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과 본질을 동시에 본다 | 소리를 듣고, 소리가 일어나는 이 공간을 알아차린다 |
본질에 대한 관념을 버려라.(55:19)
0:17
<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 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말 굉장히 중요한 말이죠. 결국에는 우리가
형상을 동일시함으로써 자기가 의식이란 걸 까먹어 버린 거에요.
근데 형상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면
'나는 누구지?' 하면서 저절로 의식은 자기를 자각을 하게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
형상의 물들지 않는 공간이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0:57
<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
이거는 해봐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만약에 정말로 수행에 뜻이 있으시다면
어떤 사건 사고가 왔을 때 그때 내가 내 내면에서 그것에 물들지 않는가를
살펴볼 줄 알아야 돼요.
만약에, 막 요동칠 것 아니에요?
톨레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는 안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 전화 받기 전까지.(웃음) 따르릉~ 하기 전까지.
근데 따르릉~ 했을 때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보고
잠시 그 상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면
결국에는 흔들리지 않는, 그것은 지나가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 공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견성이에요.
근데 이렇게 한 번이라도 되도록 발견하면 힘이 생겨요.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면, 자기가 직접 확인한 거잖아요.
자기가 확인한 것은 굉장히 힘이 있는 거에요.
남한테 들은 거 말고.
그러니까 실제로 어떤 사건 사고가 왔는데 내가 옛날 같으면
난리칠 건데 난리를 치더라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있으면서
아, 왔구나 하고 보고 있으면 지나가잖아요.
약해지면서, 내가 물들지 않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거에요.
저는 얼마 전에 해봤어요. 그때 들어온 것을 가지고 내 마음을 본 거지.
2:53
약간 일어나죠. 당연히 일어나지요.
일어나지만 딸려 가지 않고 가만히 이렇게 보니까 싹 정리가 되면서
지혜가 떠올라요. 어떻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그래서 순서가 일을 처리하는데, 여러분 1번, 2번, 3번 해야 될 걸
3번, 2번, 1번 하면 꼬이는 거 아시겠습니까?
요때 제일 중요한 게 일을 최대한 순서대로 하는 거든요.
그러니까 딱 쥐고 가만히 있으면 이제 싹 좀 가라앉으면서 지혜가 딱 나와 가지고
뭐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게 알아차려져요.
4:02
사건 사고가 났을 때 그때 딱 정신 차리고 살피면, 안팎으로 살피면,
밖으로는 상황이 어떻게 벌어지는 가도 살피고,
안으로는 내 마음이 어떻게 요동치는 가도 살펴서 그 안팎으로
딱 살피고 있으면 정리가 되면서 지혜가 나온다.
그럼 그 지혜로 일이 풀려나갈 때는 금방 풀려 버리는 것,
일이 풀리려면 금방 풀리는 거에요.
대개 보면 별 일 아닌데 스스로 크게 만들어 가지고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는 것이 그래서 우리들의 지금 삶이라는 거죠.
4:54
<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
본래는 있는데 흔들려 가지고 못 본다 이거에요, 본래 있는 것을.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제대로, 흔들리더라도 정신줄 놓지 않고 딱
각찰(覺察), 안과 밖을 깨어서 관찰한다.
각찰을 제대로 딱 하면 밖에 아무리 뭐가 와도 살짝 요동이 일어나는 것
같다가도 나의 깊은 곳에서는 흔들리지 않는구나 하는 걸 확인하게 되면
그곳이 이제 나의 존재의 집이 되어서 항상 그곳이 이제 확인되고 그곳에서
내가 거주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게 이제 견성이다. 그게.
6:02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
이때 공간이 생긴다 이 말은 여유가 생긴다 이 말이에요.
이때 공간은 그냥 공간이 아니고 저는 여기다 공간 앞에다가
뭐라고 했냐면 물들지 않는다, 물들지 않는 공간이 생기는 거에요.
그게 우리의, 여러분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이 세상은 홍수가 난 것과 같다. 이 세상은 홍수가 난 것과 같다.
홍수 속에서는 섬이 있다. 섬이 있다. 섬에 발을 디뎌라.
이게 부처님의 유훈이에요.
부처님이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 할 때 그 '자'라고 하는,
귀의하는데 어디로 귀의해야 되느냐.
자기 자신인데 그 자기 자신, 인도 말로는 그 뜻이 '섬'이라는 뜻입니다.
'섬'에 귀의하라. 그리고 '등불'로도 번역돼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고도 번역하고
또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라고도 번역하는데
원래 그 뜻이 델타에요, 델타.
델타는 강에 있는 삼각주잖아요. 델타.
그럼 그 섬이 어디 있느냐?
물들지 않는 내면 공간, 우리 내면의 물들지 않는 내면 공간,
거기가 '섬'이에요. 섬이고 또 다른 데에서는, 반야심경에서는
거기를 '피안'이라고도 불러.
7:40
섬이라고 하든 피안이라고 하든 이 홍수 난 이 세계에서
휩쓸려 가지 않는 육지가 있다. 땅이 있다. 그게 어디냐?
지금 이 현상계에서 아무리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내면의 물들지 않는 공간, 바로 거기가 에덴동산이다 이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쫓겨났다 이거예요. 이걸 집착함으로써,
분별함으로써,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쫓겨났는데
다시 발견해서 회복하는 것이 그게 부활이에요, 부활.
거기를 회복하는 것이 부활이에요.
8:23
<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
어떤 여유가 생긴다. 공간이 생긴다.
<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끝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
지금 여러분 이게 지금 책이, 노트가 형상이지요.
근데 형상이 공간에 지금 있지요.
이 형상에 물들지 않는 공간, 이해되세요?
형상에 물들지 않는 본질, 요것의 발견이다, 지금.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 이거는 현상이죠.
현상의 것이 아닌 본질로서의 평화, 본래 평정심.
본래 본래, 이런 말 쓰지요? 본래 부처,
이런 말이 다 여기를 말하는 거에요.
<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다. 신적인 평화다. 절대 평화다. >
여러분, 얼마나 좋아요, 절대 평화.
그 무엇도 물들일 수 없는 절대의 평화, 그게 지금 우리 안에 있다.
어떻게 발견하는가?
고통을 견뎌낼 때, 고통을 견뎌낼 때, 여러분,
똑같은 도전이 무슨 말이냐면 고통이 첫 번째 화살이에요.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첫 번째 화살은.
근데 첫 번째 화살을 맞았다고 막 허둥지둥대면 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
계속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또 감정이 따라오고
그래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이거에요.
그러지말고 첫 번째 화살이 왔을 때 맞아라. 그것을 피할 수 없다.
부처님이 그러셨어요. 나도 피할 수 없다, 부처도.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걸 맞고 요동치지 않으면 견뎌내면, 수용하면,
지나간다는 것,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다.
지나가면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그곳에 있다는 거에요.
그걸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발견하면 그 다음부터는 힘이 붙는다. 힘이 붙는다.
무엇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오뚜기처럼 중심이 딱 잡힌다.
그 힘을 길러가는 게 수행이다. 이게 지금 이론도 그렇고 수행도 그렇고
실생활도 이게 하나가 되어야 해요. 하나가.
11:30
이 대목도 좋은 대목이에요.
자, 대상의식과 공간의식,
지금 톨레는,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은 우리의 생각, 감정이에요.
지금 대상 의식은 생각, 감정을 말하는 거에요.
따라서 대상 의식은 생멸심(生滅心), 대상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생멸심,
마음은 마음인데 생겼다가 사라지는 마음,
이것은 대상 따라서 일어났다가 대상 따라서 사라지는 마음.
그런데 공간 의식은 진여심(眞如心), 진실되고 변하지 않는 우리 의식.
이것은 공간으로 항상 있는 것, 항상 있는 거.
지금 이 방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들의 몸은 이 방의 입장에서는 현상이에요. 왔다 가요.
이 공간 자체 이 방의 이 공간 자체는 진여 의식이에요.
항상 이건 있는 거에요. 그와 같아요.
12:35
그러면 나한테서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칠 때는 나의 현상은
당연히 몸하고 몸과 연관되는 이런 것들인데 나의 본질은 이 모든 것이
지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는 요 공간 자체, 여기에 나의 의식으로 꽉 차 있다.
텅빈 의식, 공간 의식, 바탕 의식, 요렇게 꽉 차 있다.
그것을 지금 이야기 합니다. 자 읽어보겠습니다.
톨레는 대상 의식과 공간 의식을, 현상과 본질을, 생각 감정과 의식 자체를
이렇게 분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3:19
<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물질적인 것과 해야 할 일들, 생각해야 할 것 등의
일들로 가득하다. 그러한 삶은 윈스턴 처칠이 한 가지 망할 놈의 것 다음에 오는
또 다른 망할 놈의 것들이라고 규정한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가 없다. >
참 재미있게 말했네요. 참 처칠이 대단했던 수상이거든요.
위기의 영국을 구했잖아요.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지휘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는 망할 놈의 것들,
근데 전쟁이 끝나면 다 괜찮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또 현상계는 그렇다는 거지요.
14:13
< 사람들의 마음은 어지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한 생각이 지나가면
다음 생각이 연이어 밀려온다. 이것이 대상 의식의 차원, 현상의 차원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현실이다.
인간의 삶이 그토록 불균형한 상태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의 행성,
이 지구를 제 정신으로 되돌리고 인류가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대상 의식을 공간 의식으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
대상 의식을 저는 분별 의식이라고 말을 하고 싶어요.
분별하는 의식, 대상을 파악할 때 항상 분별하잖아요. 분별하는 의식.
그리고 공간 의식은 바탕 의식, 우리한테 바탕 의식은 항상 있고
그리고 대상을 만날 때 분별 의식이 일어나는 거죠.
분별 의식은 그러면 바탕 의식이 일어난 거죠.
모든 파도가 물이 일어난 것처럼 분별 의식은 바탕 의식이 인연따라 일어난 것이다.
요것을 균형을 잡자. 균형을 잡다.
15:34
< 이 공간 의식의 등장이, 본질의 등장이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다. >
그러니까 지금 우리랑 생각이 좀 달라요.
톨레는 인간은 진화하고 진화상에서 공간 의식의 등장이
진화의 다음 단계라고 하지만 우리는 본질인 의식이 본래 있지 않나요?
본래 있는데 지금 왜곡 당해 가지고 지금 이렇게 되어서 다시 본질을
회복하는 거다. 우리는 지금 그런 입장이고. 자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봅시다.
16:07
본각(本覺)이라고 불러요.
모든 인간은 본래 깨달아 있다. 본각이다. 본각이었다.
근데 지금 왜곡 당해 가지고 불각(不覺), 지금 불각 상태,
각을 놓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통해서 시각(始覺)
비로소 시, 비로소 시(始)자, 각을 회복한다. 본각, 불각,
시각, 그리고 각이 완전히 확립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
요 각을 네 가지로 보거든요. 본각, 불각, 시각, 구경각.
시각은 돈오했지만 점수에 있는 것, 그리고 돈오돈수가 완성된 상태를 구경각,
요 네 가지로 봤어요. 그것이 지금 톨레와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16:56
왜냐하면 우리는 부처님의 자손이라서 그래요.ㅎㅎ
그게 그게 훨씬 유리해요, 우리는.
< 공간의식은 사물을 의식하는 것 - 언제나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의 순서로
진행되는 사물을 의식하는 것 >
그러니까 이게 그냥 여러분 참고로 알아두세요.
서양철학은 기본이 서양철학은 존재론이 있고, 인식론이 있고, 도덕론이 있어요.
존재는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거고, 인식은 우리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
그리고 도덕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요 세 가지 철학의 분야가 있어요.
그중에 인식론, 인식론이 근대철학은 인식론이 핵심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세상을 파악하느냐, 하는 걸 따지는 거에요.
그래서 인식론에서는 감각을 지각한다.
임프레션(impression)이라고 해요, 이것을.
보세요, 여러분, 우리의 나의 집 정신에 지금 책을 봤다, 노트를 봤다,
그러면 노트가 와서 찍혀요. 제일 먼저 인쇄된다 그래요.
사물을 보면 대상을 보면 그 대상이 인간 머리속에 인쇄가 된다.
사물을 보면 대상을 보면 그 대상이 인간 머리 속에 인쇄가 된다,
임프레션(impression) 인쇄란 말이에요.
18:33
인쇄가 된다. 그러면 인쇄가 한 번 되면 대상이 사라져도
인쇄된 것을 이미지로써 떠올릴 수 있다. 이 말 이해되세요?
떠올리는 것을 아이디어라 그래요. 관념이라 그래요.
그러면 한 번 대상이 한 번 임프레션 됐다, 다음에 아이디어 관념이 떠올릴 수 있다,
오케이입니까? 자, 그 다음부터 왜곡이 일어나요.
뭐냐면 관념을 대상은 사라졌는데 가만히 앉아서 방에 앉아서 눈 감고
대상들끼리 아이디어끼리 찍힌 그 이미지를 가지고 이미지를 가지고 조작을 해요.
관념 조작을 하면서부터 왜곡이 일어난다고 서양철학에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가. 쉽게 말하면, 여러분 뱀을 봤어요.
그리고 소를 보니까 다리가 있어. 뱀을 봤는데 아, 뱀이라는 것이 찍혔어.
소를 보니까 다리가 있어 가지고 다리가 있구나 하고 찍혔어.
그러면 앉아서 이제 대상은 다 사라졌는데 찍히고 난 다음에는 아이디어가
생기면 관념이 생기면 어떻게 되냐면 뱀에다가 소의 다리를 붙여.
뱀 다리가 사족이 생겨요.
그리고 강아지를 봤어요. 근데 소를 보니까 또 뿔이 있네.
그래서 딱 이제는 다 없어졌는데 혼자 앉아서 아, 강아지에 뿔이 있구나, 하고
강아지 뿔을 그리면 개뿔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 개뿔이란 말 쓰잖아요. 실제로는 없는데 우리가 뭐라고 떠들면
그걸 '개뿔' 그러잖아요. 없다는 말이잖아요.
근데 여러분 우리가 쓰는 많은 용어들이 실제로는 없는데 쓰고 있는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냐면 그래서 관념을 붙였다고 해가지고 복합관념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특히 인식론이 발전한 곳이 영국의 경험주의에요.
영국 경험주의에 모토가 있어요. 영국 경험주의 모토, 이건 뭐냐면
복합 관념을 청소하자는 거에요. 청소하자. 왜냐면 없는 거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복합 관념으로 이상을 만들고 그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을 탄압합니다.
현실이 왜곡되는 것은 이상 때문인데 이상을 어떻게 만드는가.
한번 찍힌 이미지들을 레고 조합하듯이 하면 사람들이 속는 이념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데올로기가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이데올로기는 실제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의 머리속에서 관념을
조합을 해가지고, 여러분 개하고 뿔만 조합을 해도 개뿔이 이상하잖아요.
근데 거기다가 또 그것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날개도 붙여.
날개 달린 개가 뿔이 있다고 막~ (웃음)
꼬리는 또 돼지 꼬리처럼 막 이렇게~ 하면 이상한 괴물이 탄생하잖아요.
21:52
우리가 알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전부 그런 것들이에요.
현실에는 없는데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복합 관념에만 속지 않아도 인간의 삶은 굉장히 단촐해지고
지혜가 나온다는 거에요. 그게 영국 철학의 모토예요.
그래서 영국 철학은 지금까지도, 영국 철학의 후예가 미국 철학이거든요.
영미 철학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에요.
영미 철학은 철저하게 실용주의, 아주 구체적인, 실제로 있는 것만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청소를 하고 보니까 영미 철학의 라이벌은 프랑스 독일
대륙 철학이거든요. 여기는 관념주의에요.
그래서 관념주의가 영미 철학의 실용주의에 박살이 났습니다.
지금도 박살 나 있어요. 지금도 철학은 그쪽이 더 우수해요.
그러니까 지금 상황 이해되시죠? 그런데 그쪽이 이길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관념은 허상이고 실용이 더 현실적이지 않나요?
현실이 이길 수밖에 없는 거에요.
23:09
생각은, 모든 생각은 복합 관념이에요.
그러니까 현실을 상대할 때는 생각이 필요 없다는 거에요.
관념이 필요 없다는 거에요
현실이 없이 혼자 앉아 하면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제 이게 장점이면서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는,
그러니까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 복합 관념 만들어 내는 것이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감각, 지각이 생각으로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또 감정을 또 만들고
요렇게 해서 우리를 괴로움으로 빠뜨리는 그 진행이 된다.
< 그래서 공간의식은 사물을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그 밑바탕에
알아차림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
참 중요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이 일어나는데
알아차린다는 거에요,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다. 각찰할 수 있다.
깨어서 관찰 할 수 있다, 무엇을?
생각 감정들을, 복합 관념들을, 각찰할 수 있다.
각찰하는 것이 본질이다. 우리는 지금 이 공부를 하게 되면
항상 입체적으로 봐야 돼요. 현상의 것과 본질의 것이 입체적으로,
입체적으로 본다.
이 말을 제가 은현동시(隱現同時)라고 하는 말로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달을 볼 때마다 반달의 경우에는 드러난 부분이 있고 숨어 있는 부분이 있다.
드러난 부분은 현상이고 숨어 있는 부분은 본질이다, 할 때
항상 같이 본다.
생각 감정도 깨어서 볼 수 있잖아요. 깨어서 보는 것이 의식이라 이거에요.
그러면 잠든 의식을 깨워서 일깨워서 강화시키려면 자꾸 현상을 보라 이거에요.
생각 감정을 보라. 볼 때마다 의식은 강해진다.
깨어나는 힘은 강해진다. 그 원리를 말하는 겁니다.
25:20
< 이 밑바탕에 알아차림의 흐름이 존재한다. 이 알아차림은 사물,
즉 대상을 의식할뿐 아니라 자신이 의식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힘이 강해지면 알아차림은 자기를 알아차리게 된다.
현상만 알아차릴뿐만 아니라 본질이 본질을 알아차린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전면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그 배경에 내면의 깨어있는 고요를 감지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본질이다.
이 차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결코 자각하지 못한다. >
왜냐? 한 눈 팔려서.
현상에 한 눈 팔려서 본질을 자각하지 못한다.
< 나는 때로 그것을 가리켜 이런 식으로 말한다
당신은 자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가. >
여러분, 현존은 제가 잠깐 약간 조금 고민해 봤어요.
'현존'을 자각한 사람은, 저같이 인문학 공부한 사람은 '현존'에 워낙 익어 있어서
'현존'이라는 단어는 금방 와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인문학의 제1주제는 현존이란 말이에요.
프레젠스(presence) 영어로 하면, 프레젠트(present) 하면 현재잖아요.
프레젠스(presence) 그러면 현재에 존재하는 거에요.
'현존'이라고 불러요. 인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에요.
그냥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좀 익숙한데 그리고 톨레도 익숙해요, 이 단어에.
서양인들이 익숙해요. 사실은. 그런데 동양인들한테는 현존이라 그러면
이게 안 익숙해.
그래서 제가 고민한 것은 여러분한테 뭐라고 이 말을 어떻게
다른 말로 바꾸면 여러분이 쉽게 알아차릴까 현존이라는 말을.
그래서 제가 찾아낸 게 뭐냐면 현존은 현재 의식이에요.
이 순간의 의식. 여러분, 여러분한테 의식이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자기를 돌아보게 되지요.
돌아보면 이 순간에 의식이죠, 그게, 그게 현존이라는 겁니다.
이 순간에 자각되는 의식.
현재 의식. 현재 의식을 선불교에서는 현재심이라고 그래요.
현재심. 그래서 알고 보면 본질에 대한, 본성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지적을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심이란 말이에요.
현재심은 지금 마음이잖아요.
이 마음을 지금 우리는 지금 의식이라고 하면 훨씬 더 잘 이해하기 쉬우니까
현재 의식이라고 지금 바꾼 거에요.
그러니까 선불교 용어로 하면 현재심이 서양에서는 현존이라고 하는 거에요.
현재의 마음은 뭐냐.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의식.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의식을 우리가 의식하려면
의식이 의식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이해되세요?
그렇게 되는 게 현존의 상태다. 현존의 상태다.
지금 의식을 의식하는 상태, 그거다.
그래도 어렵나요? 나머지 소화는 여러분의 몫이에요.
근데 제가 지금 일반적으로 현존이란 말은 전문 용어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알아듣기에는 어려워서 제가 일반인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바꾼다면 현재 의식, 제가 그런다 그러잖아요.
오늘도 그랬어요. 버스 타려고 여기 오려고 버스 정류장에 왔더니
제가 타는 버스가 지나갔어. 그리고 전광판에 보니까 3분 뒤에 온대.
그러면 의자 있죠, 그죠? 정류장에. 의자에 앉아서 3분 동안
지금도 의식이네, 지금도 현재네.
앉아 가지고 3분 동안 지금도 현재네. 지금 현재네.
지금 현재 하는 그것이 현재 의식이에요.
지금도 현재네, 이 말은 현존을 내가 불러 일으키는 거에요.
그 3분 동안은 아주 좋은 찬스, 안심하고 3분을 현존을 만끽한다.
내가 이 순간 깨어 있다고, 살아 있다고 하는 이 감각을
살아 있다고 하는 깨어 있다고 하는 실존한다는 존재한다는
오직 존재하는데 힘쓴다, 그러잖아요.
오직 존재하는데 힘 쓴다가 되려면 이 순간에 내가 깨어 있어야 해.
그러니까 현재에 깨어 있는 것이 현존이다.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 현존이다. 이것이 현재 의식이다.
그 짧은 시간에 현존을 불러 일으킨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짧은 시간에,
이 시간에 현재라는 것을 자각한다. 자각하는 그것이 현재 의식이에요.
다시, 이 순간이 현재라는 것을 자각한다. 이 말 이해되세요?
언제나 자각하면 현재밖에 없어요. 영원히 자각하는 순간은 현재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 순간을 자각하면 현재라고 하는 사실을
돌이킬 때마다 현존감은 강화된다.
이것이 진정한 명상이고 바로 현재 의식이 저같은 사람한테는 화두에요.
지금 현재네, 하는 순간 지금 깨어 있는 이 의식이 화두거든.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이 의식이 화두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현재네 하는 순간 요 감각이 화두에 대한 감각이
생겨 가지고 화두 두는 거에요.
제가 설명했어요. 여러분한테 현존이란 말을 좀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그게 이게 지금 돌이키면 이거다 이거예요. 돌이키면 자기 의식이다.
항상 있는 이거. 이걸 지금 물들지 않기 때문에
톨레는 '고요'라고도 표현했잖아요.
스틸리스(stillness), 고요한 것, 사일런스(silence),
스틸, 고요한 이것, 여기 항상 있다.
근데 고요에는 뭐가 빠져 있느냐? 자각이 빠져 있잖아요.
그리고 자각하는 게 현존이다.
32:04
< 당신은 자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가.
공간 의식은 에고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
공간 의식은 본질이고요, 에고는 현상이죠. 그러니까
< 공간 의식을 자각하는 것은 현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일들 물질주의와 물질성에 대한 도전으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
이 말도 들어오십니까?
물을 뿌리나, 불을 붙이나, 페인트를 칠하나 허공은 젖지 않는다. 묻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든 일어나는 것들로부터 허공 자체는 자유다.
우리의 본질이 자유다 이거예요.
32:55
< 그것만이 이 세상에 초월적이고 진정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이다. >
그게 영적인 차원이다. 그게 영성이다 이거예요.
영성이고 그게 본성이고 그게 불성이고.
< 어떤 사건과 사람과 상황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 진정한 원인은
그 사건과 사람과 상황 자체가 아니다.
오직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시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대상 의식에 갇혀 시간을 초월한 의식 그 자체인
내적 공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알아차리면 꿈에서 깨어 있는 거고
못 알아차림은 꿈속에 빨려 들어가 있는 거에요.
여기서 물들지 못한다,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말은
꿈에서 깨어서 꿈을 보고 있기 때문에 본질은 꿈에서 깬 상황이기 때문에
꿈에서 깨어서 꿈을 보면 꿈속의 일이 진짜예요, 가짜예요?
가짜잖아요. 본질 입장에서 그렇다 이거예요.
본질로서 깨어 있으면 이 모든 일어나는 것들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놓아버려 줄 수 있다.
그래서 자유가 온다. 그리고 스스로 깨어 있게 된다.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하나의 방향 표지판으로 사용하면
다시금 그 차원을 알아차릴 수 있다. >
왜냐하면 여러분, 눈 앞에 뭐가 벌어졌을 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 지나가지요.
그러면 이것 또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이것은,
의식은 지나가지 않는다, 이거예요.
35:19
진여(眞如)다. 진여라는 말 참 좋지 않나요?
진짜고 여, 항상 같다. 같고 여여하다.
진짜이면서 여여한 것이 보고 있어서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는 것을 두고 이거는 안 지나가네.
그러니까 지나가는 것이 없으면 이거 발견하지 못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텅 빈 허공은 무엇이 있으니까 텅 빈 허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현상이 있으니까 이 공간을 우리가 인식을 할 수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참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의 방향 표지판으로 사용하면
다시금 그 차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차원은 달라요.
현상의 차원하고 본질의 차원은 차원이 달라요. 차원이 달라.
그래서 물들지 않는 거에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초월이라는 말도 쓰고.
36:20
< 차원이 다르다. 또 한 가지 당신 안에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
기적 수업이라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학교에요.
그게 교재가 나와 있어요. 그게 기적 수업이에요. 그게 이런 대목이 있어요.
< 나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
나는 나의 생각 때문에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려면, 내면 공간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렇게 못 돼요.
이해되지요?
내면 공간을 발견해야만이 나는 나의 생각에 동요되지 않고
나의 감정에도 동요되지 않고 그 어떤 사건 사고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여러분 이것이 익숙해지면 그런 확실히
익숙해지면 어떤 느낌이 오느냐면 아, 그러니까 여러분 물건 잃어버리고
좀 약간 당황한 적 있습니까? 있지요.
몸도 잃어버리는구나, 물건 잃어버리듯이 몸도 잊어버리는구나
하고 생각해 봐요. 때가 되면 몸도 이별하는 구나.
물건이 물건 잃어버릴 때 여러분 어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나와 인연이 끝났구나. 이런 말 있잖아요. 그러면 미련이 없잖아요.
그렇죠? 물건 잃어버렸을 때 아 나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구나 하고 우리가 그런 느낌 있잖아요.
몸하고도 마찬가지예요.
결정을 하면 깨끗하잖아요. 그것처럼 몸도 아 나와의 인연이 몸이
여기까지구나. 죽음이란 것도 그런 거다 이거예요, 알고 보면, 알고 보면.
그러니까 죽음이 왔을 때도 담담하게 아, 이번 게임 레벨의 인연은
여기까지 구나, 하고 뭐 그 다음부턴 다음 레벨이 또 오든지 말든지
자유로워지는 거지요.
그러니까 다음 레벨이 와도 또 게임일 뿐이죠. 그렇지 않나요?
요게 참 이게 분명한, 진짜 구원이다 이거죠.
다음 레벨은 어떻게 오느냐가 궁금하지 않다 이거지.
사실은 진짜 궁금한 것은 언제나 진짜로서 여여한 지금 본질인 이것.
사실은 또 재미있게 게임하면 되잖아요. 안 죽어요, 우리.
여러분, 주인공이 죽는 거 봤느냐 이거예요, 게임에서.
수없이 죽어도 안 죽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신나게 살자 이거죠.
이번 게임에서는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신나게 살자.
39:09
< 생각 아래로의 추락과 생각이 위로 올라감은~ >
톨레가, 이것도 중요해요, 여러분. 간단히 설명할게요.
생각이 구름 같은 거라고 보는 거에요
생각의 구름이 이렇게 있는데 사람의 생각이 생각으로부터
벗어난다. 생각에서 벗어나는데 보세요.
우리가 우리의 본성은 공적 영지, 이런 말 쓰잖아요.
아까 얘기하면 공적과 지혜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생각에서 벗어난 상태가 공적, 생각이 텅 비고 고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생각 구름 입장에서는 생각의 밑으로 가도 공적이고 올라가도 공적이에요.
맞아요? 근데 생각의 밑에는 어둡다, 구름 밑에는 어둡잖아요,
태양이 없어서. 비오고 축축하지 않나요?
그 상태를 혼침(惛沈)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공적한데 혼침일 수가 있어.
이것을 젊은 사람들은 뭐라 그러냐면 몽상(夢想)이라고 그래요.
멍 때리는 것. 멍 때릴 때는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깨어 있지 못하고 멍~.
멍청한 상태거든요. 그래서 몽상이라고 하는 것은 공적하지만
혼침의 상태, 혼침을 무기(誣欺)라고도 해요. 그러니까 의식이 없는 상태,
잠들어 있는 상태, 공적 혼침은 생각이 아래고 근데 공적한데 깨어 있는 것,
태양이 확, 구름 위로는 태양이 확 빛나고 있잖아요.
그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깨어 생각도 없고 정신은 깨어 있어.
공적이면서 영지. 생각의 위, 이렇게 표현한 거에요, 톨레가.
생각 아래와 생각 위를 구분해 가지고 생각은 없는데
멍청하냐, 아니면 깨어 있느냐.
그러니까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표현을 한 거에요.
됐습니까?
41:35
< 내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그것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물건과 경험을 찾듯이 찾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발견할 수 없다. >
이런 말은 진짜 공부한 사람한테는 중요해요.
내적 공간을 현상에서 찾기 때문에, 그러니까 본질을 현상에서
찾기 때문에 못 찾는 겁니다.
차원이 다른데
<이것은 영적 자각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딜레마다. >
자 그래서 이 부분 한 번만 짚고 넘어갑시다. 중요하니까.
보세요, 본질하고 현상에 대한 정말로 카테고리가 다르다고 하는 사실에
정말로 미스테이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카테고리 미스테이크에 빠지면 본질을 현상에서 찾게 된다.
아무리 찾아도 못 찾는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보세요. '나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 취미된 질문이죠.
나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가 실제로 답이 나오려면 여러분,
그러니까 '나는 무엇이다' 할 때 무엇은, 나는 무엇이다 할 때 무엇은
역할이기 때문에 이것은 현상에 속한다.
맞습니까? 나는 남자다. 남자는 현상에 속하는 거에요.
뭐 여자다. 뭐 인간이다. 또 선생이다. 뭐 학생이다. 온갖 것들을,
나는 무엇이다 할 때 무엇은 현상에 속한 것이다. 라인이, 카테고리가.
근데 보세요. 나는, 나는 선생이다, 인간이다, 남자다. 해도
나는 나는~ 안 변하지요?
안 변하는 것은 본질이다 이거에요. 그러면 보세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에서 우리들은 나를 무엇으로 찾느냐 이거에요.
지금 톨레가 강조하는 것은 나를 무엇으로 찾느냐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이 잘못을, 이게 딜레마다, 공부한 사람이 딜레마다.
그래서 나아가 내가 나를 깨달으려고 하는데 나를 찾는데 나도 모르게
무엇으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공부의 중요한 전환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무엇으로 찾고 있어요.
그래서 이 점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 한 번 따라 해 보시겠어요?
'나는' 해보세요. '나는.'(나는)
거기에서 끝나야 돼요.
'무엇이다'라고 넘어가면 영원히 헤매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하는 이것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라고 까지 가면 벌써 틀려버려요.
나는 무엇인가 하면 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무엇이라는 말을 안 하고 '나는.', 진짜로 만약에 말귀 알아들으시는
분이라면 '나는.' 하는 이거에요. 지금 '나는.' 하고 끝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참 기가 막히게도 모세가 이집트의
노예로 끌려간 동족을 구하기 위해서 힘을 얻기 위해서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그 자기들의 신을 찾아가지고
신에게 물어보거든요. 당신이 누구십니까? 당신이 신입니까?
"신이라면 당신이 누군지 밝히세요." 하고 모세가 질문을 해요.
그때 신이 "I am that I am." 나는 나다고 했지 나는 무엇이라고 안 했어요.
만약에 그때 "나는 무엇이다."고 했으면 그것은 신이 아닌 거지.
그러니까 이해되세요? 본질은 무엇이 아니에요.
본질은 무엇이 아니에요. 무엇은 전부 현상이에요.
무엇은 형상이고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나다." 이 말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에요.
나는 나다를 알아차리는 것, 말귀 알아듣는 게 중요하다.
나는 나다. 무엇이 아니다. 근데 만약에 나는 나다, 무엇이 아니다. 이것을
만약에 왕이 도인한테 "당신 누구요?" 하고 물으면 여러분,
왕이 도인한테, 깨달은 사람한테 "당신 누구요?" 하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요. 제 말 이해되세요?
나는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답을 무엇이라고 하면 틀리잖아요.
근데 "나는 나다." 그러면 왕이 화낼 거 아닙니까.
"나는 나다." 그러면 화를 낼 거잖아요. 무엄하게도 왕 앞에서,
왕은 무서워요. 여러분 도인이라도 왕이 죽이라고 하면 죽는 거에요.
옛날에 암두라고 하는 스님이, 암두가 철저했거든요.
흑산의 제자로서 설봉을 깨닫게 한 정말 그 출중한 암두가
황건적의 칼날에 죽었어요.
그 도적떼들이 쌀을 훔치러 와 가지고 멀쩡하게 목숨이 날아가 버린 거에요.
그때 암두가 하도 고함을 쳐서 고함이 몇 십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데
도인들도 도적의 칼날에 죽는 거에요.
그럴 수 있어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왕 앞에서
아무리 도인이라도 나는 나다 이렇게 말하면 죽어요.
그러니까 달마가 직접 이 질문 당했잖아요.
양나라의 무제로부터 "당신 누구요?"란 질문을 당했잖아요.
그때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면 틀리잖아요.
그리고 "나는 나다." 해도 매를 벌잖아요.
그러니까 뭐라고 했냐면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한 거에요.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답은 뭐라고 해도 틀리고 나는 나라고 해도 틀리고
그러니까 불식,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상대방 입장이 현상계에 빠져 있으니까 그 입장에서는,
현상 입장에서는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라고 눈높이에 맞춰 가지고
말을 해준 거에요.
그러니까 알 수 없다는 말이 본질의 입장에서는 현상한테는 알 수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모른다는 걸 아는 게 아주 중요한 또 지혜라는 거죠.
현상의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는 거죠, 본질을.
그러니까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아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도 모른다. 이게 소크라테스의 지혜라는 거 아니에요?
요게 달마 불식,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보조국사가 단지불회(但知不會), 본질은 대상으로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시즉견성(是卽見性), 이것이 견성한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다 일맥상통하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깨달음의 중요한 단초는
내가 대상으로서 찾는다는 것을 빨리 포기해야 돼요.
나도 모르게 구하고 있다. 대상으로서 구하고 있다, 본질을.
그래서 특히 뭘 포기하셔야 되냐면 여러분,
대상으로서 여러분이 지고 있는 게 뭐냐면 관념이에요.
본질에 대한 관념. 그래서 본질이란 말을 버리셔야 되고,
의식이란 말을 버리셔야 되고, 버릴 정도가 아니고 죽여야 돼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되고 선사를 만나면 선사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임재는 그 말까지 했어.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부모도 죽이고, 이 말에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본질을 부처, 조사, 본질, 진리, 본성, 또 뭐
반야, 지혜, 자유, 이런 말들로 끌어 내려 가지고 쥐고 있다 이거예요.
이것을 쥐고 있는 한은 본질을 못 깨닫는다.
이게 주, 집착하고 있다. 그러니까 동일시가 얼마나 무서우냐면
에고가 안 떨어지기 위해서 부처를 동일시하고 있어요.
나는 부처야 부처야, 하면서 그게 에고가 그짓을 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많은 분들이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할 수 없이
관념을 쥘 수밖에 없어요,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근데 그걸 놓아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무엇도 쥐면 안 돼요, 깨달으려면.
이것도 중요한 대목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에서 끝나야 되기 때문에
나는 본질도 아니고 본성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하여튼 그 뒤에 오는 것은 다 죽인다,
이 말이 무서운 임재가품이다 이거예요. 그게 왜냐?
그걸 지고 있는 한은 현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무위도인(無爲道人), 도인은 의지하는 바가 없다.
의지하는 바가 없다. 이 말은 관념을 쥐고 있지 않다 이 말이에요.
요런 점도 우리가 공부하면서 눈여겨 봐야 합니다.
다음에 하여튼 뭐 이렇게 가서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가?
이 말도, 개울물 소리 있잖아요. 여러분 소리(책상을 치며)
소리, 보세요. 소리 연상이죠.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리가 멈출 때가 있죠.
그때 내적 공간을 본다 이거예요.
보세요. 지금 이 빈 공간하고 형상의 관계,
형상이 사라지면 빈 공간이다, 이 안이. 이게 견성이라는 거에요.
소리, 소리하고 침묵의 관계, 소리가 없어졌다고 해서 nothing이 아니고
소리가 없어져도 지금 의식은 있잖아요. 의식 속에서 소리가 일어나잖아요.
소리가 사라지면 의식만 남는다 이거죠. 의식 안에서 형상이 나타나잖아요.
형상은 사라지고 의식만 남는다.
결국에는 내면 공간을 발견할 때 많은 사람이 소리를 듣고
소리가 일어나는 이 공간을 알아챈다 이거예요.
소리가 일어나는 이 공간을 침묵이라고도 한다.
소리와 침묵, 현상과 본질을 이런 식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어떻게 도에 들어갑니까." 할 때 저 소리 들리냐?
소리 따라 들어가라. 소리 듣고 있으면 싹 사라질 때가 있는데 그 자리,
그게 내면 공간이다 이거예요.
소리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자리.
그런 식으로 지금 이야기 인용을 해놨습니다.
< 올바른 행동은~ >
올바른 행동은 본질에 맡기는 행동이에요.
다음 장에 올바른 행동은 무위(無爲), 무위라는 말은 본질에 맡기는 거에요.
본질에 맡겨서 하는 거, 이게 올바른 행동이에요.(5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