했네. 돌연한 변고는 불가항력이야. 게다가 대사를 도모하는 우리들이 한낱 아녀자의 사사로운 원한에 얽매여서야 쓰겠나? 신경 쓰지 말게."
구지신마의 얼굴에 존경의 빛이 나타났다.
"역시 둘째형은 다르군요. 그러니 광마(狂魔)가 생전에 그렇게 둘째형만 졸졸 따라다녔지."
광마는 얼마전 관운빈에게 죽은 팔대봉공 중의 일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이만 돌아가세."
구지신마는 바닥에 누워있는 예군향을 내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계집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안고 갈까요?"
그는 허락도 받지 않고 예군향을 번쩍 안아들었다. 검공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
"그리 하게. 하지만 그녀를 건드릴 생각은 말게. 주상께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니 말이네."
"쩝!"
구지신마는 실망한 표정으로 혀를 찬 후 다시 물었다.
"무림군왕성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아니야, 여기까지 온 김에 황보수선이란 아이를 데려가세. 그 아이의 미색이 그리 출중하다하니 아우도 관심 있지 않은가?"
"아이쿠, 형님! 절 이해하시는군요. 이거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구지신마의 입이 쭉 찢어졌다.
"그럼, 어서 갑시다. 여기서 가까우니 곧 도착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