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깨달음>
타임머신을 타듯이 붓다의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1,000년 이상 전해져온 전통적인 고행과 자신만이 터득한 수행을 마치고 ‘수자타’라는
착한 처녀에게 우유죽을 공양 받고, 5비구에게 4성제를 설하시는 붓다의 옆에 있다고 가정 합니다.
다행히 붓다의 상대인 다섯 비구는 한때는 동료 수행자였기에 말 귀를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들은
고행주의자였고 그 고행은 당시로 서는 모든 수행자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단계라고 여겼을 전통적인
수행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행의 방법도 대체적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못을 막은 판자에 가부좌로 앉아 있다던가, 물속에서 일생을 산다던가, 종일 태양을 바라보아 장님이 되는
수행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식을 하는 정도의 수행은 그나마 고상한 고행법에 속했을 것입니다.
붓다는 그런 극단적인 고행이 무의미하다고 반발을 한 것입니다. 고행을 포기하는 수행을 택한다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행을 통해서도 얻어지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기 때문 입니다.
경전에서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는 고행으로도 가능한 단계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고행은
욕심을 날려버리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고행의 성과는 아마 육체가
깨달음에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수행자에게 명확하게 일러준다는 사실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욕망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물질에서는 해방된 수행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한
존경과 신뢰로 새로운 신망을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당시 수행자들이 얻은 최고의
경지였습니다.
당시의 최고 권력층인 바라문은 동물을 죽여 제단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고, 계급주의를 내세워 하위
계층에 대한 노골적 차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바라문의 이런 행태는 베다시대부터 1,000여년
동안 이어졌고, 산업은 아직 농경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붓다와 신흥수행자들은 이런 바라문들의 행태를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이러한 비판이 당연한 것은
바라문의 행태는 비록 전통적이었지만 미개하고, 극심한 인간 차별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바라문(br?hma?a)들은 사제司祭인 자신들은 머리에서 태어난다고 하고, 다음 계급인 크샤트리아
(kshatriya)인 왕족은 옆구리에서 태어나며〔붓다께 서도 옆구리에서 태어나셨다고 전해지는 이유도
고타마 싯다르타가 왕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계급인 바이샤(vai?ya)는 평민으로 허벅지에서
태어나며, 최하층인 수드라sudra는 노예계급으로 발가락 사이에서 태어 난다고 사람들에게 주입을
시켰습니다.
서두에 밝혔듯이 이런 계급 구성은 아리안 족이 인도를 장악하며, 자신들은 바라문에 속하고 대다수 인도
토착민은 피지배 계급으로 전락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아리안 족은
이 못된 사상을 베다에 접목시켜 붓다 시대까지 끌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붓다등 신흥 사상가들이 바라문과 계급제도를 비난하는 일은 대단히 용기있고 혁신적인 ‘사건’
이었던 것입니다. 일반 민중들은 너무 오래전부터 전래된 일이기에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더욱 이
힌두의 업과 윤회라는 틀이 그들을 저항하지 못할 자포자기로 몰아버렸으나, 붓다 등 현명하고 새로운
사상들을 섭렵한 사문들에게 바라문들은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마침내 농경시대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상업과 교역이 발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상업과 교역으로
경제적 주체로 커가는 이들은, 자신들을 하층계급으로 바라보는 바라문을 공경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맞는 사상을 펴나가는 신흥 사문들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라문에게
해오던 보시도 붓다 등 사문에게 행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연유로 붓다와 360여
신흥 사상가들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의 중심지가 바로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곧바로
찾아간 빔비사라 왕이 다스리던 마가다국의 왕사성입니다.
그런 큰 변화 속에 붓다만의 반 고행주의의 성공은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