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의 세월(歲月)
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져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고, 그 사이로 맑은 눈망울 두 개가 빛나고 있었다.
군데군데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송림(松林).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무 가지 위에서 눈더미가 툭툭 떨어져 내렸다.
'지금쯤 돌아올 때가 된 듯한데…….'
그는 조양(朝陽)을 보고 있었다.
백무엽, 그는 화정신수궁에서의 일을 마친 후 곧바로 천진부로 돌아왔다.
이 곳은 와우구(臥牛邱)라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와우구는 청운군영각(靑雲群英閣)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백무엽은 대인법(大忍法)을 터득한 후, 경공술(輕功術)에 있어 초절정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붉은 해가 담기고 있었다.
'언제쯤에나 밝은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지…….'
백무엽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해를 응시했다.
그의 안력(眼力)은 어둠을 뚫어 보고, 세 자 두께의 얼음을 뚫고 물 속의 잉어를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인간 잠재력의 극한(極限)을 깨는 특수한 수련을 거친 백무엽. 그는 이 순간따라 그녀를 생각한다.
'설향, 그녀가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백무엽은 설향의 이목구비를 그려 봤다.
-미워, 미워! 너를 죽이고 말 테야!
그녀는 애절한 표정으로 뇌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나를 바라고 있다.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왠지 모른다, 나는 떠나야 한다!'
백무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곳으로 가야만 한다. 나는 늘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꾼다.'
백무엽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바로 그 때였다.
사박- 사박-!
누군가 눈을 밟는 소리가 들리며,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대숙(大叔), 춥지 않아요?"
눈빛이 까만 소녀가 살그머니 다가서고 있었다.
아주 앙증스러운 귀염성을 지닌 미소녀, 그녀는 청청(靑靑)이라고 했다.
버림을 받은 고아소녀, 그녀는 청운군영각에 모여 사는 수많은 고아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지라 아이들을 위해 밥도 하고 길쌈도 했다.
지금 청청의 가슴에는 누비옷 한 벌이 안겨 있었다.
청청은 머뭇거리며 다가섰다.
백무엽은 빙그레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여기 있는지 어찌 알았느냐?"
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매달렸다.
그 미소는 새벽의 빛과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사랑의 빛이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야말로 백무엽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쑥을 뜯으러 지난 새벽 나섰다가… 멀리서 봤어요."
청청의 볼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쑥? 벌써 쑥이 나느냐?"
"양지녘에는요."
"벌써… 봄기운이 여기까지 왔나 보구나!"
백무엽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청청의 머리를 감싸 주었다.
청청의 볼은 아주 차가웠다.
'그래, 나는 이런 아이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악마의 무리들을 쳐부수는 것은… 힘이 약한 사람들을 위한 싸움이다.'
백무엽은 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뜨거운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인문(忍門)이 나를 풀어 준다 해도 나는 계속 검(劍)을 쥐고 강호를 떠돌아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백무엽은 싱긋 미소지었다.
청청은 백무엽이 그러한 미소를 짓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겪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빛은 점점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곧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릴 듯했다.
"청청아, 새벽에 나를 봤으면 소리쳐서 부를 것이지… 어이해 지금에야 오느냐? 대숙이 그리도 먼 사람이야?"
"아니예요, 대숙! 대숙은 참 좋아요. 늘 대숙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할아버지가 한 말 때문입니다, 대숙. 대숙이 미워서 모른 체한 것이 아니라……."
"석노야(石老爺)가 뭐라 했는데?"
"대숙은 곧 떠날 사람이니, 다시는 아는 체를 말라고!"
"흠!"
"그리고… 보게 되더라도 못 본 체하라고!"
"흠, 노야가 그랬단 말이냐?"
"예."
"그리고?"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니, 그렇게 되면 우리들끼리 힘을 합해 살라고도 하셨습니다!"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백무엽의 볼이 경직되었다.
석노야는 바로 부평령(浮 令)이다. 그도 이번 일에 참가를 했었다. 한데……?
청청은 입술을 질끈 물고 말을 이었다.
"떠나가기 전날, 할아버지는 피를 아주 많이 토하셨답니다!"
"피를?"
백무엽은 또다시 흠칫 놀랐다.
"예. 그래서 천야농부(天野農夫) 할아버지가 와서 할아버지에게 단약(丹藥)을 드리기까지 했었습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느냐?"
백무엽은 힐끔 하늘을 봤다.
'나는 강(强)하고 젊으나, 다른 사람들은 병들었다. 아아, 그들은 마혼십가와 싸우다가 중내상(重內傷)을 입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쓰러지지 않고 다시 도전했다. 의혼(義魂)이 그들을 싸우게 한 것이다.'
백무엽의 살색이 조금 희어졌다. 그 때였다.
"대, 대숙! 아파요!"
청청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 나왔다.
"미, 미안하구나. 그만, 너를 너무 세게 안았구나!"
백무엽은 얼른 팔을 풀더니, 두 손으로 청청을 번쩍 안아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도 너희들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왜요?"
"내가 있으니까!"
백무엽의 흰 이가 훤히 드러났다.
"정말이에요, 대숙?"
"하하… 그럼 대숙이 거짓말쟁이란 말이냐?"
벡무엽은 환히 웃었고, 한 걸음 내딛었다.
저벅- 저벅-!
그는 눈을 밟고 걸음을 내딛으며 덧붙였다.
"대숙이 너희들에게 새해 예물을 주지 못했구나. 좋아, 대숙이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너희들에게 꽃신을 사 주겠다! 저자로 가자꾸나!"
"야아! 좋아라!"
청청은 환히 웃는다. 그리고 그 웃음은 곧 두려운 표정으로 변화했다.
"아니 돼요. 저자(市場)에 내려가면 아니 돼요."
"왜?"
"대숙은 숨어 계셔야 해요. 사, 사실은 대숙에게 그 말씀을 드리기 위해 왔어요."
"무슨 소리냐?"
"이것을 보세요. 이것은 제가 주루문에서 떼어 온 것입니다!"
청청은 손을 허리춤에 댔다.
잠시 후, 청청은 방문(榜文) 한 장을 백무엽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이 아이가 이것을 두려워할까?'
백무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폈다.
그 안, 백무엽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글이 적혀 있었다.
<이하자(以下者)는 즉시 연경(燕京) 화영친위대(華影親衛隊)로 와서 배례해야 함.
천진부(天津府) 무유서생(無遊書生) 백무엽(白武葉),
봉양성(鳳陽城) 열화태세(熱火太歲) 사마량(司馬亮),
해동(海東) 비파금지(琵琶金指) 철무생(鐵無生),
곤륜(崑崙) 운중일학(雲中一鶴) 종전(鐘田),
동정호(洞庭湖) 상강어은(湘江魚隱) 목강우(穆江羽),
음산(陰山) 칠절수사(七絶秀士) 곡기(曲奇)…….>
오십여 인의 이름이 방문에 적혀 있었다.
'나의 이름이 맨 위에 있다니… 대체 무슨 이유일까? 자금성(紫禁城)에서 나를 찾다니?'
백무엽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가는 인기척을 들었다.
"쿨룩… 쿨룩……!"
기침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다가서고 있었다.
커다란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계피발학의 노인 천야농부(天野農夫), 그가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제일 먼저 청청을 받아 번쩍 안아 들었고, 청청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체하며 백무엽을 향해 전음입밀(傳音入密)로 이야기를 했다.
"신경 쓸 일은 아니네, 무화령!"
그의 목소리는 아주 가늘었다.
천야농부, 그는 본시 소림제일인(少林第一人)이었다.
철목성승(鐵木聖僧), 그는 전에 비해 지치고 병들어 보였다.
"그 일은 자네의 근골(筋骨)이 좋다는 뜻에 불과하니, 신경쓰지 말게!"
"근골이라니요?"
"화영군주라는 오만하고 괴팍한 황실여인 하나가 친위군(親衛軍)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 십대천장(十代天將)을 강호에 풀었다네. 기재를 찾아오라는 뜻에서였지."
"흠!"
"한데, 그 중 우두머리인 천하유자(天下遊子)가 자네의 탁월한 근골을 알아보고 친위대에 전서를 보낸 것이네!"
"아……!"
"훗훗… 자네의 무공은 화영친위군 오백을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지. 천하유자는 그것을 모르고 자네를 친위군에 입문시키려 하는 것이라네!"
"흠……!"
"훗훗… 세월이 어지러워지다 보니, 황실마저 세력을 넓히려 하는구먼. 훗훗……!"
천야농부는 쭈욱 전음으로 말하다가 백무엽을 바라봤다.
백무엽은 바람을 맞고 있었다. 북서풍(北西風)이 그의 얼굴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리고 눈(雪)… 함박눈이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을 뒤덮기 시작했다.
백무엽의 준미로운 얼굴은 가히 신의 얼굴과 같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말할 수 없는 신비를 가득 담고 있었다.
'가히 천하제일인이다. 아아, 단신으로 화정신수궁을 격파하는 가운데 약간의 상처도 입지 않다니……!'
천야농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전음이 아니었다.
"자네에게 전할 것이 있네!"
그가 육성으로 말하는 이유는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청청은 자고 있었다. 천야농부가 청청을 안아 들며 청청의 혼수혈을 가볍게 찍은 것이다.
"이것은 본시 몇 달 후 자네에게 주려 한 것이네. 그런데 상황이 화급해져 지금 여기서 자네에게 전하고자 하네!"
천야농부는 허리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꽤 묵직해 보였다.
"이것은 인문(忍門)이 자네에게 주는 것이 아니네!"
"그럼?"
"자네를 아는 사람들이 주는 것이네. 다시 말해, 인문의 한 사람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네를 아는 사람으로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가죽 주머니는 백무엽의 손으로 전해졌다.
천야농부는 이제 할 일을 다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청청을 꼬옥 끌어안으며 결연한 어조로 덧붙였다.
"자네는 곧 떠나야 하네."
"어, 어디로요?"
"문주가 말해 줄 걸세! 아마 마지막 길이기가 쉽네."
"으음……."
"이번은 인문의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네. 적은 너무 방대하네. 인문으로 그들 모두를 격파할 수는 없네!"
"……!"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 그것은 천하에 그들을 소문내는 것이지. 그것은… 성공했다고 보네!"
천야농부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저벅- 저벅-!
그는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퍼부어지는 눈 속으로…….
"고아들은 강룡사태가 다 키울 것이네. 강룡은 이번 싸움에서 반 폐인이 되었다네. 다시는 강호상에 나가지 못할 걸세. 물론, 빈승도 마찬가지이지!"
"아아……!"
"강룡은 청청이라는 이 아이를 의발전인(依鉢傳人)으로 삼을 걸세! 아마 수년 후, 청청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미파의 여고수 하나가 나타나겠지. 그리고 그 아이는 소림의 절기에도 꽤나 탁월할 것이네!"
"……!"
"그 때 그 아이를 보게 되면 조금 전같이 귀여워해 주게! 물론 그 때 자네는 인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테지만!"
천야농부의 모습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는 설무(雪霧) 속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문주는 표향루(剽香褸)에 있네. 갈 때 역용하고 가게. 문주도 역용하고 자네를 기다릴 것이네그려. 헛헛……!"
그는 그런 말을 남기며 아련히 사라졌다.
그리고 설풍(雪風)과 아련한 말소리만이 허공에 남았다.
"십화궁(十花宮)의 설노인(雪老人)은 여덟 시체를 되살린 후 그들에게 절을 하며 살계(殺戒)를 어기라 부탁했고, 파계승(破戒僧)과 거지와 도사가 승복했네. 아아, 하지만 덧없는 세월은 흐르고… 인문과 약속했던 세월은 모두 다 사라졌도다! 그러나 인연은 사슬이 되어 남고……."
천야농부는 천리전음으로 말하며 사라져 갔다.
그는 완전히 떠나 버린 것일까?
백무엽은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눈보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먼저 떠나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군. 오히려… 내가 남게 되는군."
그는 한숨을 쉬다가 가죽 주머니를 폈다.
그 안, 백무엽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우선 먼저 보이는 것은 꽤 두꺼운 책자 세 권이었다.
인문십화경(忍門十花經).
세 권의 제목은 모두 같았다. 그러나 부제는 각기 달랐다.
상편(上篇) 연무편(練武編),
중편(中篇) 접기편(接技編),
하편(下篇) 천문지리편(天文地理編).
인문십화경은 바로 인문에 몸을 담았던 강호제현들의 비전절학이었다.
인문의 문을 연 십화지존(十花至尊)의 절기를 위시해서 철목성승(鐵木聖僧), 강룡사태(降龍師太), 마의화타(麻衣華陀), 천마성(天魔星), 풍진취개(風塵醉蓋), 벽진자(碧眞子), 야유향(夜遊香)…
이들의 제반절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인문십화경 안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애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최근에 만들어진 듯 했다.
연무편에는 정파의 전통적인 무공이 적혀 있었다.
십화궁비전절예(十花宮秘傳絶藝).
화혼폐맥수(花魂廢脈手),
창궁난화칠십이장(蒼穹亂花七十二掌),
신화무영척천도(神花無影擲天刀),
감리십화지력(坎離十花指力),
산화선녀옥수(散花仙女玉手),
화영무궁진력(花影無窮眞力),
비화어기배검술(飛花馭氣排劍術).
달마역근경철목주해서(達磨易筋經鐵木註解書).
소림칠십이종절예 중 삼대절기(三大絶技) 철목주해(鐵木註解).
대금강복마장(大金剛伏魔掌),
미타분향지공(彌陀焚香指功),
탄지신통력(彈指神通力).
무당상청보록초벽진해(武當上淸寶錄抄碧眞解).
양의선력(兩意禪力),
육합개정수(六合開頂手),
선천삼미진력(先天三味眞力),
삼풍비전(三豊秘傳) 풍마상청검결(風魔上淸劍訣).
개방삼대절기(蓋幇三大絶技).
주선공법(酒仙功法),
취팔선무보(醉八仙舞步),
타구백팔로신봉술(打拘百八路神棒術).
야유비전(夜遊秘傳) 십대신투공(十大神偸功) 공공비결(空空秘訣)
화타비전(華陀秘傳) 천약천초보(千藥千草譜).
상중하, 세 편의 비급은 십 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권말에는 기이한 단서가 달려 있었다.
-이 비급의 전수는 백무엽 일 인에게 한한다.
오직 한 사람 백무엽에게 전한다는 글, 그 글이 백무엽의 볼을 화끈하게 했다.
'그들이 나를 아꼈단 말인가? 살인병기(殺人兵器)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를 아꼈단 말인가? 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백무엽의 볼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비급과 함께 들어 있던 하나의 작은 금주머니를 여는 순간에는 눈가가 시큰해지기까지 했다.
개방 십절죽부령패(十節竹符令牌).
전 개방도(全蓋幇徒)는 이 패의 주인을 십결제자로 존경해야 한다.
패를 쥔 자, 바로 조사(祖士)이니… 그가 무엇을 명하든 도와야 한다!
야제령(夜帝令).
이 패의 주인은 녹림지왕(綠林之王)이요, 하오지제(下午之帝)이도다.
투의 길(偸道), 푸른 숲의 길(綠林道), 밤의 길(黑道)을 걷는 모든 사람은 이 패의 주인을 지존(至尊)으로 섬겨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야유문(夜遊門) 사람이 너의 모든 것… 재산과 목숨, 아내마저 훔쳐 가 버리리라!
천마패(天魔牌).
이것을 가진 자, 천마성(天魔星)의 화신이니… 그를 혈마방주(血魔幇主)로서 존경하고, 이 패가 나타난다면 과거 혈마방에 들었던 사람은 모두 뭉쳐야 한다!
화타문주패(華陀門主牌),
백팔철목주(百八鐵木珠)…….
여러 개의 영부(令符)들, 그것은 고수들이 인문에 들기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백무엽에게 전한 것이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돌아가지 못할 처지가 된 사람도 있었고,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대신 백무엽을 선택했다.
<인문은 시한부(時限附)로 탄생했다. 마혼십가가 정식으로 나타나는 순간, 인문은 해체된다.
자객 노릇으로는 그들 전부를 멸할 수 없다. 인문은 작은 그릇일 뿐이다.
인문의 뜻은 단 하나! 그것은 바로 한 마리 용(龍)을 만나 그에게 천하를 구할 능력을 주는 데에 있다!>
그런 글이 쪽지에 적혀 있었다.
"나를… 나를 선택했단 말인가? 왜?"
백무엽은 주먹을 불끈 쥐고 위로 날아올랐다.
슷-!
누런 선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유성(流星)이 땅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가듯, 백무엽은 탄지지간에 이백오십 장을 날아 모습을 감췄다.
고금제일의 경신법.
인법 오결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한 번에 이백오십 장을 날지는 못할 것이다. 난다 하더라도 이처럼 빛살같이 빠르게 날지는 못할 것이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신형을 폭사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백무엽은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노출시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강한 고수였다.
* * *
폭설(暴雪)은 또다시 주루 주인을 울상짓게 했다.
"젠장, 이번 겨울에는 어이해 눈이 이리도 많이 쏟아진단 말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어이해 마작(麻雀)을 그리도 좋아한단 말인가?"
표향루주(飄香樓主).
그는 점소이 생활 삼십 년 해서 모은 돈을 다 들여서 이층 주루를 차렸다.
위층에는 객방이 있고, 아래층에는 술과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제법 반듯하게 차렸는데에도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목이 좋은 곳이 아니고, 눈이 유난히 많이 오기에.
눈이 많은 날에는 사람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개 마작판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봄만 되면 고과부의 고리채를 빌려서라도 주루를 헐고 도박장을 차려야지!"
주루 주인은 툴툴거리다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젠장, 주머니 텅 빈 놈들만 와서 싸구려 죽엽청(竹葉淸)만 홀짝이니… 젠장!'
그는 입을 벌렸고, 나무 바닥에다가 누런 가래침을 툭 뱉어 냈다.
"카악… 퉤에!"
구석진 자리, 벌써 세 시진째 술을 마시고 있는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는 아주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고, 머리를 산발해 흩트리고 있었다. 아래턱에는 수염도 나지 않은 어린 소년, 그는 쓴 술을 안주도 없이 쉬지 않고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는 황삼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이 거무스름하고 입술이 두꺼운 것이 여자의 호감을 끌 것 같지는 않았다.
유별나게도 무화과 가지 하나를 잘라 들고 있는 폼이 풍류도 제대로 모르는 파락호(破落虎) 같았다.
"쓰군!"
소년은 술잔을 텅 비게 한 다음, 청년을 힐끔 봤다.
"어때? 빤히 보지만 말고 술을 한 잔 하는 것이?"
그는 적개심을 갖고 있는 듯, 아주 사납게 말했다.
"권하는 잔(盞)은 피하지 않는 법이라니, 들겠소!"
청년의 목소리는 용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웠다.
"큿큿……!"
소년은 웃으며 청년에게 잔을 준다.
잔은 곧 술로 가득 찼다.
높은 누각 근처에 핀 꽃이 나그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천하가 소란하지만 나 혼자 이 곳에 왔다.
금강의 봄빛은 천지에 퍼졌고,
옥루봉에 머뭇거리는 구름은 수시로 변화하며,
북극성 같은 우리 조정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서산 저쪽의 토번 무리는 침략을 그쳐야 할 것이다.
花近高樓傷客心, 萬方多難我登臨,
錦江春色來天地, 玉壘浮雲變古今.
잔에는 술이 가득 부어졌다.
황삼청년은 술을 단 한숨에 들이마셨다.
그는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소년을 바라봤다.
그의 흐릿한 눈빛은 기이하게도 신광(神光)을 흘려냈다. 하지만 그 빛은 차갑지 않고 따사로웠다.
"문주가 약골(弱骨)인지 이제야 알았소! 피를 좀 봤다고 술을 마시다니……."
아아, 너무도 아름다운 목소리.
바로 무화령 백무엽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가 오기 이전 표향루 구석진 자리에 앉아 두주불사 술을 마시던 소년은 설향이란 말인가?
설향, 그녀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남장을 하기는 했으나 천부적인 미색만은 감춰지지 않았다.
"나는 청춘을 인문에 바쳤다. 그러나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너 하나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
"이번 살행(殺行)에서 셋이 죽었다. 석노야(石老爺), 벽진자(碧眞子), 그리고 혈도 마운(血刀馬雲)! 너는 슬프지 않을지 모르나, 나는 슬프다… 진심으로!"
"그, 그들이 죽었다고?"
백무엽은 상체를 휘청였다. 그는 지금에야 설향이 술을 마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다. 그들은 죽었다. 적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으음……!"
백무엽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성공하기는 했으나 희생이 너무 컸다. 그리고 마혼십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설향은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진정한 모습일까?
"말하자면… 본시 싸움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소!"
"나를 위로하는 것이냐?"
설향은 친하게 지내던 세 사람이 죽은 사실에 대해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는 본래 이런 여인이었다. 원한으로 인해 마음이 모질어지기는 했으나, 그녀의 내심은 비단결보다도 부드러웠다.
그녀가 잔을 쳐들 때였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소! 세 분이 희생되었다고 해도!"
백무엽의 손이 쳐들렸다. 그의 손아귀에 설향의 흰 손목이 덜컥 잡혔다.
"놔라, 나는 문주다! 네게 죽음도 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설향은 잡힌 팔목을 풀려 했다.
하지만 백무엽의 내공은 그녀의 세 배 수준이 아닌가?
그녀가 쏟아 내는 진기의 힘은 모두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놔라!"
"놓을 수 없소!"
백무엽은 눈빛을 더욱 강하게 했다.
"제발 놓아라! 부탁이다! 어차피 너는 이 겨울이 지나면 인문을 떠날 사람이 아니냐?"
설향이 애절한 어조로 애원했다.
"물론 떠날 것이오. 그렇지만 그냥 떠나지는 않소!"
"그냥 떠나지 않겠다고?"
"생각해 봤소. 인문이 나를 통해 얻은 것을!"
"그래서?"
"결국 인문은 나로 인해 크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백무엽은 내공의 힘으로 설향을 제압하고 더욱 힘있게 말했다.
"인문은 나의 목숨을 살린 은인이오!"
"……!"
"그래서 나는 인문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했소!"
"그런데?"
"훗훗… 머지않아 입춘(立春)이오!"
"으… 음!"
"나는 떠날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오. 그러나 맨손으로 떠나지 않겠소. 왜냐하면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주었으니까! 즉, 빚을 진 쪽은 이제 내가 아니라 인문이란 말이오!"
"그럼 어찌하겠다는 말이냐?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훗훗… 그렇게 하고도 싶소만……!"
백무엽은 묘하게 웃었다. 이윽고 그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 설향의 뺨을 만졌다.
"무, 무슨 짓이냐?"
설향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내 그녀는 이를 빠드득 갈며 쏘아붙였다.
"무슨 더러운 수작을 하자는 것이냐?"
"그대는 죽기에는 너무 젊고, 미워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소!"
"뭐… 뭐라고?"
"정확히 말해, 이제까지는 그대가 인문의 주인으로 나를 지배했으나 이제부터는 내가 그대를 지배(支配)하겠단 말이오!"
"닥, 닥쳐라!"
설향은 악을 썼고, 그러다가는 백무엽의 눈빛 가운데 들어 있는 전에 없던 훈훈한 기운을 느끼며 돌연 볼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나, 나를 어찌하겠다고?"
"훗훗… 술을 줄이고 수다를 좀 줄인다면 몇 년 정도… 거느리고 살 마음이 있다는 말이오!"
"나, 나를 거느린다고?"
설향의 눈빛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거렸다. 심장의 박동 또한, 방망이질하듯 빨라졌다.
아니, 심장이 터져 버리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백무엽은 설향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듯 무심한 투로 말을 이어 나간다.
"훗훗… 여자가 검(劍)을 쥔다는 것은 내가 꺼리는 일이니, 나를 따르려면 무림에서 물러나시오. 후후… 나는 말이오, 거친 여자보다 얌전한 여자를 더 좋아하거든!"
"……!"
설향은 말을 잊고 말았다. 그녀의 마음 속 역시, 공허하기만 했다.
아아, 이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천하에서 가장 미묘한 관계로 천여 일을 끌어온 남녀.
두 사람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제야 끝이 나는 것인가?
'고마워, 무엽(武葉). 나를 여자로 생각해 주어서…….'
설향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안 돼!'
그녀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 때였다.
"어떻소, 경치 좋은 소주(蘇州)로 가는 것이? 다른 걱정은 마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 곳에는 겨울이 없다니……."
"아, 아직은 안 돼!"
"왜?"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 생겼다. 사실은… 그래서 너를 부른 것이다!"
"무엇이오?"
"죽일 자가 둘 생겼다."
"……!"
"그 자들은 백도에 잠입한 마혼첩(魔魂諜) 중 지위가 가장 높은 자들이다!"
"아아, 결국 알아 낸 것이오… 괴수를?"
"그런 셈이다. 아주 우연히 그 내막이 개방 쪽에 알려졌고…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누구요?"
"하나는 정법회에 있고, 하나는 소림사에 있다!"
"흠, 거기서 어떤 지위요?"
"놀랍게도… 둘 다 양쪽의 지존이다!"
"아아, 그렇다면 그들은 소림사와 정법회를 강점하는데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오?"
"그렇다. 마화삼이 드디어 나타났다. 그는 일단 중원을 얻고, 그 다음 변황마저 장악하고, 결국에 가서는 자금성마저 얻을 작정을 하고 있다!"
설향의 말은 점점 가늘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전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을 한시빨리 처단해야만 한다."
"이번이 마지막 암중살행(暗中殺行)이 될 것이다. 이번 일만 끝나면 우리는 천하에 우리들의 진면목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천하백도인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는 가운데 큰 세력을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설향의 눈빛이 유난히도 강렬해졌다.
정법회주 수정옥녀 단리음,
소림사 방장 고엽선사.
이들은 백도의 정신적 지주들이며, 당금 백도계를 이끌어 가는 실세들이다. 이들이 마혼십가의 하수인이라는 것은 마도가 이미 천하를 정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그런 자들을 처단한다는 것은 백도의 정기를 되살리는 일이며, 인문이 더 이상 암흑의 세력이 아님을 강호상에 천명하는 일이리라.
설향의 음성은 한층 단호해졌다.
"이들 중 정법회의 단리음은 네가 맡아라. 왜냐하면 그 곳의 방어는 천하에서 가장 치밀해, 네가 아니면 뚫지 못하니까. 나는 소림사를 맡겠다. 거기 출신인 철목성승이 내게 일러 준 암도를 따라 들어간다면 일을 쉽게 성사시킬 수 있다!"
설향이 그러한 말을 한 후였다.
"혹, 함정이 아닐는지?"
백무엽은 제 손으로 술을 따라 마셨다.
"글쎄,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그러나 조심한다면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으음……!"
"오늘 떠나. 일이 성사된 후, 화림에서 만나기로 하자. 그 곳의 지하밀실 안에서!"
"훗훗… 좋소!"
"그 때, 너는 내 부탁 하나를 들어 주어야 한다!"
"무슨 부탁을?"
"네가 문주 노릇을 해라. 나 대신!"
"문주?"
"너야말로 인문제일좌(忍門第一座)감이다. 너는 인문에서 가장 강하다. 네가 인문을 맡아 준다면 인문의 틀은 바르게 설 것이다! 너는 일개 자객 이상이다. 네 가슴 속에는 천하를 다스릴 경륜과 병법이 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설향의 눈에서는 사랑의 빛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백무엽의 눈에도 그와 비슷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 온 남녀. 지금까지는 인(忍)의 율법이 이들 사이에 존재했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며칠 후, 천기는 말할 수 없이 청명했다.
폭설이 거두어진 봉황산(鳳凰山)의 하늘은 푸른 유리벽(琉璃壁)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손가락만 대도 깨어져 버릴 듯…….
창천무궁(蒼天無窮).
하늘의 빛은 서러울 정도로 푸르렀다.
산정(山頂), 언제부터인가 인영(人影)이 하나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아주 긴 여인, 그녀는 사방을 휘둘러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꼭 올 것이다. 아암, 꼬옥 올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주위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사악한 빛이 흐르는 두 눈, 푸른빛 감도는 동공에선 핏빛 잔광이 흐르고 있다.
"호호… 인문은 꼬옥 온다. 그리고 온다면 잡힌다. 그리고 명예는 되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호호! 그 발칙한 혈발미랑년을 깔아뭉갤 수 있는 지위에 오르자면, 기필코 인문 무리를 내 손으로 잡아야 한다!"
휘이이- 잉-!
바람이 불며 궁장자락이 나부꼈다.
"호호… 인문의 자객놈! 나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놀이가 이제 시작될 것이다."
바람(風)이여!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구름(雲)은 또 어떠한 모양으로 뭉치고, 흐트러지고……?
하늘(天), 혹 하늘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