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버트 헬링거 미발간 글모음 제1권 63p>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워크샵에서 인디안 여자의 질문 : 희생자 태도에 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들의 보호구역에서 치료자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식민화 과정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해진 불의입니다. 지금도 우리 민족은 희생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여러 분야에서 마비시킵니다. 우리가 희생자로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면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핑계를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입니다.
우리가 희생자로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그들에게 그때 우리들에게 무엇이 가해졌는가를 상기시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불의가 가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우리는 희생자 역할을 고집합니다. 그들의 죄책감은 우리들의 청구권을 지켜주는 담보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우리 민족을 마비시킵니다. 우리 구역에서 가족 세우기를 하면서 저는 자문합니다. 우리 조상님과 그분들이 당한 운명에 존경심을 가지면서도 어떻게 우리는 희생자 역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더 이상 희생자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조상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버트 헬링거 :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기억과 망각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좋지 않은 것을 경험한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들은 항상 그 경험을 생각하며 기억합니다. 기억을 통해 좋지 않은 것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들은 기억과 다른 사람을 향한 요구를 연결시킵니다. 좋지 않은 것을 기억하여 상기함으로 그 요구를 항상 다시 새롭게 관철하려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보상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나중에 보상을 원합니다. 고통을 받은 민족은 그 고통을 준 민족으로부터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보상받고 싶은 욕구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통의 기억을 한없이 지속시킵니다.
보상을 요구하고 보상이 이루어질 기대는 개인 간의 관계를 위해서는 정당하고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와 기대는 같은 방법으로 민족 간의 관계로 전용 되어지지 않습니다. 과거에 당한 불의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기대와 요구는 많은 전쟁을 유발시키는 힘입니다. 불의에 대한 복수, 고통에 대한 보상을 위한 전쟁은 당연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전쟁 수행을 위해 힘을 기릅니다.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으니 쉽게 희생자 삶을 살면서 미래의 보상을 희망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가족의 친구인 한 여자분은 소녀 때 유대인 집단수용소 다하우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16살이었습니다. 그녀와 같이 유대인 집단수용소에서 구출된 다른 여자분은 자신의 불임의 원인이 집단수용소 생활이라고 하면서 보상을 위해 소송했습니다. 이 요구와 기대를 관철하기 위해 그녀는 30년 내지 40년에 걸친 법정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자 이제 이 투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녀의 실제의 삶은 그녀 곁을 지나 흘렀습니다. 지난 불의에의 기억은 그녀에게 가능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친구인 여자는 아주 다르게 살았습니다. 구출될 때 한 미군 장교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체험한 것을 뒤로 두어라. 잊어라, 그리고 앞을 보아라.” 그녀는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그녀는 의사로서 대학교수가 되었고 성공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했습니다. 기억을 뒤로 두었기에 삶이 그녀에게 선물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한 노인도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유대인 집단수용소에서 구출될 때 한 장교가 말했습니다. “가슴에 증오를 품고는 살 수 없습니다. 가슴에 증오를 품고 사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노인도 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겼기에 기억을 뒤로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칠레에서 개최된 워크샵에서 한 부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의 오빠는 30년 전 독재하에서 체포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저는 그녀에게 당신은 잊어야만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저는 그녀와 그녀 오빠의 대역을 세워서 보도록 했습니다. 그녀의 대역은 돌과 같이 굳어졌으며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녀 곁의 오빠도 편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빠 곁에 그와 함께 죽은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놀랍게도 그는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의도 생기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평온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의 운명이 가해자의 수중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해자들은 우리나 한 민족을 없앨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해자들도 생사를 결정하는 더 큰 힘에 봉사합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대한 발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통찰을 얻어 운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평화가 옵니다.
오늘 아침 식사 중에 저는 한 분과 미국과 원주민의 상황에 관하여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원주민에게 아주 큰 불의가 가해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미국을 보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원주민과 정복자만 보고 그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만 대비시킨다면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을 단지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겁니다.
자 이제 미국을 보게 되면, 저는 미국이 박해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호와 새 고향을 제공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러한 면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쪽의 지배적인 다수와 원주민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만 축소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도 더 큰 힘이 작용했습니다. 이 점을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기억과 망각의 문제로 되돌아갑시다. 원주민에게 치유를 가져오는 기억은 고통받은 불의의 기억이 아니라 그 시대 이전의 조상에 대한 회상입니다. 가해자만 볼 것이 아니라 삶이 잘 되고 좋았던 시절의 조상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상들로부터 힘을 얻어 그 힘으로 현재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상들에게 가해진 불의를 기억하는 것보다 조상을 더 존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들은 옛 힘과 존엄을 되찾아 이 힘과 존엄으로 이 나라를 위해 큰 것과 가치 있는 것을 이루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이 나라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치유를 가져오는 움직임이겠습니다.
평화 <버트 헬링거 미발간 글모음 제1권 67p>
평화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평화란 무엇입니까? 전에 혼란스럽던 것이 조용하게 되면 평화입니다. 서로 대적하던 것들이 화해하며, 나누어졌던 것들이 합쳐져 같이 흐르면 평화입니다.
평화는 각자의 영혼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선과 악으로 구별하는 것, 즉 선과 악으로 대적하는 것이 같은 차원으로 와서, 거기에서 선과 악이 함께 작용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가치가 될 때 평화가 시작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선하게 여기면, 우리가 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우리는 제외합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어떤 것을 악하게 여기거나, 또는 나쁘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제외하여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감추고 억압하여, 우리 안의 그것을 싸워 없애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같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면 우리는 우리 안의 그것은 놓아두고 상대의 그것을 싸워 없애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구별을 하는 마음의 기관을 따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구별에 넘겨짐을 느낍니다. 이 기관이 양심입니다. 양심이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합니다. 이 구별은 그룹 내에서는 중요합니다.
누가 그룹에 속해도 되는가, 속하면 안 되는가를 구별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 내에서는 예를 들면 우리를 우리 가족에게 연결시켜주는 것은 선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 가족으로부터 때어놓는 것은 악하게 또는 나쁘게 경험됩니다. 이 안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이 정당하고 중요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우리 가족 내에서 알고 있는 선과 악의 구별을 전 세계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우리가 뜻하는 선한 것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가족 내에서 우리가 악으로 간주하는 것들을 싸워 이기려고 하거나 더 나아가 전멸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신도 우리가 똑같이 선과 악을 구별한다고 하여 우리가 뜻하는 선한 사람에게는 천당을 약속하고 우리가 뜻하는 나쁜 사람은 벌하여 영원히 지옥에 보낸다는 신을 우리는 만듭니다. 그리하여 선과 악의 구별을 신의 이름으로 하게 되어, 신의 이름으로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며 저주합니다.
분리되어 서로 화해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을 화해케 하는 평화로 무엇이 이끕니까? 평화의 전제는, 우리가 선과 악의 구별을 떠나, 성장하여, 선과 악을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인정할 때입니다.
우선 우리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그리고 우리가 선하다는 또는 성스럽다는 것을 바라봅시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악하여 경멸할 만하다고, 혹은 위험하며 충동적인 것을 정신과 선에 반대하는 것으로 바라본 다음, 한 손에 소위 선하다는 것을 놓고 다른 손에는 소위 악하다는 것을 놓아서 양손의 무게를 자세히 비교해 봅시다.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소위 선하다는 것이 무겁습니까? 아니면 소위 악하다는 것입니까? 소위 악하다는 것이 훨씬 무겁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힘을 가집니다. 동시에 우리는 소위 선이 악이 없으면 힘이 없고 제한되고 좁다는 것을 압니다.
두 가지의 예를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부모 중의 한 분을 좋은 분이라고 존경하고 다른 분을 우리에게 충분히 좋게 보이지 않는다거나 또는 나쁜 사람이라 여겨 거절하면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우리가 두 분의 부모님을 부모인 그대로 우리에게 옳고 맞는 부모님으로 받아들여야 우리는 자녀로서 온전한 힘을 얻습니다.
결혼했던 남녀가, 배우자가 좋지 않다고 하면서 헤어지고 옛 배우자보다 더 좋다는 상대를 찾아 다시 결혼한다고 하면, 그들은 첫째 배우자를 경멸하며 두 번째 배우자를 첫째 위에 놓게 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두 번째 결혼생활을 힘들게 합니다. 이에 반해 첫째 배우자가 두 사람에 의해 자신들과 똑같이 귀함과 존경을 받을 때에 새로운 관계는 확고함과 힘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