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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묘지명의 김인위와 경주김씨족보의 김인위는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이것을 판단하기 위하여 본 글은 다음 네가지 검토를 할 것이다.
첫째, 김인위의 한자 검토
둘째, 김인위의 관직 검토
세째, 김원황과 김원정의 역사연대 검토
네째, 학자들의 견해
첫째, 김인위의 한자(漢字) 검토
이자연 아들 이정 묘지명(1077년)의 긴 원문에서 인위의 이름이 있는 한 문장만 뽑아냈다.
이정 묘지명을 비롯하여 관련 금석문(김지우묘지명,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은 밑에 원문과 해석문을 모두 올려놓을 테니 참고하기 바란다.
1. 이정 묘지명-1077년-인위(因謂)
아버지 자연(子淵)은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이고 추증된 시호는 장화(章和)이다. 어머니 김씨는 계림국대부인(?林國大夫人)으로,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의 딸이다.
(출처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2. 김지우 묘지명-1152년-인위(因謂)
군의 이름은 지우(之祐)이고, 자는 복기(福基)로, 선조는 신라국(新羅國)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이다. 대왕은 대광(大匡) 김예(金禮)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고, 위는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을 낳고, 황은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를 낳고, 규가 지우(之祐)를 낳았다.
(출처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3. 고려사 열전 현종(顯宗) 후비 원순숙비(元順淑妃)-1482년-인위(因渭)
원순숙비 김씨는 기록에 그 관향이 누락되었다. 평장사(平章事) 김인위(金因渭)의 딸로 경성왕후(敬成王后)를 낳았다. 애초 경흥원주(景興院主)라고 부르다가 현종 15년(1024) 정월에 덕비(德妃)로 책봉하였다. 9월에 그 부친 김인위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知政事)·주국(柱國)·경조현개국남(京兆縣開國男)으로 임명하고 식읍(食邑) 3백호를 내려준 뒤 은퇴시켰다
(출처: 국역 고려사,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6.11.20, 경인문화사 ).
4. 경주김씨족보-1772년 인위(因渭)
인위(因渭)-원정
현종(사위)
이자연(사위)
< 경주김씨족보 임진보 1772년>
위에서 보는 것처럼, 이정 묘지명과 김지우 묘지명에는 인위(因謂)로 쓰였고, 고려사열전과 경주김씨족보에는 인위(因渭)로 쓰였다.
그렇다면 이정묘지명의 인위와 고려사열전의 인위는 다른 사람일까?
이정(李? 1025-1077)은 이자연과 계림국대부인의 아들이고, 계림국대부인은 인위의 딸이다. 그리고 고려사열전의 원순숙비는 현종의 제 8비로 인위의 딸이다.
그러므로 이정 묘지명(1077년)의 계림국대부인의 아버지 인위(因謂)와 고려사열전의 원순숙비의 아버지 인위(因渭)는 같은 사람이다.
이름에 쓰여진 한자 이를 위(謂)와 강이름 위(渭)가 다를 뿐이다.
이렇게 쉽게 설명을 했는데도 다른 사람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 난독증이거나 지능이 낮은 사람이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과 이정의 묘지명(1077년)에는 인위(因謂)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와 경주김씨족보에는 인위(因渭)로 되어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김지우 묘지명(1152년)과 이정묘지명(1077년)의 인위(因謂)는 고려사와 경주김씨족보의 인위(因渭)보다 먼저 쓰인 한자(漢字)다.
인위의 이름에서 '이를 위'(謂)가 먼저 쓰인 한자(漢字)고 '강이름 위'(渭)가 나중에 쓰인 한자(漢字)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인위의 이름을 쓸 때는 먼저 쓰인 한자 因謂로 고쳐야 맞다.
이정 묘지명(1077년)의 계림국대부인의 아버지 인위(因謂)와 고려사열전의 원순숙비의 아버지 인위(因渭)는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정 묘지명의 인위(因謂)와 김지우 묘지명의 김원황의 아버지 인위(因謂)는 한자가 같으므로 동일인이다.
둘째, 김인위의 관직 검토
이정 묘지명(1077년)-내사시랑평장사
김지우묘지명(1152년)-사도 내사시랑평장사
고려사열전(1482년)-평장사
경주김씨족보(1772년)-상서좌복야 문하시랑평장사
이와같이 김인위의 관직이 평장사라는 기록이 공통적으로 일치한다.
셋째, 김원황과 김원정의 연대검토
김지우 묘지명의 김인위의 아들 김원황과 경주김씨족보의 김원정은 고려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이다. 이들의 활동연대를 살펴봄으로써 김지우 묘지명의 김인위(金因謂)와 경주김씨족보의 김인위(金因渭)가 동일인임을 판단해 볼 것이다.
김원정과 김원황에 대한 역사기록은 많다.
그 모든 것을 올려놓으면 장황해서 논점이 흐려질 우려가 있으므로 몇 가지만 올린다.
국역 고려사 : 세가 문종 15년(1061) 신축년? 12월
병신일. 왕총지(王寵之)를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김원정(金元鼎)을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최유선(崔惟善)을 중서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로, 이유충(異惟忠)을 참지정사(?知政事)·주국(柱國)으로, 김원황(金元晃)을 중추원사(中樞院事)로, 김의진(金義珍)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김양지(金良贄)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각각 임명했다.
문종 때 함께 관직 임명을 받은 기록으로 볼 때 김원정과 김원황은 같은 시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작고년도 원정-1063년, 원황- 1062년으로 비슷하다.
김원정 졸년-1063년
고려사절요 문종 계모 17년(1063년)
가을 7월에 김원정(金元鼎)을 수태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얼마 뒤에 죽었다.
동사강목 계묘년 문종 17년(1063년)
추9월 시중 김원정(金元鼎)이 졸하였다.
김원황 졸년-1062년
국역 고려사 : 세가 문종 16년(1062) 임인년? 가을 7월
경신일. 중추원사(中樞院使)·병부상서(兵部尙書) 김원황(金元晃)이 죽자, 시호를 의경(毅敬)이라 하고 그 아들 가운데 한 명에게 벼슬을 주었다.
문종 15년에 관직을 함께 임명받았고, 작고년대도 김원정(1063년 9월), 김원황(1062년 7월)로 비슷하다.
따라서 김원정과 김원황은 형제로 볼 수 있다.
김원정과 김원황의 활동연대가 같다는 것은 김지우 묘지명의 인위와 경주김씨족보의 인위를 동일인으로 보는 연대기적 근거가 된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고관들은 신첩(信牒)에 자신의 씨족을 기록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고서도 자신의 씨족이 누구인지 몰라 기록하지 않은 이신석에 대하여 최충은 조정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동사강목 문종11년(1057년)
급제 이신석이 씨족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여 최충이 조정에 오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니
시랑 김원충이 아뢰기를 "씨족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부조의 실책이며 신석은 한묵의 공을 쌓아 정시에 급제하였고, 그 자신은 허물이 없으니 잠신(고관)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하자 제하기를 "현자를 쓰는 데는 밤소가 없는 것이니 그것은 원충의 주청에 의거하라"하였다.
이 기록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려에서는 조정의 고관들이 자신의 씨족을 기록했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고관들은 저마다 세가(世家)의 계보가 기록된 가첩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고려에서는 조정의 고관들이 자신의 계보를 기록하는 신첩이 있었다는 사실은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1111년)에도 나타난다.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국보 24호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1111년(예종6년))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왕실의 명신(名臣)이며, 충절(忠節)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과 장(杖)과 부월(?鉞)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擊柝)의 근심이 없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면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 만승(萬乘)께서 수상(垂裳)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출처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이정의 묘지명과 비교하여 볼 때 ▨▨ ▨▨시랑(▨▨侍郞)= 사도 내사시랑 평장사 인위이다.
이오는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1111년)를 찬하면서 혜덕왕사 소현의 외조부 인위에 대하여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고 썼다.
고려 조정의 고관인 김인위는 그의 계보를 신첩에 자세히 썼을 것이다.
그 계보의 일부가 김지우 묘지명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원성왕 후손---
김인윤(삼한공신)-김신웅-김인위-김원황-김경용-김인규-김지우
네째, 학자들의 견해
학자들은 김지우 묘지명의 김인위와 고려사, 경주김씨족보의 김인위를 동일인으로 본다.
1. 1982년 김연옥은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으로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숙대사론, 11·12합, 숙명여대)를 쓰면서 김지우 묘지명을 논문의 주요 사료로 인용하였다.
2. 한국의 성씨와 족보(서울대출판부,2003)의 저자로 평생 보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이수건(李樹健 1935-2006) 교수는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197~198쪽에서 김원정, 김원황, 김원충은 김인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이수건 박사는 1935년 경남 울산 출신으로 경북대 사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 土姓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김원충이 김인위의 아들이라는 추론 근거는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찾을 수 있다.
3. 2006년 국역 고려사열전을 펴낸 동아대학교석당학술원(심봉근 원장)은 김경용에 김지우 묘지명의 김인위와 고려사, 경주김씨족보의 김인위를 동일인으로 각주를 달았다.
국역 고려사열전 97권 김경용전 각주-동아대학교학술원당(심봉근 원장)
김원황(?~1062) :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역임한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인위(金因渭)의 아들로, 문종 때 중추원사(中樞院使)·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한 문신관료이다. 시호가 의경(毅敬)이다.
이 집안은 신라 원성왕의 후손 김인윤(金仁允)이 태조 왕건을 따라 개경(開京)에 와서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추증되면서 그 기반을 갖추기 시작하여 김인윤의 아들 김신웅(金信雄)이 태자태보(太子太保)·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그의 손자 김인위의 딸이 현종의 비인 원순숙비(元順淑妃)가 되면서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김인위의 세 아들 김원정(金元鼎)·김원황·김원충(金元?)과 함께 김원황의 아들 김경용(金景庸) 및 손자 김인규[金仁揆·金仁規]도 고위관직을 역임하고 김원충의 두 딸도 정종의 비인 용절덕비(容節德妃)와 문종의 비인 인목덕비(仁穆德妃)가 되는 등 당대 유력한 문벌이 되었다.
김인규의 아들 김지우(金之祐)가 음서로 진출하여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역임하였으며, 김지우의 맏아들 김충언(金忠彦)이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을 지냈다. 이 집안은 현종·정종·문종 때 왕실의 외척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외척이나 문벌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김인위의 다른 딸 계림국대부인(?林國大夫人)이 경원 이씨(慶源李氏) 이자연(李子淵)에게 시집가서 문종의 비가 된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延德宮主))·인경현비(仁敬賢妃(壽寧宮主))·인절현비(仁節賢妃(崇慶宮主))를 낳았고, 김경용의 딸 및 김인규의 딸도 경원 이씨 이자원(李資元) 및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에게 각각 시집가는 등 당대의 최고 문벌 가운데 한 집안인 경원 이씨와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었다.
김지우도 김선[金璿·金瑄]의 딸로 인종의 비인 선평왕후(宣平王后)의 언니 김씨(金氏)에게 장가 들었으며, 김원정의 딸은 평장사를 역임한 이천 서씨(利川徐氏) 서정(徐靖)과, 김인규가 판삼사사(判三司事)·참지정사(?知政事)를 지낸 개성 왕씨(開城王氏) 왕하(王?)의 딸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과 각각 혼인하였다.
참고자료: 김용선 편, 「이정(李?) 묘지명(墓誌銘)」최계방(崔繼芳) 묘지명(墓誌銘)」·「윤언영 처 유씨(尹彦榮妻柳氏) 묘지명(墓誌銘)」·「서균(徐鈞) 묘지명(墓誌銘)」·「이자원 녀 이씨(李資元女李氏) 묘지명(墓誌銘)」·「김지우(金之祐) 묘지명(墓誌銘)」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김연옥,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 『숙대사론』 11·12합, 숙명여대, 1982.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197~198쪽.
[네이버 지식백과]김경용[金景庸]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지금까지 김지우 묘지명의 김인위와 경주김씨족보의 김인위는 동일인임을 논하였다.
경주김씨 계림군파와 예판공파 문중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경순왕의 후손으로만 알고 살아 왔는데,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라고 하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보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보면 분명히 김인위는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고 원성왕의 후손이다.
나는 평장사공 인위(因謂)의 29세손이고, 예의판서공 남기(南基)의 22세손이다.
範鎭(범진)-憲圭(헌규)-忠燮(충섭)-相輟(상철)-奎仁(규인)-熙遠(희원)-鳳成(봉성)-尙鼎(상정)-佐昆(좌곤)-弘德(홍덕)-瑞平(서평)-郁一(욱일)-水龍(수용)-應世(응세)-光潤(광윤)-孟仝(맹동)-處昆(처곤)-恂(순)-敬存(경존)-讓(양)-仁軾(인식)-晫(탁)-南基(남기)-光俊(광준)-義公(의공)-英裕(영유)-舜符(순부)-之銳(지예)-元鼎(원정)-因謂(인위)-信雄(신웅)-仁允(인윤)-삼한공신삼중대광-원성왕 후손
경주김씨 계림군파와 예의판서공파의 조상인 평장사공 인위의 상계가 조금이라도 밝혀진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 옛날 신첩에 갖추어져 있던 인위의 먼 계보를 밝히려면 무척 어려운 일로 보인다. 하지만, 평장사공 인위의 조부가 삼한공신 김인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김인윤의 상계를 밝히는 작업을 계속한다면 원성왕에서부터 김인윤까지 누락된 계보를 밝혀내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될 것이다.
끝으로,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옮겨온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이정묘지명(1077년),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1111년)의 원문과 해석문을 올려놓는다.
김지우묘지명(金之祐墓誌銘) -1152년
시대 고려
연대 1152년(의종6년, 금(金) 제량(帝亮) 천덕(天德) 4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세로 4.2cm, 가로 7.2cm, 글자크기 1.5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김지우(金之祐 : 1108~1151)의 자(字)는 복기(福基), 경주사람으로 신라 원성왕(元聖王)의 후손이다. 조부(祖父)는 중서령(中書令) 김경용(金景庸)이고 아버지는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김인규(金仁揆)이고, 어머니는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으로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參知政事) 왕하(王?)의 딸이다. 조부(祖父)의 문음(門蔭)으로 벼슬하여 양온령동정(良?令同正),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 대악서승(大樂署丞), 예빈주부(禮賓注簿), 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 등을 거쳐 의종 2년(1148)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특별히 임명되면서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이 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의종 5년(1151)에 43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부인 김씨는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추봉된 김선(金瑄)의 딸로 인종의 차비인 왕대비(王大妃) 연수궁주(延壽宮主)의 언니이다. 그가 특별히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닌가 추측된다.
閤門祗侯金君墓誌銘」
君諱之祐字福基其先新羅國」
元聖大王之後大王生大匡金」
禮禮生三韓功臣三重大匡仁」
允允生大子大保左僕射信雄」
雄生司徒內史侍郎平章事因」
謂謂生兵部尙書中樞使元晃」
晃生中書令樂浪公景庸庸生」
中書侍郎平章事判尙書工部」
事仁揆揆生之祐初功臣仁允」
仕大祖統合三國有功隨大祖」
入京家焉金氏之族世世衣冠」
顯達金姓自此始矣至今稱爲」
貴姓母開州郡夫人左僕射?」
知政事王?之女也君爲人寬」
厚有節少好文學以祖蔭入仕」
爲良?令同正初受寫經院判」
官遷大樂署丞遷禮賓注簿至」
善慶府舍人天德三年戊辰二」
月日超拜閤門祗侯出安西都」
護府判官爲郡淸直臨事善決」
三年以▨聞辛未年七月二十」
六日因病卒于京城享年四十」
四歲娶金氏女王大妃延壽宮」
主之兄也追封戶部尙書金」
之女也生子二人長衛尉丞同」
正忠彦一男最幼女三人長適」
禮賓主夫黃文富餘?幼壬申」
年十月十九日葬于松林縣白古」
浦銘曰天難測命靡常世素貴」
壽不長銘於石永以藏」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1984)〕
판독자: 허흥식
합문지후 김군(閤門祗候 金君) 묘지명
군의 이름은 지우(之祐)이고, 자는 복기(福基)로, 선조는 신라국(新羅國)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이다. 대왕은 대광(大匡) 김예(金禮)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고, 위는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을 낳고, 황은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를 낳고, 규가 지우(之祐)를 낳았다.
처음 공신 인윤이 대조(大祖, 太祖)를 섬겨 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로가 있었으므로 대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 와 가문을 일구었다. 김씨 집안이 대대로 벼슬하여 현달하였으니, 김씨 성이 이로부터 비롯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귀성(貴姓)으로 불리운다. 어머니는 개주군부인(開州郡夫人)으로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知政事) 왕하(王?)의 딸이다.
군은 사람됨이 관대하고 너그럽고 지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조음(祖蔭)으로 벼슬하여 양온령동정(良?令同正)이 되었다. 처음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이 되었다가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오르고, 예빈주부(禮賓注簿)로 바뀌었다가 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에 이르렀다. 천덕(天德) 3년 무진년 2월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특별히 임명되면서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나갔다. 군(郡)을 청렴하고 정직하게 다스리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3년이 되자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다. 신미년(의종 5, 1151) 7월 26일에 병으로 서울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4세이다.
김씨 집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왕대비(王大妃) 연수궁주(延壽宮主)의 언니이며,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추봉된 김선(金瑄)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으니, 큰아들은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이고, 다음 아들은 가장 어리다. 딸은 세 명이 있는데, 큰딸은 예빈주부(禮賓主夫) 황문부(黃文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신년(의종 6, 1152) 10월 19일에 송림현 백고포(松林縣 白古浦)에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워 사람의 목숨도 항상 같을 수는 없네.
대대로 본래 귀한 가문이지만 수명이 길지 못하였네.
돌에 명(銘)을 새겼으니 영원토록 간직되리라.
이정묘지명(李?墓誌銘) -1077년
시대 고려
연대 1077년(문종31년, 요(遼) 도종(道宗) 태강(太康) 3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세로 37.8cm, 가로 88cm, 글자크기 1.2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조유부(趙惟阜) / 양숙화(梁肅華) / 미상
이정(李? : 1025~1077)의 자는 백약(百藥)이며, 수주 소성현(樹州 邵城縣 :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일대) 사람이다. 조부의 이름은 한(翰)이고, 아버지는 문종대의 권신인 장화공(章和公) 자연(子淵)이니, 그는 바로 이자연의 8남 3녀 중 장남이다. 어머니 계림국대부인(?林國大夫人) 김씨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특히 시에 능하였다고 한다. 문음(門蔭)으로 출신(出身)하여 20세에 내고부사(內庫副使)를 시작으로, 예빈성주부(禮賓省主簿), 합문지후(閤門祗候),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 위위소경(衛尉少卿),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 전중감 지상서이부사(殿中監 知尙書吏部事),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이부상서(吏部尙書), 참지정사 판삼사사 주국(?知政事 判三司事 柱國)을 거쳐 51세에는 중대부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 서북면병마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中大夫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兵部事 西北面兵馬事 兼 西京留守使 上柱國)이 되었다.
부인 왕씨(王氏)는 왕가도(王可道)의 셋째 딸로 상당현군(上黨縣君)에 봉해졌다. 6남 4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자인(資仁)·둘째 자의(資義)·셋째 자충(資忠)·넷째 자효(資孝)는 모두 벼슬을 하였고 다섯째는 승려로 법명이 세량(世良)이다.
1077년(문종 31) 53세에 병으로 작고하였다. 시호를 정헌(貞憲)이라 하였고, 서기산(西畿山) 기슭에서 화장하고, 임진현 백악(臨津縣 白嶽)의 선영 근처에 장례지냈다. 묘지는 문림랑 수상서예부원외랑(文林郞 守尙書禮部員外郞) 벼슬에 있던 조유부(趙惟阜)가 짓고, 장사랑 한림원대조(將仕郞 翰林院待詔)인 양숙화(梁肅華)가 글씨를 썼다.
해석자: 김용선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고려국(高麗國)의 돌아가신 대중태부 수태부 겸 문하시중 상주국(大中太夫 守太傅 兼 門下侍中 上柱國)이고 시호가 정헌(貞憲)으로 추증된 이공(李公) 묘지명 및 서문
문림랑 수상서예부원외랑(文林郞 守尙書禮部員外郞) 조유부(趙惟阜)가 짓다.
공의 이름은 정(?)이고, 자는 백약(百藥)이며, 수주 소성현(樹州 邵城縣) 사람이다. 증조부 허겸(許謙)은 상서좌복야 태자태부(尙書左僕射 太子太傅)로 추증되고, 조부 한(翰)은 상서좌복야 태자태보(尙書左僕射 太子太保)인데 안경(安敬)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아버지 자연(子淵)은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이고 추증된 시호는 장화(章和)이다. 어머니 김씨는 계림국대부인(?林國大夫人)으로,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의 딸이다.
공은 곧 중서령의 큰아들로 하늘과 땅의 순수한 정기를 받아 풍채가 남다르게 빼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자라서는 시를 공부하였는데, 아름다운 경치, 맑게 갠 밤,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는 반드시 붓을 잡고 글을 짓느라 거의 헛되게 보내는 날이 없었다. 한 문장 한 귀절이 나올 때마다 (글은) 다리가 없는데도 구슬보다도 빠르게 달려가 사람들이 다투어 전하고 베끼니 도성 안에 종이가 귀해졌다. 그 읊은 내용을 보면 대의(大義)가 다 갖추어져 있고 봉요학슬(蜂腰鶴膝)의 병폐가 없었으니, 어찌 풍월이나 읊조리고 화초를 희롱할 따름이었겠는가. 하물며 전분(典賁)에 이르러서는 그 깊은 이치를 탐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그 문장은 한 나라를 빛낼 만하였으며 그 재주는 과거에 일등으로 급제할 만하였다. 그러나 가의(賈誼)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상여(相如)의 병이 지나칠까 하여, 선친이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문음(門蔭)으로 출신(出身)하도록 하였다.
20세에 내고부사(內庫副使)를 제수받고, 23세에 예빈성주부(禮賓省主簿)로 옮겼다. 25세에 합문지후(閤門祗候)를 더하고, 28세에 상서고공원외랑(尙書考功員外郞)으로 옮겼으며 지방으로 나가 양주(楊州)를 다스렸다. 31세에 임기가 끝나자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이 되었는데, 32세에 정랑(正郞)을 더하고 겸하여 비어(緋魚)를 내렸으며, 33세에 위위소경 지합문사(衛尉少卿 知閤門事)에 임명되었다. 35세에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옮기고, 36세에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으로 고쳐 제수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38세에 전중감 지상서이부사(殿中監 知尙書吏部事)가 되고, 40세에 본관(本官)으로서 동지중추원사 겸 삼사사(同知中樞院事 兼 三司使)가 되었다. 44세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제수받고, 46세에 호부상서 중추사 권서경유수사(戶部尙書 中樞使 權西京留守使)로 옮겼다. 47세에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고쳐 제수되고, 48세에 참지정사 판삼사사 주국(?知政事 判三司事 柱國)에 제배되고, 51세에 중대부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 서북면병마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中大夫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兵部事 西北面兵馬事 兼 西京留守使 上柱國)이 되었으니, 겨우 30여 년에 낭서(郞署)로부터 재형(宰衡)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밝게 드러난 공적은 모두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모두 싣지 않는다.
아우가 네 명 있는데 모두 높은 지위에 오르고, 누이가 세 명 있는데 함께 왕비[金屋之貯]가 되었다. 그 이름과 덕업은 장화공(章和公)의 지문(誌文) 중에 매우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또한 생략하고 적지 않는다. 무릇 우리 임금[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 가세(家勢)의 대단함이 이미 이와 같으며, 관직의 화려함이 또한 저와 같다. 귀하다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오만하게 대하지 않았고, 항상 겸손함을 실천하면서 자신을 다스렸다.
왕씨(王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상당현군(上黨縣君)에 봉해졌다.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된 가도(可道)의 셋째 딸로서,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부덕(婦德)이 구족(九族)의 으뜸이 되었다. 6남 4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자인(資仁)은 22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처음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고 거듭 승진하여 지금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으니 그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예의범절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둘째 자의(資義)는 경시서승(京市署丞)이고, 셋째 자충(資忠)은 상서호부주사(尙書戶部主事)이며, 넷째 자효(資孝)는 양온령(良?令)인데, 모두 음서의 혜택을 받아 일찍 벼슬길에 올랐다. 각기 재주와 명성을 지니고 있으나 과거에 뜻이 있으니, 당시 사람들이 재능이 뛰어난 군자들로 용과 호랑이처럼 우열을 가르기 어려운 형제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비구(比丘)가 되어 현화사(玄化寺)에 있는데, 법명은 세량(世良)이다. 여섯째는 어려서 아직 이름이 없다. 장녀는 우산기상시 삼사사(右散騎常侍 三司使) 김양감(金良鑑)의 적남(嫡男)인 잡직서승(雜織署丞) 의영(義英)에게 시집갔다. 다음 둘째와 셋째는 모두 시집가지 않았고, 다음 넷째도 아직 비녀 꽂을 나이가 되지 않았다.
현군(縣君)은 공보다 76일 앞서 사망하였다. 공은 죽음을 슬퍼하는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달관(達觀)의 생각이 고분(?盆)에 버금갔다. 이에 서회시(敍懷詩)를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서너 해 동안 병을 가진 몸으로
공로도 없이 임금의 녹을 먹으니 모든 사람들이 비웃는다.
조금씩 남국(南國) 휴문(休文)의 수척함을 닮아가니
헛되이 서하(西河) 자하(子夏)의 살찜을 부러워하노라.
단지 불교를 배워 정진하는 것이 간절하나
꽃과 술을 만나니 즐거움만 극진하네.
올 봄에 문득 조강(糟糠)의 아내를 잃으니
들보 위 한 쌍의 제비만 미워하노라.
그 낙구(落句)의 뜻이 옆 사람이 들어도 오히려 서글픈데, 하물며 부부 사이에 능히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슬프다, 40년 이래 시를 업(業)으로 삼은 자로 이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에 병이 생겼는데, 수십 일이 되어도 낫지 않았다. 임금이 마고(麻誥)를 내려 대중대부 수태부 겸 문하시중(大中大夫 守太傅 兼 門下侍中)의 벼슬을 내리고, 장남을 발탁하여 조관(朝官)으로 올렸다. 어의(御醫)를 보내어 보살피도록 하기도 하고 혹은 내탕금(內帑金)을 기울여 조정에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태자와 후비, 친왕(親王) 등에 이르러서는 재물을 내어 하사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친히 방문하여 안부를 물으니 도로가 번잡하였다. 그러나 명록(命祿)이 다하니 천지신명이나 부처도 머무르게 하기가 어려웠다.
5월 13일에 서울 안의 불은사(佛恩寺)에서 돌아가시니, 이 해는 송(太宋) 희령(熙寧) 10년(문종 31, 1077)으로 세차로는 정사년이다. 돌아가시는 날 저녁에는 신음소리도 없이 손발을 씻고 의관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읊조렸다. 또한 스스로 보살 8계를 받고 끝나자 베개에 누워서 작고하였으니, 춘추 53세이다.
식자(識者)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겼다. 임금은 이 소식을 듣고 조회를 사흘 간 멈추었으며, 시호를 정헌(貞憲)이라 추증하였다. 슬퍼하는 마음이 보통과는 달라 부의를 높이는 것이 관례보다 두터웠으니, 애통함과 영예로움을 함께 갖춘 것이 고금에 견줄 바가 드문 것이다.
이 달 23일 임신일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일을 돌보게 하고, 불교법에 따라 서기산(西畿山) 기슭에서 화장[茶毗]하였다. 뭇 자녀들이 호곡하면서 유해를 받들어 사찰에 임시로 안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또 그 해 10월 20일 정유일에 좋은 점괘를 좇아 임진현 백악(臨津縣 白嶽)의 선영 근처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공은 불혹(不惑)의 나이 때부터 불교[因果]를 깊이 믿어 근무하는 시간 이외에는 대장경(大藏經)을 읽으면서 자신을 돌보고자 하였다. 전체를 한 번 다 읽고 다시 거의 반을 읽었으니, 부처가 식언을 하지 않는다면 저승에서의 도우심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부(惟阜)는 일찍이 보잘 것 없는 재주로나마 외람되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는데, 글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으니 사양하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비록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는 다행히 부끄러움이 없어, 삼가 명(銘)을 짓는다.
참으로 뛰어난 자손이여,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도량은 큰 바다 같이 넓고, 고상한 인품은 온화한 자태 그대로이다.
배움은 스승을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오직 지극한 도를 섬겨서
눈으로 제자백가를 섭렵하고 가슴으로는 고금을 꿰뚫었다.
시는 원백(元白)처럼 고결하고, 필체는 종장(鍾張)처럼 신묘하니
남겨진 풍모가 이어져 빛나고, 황실과 외척 간에 꽃다운 향기가 잇따르도다.
단아하고 총명하여 높은 자리를 역임하고
이름은 유리병[瑠甁]에 첫째로 적혀서, 옥으로 만든 솥과 같이 강하고 부드러운 덕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네.
다섯 빛깔의 붓으로 임금을 보필하고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같이 나라를 받들었지만
총애를 받아도 더욱 삼가고 귀해져도 위엄을 부리지 않았다.
일찍이 인생이 허무함을 깨달아 항상 연화장(蓮花藏) 세계를 찾아 헤매고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대하였으며 색(色)과 공(空)을 함께 잊었도다.
달콤한 샘물은 쉽게 마르고, 빼어난 재목은 먼저 꺾이나니
원수(洹水)를 건넌 것이 꿈 속의 일인가, 대산(岱山)을 노닐면서 돌아오지 않는구나.
사람들이 놀라 배를 잃어버리고 황제는 슬퍼하여 거울을 보는 것을 잊었는데
동각(東閤)은 이는 바람에 스산하고, 북당(北堂)에서는 달빛이 슬프도다.
흐르는 세월도 금방 바뀌니 먼 날도 잠깐이런가,
푸른 새가 길함을 알리고, 흰 비단을 두른 마차가 조심스레 걷는다.
무덤을 닫으면서 옥돌에 새겨 이에 묻으니
난초의 향기처럼 그 덕도 영원하리라.
대강(大康) 3년 정사년(문종 31, 1077) 10월 일에 명(銘)한다.
장사랑 한림원대조(將仕郞 翰林院待詔) 양숙화(梁肅華)가 쓰다.
해석자: 김용선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상(2001)〕
高麗國故大中太夫守太傅兼門下侍中上柱國贈諡貞憲李公墓誌銘幷序」
文林郎守尙書禮部員外郎趙惟阜撰」
公諱?字百藥樹州邵城縣人也曾王父諱許謙贈尙書左僕射太子」
太傅王父諱翰尙書左僕射太子太保贈諡安敬考諱子淵守太師兼中」
書令贈諡章和?金氏?林國大夫人內史侍郎平章事諱因謂之女」
也公卽中書長子受天地粹靈風神秀異幼嗜學長工詩若美景良辰」
花朝月夕必須命筆成篇略無虛日每一章一句出無脛而走疾於」
珠玉人爭傳寫都下紙貴觀其諷詠之旨大義畢備無蜂腰鶴膝之
病奚翅嘲風月弄花草而已哉況至典墳無不探?其文足以華一」
國其才足以取一第然繇自賈誼之年多相如之病先公不許應擧之」
事强令門蔭出身年二十授內庫副使二十三遷禮賓省主簿二十」
五加閤門侯二十八轉尙書考功員外郎出知楊州三十一秩滿歸」
朝復爲尙書戶部員外郎三十二加正郎兼賜緋魚三十二拜衛尉少」
卿知閤門事三十五轉尙書右丞三十六改授尙書吏部侍郎賜紫金」
魚袋三十八加殿中監知尙書吏部事四十以本官同知中樞院事兼」
三司使四十四授右散騎常侍四十六轉戶部尙書中樞使權西京留」
守使四十七改授吏部尙書四十八拜爲?知政事判三司事柱國五」
十一加中大夫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兵部事西北面」
兵馬事兼西京留守使上柱國僅三十年自郎署至于宰衡所著功」
績皆布在國史此不載弟有四?耀朱輪之榮妹有三同爲金屋」
之貯其名諱德業章和公誌文中甚詳又略而不書凡吾皇之子」
皆我公之甥勢之熱旣若斯秩之華又如彼不恃貴以?物常」
蹈謙而理身娶王氏封上黨縣君贈中書令諱可道第三女容色?美」
德爲九族冠生六男四女長子曰資仁年二十二擧進士擢第始授秘」
書省校書郎累遷今爲閤門侯者以其束立之儀?出人右故也次」
曰資義京市署丞次曰資忠尙書戶部主事次曰資孝良?令俱以蔭」
資早登仕徑各負才名有?廳之志時謂芝蘭玉樹優龍劣虎次爲比」
丘止玄化寺法名世良次曰幼而未名長女適右散騎常侍三司使金良」
鑑之嫡男雜織署丞義▨次二女次三女?在室次四女未?縣君」
先公七旬六日而亡公悼往之色不形于外達觀之思亞於?」
盆而吟?懷詩云三五年來養病姿素?君祿合人譏稍同南國」
休文瘦徒?西河子夏肥只學因緣精進切縱逢花酒極歡稀今春偶」
失糟糠伴梁上?嫌雙燕飛其落句之意傍人聞之尙猶悽愴?於」
夫婦之間能無念乎嗚呼四十年來業詩者絶筆於此焉未幾患脚」
浹旬不療 上宣麻誥加大中大夫守太傳兼門下侍中擢長男爲昇」
朝官或輟御醫以看侍或傾內帑以祈延?至 儲皇及 后妃」
親王等施捨財寶不可勝紀枉駕問視旁午道路而祿窮命盡神佛」
難留以五月十三日薨于京城內佛恩寺是歲太宋?寧十年龍
集丁巳也捐?之夕無呻吟聲?手足整衣冠坐念阿彌?佛名」
號又?受菩薩八戒訖伏枕而終春秋五十有三識者爲蒼生惜焉」
上聞之不視朝三日贈諡曰貞憲傷嗟之念有異於常情奠賻之」
儀特加於?例哀榮兼備今古罕?是月二十三日壬申命有司監」
護喪事以竺法茶毗于西畿山麓諸孤等號奉遺骸權安佛寺晨」
夕饗祀一如事生又以其年孟冬月二十日丁酉從龜筮之長葬于臨」
津縣白嶽近先塋禮也公自不惑之年深信因果奉公之外讀」
大藏經爲身計部秩一周復而將半若佛言不食冥祐可知惟阜早」
以寒微過??待論?見託遜?罔由課虛雖昧於妙辭撫實幸」
無於?色謹爲銘曰」
展矣英胄 生于慶門 珠瀛量闊 瓊樹姿? 學不由師」
心惟至道 目獵百家 ?萬古 詩高元白 筆妙鍾張」
餘風承絢 懿戚聯芳 端遇濬明 歷揚華顯 名首瑠?」
味調玉鉉 補天五色 柱國十圍 寵而益戒 貴不作威」
早悟蕉身 恒探蓮藏 人等我觀 色空俱忘 甘泉易竭」
秀木先? 涉洹有夢 遊岱不? 人駭失舟 帝嗟亡鑑」
東閣風酸 北堂月慘 流光屢換 遠日俄丁 靑烏告吉」
縞駟戒行 幽?欲? 勒珉是樹 如蘭之馨 厥德不朽」
時大康三年丁巳十月 日銘」
將仕郎翰林院待詔梁 肅華筆」
판독자: 허흥식
〔출전:『朝鮮金石總覽』上(1976)〕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1111년
시대 고려
연대 1111년(예종6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보물 - 24호
크기 높이 2.77m, 가로 1.49m, 두께 17cm, 글자크기 2.1㎝, 제액 글자크기 7.6㎝,
출토지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
소재지 (한국)금산사-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이오(李?) / 정황선(鄭晃先) / 이효전(李孝全)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金山寺)에 현존하는 비이다. 고려 중기 법상종의 대표적인 고승인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 1038, 정종 4~1097, 숙종 2)의 생애를 기리는 탑과 함께 세운 비이다. 귀부 위에 비신을 얹고 그 위에 가첨석을 올렸으나 현재는 가첨석은 없어지고 귀부와 비신만 남아 있다. 보물 제 24호이다. 비신은 주위로 당초문을 둘러 장식하였으나 비문의 마모 상태가 심하여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비문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문하시랑을 지낸 이오(李?, 1050~1110)가 지었고, 해서로 비문을 쓴 사람은 『대동금석서』에는 채유탄(蔡有誕)이라 하였으나 『해동금석원』과 『조선금석총람』등에서는 정모(鄭□), 『한국금석전문』에는 정황선(鄭晃先)이라 하여 정황선으로 생각된다. 비 전면 끝에 이효전(李孝全)이라는 이름이 있어 새긴 이로 추정된다. 혜덕왕사가 돌아간 이듬해인 1111년(숙종 3)에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대표적인 문벌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음기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스승인 지광국사비와 같이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와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사지전후몰세자(師之前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인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 8백 인에 이른다. 고려의 승려·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題額)」
高麗國全州大瑜伽業金山寺普利了眞精進饒益融慧廣祐護世能化中觀 贈諡慧德 王師眞應之塔碑銘幷序」
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
章事判尙書禮部翰林院事文德殿太僕射脩國史上柱國▨▨▨▨」
學士▨▨▨ ▨▨」
登仕郎尙書都官郎中賜緋魚袋(臣)鄭晃先 奉 敎撰」
(臣)聞釋氏出世立敎也爲化群機故其說有權實漸頓之殊半滿偏圓之別繇是五天高士諸夏名?空緇?空?有者寔繁宗性宗相者甚衆惟性與相泯合爲一而已▨▨道妙理者今贈諡慧德王師」
師諱韶顯字範圍俗姓李氏其先慶源郡人也曾高以降積累彌深乃子乃孫列鉉司而挺秀爲?爲妹公 掛壺以聯芳王父諱翰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贈太子太傳尙書左僕射▨▨▨」
公孝以克家忠以許 國契先朝之際會?顯列以仟翔衆協六符?立乎鈞衡之秩慶綿十葉翼飛乎閥閱之聲功與世而莫京裕垂昆而不絶者焉顯考諱子淵守太史門下侍中贈中書侍郎文
和公以文章擢 御簾高第有籌略爲 聖域聞人力?萬機首居四輔豈止伊尹作殷家右相天下取以保安孔光拜漢室上公海內畏其威振而已哉外祖諱▨▨▨▨侍郎平章事候▨▨」
▨王室名(臣)守誠節以不踰歷夷險而一致出則秉?杖鉞四方無擊析之入則論道經邦 萬乘有垂蒙之暇其世家遠系信牒備文故略焉母金氏累贈鷄林國太夫人性?柔嘉長成▨▨▨」
四德蔚爲公族之嬪繼念三歸求得法王之子果蒙應也乃有娠焉以太平紀曆十有七年歲在戊寅七月哉生明誕師于 闕南佛嶺之私第師生而特異??▨▨▨▨▨▨▨額廣眉長▨▨▨▨▨」
勁其骨黔其膚若應眞之相也年甫十一就海安寺麟公所落髮麟公卽故法泉寺國師諡智光諱海麟也先是公應詔入內夜方一鼓夢見瑞鳥似鳳而紫▨▨▨紫▨▨▨▨玩深恐失之▨▨▨」
和公?師而至請爲弟子麟公見師貌雄傑而衣紫謂曰昨夢瑞鳥之兆豈誣也哉初學金光明經唯識論夙殖聞?日新懸鮮故麟公意甚愛之?云賢哲之才俟時▨▨▨▨桃李應韶▨▨陽▨」
發顯故以韶顯爲名焉明年受於福興寺官壇超世之戒珠自潔匪假磨?生塵之心鏡本淸豈勞拂拭于時麟公移住玄化寺師?高棲絳帳親受金言則何異仲尼▨▨▨▨▨回善光▨▨▨▨▨▨」
哉淸寧七年赴王輪寺大選?一捷爲大德咸雍五年加重大師?乎六年夏五月文宗金輪啓統玉?凝休廣斯文而旣致化成向彼佛而兼修喜捨 聆師之才▨▨▨蔭眷六年」
延德宮第六 王子投師門而出家卽今俗離山法住寺住持導生僧統是也是年十月十四日 上幸師之所隷玄化寺齋佛僧以慶之仍 賜磨衲袈裟蔭眷七年初住海安寺加授三重大」
師太康五年秋 上命有司於 內殿大張法席 請師充說主者爲大宋回使利涉大洋故也仍加普利二字爾後累加一十六字爲法號者皆所以旌其德行也是年 詔住全州金山寺九年又」
加首座是歲 文宗昇遐 順宗嗣位未幾而王崩卽 宣宗承纂之元年也 上以端拱無爲坐見中興者豈非師福利之功耶下枇署爲僧統其時 師年四十七也始師爲首座求▨▨」
僧統位由德進不其偉歟? 國初已來凡爲法王者非有年德罕能居此職而師以壯年見 擢緇素榮之又其年 王命師移住玄化寺仍於開國慈雲兩寺選?有再爲都▨▨▨▨▨又赴內賜法」
會?大藏道?主張講席幷蒙 賜法服者其數非一師降眞戚里作主空門其儀也燦然可觀其志也確乎不拔凡所爲事有異於人?在燕居少選閒手無釋卷每於講會一▨次之不▨」
物以思恭或誨人而忘倦故得?廊?者盡是?琮藍璧盡是殊珍持?盂者孔羽翠毛無非佳瑞大寂之學徒累百僧俗智?學之聽衆盈千豈可同日而語哉大安初師以手校唯識開發意四衆▨▨▨▨▨▨」
初失其本積有年矣旣得之尊尙者衆矣師曾於金山寺選勝于寺之南走六十許步地創設一院額號廣敎仍筆刻雕經板置于院院之中別造金堂一所幷繪畵盧舍那及奬基二師像其」
堂自太康九年至師之末年搜訪慈恩所撰法華玄?惟識述記等章?三十二部共計三百五十三卷考正其本募工開板私紙墨印布流通以廣法施也謹案大宋高僧傳云奬▨存惟」
識開創之祖基?守文述作之宗?苟無基則何祖張其學乎是知凡將入於性相義門者捨慈悲之學則罔臻其極矣頃自唐 文皇以新羅 王表請 宣送瑜伽論一百卷於是無應理圓實之學」
漸盛于玆土?乎曉法師導之于前賢大統踵之於後燈燈傳世世嗣興然而去聖寥遠遺文訛舛者多矣師?疾于懷以其祖門章?大行於世使學者知本宗之有坦途惟師之力也可謂扶」
曉賢方軌齊鶩焉可勝道哉其光揚本敎也如此復於傳法之外雅好仁義之術博 覽經史至于詩篇筆札靡不精究爲人歎詠者??有焉故於首座告身云內檀師明訓領徒弟於蘭菊」
結詩社於江山其才兼外學也又如此師以爲欲資感果於未來莫若植因於現在上生懇願遠則追無着之?內院脩行近則慕基公之??評題逐月畵成慈氏尊像每歲取七月十四日開法筵」
集徒侶禮懺?依及明設齋施?以罷席自太康元年乙卯至壽昌二年丙子 首尾凡二十有二稔而止大康末癸亥宣宗聞其事特 賜諸般彩畵幷 御書一通其書曰▨當來不▨▨▨▨▨▨」
盛會謹隨喜吾師功德其於月日下 國銜稱弟子有以見師心奉法繼年修香火之緣 御手飛文隨喜 賜丹靑之飾苟非願力甚深▨何▨宸襟信重之如是耶師居玄化寺時▨▨▨▨」
完補爲急務尋狀聞 上可其奏仍置繕理宮大安四年肇其役壽昌二年畢其功締葺宏模雖因舊址莊嚴勝?宛若新成師又於中外本宗諸寺施納淨財許設每年兩度法會以爲常式募得虎頭」
名手畵成釋迦如來及?基二師海東六祖像都一各安于其寺欲令義學者覩像生敬自敬生信自信得慧日以勸焉壽昌元年乙亥冬十月 聖考肅宗慶襲宗社心歸佛法▨▨▨▨」
召師爲法主講仁王經者祈天 祚業故也?二年十二月十八日師於寺之奉天院深夜看經次有斯疾旣以聞卽 遣御?診視之未回續 差中使押送尙乘鞍馬施納其寺以▨▨▨▨▨▨▨」
內侍少卿池澤厚奉傳 聖旨今欲封師爲 王師師頓首言德簿行庸豈堪 聖奬夜將深嚼楊枝漱訖念彌勒如來名號?四弘願戒與門弟等囑累蕩蕩然無憂色中夜更嚼楊枝俄而遷化」
先一日白虹夜見識者以爲師終之?也山?野老無不號?走獸飛禽互相悽慘遙明以入寂聞 上乃 震悼遣入 內奉御王? 吊慰之翌日命右街僧錄繼通攝司天監知太史局事文」
象等監護葬事二十七日 遣使尙書右僕射陳謂使副尙書左丞右諫議大夫金沅等?持璽書封爲 王師諡曰慧德塔號眞應幷 贈紫地繡袈裟?諸衣對器玩茶香等物▨伸時▨▨▨▨」
未茶毗于寺之西南隅明年丁丑正月旬有一日丙申遷葬于寺之西北隅安其骨遵像法也嗚呼毗尼園內始則現無生之生跋提河邊終則示不滅之滅其餘終也自初七?二祥凡十齋所▨▨▨▨▨」
給其在 朝延也猶若是焉?其門人乎哉時有祐世僧統大覺國師實華嚴之宗匠也聞師之卒方盡哀而致祭其文略云方期沒齒交臂弘眞今也卽亡吾誰與親其他宗之見重也皆是歎道人有華僧▨▨」
大師慧?度海而來屬于師之講下?之於師也欣然如舊相識居兩年矣無何先於師三旬而滅其滅也結跏印手而坐化盖出於尋常焉其爲遠人依慕也又如是類其▨累朝凡所賜▨▨▨」
他等避繁故不書及諸貴臣盛族豪商大賈各盡其所可爲而致敬者無虛日矣俗壽五十九夏臘四十八奧有門弟上首導生僧統而下凡一千餘人等狀先師行涕淚伏 闕而奏其書曰▨▨」
於珊兜知哀慕勒龜趺於寶界願永傳聞爰 命下臣?揚遺烈臣表讓云臣本性孤?加以老衰?無賈勇於操?曷副屬辭於寫琰願回▨中旨移授通人仍降 制曰以碑聯▨之▨▨▨▨▨」
之景行勿煩曲讓勉?眞書旣 阻示於 都兪敢不?於論?文非無質然慙作者之求道可强名庶續高僧之史?其實而謹述銘云」
能仁出現爲大因緣度衆生界說諸敎詮或云權實或云偏圓起從西域漸被東?(其一)祖祖闡揚師師提唱談有談空曰性曰相苟泯二道有何偏尙其誰融通唯我宗匠(其二)萬行▨我生而▨▨▨▨▨」
鷲嶺譽? 龍?應 王臣護爲 帝子師聖墻疊?覺樹添枝(其三)締構梵宮莊嚴佛氏日振法衣講宣微旨請益如雲攝齋成市道豈遠而行之卽是(其四)欲圓妙果須種善業像像補處▨▨▨▨▨▨」
如水月福也河沙年踰二紀念玆靡?(其五)廣敎起院購書周?多葉鏤文貫花增線法雨均沾慈風益扇擬彼曉賢重生辰卞(其六)對賓命筆探景成詩垂露騰彩碧雲騁奇業之所感作▨▨▨▨▨▨」
▨所名滿證爲期(其七)白虹告祥雙林變色奄促化緣復歸淨域 大君澍恩微臣?德刻以貞珉 流美萬億(其八)」
校尉(臣) 李孝全 奉詔 撰
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
(陰記)
俗離寺主兼住金山寺僧統導生僧統窺▨僧統同壽首座冠僧釋稱普元右賢」
尙▨▨壽會元誕融三重大師覺彼仁股智圓道月?宗?雄洞明義誕重大師」
承覺▨▨▨▨國?釋目充善▨倫詮善俊明祐承?相眞鑑尙表忠▨釋宗秀」
賢▨▨甚賢識珠隣尙良辨闡祥思遠利雄善雄證林性▨法▨▨▨甚冀寶明」
德幾乎領融演深宗祐冠倫性端慧端性珉戒元▨妙洪▨承▨鑑同▨方德?」
▨億景?禪晤法延曇休靈坦性信▨約宣挺鑑賢德國▨▨▨▨申▨▨▨▨」
▨等一百六十人重大師惠奇志雄等一十四人受敎繼業者也」
兩街都僧錄大師光▨左街僧錄行雄重大師慧宗弘學明眞爲鏡受明▨舒大師」
釋知明胥▨百餘人隨職加階者也」
重大師?賢夙相報正景生昌融祖忠大師導挺舊日▨宗▨▨▨雄等一千五」
百餘人慕德歸化者也」
僧統勝齡首座崇▨▨常▨▨▨▨三重大師僧統祐祥洪▨順眞道緣釋琳眞」
領證相?領重大師梁▨▨▨▨▨▨▨▨▨▨▨師之前後沒世者也」
右件門徒開座職名雕錄施行」
承務郎尙書考珣賢員外郎賜緋金魚袋(臣)奉 詔謹書」
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 日 立石」
판독자 허흥식 劉燕庭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전주(全州) 대유가업(大瑜伽業) 금산사(金山寺) 보리료진(普利了眞) 정진요익(精進饒益) 융혜광우(融慧廣祐) 호세능화중관(護世能化中觀)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병서(幷序)
삼중대광(三重大匡) 개부의동(開府儀同)삼사(三司) 검교(檢校)태사(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 한림원사(翰林院事) 문덕전(文德殿)대학사(大學士)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 ▨▨▨▨학사(▨▨▨▨學士)인 이오(李?)가 조칙(詔勅)에 의하여 비문(碑文)을 지었고,
등사랑(登仕郞) 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郎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정황선(鄭晃先)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신(臣)이 듣건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여 불교를 창립한 것이 군기(?機)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설법(說法) 중에는 권실(權實)과 점돈(漸頓)의 다름과 반만(半滿)과 편원(偏圓)의 차별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천축국(五天竺國)의 모든 고사(高士)와 제하(諸夏)의 이름 높은 스님들이 공(空)에 집착하고, 유(有)에 떨어진 이가 매우 많으며, 또한 성종(性宗)에 국집하거나, 상종(相宗)으로 치우치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성종과 상종이 민합(泯合)하여 오직 하나뿐인 지극한 도(道)이며, 미묘한 진리인 것이다. (결락) 우리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휘는 소현(韶顯)이요, 자(字)는 범위(範圍)이며, 속성은 이씨(李氏)요, 그의 선조(先祖)는 경원군(慶源郡) 사람이다. 증조(曾祖)와 고조(高祖) 이후로 선행을 적루(積累)함이 심히 많아서, 자자 손손(子子 孫孫)으로 내려 오면서 현사(鉉司)의 높은 관직에 서열(序列)되어 크게 빼어났으며, 자(?)가 되고 매(妹)가 된 여식(女息)들은 괘호(掛壺)의 집안으로 시집가서 왕후(王后), 국태부인(國太夫人), 음부인(陰夫人), 숙부인(淑父人) 등 연방(聯芳)에 오르게 되었다. 왕부(王父)의 휘는 한(翰)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증태자태부(贈太子太傅)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공(▨▨▨▨▨▨公)이니, 효도로써 힘을 다하고, 충성으로써 생명을 바쳤다. 선조의 제회(際會)에 계합하고, 현열(顯列)로써 회상(?翔)함에 참여하였다. 상징적으로 육부(六符)를 도왔으며, 균형(鈞衡)의 질(秩)에 악립(?立)하였고, 가문의 경사(慶事)가 칠대(七代)의 후손에까지 면면히 이어져서 벌열(閥閱)의 명성이 온 천하에 퍼졌으며, 공적은 세상에서 비길 데 없고, 쌓은 적덕(積德)을 먼 후손에까지 드리워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현고(顯考)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증중서시랑(贈中書侍郞) 문화공(文和公)이니, 문장으로써 어렴(御簾)고제(高第)에 발탁되었다. 남다른 주략(籌略)이 있어, 독보적인 지모(智謀)로 많은 사람을 힘껏 돕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며, 만기(萬機)를 돕는 사보(四輔) 중에 으뜸이었으니, 어찌 이윤(伊尹)이 은(殷)나라의 우상(右相)이 되어 천하를 태평성세로 이룩한 것에 그칠 뿐이며, 공광(孔光)이 한(漢)나라의 상공(上公)에 임명되니, 해내(海內)가 어찌 그의 위엄(威嚴)에만 두려워 함이겠는가?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왕실의 명신(名臣)이며, 충절(忠節)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과 장(杖)과 부월(?鉞)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擊柝)의 근심이 없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면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 만승(萬乘)께서 수상(垂裳)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태평기력(太平紀曆) 17년 세재무인(歲在戊寅) 7월 재생명(哉生明)에 궁궐 남쪽 불령(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스님은 날 때부터 특이하였고, 초츤(??) (결락) 이마는 넓으며 눈썹은 길고, 코는 높고 곧으며, (결락) 골격은 건장하고 피부색은 검어서 마치 응진(應眞)의 상(相)과 같았다. 나이 겨우 11살 때 해안사(海安寺)의 해린(海麟)스님을 찾아가서 그를 은사로 하여 낙발득도(落髮得度)하였는데, 해린은 이미 입적(入寂)하신 법천사(法泉寺)의 국사(國師)이니, 시호는 지광(智光)이요, 휘는 해린이다. 이보다 앞서 인공(麟公)이 왕의 부름을 받아 궐내에 들어가서 어느날 밤 삼고(三鼓)의 꿈에 서조(瑞鳥)를 보니, 봉(鳳)과 비슷하나 자색(紫色)이며, (결락) 자(紫) (결락) 완심(玩深) 공실지(恐失之) (결락) 화공(和公)이 스님을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인공이 스님의 모습을 보니, 웅걸(雄傑)하고 자색(紫色) 옷을 입고 있었다. 인공이 이르기를, “어제 밤에 서조를 보는 꿈을 꾸었으니, 어찌 이것이 거짓이겠는가”라 하고 받아 들였다. 처음부터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는데, 숙세(夙世)로부터 많이 문훈(聞薰)하였으므로, 날마다 식견(識見)이 증승(增勝)하였다. 그리하여 인공이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이르기를, “현철(賢哲)의 재질(才質)이 때를 기다려,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도리(桃李)나무가 봄 빛을 받아 점점 자라는 것과 같으므로, 소현(韶顯)으로써 법명(法名)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다음해인 명년(明年)에 복흥사(福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세간을 초월하는 계주(戒珠)가 스스로 청결(淸潔)하여 마롱(磨?)을 빌리지 않았다. 출진(出塵)의 마음 거울이 본래로 청정한 것이어늘, 어찌 수고롭게 불식(拂拭)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무렵 인공이 현화사(玄化寺)로 이주하여 높이강장(絳帳)에 앉아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사(王師)도 그곳으로 따라가서 금언(金言)을 수학하였으니, 어찌 중니(仲尼)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는 안회(顔回)와 다를 것이며, 선광(善光) (결락) 재(哉)아!
청령(淸寧) 7년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 일첩(一捷)에 대덕법계(大德法階)에 합격하였다. 함태(咸泰) 5년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가 첨가되었고, 6년 5월에 이르러 문종이 금륜왕(金輪王)과 같이 나라를 통어(統御)하고, 옥의(玉?)으로부터 저절로 상서(祥瑞)가 응집(凝集)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풍(文風)이 널리 퍼져 이미 화성(化成)을 이루었고, 저 성불(成佛)의 단계를 향하여 대희대사(大喜大捨)의 6도만행을 겸수하였다. 문종 임금께서 왕사의 뛰어난 법재(法才)를 듣고,흠모하는 마음으로 마납가사(磨衲袈裟)와 음척(蔭脊)을 선사하였다. 또 그 해 연덕궁비(延德宮妃) 이씨(李氏) 소생인 문종의 여섯째 왕자 훈(塤)을 왕사의 문하에 보내어 출가하여 시봉토록 하였으니, 지금의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주지인 도생(導生) 승통(僧統)이 바로 그 분이시다. 이 해 10월 14일에는 문종 임금이 왕사가 소속되어 있는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불승(佛僧)에 공양하며 경축하고는 마납가사와 음척을 하사하였다. 7년 초부터 해안사(海安寺)에 주석(住錫)하였는데, 10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가수(加授)하였다. 태강(太康) 5년 가을 문종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내전(內殿)에서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고, 왕사를 초청하여 설법주(說法主)로 모신 것은 대송(大宋)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사신(使臣) 일행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가도록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보리(普利)라는 이자(二字)의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 후 십육자(十六字)의 법호(法號)를 누가(累加)한 것은 모두 그의 덕행을 현창한 것이다. 다시 그 해에 전주 금산사로 왕명에 따라 이주하였다. 9년에 이르러 수좌(首座)의 직계(職階)를 더하였는데, 이 해에 문종이 승하(昇遐)하고, 순종(順宗)이 즉위하였으나, 4개월만에 순종도 승하하고, 선종(宣宗)이 보위(寶位)를 승계한 원년(元年)이다.
임금이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무위태평(無爲太平)을 이루었으며, 편안히 앉아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이 어찌 왕사가 끼친 복리(福利)의 공(功)이 아니겠는가? 비서(批署)를 내려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때 왕사의 나이는 47세였다. 비로소 수좌가 되고 (결락) 이어 승통이 되었는데, 지위(地位)란 덕으로 말미암아 진계(進階)되는 것이니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국초(國初) 이래로 무릇 법왕(法王)이 된 이는 연덕(年德)이 있지 않으면 능히 이 직위에 오른 이가 드물었으나, 스님은 장년(壯年)에 이미 치소중(緇素中)에서 발탁되어 영광을 차지하였다. 또 그 해에 왕명으로 스님을 현화사에 이주케 하였고, 개국(開國)과 자운(慈雲) 양사(兩寺)의 선장(選場)에서 다시 도승통(都僧統)이 되었다. (결락) 또 내사법회(內賜法會)에 나아갔으며, 대장도량(大藏道場)에서 강석(講席)을 주관하고 아울러 법복(法服)을 하사받았으니, 그 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왕사께서는 척리(戚里)의 가문에 태어나서 공문(空門)을 주관하는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 위의(威儀)가 찬연하여 우뚝해 보이며, 그 의지는 확고하여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없다.
무릇 하는 바의 일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함이 있었다. 항상 고요한 곳에서 연거(燕居)하되, 잠깐 사이에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고, 항상 강회(講會)마다 질서가 정연하여 조리(條理)를 잃지 아니하였다. (결락) 물건을 얻기 위해 비굴하지 아니하며, 혹은 후학을 가르치되 피곤함을 잊었다. 낭무(廊?)에 나아가서 얻은 것이 모두 곤종(?琮)과 남벽(藍璧)이니, 다 특수한 보배이다. 왕사를 모시며 병우(甁盂)를 시봉하는 자로는 공작(孔雀)의 깃과 푸른 털을 가진 봉황(鳳凰)까지도 가서(佳瑞)로운 시자(侍者) 아닌 것이 없었다. 대적(大寂)의 회상에 학도(學徒)가 수백명이며, 지의(智?)의 문하(門下)에 청중(聽衆)이 천명을 넘었으나, 어찌 동일의 선상에 놓고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안(大安) 초에 스님께서 직접 유식론(唯識論) 등을 교정하여 깊은 뜻을 개발하고, (결락) 사권(四卷)을 지었다. (결락) 그 초본을 유실한지 이미 오래되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이를 존상(尊尙)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스님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 60보쯤 되는 지점에 승지(勝地)를 골라 광교원(廣敎院)을 창설하고, 유식종에 관한 경론(經論)을 각조(刻雕)하여 광교원에 진장(鎭藏)하였다. 그리고 원중(院中)에 일금당(一金堂)을 따로 두어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현장(玄?)과 규기(窺基) 두 스님의 상(像)을 (결락) 봉안하였다. 태강(太康) 9년으로부터 스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지은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를 찾아서 32부(部) 공계(共計) 353권을 그 본(本)을 고정(考正)하고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판각(板刻)하고는 개인적으로 지묵(紙墨)을 갖추어 인경(印經)하여 유통함으로써 널리 법포시(法布施)를 행하였다. 자세히 상고해 보니,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에 현장은 유식론을 개창한 시조이며, 규기는 이에 유식론문(唯識論文)을 보수(保守)하여 술작(述作)한 종조(宗祖)라고 하였다. 현장이 만약 규기가 없었다면 어찌 그의 학(學)을 조술(祖述)하여 확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만약 성상(性相)의 의문(義門)으로 들어가고자 할진대, 자비(慈悲)의 학(學)을 버리고는 그 진극(盡極)한 경지에 이르러 갈 수 없다. 과거 당(唐)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신라왕의 요청으로 유가론(瑜伽論) 100권을 보내옴으로부터 그때까지 응리원실(應理圓實)의 교학(敎學)이 없었으나, 이때부터 점점 이 땅에 왕성하였다. 그리하여 원효법사가 앞에서 인도하였고, 태현대통(太賢大統)이 뒤를 따랐으며, 등(燈)과 등이 등불을 이어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 중흥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과의 상거(相去)가 더욱 멀어진 말세에 있어서 유문(遺文)에 그릇되고 어긋남이 많았으므로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이를 바로 잡으려고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법상종조사(法相宗祖師)의 초소(草?)를 크게 세상에 유행토록 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본종(本宗)의 탄도(坦途)가 있음을 알게 한 것은 오로지 스님의 공력(功力)이었으니, 가히 원효와 태현(太賢)을 부호(扶護)하고 바야흐로 함께 달리도록 하였으니, 어찌 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본교(本敎)를 더욱 빛나게 선양한 것은 이와 같았고 전법(傳法)하는 일 밖에도 인의(仁義)의 학술(學術)을 아호(雅好)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하고, 시편(詩篇)과 필찰(筆札)에 이르기까지 정미롭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탄영(歎詠)을 받은 적이 자주 자주 있었다. 그러므로 수좌(首座) 승계(僧階)를 받을 때의 고신(告身)에 이르되 내단사(內檀師)인 명훈(明訓)이 도제(徒弟)를 난국(蘭菊)에서 거느리고, (결락) 시사(詩社)를 강산(江山)에서 맺었으니, 그의 재주가 외학(外學)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스님을 도와서 미래에 감과(感果)코자 할진댄, 그 인(因)을 현재에 심는 것만 같지 못하니, 도솔천 내원정토(內院淨土)에 상생(上生)하기를 발원(發願)함에는, 멀리로는 무착(無着)의 자취를 추모하여 내원수행(內院脩行)을 하고, 가까이로는 규기(窺基)의 행적을 흠모하여 마음에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씨(慈氏)의 탱화를 그려서 봉안하고 해마다 7월 14일에 법연(法筵)을 열어 도려(徒侶)를 모아 예참(禮懺)하며 귀의(歸依)하고, 또한 크게 재(齋)를 베풀어 시친(施?)하고 법석(法席)을 파하였는데, 태강(太康) 원년 을묘(乙卯)로부터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이르기까지 수미(首尾)의 기간이 무릇 22년만에 끝났다. 태강말(太康末) 계해년(癸亥年)에 선종(宣宗)이 그 미륵불의 탱화불사를 듣고, 특히 여러 가지 채화(彩畵)와 아울러 어서(御書) 일통(一通)을 하사하였는데, 그 어서에 이르기를, “당래불(當來不) (결락) 성회(盛會)하여 삼가 우리 스님의 공덕을 수희(隨喜)하라” 하였다. 그달 그날에 왕이 국함(國銜)을 내려 제자(弟子)로 일컫대 왕사의 마음을 보고 불법(佛法)을 받들면서 계속 여러해 동안 향화(香火)의 인연을 닦았으며, 어수(御手)로 쓴 친서(親書)를 보내어 수희(隨喜)하는 마음으로 단청(丹靑)할 장식물을 하사하였으니, 진실로 원력(願力)이 심히 깊은 이가 아니면 어찌 능히 신금(宸襟)의 신중(信重)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 현화사에 거주할 때, (결락) 완전히 보수하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생각하여 곧 상계(狀啓)를 갖추어 왕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임금께서 주청한 것을 가하다고 인가하시고, 선리궁(繕理宮)을 설치하였다. 대안(大安) 4년 기사(己巳)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준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웅대하였다. 비록 구지(舊址)에 복원하였으나, 장엄한 승개(勝?)가 완전히 새로 건축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또 중외(中外)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종(本宗)의 모든 사찰에 정재(淨財)를 시납(施納)케 하여, 매년 양회(兩會)에 걸쳐 법회(法會)를 여는 것을 연례화(年例化)하였다. 호두명수(虎頭名手)인 뛰어난 화가(畵家)를 모집하여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탱화와 장기이사(?基二師)와 해동육조(海東六祖) 등의 영정을 일당(一?)에 모두 그려서 각각 그 절에 봉안하였다. 의학자(義學者)들로 하여금 성상(聖像)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공경함으로부터 신심(信心)을 내고, 신심이 견고함으로부터 지혜를 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날마다 상생정토(上生淨土)를 발원하도록 권장하였다. 수창원년(壽昌元年) 을해(乙亥) 10월에 성고(聖考)인 숙종께서 경사스럽게 종사(宗社)를 계습하였으며, 마음으로 깊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결락) 왕명으로 스님을 청해 법주(法主)로 모시고, 잉왕경(仁王經)을 강설한 것은 천조(天祚)의 성업(聖業)을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수창 2년 12월 18일에 이르러 왕사께서 금산사 봉천원(奉天院)에서 심야에 경을 보다가 미질(微疾)이 있게 되었다. 이를 숙종 임금께 알렸더니 곧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였으나 회복되지 아니하였다. 이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친서(親書)와 함께 왕사가 전용으로 타도록 상승국(尙乘局)의 마차를 그 절에 헌납하였다. 이(以) (결락) 내시소경(內侍少卿) 지택후(池澤厚)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전하고, “스님을 봉(封)하여 왕사로 추대코자 합니다”라고 고하였다. 스님이 돈수(頓首)하고 이르되, “덕이 박하고 수행도 용렬하니 어찌 성장(聖?)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밤이 장차 깊어져 가는데 스님은 양지(楊枝)를 씹어 양치질한 다음, 미륵여래(彌勒如來)의 명호를 염(念)하고 사홍원계(四弘願戒)에 이르러 발원하여 마치고, 문제자(門弟子)들과 더불어 간곡히 부촉하되, 탕탕연(蕩蕩然)하여 얼굴에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다. 중야(中夜)에 이르러 다시 양지를 씹은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다. 열반에 들기 하루전에 흰 무지개가 밤에 나타났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스님께서 임종하실 예고를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산동(山?)과 야로(野老)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으며, 새와 짐승들도 서로 처참하였다. 이른 새벽에 입적하시니,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입내봉어(入內奉御)인 왕하(王?)를 파견하여 조문(弔問)과 위로를 표하고, 다음날 우가승록(右街僧錄) 계통(繼通)과 사천감(司天監)이며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인 문상(文象) 등을 보내서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27일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진위사(陳謂使)와 부상서(副尙書) 좌승(左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인 김통(金統) 등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지참하고 가서 왕사로 진봉(進封)하고, 시호를 혜덕(慧德),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고, 아울러 자색(紫色) 바탕에 수를 놓은 가사(袈裟)와 여러 가지의 옷과 대기완(對器玩) 다향(茶香) 등 물류를 증사(贈賜)하였다. 신시(申時) (결락) 말에 절 서남쪽에서 다비(茶毗)하였다가, 다음 해 정월(正月) 11일 병신(丙申)에 절의 서북쪽으로 천장(遷葬)하여 유골을 안치하였는데, 이는 상법(像法)을 준수한 것이다. 오호라! 비니원내(毗尼園內)에서 비롯하였으니, 곧 출생할 것이 없는 데서 생(生)을 나타냈고, 발제하변(跋提河邊)에서 임종하였으니, 이는 곧 입멸(入滅)할 것이 없는 데서 입멸을 보인 것으로, 일생(一生)의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이다.
초재(初齋)인 7일로부터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인 이상(二祥)에 이르는 무릇 십재(十齋)에 이르기까지의 소요되는 경비 (결락) 를 공급함이 조정(朝廷)에 있었다. 국가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거든, 하물며 문인(門人)이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우세승통(祐世僧統) 대각국사는 실로 화엄종장(華嚴宗匠)이었지만, 스님의 입적을 듣고 바야흐로 극진히 애도하여 그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생략하여 말한다면 “바야흐로 몰치(沒齒)를 기약하여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진교(眞敎)를 홍포(弘布)하여 왔는데, 이제 스님께서 사망하였으니, 내 누구와 함께 친할 것인가”라 하였다. 타종(他宗)에서도 왕사를 존중하였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중화(中華)의 도인(道人) 성총(省聰)과 혜진(慧?) 양대사(兩大師)가 있어 바다를 건너 고려에 와서 왕사의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혜진이 처음 스님을 보고 흔연히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있는 구면(舊面)과 같다면서 2년 쯤 주석하다가 갑자기 병이 생겨나서 스님보다 20일 앞서 입멸하였다. 입멸할 때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선정인(禪定印)을 수인(手印)하고는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비상(非常)함이 아니어서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의지하고 흠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종류가 심히 많았다. 여러 조정(朝廷)에 걸쳐 무릇 하사받은 (결락) 타등(他等)은 번거로움을 피하는 까닭으로 기록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모든 귀신(貴臣)과 성족(盛族), 호상(豪商)과 대고(大賈) 등은 각기 정성을 다하며,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날이 없었다. 속수(俗壽)는 59요, 하납(夏臘)은 48세였다. 이에 상수(上首) 제자인 도생승통(導生僧統)이 있고, 그 이하에 무릇 일천여인(一千餘人)이 함께 뜻을 모아 선사(先師)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눈물을 흘리면서 궐하(闕下)에 엎드려 임금께 주달(奏達)하였다. 그 올린 글에 이르기를, “(결락) 산두사다천(珊兜史多天)에서 공연히 미륵(彌勒)을 애모(哀慕)하는 것이옵니다만 귀부(龜趺)를 보계(寶界)에 새겨 미래에 영원토록 널리 전문(傳聞)케 하기 원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왕사의 유열(遺烈)을 천양하도록 비문을 지으라 하시므로, 신(臣)이 사양을 표하여 이르되, “신은 본성(本性)이 고루할 뿐 아니라, 노쇠(老衰)를 더하였으며, 하물며 조고(操?)를 잡을 용기조차 없음이온 어찌 속사(屬辭)를 사염(寫琰)에 부합할 수 있겠나이까? 원하옵건대 중지(中旨)를 회수(回收)하여 다른 통인(通人)에게 당부하소서”라고 간절히 사양하였다. 다시 제지(制旨)를 내려 이르시기를 “이비련(以碑聯) (결락) 지(之) (결락) 왕사의 비문을 지어 경행(景行)을 선양토록 하되, 더 이상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직서(直書)에 힘쓰라” 하였고, 이미 도유(都兪)에 지시하였으므로 감히 비문을 짓는 일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장(文章)에 질(質)이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작자(作者)의 요구에는 부끄러움이 없지 않다. 도(道)라는 말도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 고승(高僧)의 사전(史傳)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적(行跡)의 사실만을 주워 모아 삼가 명(銘)을 서술하여 이른다.
능인(能仁)이 출현함은 중생(衆生)을 위함인 것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사파(娑婆)에 출현했네.
십이류(十二類) 중생(衆生)들을 모두 다 제도코자
팔만(八萬)과 사천법문(四千法門) 갖가지 연설하다.
때로는 방편법문(方便法門) 유시(有時)엔 진실교리(眞實敎理)
어느땐 편설(偏說)하고 혹시(或時)엔 원설(圓說)하다
서역(西域) 발상(發祥)여 사오년(四五年) 교화(敎化)하고
이 법(法)이 동점(東漸)하여 근역(槿域)에 두루하다. ①
서천(西天)의 이십팔조(二十八祖) 동토(東土)엔 육대조사(六代祖師)
조조(祖祖)가 천양(闡揚)하고 사사(師師)가 제창(提唱)하다
유(有)와 공(空) 주창하여 저마다 국집하고
성(性)과 상(相) 상치(相値)하여 성상(性相)이 적대(敵對)하나
성상(性相)을 초월하면 이도(二道)가 따로 없어
이 어찌 편견(偏見)으로 저마다 옳다 하랴!
이러한 차별견(差別見)을 그 누가 융통(融通)할까?
금산사(金山寺) 왕사(王師)만이 이 일을 감당했네. ②
만행(萬行)을 (결락) (결락) (결락)
숙세(宿世)에 훈습(薰習)하여 생지(生知)의 천재(天才)일새
(결락) (결락) (결락) 취령(鷲嶺)
그 칭송(稱頌) 두루하여 용병(龍?)에 가득했네!
도덕이 숭고하여 왕신(王臣)이 외호(外護)하고
덕망이 고매하여 임금의 스승되다.
그 경지(境地) 높고 높아 엿볼길 전혀 없고
보리수(菩提樹) 잘 길러서 가지에 가지로다. ③
비보(裨補)를 하기 위해 옛터에 절을 짓고
불씨(佛氏)를 장엄하여 유식종(唯識宗) 도량(道場)되었네!
날마다 법의(法衣) 입고 법좌(法座)에 높이 앉아
오묘(奧妙)한 그 진리(眞理)를 사자후(獅子吼) 진동하다.
법문(法門)을 들으려는 사부중(四部衆) 운집(雲集)하고
옷깃을 여미운 이 장터를 이루었네!
도(道) 어찌 멀다 하랴. 평상심(平常心) 그것이며
실천(實踐)만 한다면 이 또한 도(道)인 것을 ④
구경(究竟)의 원묘과(圓妙果)를 이루려 할진대는
반드시 인행(因行)에서 선업(善業)을 닦을지다.
삼라(森羅)의 만상(萬像)들이 모두가 보처(補處)인데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지혜(智慧)가 교결(皎潔)함은 청담(淸潭)의 달과 같고
복덕(福德)이 구족(具足)함은 항하사(恒河沙) 모래같네.
해마다 유식참법(唯識懺法) 이기(二紀)를 계속하여
도솔천(兜率天) 상생(上生)코자 그 일념(一念)밖에 없네. ⑤
법상종(法相宗) 홍포(弘布)코자 광교원(廣敎院) 열어놓고
곳곳에 다니면서 장소(章疏)를 구(求)하여서
제본(諸本)과 교정하여 목판(木板)에 새겼으니
흩어진 꽃송이를 노끈에 꿴 것 같네!
이 법문(法門) 인경(印經)하여 골고루 법시(法施)하니
자비(慈悲)한 진리(眞理) 바람 천하(天下)에 두루 불다
원효(元曉)와 태현대통(太賢大統) 이 나라 불교(佛敎) 위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 땅에 재현(再現)이 아닐런지. ⑥
문장(文章)이 도도하여 운자(韻字)만 떨어지면
정경(情景)을 감상하여 구구(句句)가 성시(成詩)일새
은총(恩寵)을 드리우니 찬란한 그 광채(光彩)여!
벽운시(碧雲詩) 좋다지만 비할 바 전혀 없네
동작(動作)의 느낀 바로 토운(吐韻)이 주옥(珠玉)일새.
작(作)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소명(所名)
수행을 쌓고 쌓아 만증(滿證)을 기약(期約)하다. ⑦
열반전(涅槃前) 흰 무지개 입적(入寂)을 예고했고,
쌍림(雙林)의 사라나무 흰 빛이 나타나다
양지(楊枝)로 양치하고 미륵(彌勒)을 부른 다음
도솔천(兜率天) 정역(淨域)으로 소요(逍遙)히 상생(上生)하다
임금께서 스님에게 보은(報恩)을 위해서
고루(孤陋)한 미신(微臣)에게 찬비(撰碑)를 명(命)하시어
사부중(四部衆) 정성모아 정민(貞珉)에 각자(刻字)하여
위대(偉大)한 그 홍덕(洪德)을 억만세(億萬歲) 전하리다. ⑧
교위(校尉) 신(臣) 이효전(李孝全)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천경(天慶) 원년(元年) 세재신묘(歲在辛卯) 맹하월(孟夏月)
【陰記】
속리사주(俗離寺主)에 금산사(金山寺) 지주(住持)를 겸임한 승통(僧統) 도생(導生)
승통(僧統) 규(窺)
승통(僧統) 동수(同壽)
수좌(首座) 관승(冠僧)
석칭(釋稱)
보원(普元)
우현(右賢)
상▨(尙▨)
▨수(▨壽)
회원(會元)
탄융(誕融)
삼중대사(三重大師) 각피(覺彼)
인고(仁股)
지원(智圓)
도월(道月)
품종(?宗)
공웅(雄)
동명(洞明)
의탄(義誕)
중대사(重大師) 승각(承覺)
▨▨
▨▨
국충(國?)
석목(釋目)
충선(充善)
▨륜(▨倫)
전선(詮善)
준명(俊明)
우승(祐承)
조상(肇相)
진감(眞鑑)
상표(尙表)
충▨(忠▨)
석종(釋宗)
수현(秀賢)
▨▨
심현(甚賢)
식주(識珠)
인상(隣尙)
양변(良辯)
천상(闡祥)
사원(思遠)
이웅(利雄)
선웅(善雄)
증림(證林)
성▨(性▨)
법▨(法▨)
▨▨
심기(甚冀)
보명(寶明)
덕기(德幾)
호령(乎領)
융연(融演)
심종(深宗)
우관(祐冠)
윤성(倫性)
단혜(端慧)
단성(端性)
민계(珉戒)
원▨(元▨)
묘홍(妙洪)
▨승(▨承)
▨감(▨鑑)
동▨(同▨)
방덕(方德)
진▨(?▨)
억경(億景)
충선(?禪)
오법(晤法)
연담(延曇)
휴령(休靈)
탄성(坦性)
신▨(信▨)
약선(約宣)
정감(挺鑑)
현덕(賢德)
국▨(國▨)
▨▨
▨신(▨申)
▨▨
▨▨ 등(等) 160명(名)과
중대사(重大師) 혜기(惠奇)
지웅(志雄) 등 14명은 혜덕왕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학업(學業)을 계승한 스님들
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 대사(大師) 광▨(光▨)
좌가승록(左街僧錄) 대사(大師) 행웅(行雄)
중대사(重大師) 혜종(慧宗)
홍학(弘學)
명진(明眞)
위경(爲鏡)
수명(受明)
▨서(▨舒)
대사(大師) 석지(釋知)
명서(明胥) 등 100여명은 직책(職責)에 따라 법계를 첨가(添加)받은 스님들
중대사(重大師) 품현(?賢)
숙상(夙相)
보정(報正)
경생(景生)
창융(昌融)
조충(祖忠)
대사(大師) 도정(導挺)
구일(舊日)
▨종(▨宗)
▨▨
▨웅(▨雄) 등 1,500여명은 혜덕왕사의 덕을 흠모하여 귀화(歸化)한 스님들
승통(僧統) 승령(勝齡)
수좌(首座) 숭▨(崇▨)
▨상(▨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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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대사(三重大師) 승통(僧統) 우상(祐祥)
홍▨(洪▨)
순진(順眞)
도연(道緣)
석림(釋琳)
진령(眞領)
증상(證相)
총령(聰領)
중대사(重大師) 양▨(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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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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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은 혜덕왕사를 전후(前後)하여 입적(入寂)한 친한 도반(道伴) 스님들
이상(以上)은 왕사문도(王師門徒)들의 개좌직명(開座職名)이니, 조록(雕錄)하여 시행(施行)하는 바이다.
승무랑(承務郞)·상서고(尙書考)·순현(珣賢)·원외랑(員外郞)이며 금어대(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정황선(鄭晃先)이 왕명을 받들어 음기를 쓰다.
천경(天慶) 원년(元年) 세재신묘(歲在辛卯) 맹하월(孟夏月) 일(日)에 비석(碑石)을 세우다.
해석자 이지관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출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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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은 아름다우며 우리는 언제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삶의 여유를 아는 당신이 되시기를.....
즐거운 휴일되시고
환절기 감기조심하세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날 되시고,~ 행운과 행복이 가득 되시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