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로부터의 자유
성수일
올해 3월에 들어서자, 철 이른 꽃소식이 들려왔다. 봄을 알리는 벚꽃, 목련, 개나리 등 봄꽃들이 예년에 비해 2주나 빠르게 핀 것이다. 예년이면 4월에 들어서 피던 꽃들이 올해는 3월 중순에 꽃봉오리를 내더니 하순 들어 만개했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바이오리듬의 난조 결과이다. 내 어릴 적 겪었던 영하 20도 이하의 혹한과 비교하면 요즈음의 겨울은 참 따뜻한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동으로 생태계는 간과할 수 없는 일련의 혼란이 예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기 개화에 따른 여러 이상징후가 보도되었다. 국제 의학저널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개화 시기가 매년 하루 정도씩 빨라지면서 꽃가루 날리는 시점도 30년 전에 비해 약 한 달가량 앞당겨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콧물, 재채기, 결막염 등 꽃가루 알레르기질환도 옛날보다 일찍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과 농가에도 비상이 걸렸다. 꽃가루받이를 유도하는 꿀벌을 구하기 위해 때아닌 벌통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조기 개화에 따른 이른 꽃가루 채집활동으로 벌들의 체력이 소진되어 정작 사과꽃의 꽃가루받이 벌들이 줄어든 때문이란다.
자연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세태도 옛날 같지 않다.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말속에는 허무와 자조가 깔려 있다. 친구들은 우리가 가장 억울하고 불쌍한 세대라고 강변한다. 어려서는 어른들이 무서워 기를 못 폈고 젊어서는 가족부양을 위해 혼신을 바쳐 일했는데 정작 노인이 되고 나니 옛날 어른들이 누렸던 위엄과 권위의 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 노인들은 젊은 세대의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고 복잡한 디지털 정보사회에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구시대적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뿐인가 젊은이들의 무례나 파행에 대해서도 질책이나 훈계의 뒤끝은 수모와 봉변이니 차라리 못 본 척 못 들은 척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그런 무도(無道)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늘 대내외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다. 수억 년에 걸친 여러 지질시대의 생성소멸과 1만여 년으로 추정되는 인류 문명사는 이 피조의 세계가 결코 무상(無常)의 시공간(視空間)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예측도 어렵고 예정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 변화는 인간계의 영역을 벗어난 어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변화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로 인해 초래되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변화에 따르는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이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정녕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재해일 수도 있고 정치적 사회적 대격변일 수도 있다. 우리의 선대들은 이 변화에 맞서 소극적인 순응과 적극적인 적응 전략으로 이에 대처해 왔다. 그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선대들이 그들의 삶을 지켜왔듯 우리의 후손들 역시 그들 특유의 생존 전략으로 어떻게든 살아 나갈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그들이 마주칠 변화와 그 대응에 관여하기에는 시간적 물리적 한계가 있다. 결국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먼 훗날의 일은 그때 살아갈 세대들의 몫이며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것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 세계의 생존방식이고 또한 조물주의 창조 섭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변화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의 늪에서 벗어나 얼마쯤 자유로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때 비로소 일찍 핀 봄꽃들도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편히 감상할 수 있을 것 같고 생경하고 마뜩잖은 세상일에 대해서도 불평이나 질책보다는 이해와 관용의 여유로운 마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옛날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것은 웬일이죠?”라고 말하지 마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전도서 7:10). 변화를 대하는 전도자의 혜안을 떠올려 본다.
성수일_전 수원대학교 자연과학대학 교수. 2015년 《시와소금》으로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 <생명의 이해>, <햇살이 내어주는 길을 따라 걷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