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 저명인사들의 긍정적 평가(75인)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평가를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김대중 전 대통령은 98년 대통령 취임 이후 5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사형집행을 한 일이 없으며 몇 사람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위의 사진은 군정에 의하여 사형판결을 받을 당시의 모습
"인류역사 이래 사람이 있는 곳에 인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있는 곳에 반드시 인권의 침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권의 침해가 있는 곳에는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투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98년 4월 16일, 세계인권선언 50주년 메시지로 연설했던 내용 중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긍정적인 평가 자료들을 수집하여 글로 올린 이유와 방법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긍정적인 평가 자료들을 수집하여 묶어 이렇게 글로 올리게 된 계기는 박정희, 이승만, 전두환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세력들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헌신하여 국내외적으로 이미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을 빨갱이로 매도하면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과 같은 김씨에다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지역적 편견으로 그를 악평하는 세력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 역시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조사하고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더 가까이 알아서 많이 알고 싶었기 때문에 이 글을 올리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올렸기 때문에 자칫하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박정희, 이승만 대통령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며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무조건 빨갱이라며 폄하하려는 극단적인 우익 세력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올리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서로 지지하는 대통령에 대해 빨갱이, 친일파, 독재자로 매도하는 사회의 풍토를 바로 잡기 위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앞으로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을 뽑는 데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 즉 햇볕정책이 현재 북한과의 긴장이 조성된 상태에서 무조건 결과적으로 폄하를 받는 경우도 보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각계 각층의 전문가들의 평가와 관련된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가 된 것이 별로 없는 것에 자극을 받아 이렇게 올리게 되었다. 본 글에서 인용될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관련해서는 아주 정확한 출처를 통해 보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언급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음을 앞서 밝히는 바이며, 이를 통해 보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연구가 온라인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부정적인 편견을 가진 자들이 올바른 사고를 통해 올바른 길로 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렇게 올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교, 정책의 다방면으로 능숙하다." - 2006년 7월 18일에 작성된 주한 미대사관이 작성한 외교전문의 내용 중
"김대중 대통령은 빠른 경제 회복과 경제개혁 추진 과정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다." - 2000년 5월 23일 IMF의 한 관계자가 발표한 내용 중
"김대중 대통령은 아시아의 영웅,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 한국을 12대 경제국가로 올려놓은 뛰어난 지도자이다." - 2007년 9월 17일부터 29일까지 총 12박 13일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ABC 방송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자료화면으로 특집방영한 것의 내용 중
"김 전 대통령이 반세기가 넘는 정치 인생 가운데 수차례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음에도 시련을 극복하고 '민주화의 투사'로 불리게 됐다." -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일본에서 발행되는 전국지로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언론인 <Sankei> 신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논평한 내용 중
"한국의 대표적 정치지도자였던 김 전 대통령은 한·일 관계 개선에 기여하였고 햇볕정책을 내세워 북한 개방을 위해 대화한 대통령이다." -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일본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인 <Asahi> 신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논평한 내용 중
"김 전 대통령은 '좌파들의 첫 대통령'이다. 1997년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첫 번째 평화적 정권 교체'이다." -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주한 미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의 내용 중
"전 국민이 외환위기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민주화운동 지도자로 뛰어난 비전과 리더십을 갖춘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한국 국민들에게 행운이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자 뉴욕에서 발간되는 미국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인 <The New York Times>에서 논평한 내용 중
"김 대통령은 경제ㆍ정치ㆍ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77세의 김대중 씨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지도자의 업적을 이뤘다." - 2009년 2월 15일 '김 대통령의 업적'이란 사설과 1월 말에 세계적인 경제전문 통신인 미국의 <Bloombeg>가 논평한 내용 중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기 이전에 군부의 사형선고와 암살시도에서 살아남은 반체제주의자였으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 그의 라이벌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중상모략을 받았던 김대중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2000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첫 정상회담을 성립시켰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평화조약이 없었기 때문에 형식상 휴전인 상황이었고, 그 회담에서 분단된 한반도의 전례없는 화해를 이끌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으로 남북한은 도로와 철도를 개통하였고 합동 산업단지를 건설하였다. 200만명의 남한 사람들은 북한 금강산 관광을 하였고, 전쟁으로 인해 흩어진 이산가족들의 눈물의 상봉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뉴욕에서 발간되는 미국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인 <The New York Times>에서 논평한 내용 중
"고 김 전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98~2002년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1천400만달러로 가장 많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경상흑자에 따른 외화 유입 증가로 외환보유액도 많이 늘어났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말 204억600만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말에는 1천214억1천300만달러로 늘어나면서 5년간 1천10억700만달러 증가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물가도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로 노무현 정부 때의 3.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 부도 등의 여파로 경제성장률과 고용률은 이전 정권들보다 크게 낮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연평균 4.5%로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높았지만, 전두환 정부(8.7%), 노태우 정부(8.4%), 김영삼 정부(7.1%) 등에 비해서는 낮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성장률이 -6.9%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1998년 이후 성장률은 1999년 9.5%, 2000년 8.5%, 2001년 4.0%, 2002년 7.2% 등으로 4년 평균 7.3%였다. 연평균 고용률은 58.1%로 전두환 정부의 47.2%보다 높았을 뿐 김영삼 정부(60.3%), 노무현 정부(60.0%), 노태우 정부(58.4%)보다는 부진했다. 하지만 연간 고용률 추이를 보면 1998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56.4%까지 떨어진 후 2000년 58.5%, 2001년 59.0%, 2002년 60.0%로 매년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09년 8월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한국은행과 통계층의 자료를 토대로 올린 연합뉴스 기사의 내용 중
"10년 전 한국의 외환위기는 겉으로만 보면 국제통화기금(IMF)과 서방 선진국들의 자금 지원에 의해 극복됐다. DJ 정부는 IMF 권고에 따라 금융·기업·공공·노동 등 4대 부문의 개혁을 시간표를 짜놓고 전투처럼 밀어붙였다. ‘주어진 개혁’이니 ‘위장된 축복’이니 하는 소리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 극복의 이면엔 대통령의 리더십과 그 리더십을 믿고 따른 국민의 단합이 있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고비마다 직접 나섰다. 당선된 뒤 사흘 만에 데이비드 립튼 미국 재무부 차관을 만나 ‘면접 시험’까지 치렀다. 새 정부의 개혁 의지를 못 미더워하던 미국에 IMF 협약 이상의 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DJ가 약속한 ‘IMF 플러스’엔 정리해고도 들어 있었다. 정리해고는 DJ의 정치적 기반인 노동계가 결사 반대해온 사안이었다. DJ도 끝내 미루고 싶었던 사안이기도 했다. DJ가 이를 양보하면서 면접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다. 필요할 땐 직접 나서 진솔하게 국민을 설득했다. 국민과의 대화에서 “금고가 비었다”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개혁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재벌 개혁이 미적거리자 5대 재벌 총수를 직접 만나 압박하기도 했다. 위기 극복의 핵심은 인사였다. 그는 ‘코드 인사’를 줄이는 대신 꼭 필요한 자리엔 역량 있는 사람을 발탁했다. 이헌재 당시 비상경제대책위 기획단장을 금융감독위원장에 앉힌 것이 대표적이다.이 전 금감위원장은 대통령선거 당시 적진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진영을 도왔던 전력이 있었지만 따지지 않았다. 별다른 인연이 없던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을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이런 경제부처 인사는 당시 공동 여당인 자민련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다지만, DJ가 위기를 극복할 역량을 우선했던 것만은 틀림없다.‘내 사람’이라고 감싸고 돌지도 않았다. 정부 출범 석 달 만에 김태동 경제수석과 강봉균 정책기획수석을 맞바꾼 것도 그런 사례다. 경제부처와 손발이 맞지 않아 잡음이 계속되던 김 수석을 후선으로 물린 것이었다. 김 수석은 ‘DJ 노믹스’를 세우는 데 깊숙이 간여한 학자였지만 인연에 연연하지 않았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팀워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대통령이 교통정리를 해준 것이다. 경제부총리를 없앴지만 ‘컨트롤 타워 부재’에 따른 혼선은 없었다. DJ가 부처 간 역할을 명확히 한 데다, 이규성 재경부 장관이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다. 과거 경제부총리가 주재했던 경제대책조정회의는 자신이 직접 주재하며 내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에 따른 국민의 적극 호응이 결정적이었다. 장롱 속에 모셔둔 돌반지·금가락지까지 들고 나온 금모으기 운동은 그 상징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노동계가 재계·정부와 함께 모여 노사정위원회 활동을 시작했고, 금기 사안이었던 정리해고 법제화를 수용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DJ는 취임 후 1년 반 만인 1999년 8월 15일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할 수 있었다. 대우그룹 문제 등 부실은 산재했지만, 환율(1207원)·콜금리(4.67%)·외환보유액(647억 달러) 등 경제지표는 정상 궤도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 2008년 10월 25일 중앙일보 경제 부문에 '경제 고비마다 직접 뛴 DJ'라는 제목으로 이상렬 기자가 쓴 사설의 내용 중
2012년 5월 1일 매일경제가 역대 정부 '경제업적지수'를 분석하고 도표로 정리한 모습
"정부별로 집권기간 중 `경제업적지수` 평균을 분석한 결과 김대중 정부가 82로 가장 높은 지수를 기록했다. 노무현 정부가 68.9, 이명박 정부가 지난 4년 평균 44.1을 기록했다. 대통령의 경제업적지수는 저성장, 고물가, 대량 실업 등이 발생하면 급락한다. 김대중 정부가 가장 높은 지수를 받은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밑바닥부터 시작해 평균 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명박 정부는 평균 실업률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소비자물가에서 많은 점수를 잃었다. 물가상승률은 이명박(3.6%), 김대중(3.5%), 노무현(2.9%) 정부 순이었다." - 2012년 5월 1일 매일경제가 역대 정부 '경제업적지수'를 분석한 결과
2009년 12월 19일 미국 시사주간 <Newsweek>가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잊혀지지 않을 정계, 재계, 연예계, 학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전 세계 저명인사 36인'을 발표하여 선정한 내용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군부 독재에 항거하고 망명과 투옥, 납치, 암살 위협 등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야권 지도자였다. 또 김 전 대통령은 재임시 남북 화해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미국 시사주간 <Newsweek>,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로 미국의 유력지 <Washington Post>의 자매지이다ㅣ2009년 12월 19일 <Newsweek>가 선정한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잊혀지지 않을 정계, 재계, 연예계, 학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전 세계 저명인사 36인」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 <Newsweek> 인터넷판이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 11인'을 발표한 명단
"김 전 대통령은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이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 미국 시사주간 <Newsweek>,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로 미국의 유력지 <Washington Post>의 자매지이다ㅣ2009년 9월 23일자로 <Newsweek>가 선정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 11인」의 내용 중
1999년 4월 28일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Asiaweek>가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을 발표한 명단이 매일경제 1999년 5월 20일자 신문 7면에 실린 기사의 모습
1998년 5월 29일 미국의 주간경제지 <Businessweek>가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을 발표하여 선정한 내용을 매일경제 1998년 6월 20일자 신문 9면에 실은 기사의 모습
<평가 목차>
국내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18인)
세계 석학들의 평가(15인)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평가(30인)
세계 각국 지도자들을 보좌하는 참모들의 평가(12인)
총 75인
<국내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18인)>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대중 후보가 71년 선거에서 ‘대중경제’를 들고 나왔지만, 나는 김대중 씨도 학습능력과 경영능력이 탁월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때 대통령이 됐다면 크게 봐서 수출지향적인 경제발전전략을 끌고 나갔으리라 본다." - 백낙청, 브라운대학교 영문학 학사 및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와 동 대학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 시민방송 이사장을 지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교수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시민방송RTV 명예 이사장으로 있다. 그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재직 중이던 1974년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서명했다가 교수직에서 파면되는 등 박 정권과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ㅣ2010년 1월 14일 <시대정신>에서 마련한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국민통합적 인식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보수를 대표하는 학자인 안병직과 진보를 대표하여 특별대담 자리에서 나눴던 내용 중
한종우, 미국 시러큐스대학 맥스웰스쿨 정치학과 교수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하셨고,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시고, 북한과의 교류를 탄탄대로에 올려놓으셨다. 어서 건강을 회복하셔서 더 많은 경륜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한종우, 미국 시러큐스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北 김책공대-시러큐스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뉴욕 라디오코리아를 진행한다. 현재 미국 시러큐스대학 맥스웰스쿨 정치학과 교수 겸 '중부 뉴욕 한국인학교' 교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6일 비서실이 공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과 건강위기에 대해 건강회복을 기원하는 말을 했다고 밝힌 내용 중
강원택 교수,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평화적 정권교체가 한국 사회의 전 분야에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 왔기 때문에 그 자체로 큰 업적이다. 민주화세력의 승리, 호남의 소외감 해소 등으로 국민통합의 측면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외환위기 극복도 대표적 치적이다. 나라의 곳간이 빈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 당선 사흘 만에 데이비드 립튼 미국 재무부차관을 만나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금융, 기업, 공공, 노동 등 4대 부문 개혁을 밀어붙였다. 국민들도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는 등 국가적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여 2년 만에 IMF 외환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외환위기 극복의 성공적 모델로 한국을 꼽았고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은 한국 정부와 국민의 노력을 '영웅적'이라고 평한 바 있다. 무엇보다 강렬한 상징은 역시 6 15 남북정상회담이다. 그가 2000년 6월15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고 이를 통해 남북화해와 한반도 긴장완화에 이바지했다. 대북포용정책은 기존 패러다임을 넘어선,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대북정책으로 한반도 탈냉전화에 기여했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특히 그 시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추진했던 금강산 관광사업, 남북당국 간 합의로 이루어진 개성공단 등도 경제적 접근을 통해 상호불신과 적대관계 청산에 기여했다."- 강원택, 서울대학교 지리학 학사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런던정치경제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전임강사와 조교수, 통일사회복지정책 대학원 통일정책학과 주임교수와 안보정책학과 주임교수, 정치외교학과 학과장과 사회과학대학 부학장을 지냈고 미국 듀크대학교 방문교수와 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정당학회 회장, 현대경제사회연구원 주임연구원,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을 지냈다. 현재 동아시아연구원 시민정치패널 소장, 경향신문 정동칼럼 필진, 미래기획위원회 위원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한국일보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 특집으로 실은 기사의 내용 중
문정인,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제적 비중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한국이 아니라 전세계가 큰 지도자를 잃었다."- 문정인, 연세대학교 철학 학사, 메릴랜드대학교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켄터키대학교 정치과 조교수, 재미한국인 정치학회 이사와 사무총장, 한국정치학회 국제위원장, 미국 국제정치학회 이사와 부회장,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사회통합위원회 위원, 제주특별자치도 국제고문단으로 있다ㅣ2009년 8월 28일 한겨레에 이태희 기자가 기사로 밝힌 내용 중
이내영,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DJ 정권은 최초의 개혁정권이다.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소외계층, 서민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주력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복지문제는 유럽처럼 생산성이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일방적 개념에 머물렀다. 복지증진을 경제발전, 경쟁력 향상과 동시에 추구, 과거와 차별화한 정책을 보여줬다." - 이내영,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석사, 위스콘신대학교매디슨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객원연구원과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메디슨캠퍼스 글로벌연구프로그램 연구원, 사회과학원과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비상임 전문위원, 경희대학교 아태국제대학원 교수와 원장, 고려대학교 BK21 동아시아 교육·연구 사업단 총무간사, 동아시아연구원 정치사회여론조사센터 소장, 대통령 인수위원회 정치개혁실 자문위원,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 소장, 분진학원 강원관광대학 교육부 관선이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과장과 예결산자문위원회 위원,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객원연구우너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한국일보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 특집으로 실은 기사의 내용 중
김성주,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전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서남쪽 끝 한 작은 섬에서 농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질곡과 부침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보냈다. 고인의 삶은 우리 현대사 그 자체이며 민주주의 발전사와도 궤적을 같이한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족화해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고 온몸으로 투쟁해 이를 쟁취한 고인의 ‘행동하는 양심’은 이 시대의 표상이며 귀감이 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김 전 대통령이 살다간 정치적 토양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호남과 영남, 친북과 반북,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등으로 균열된 우리 사회의 멍에가 항상 고인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고인은 지역주의와 색깔론의 최대의 피해자였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한 김대중 정부의 탄생은 하나의 변혁이었으며 우리 헌정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IMF관리체제 하에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고인은 대통령직에 올랐다.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서 고인은 국가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국난극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다. 그 결과 2년 만에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국민화합을 위해 용서와 화해의 정치를 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지역균열주의와 이념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재임기간 내내 부단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만이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는 미래’라는 신념 하에서 냉전 구조와 민족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 김 전 대통령의 집념은 대단했다. 남북한 관계 개선을 넘어 양 정상의 만남은 이의 결정체였으며 우리 민족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평생을 소수파로, 박해의 상징으로 살아온 고인을 추모하면서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 평화적 남북관계에 대한 신념을 계승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국민화합과 민족화해로 승화시켜야 한다." - 김성주,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출판이사와 연구이사, 국무총리실 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부 학장,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ㅣ2009년 8월 21일 세계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이정희,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제37대 한국정치학회 회장
"고인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 반열에 선 지도자였고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 이정희,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와 미주리주립대학교대학원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엔한국협회 사무총장, 이집트 카이로대학교 정치학과 아시아연구소 초빙교수, 정무장관실 정책자문위원, 일본 쯔꾸바대학교 교환교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치개혁위원회 위원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치개혁위원회 위원장,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구획정위원회 위원, 미국 남오레곤주립대학교 초빙교수, 교육인적자원부 주요업무평가위원회 위원, 한국세계지역학회 회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카톨릭사회과학연구회 회장이자 전국가톨릭평신도협의회 국제협력분과위원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제37대 한국정치학회 회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한국일보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 특집으로 실은 기사의 내용 중
오화석, 글로벌경영전략연구원 원장이자 인도경제연구소 소장
"김대중 대통령은 무엇보다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잘 극복했다. 나름대로 철저한 구조조정 결과 기업 투명성ㆍ경쟁력은 외환위기 전에 비해 훨씬 더 강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남북 화해와 민주주의 터전을 닦은 것도 김대중 정부의 중요한 업적으로 얘기된다. 대북 송금문제 등으로 햇볕정책이 공격받고 있지만 현재 북핵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간 육로 가 트이는 등 한반도에서 94년 같은 위기감과 대결국면이 조성되지 않는 점도 햇볕정책의 공로라는 지적이 높다. 인터넷과 정보기술(IT) 등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업적을 이뤘으며,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규제완화 등으로 큰 진전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화석,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 학사와 동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과 석사,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일보 기자, 매일경제 기자와 차장, 순회특파원을 거쳐 네루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다. 현재 글로벌경영전략연구원 원장이자 인도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다ㅣ2003년 2월 21일 매일경제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김삼웅, 제7대 독립기념관 관장이자 전 성균관대학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한국현대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인이나 지역ㆍ계층간의 호오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족적을 남긴 역사적 인물이다. 그를 빼놓고는 한국현대사 특히 정치사는 구성되기 어렵다. 적어도 197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40여년 동안 그의 존재는 정치사에서 적어도 동심원(同心圓)의 한 축을 이루었다. 엄혹했던 독재 시절, 그는 민주화를 이끌었고, 한국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달성했다."- 김삼웅,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석사 및 하버드대학교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을 수료했으며, 20대 초반에 <사상계> 신인논문상에 입상하였다. 민주전선 편집장, 1975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거쳐 신민당보 <민주전선>의 편집장을 지냈다. 1980년 김대중과 함께 20여 년간 반독재 야당언론인으로 싸우다가 신군부 세력에 의해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다. 민주당 홍보위 위원장과 아태평화재단 기획조정실 실장, 아태평화포럼 편집위원장, 서울신문 주필 상무이사, 그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독립기념관 이사, 백범 학술원 연구위원,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부위원장, 제7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했으며, 성균관대학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정치문화를 가르쳤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역임했고 대한출판문화협회장상을 받았다. 현재 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로 있으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하여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전을 집필하였다ㅣ그의 저서 <김대중 평전>의 내용 중
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전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연구교수
"김대중 정부 시절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경제 환경에 대응해 대외적인 안정에 신경을 쓰면서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고금리 여파로 물가도 비교적 안정됐다. 외환위기 이후 개방을 확대한 여파로 경기 변동성이 커지자 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서 성장 잠재력이 줄어들고 고용이 감소한 측면이 있다." - 윤덕룡, 독킬 킬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국제거시금융실장, 기획재정부 국장급 장관자문관, 한국태평양 경제위원회 사무국장, APEC 교육재단 사무총장,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투자공사 운영위원이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G20연구단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20일 연합뉴스의 뉴스 내용 중
허찬국,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자 경제연구본부 본부장
"외환위기로 혹독한 감원과 구조조정으로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국민이 이를 감내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한 데 모을 수 있도록 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기업과 은행이 줄도산하고 순식간에 15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재앙'이 덮쳤는데도 사회적인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조기에 수습한 것은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설득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이 밖에 기업 재무구조, 고용 유연성, 공공부문 개혁 등 우리 경제의 구조를 개선한 점도 김 전 대통령이 거둔 큰 성과이다." - 허찬국, 캘리포니아대학교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지급준비은행 조사부 연구위원, 연방지급준비제도 이사회 국제부 연구위원, 아주대학교 경영대학 겸임교수를 지냈다. 현재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및 경제연구본부 본부장과 재정경제부 정책금융심의회 위원이자 예금보험공사 자문위원으로 있다ㅣ2009년 8월 20일 연합뉴스의 뉴스 내용 중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 본부장
"김대중 대통령은 IT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해 IMF 졸업 이후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 외신들이 한국을 `IMF 모범생'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이다." - 유병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국경제학회 경제교육위원회 위원, 한국생산성학회 회장, 민주평통자문회의 경제과학위원회 상임위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방문연구원, 국민경제자문회의 전문위원,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전략본부 본부장이자 경제연구본부 본부장과 전무로 있다ㅣ2009년 8월 20일 연합뉴스의 뉴스 내용 중
황인성, 삼성경제연구소 경제동향실 수석연구원
"김 전 대통령은 정보기술(IT)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8개월 만에 말끔히 갚을 수 있었다. 중화학 공업과 IT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성, 고환율과 선진국 경기 호조라는 유리한 여건을 십분 활용한 게 IMF 조기졸업의 비결이다. 김 전 대통령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서 큰 버팀목이 됐다. 한국 경제에 대한 각종 위기설이 불거질 때마다 막대한 외환보유액은 루머를 일축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당시에 외환보유액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지난해 금융위기 때 다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최악의 국면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 황인성,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 및 세계경제전망, 거시경제정책 등에 관한 연구를 폭넓게 수행하고 있다.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경제동향실 수석연구원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한국일보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 특집으로 실은 기사의 내용 중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2001년 11월 한국에도 국가인권기구가 설립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은 오랜 민주화 운동이 거둔 중요한 결실이었다. 비록 이명박 정부 들어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긴 하였지만, 그동안의 활약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국가와 정부는 주로 인권가해자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국가가 나서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유엔 차원의 국제적 인권규준의 국내적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왔다. 인권의 지평을 넓히고, 구체적인 인권피해자들을 찾아 실효성 있는 구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과정은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정부와 인권단체의 이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가장 큰 쟁점은 국가인권기구의 위상 문제였다. 법무부는 법무부 소속의 특수법인을 고집했고, 인권단체는 입법·사법·행정 등 어디에도 속하는 않는 독립기구로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기구의 감시대상이 되어야 할 법무부는 끈질겼다. 인권단체도 굽히지 않았다. 법무부와 인권단체의 싸움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상임위원 수를 몇 명으로 하고, 어떤 직급으로 할지, 인권기구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권한은 어떻게 할지가 모두 쟁점이었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 계속될 때도 김대중 대통령은 예의 신중한 태도로 일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새로 출범하는 국가인권기구가 유엔 등 국제사회와 인권단체가 인정할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만 강조했다. 그리곤 법무부와 인권단체의 견해 차이가 좁혀지길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는 데 능했다. 인권단체도 숱한 인권당사자들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의 결과 인권단체들도 80점쯤은 된다고 평가하는 새로운 국가인권기구가 출범할 수 있었다.1997년 12월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많은 사람을 설레게 했다. 인권단체들은 양심수 석방, 국가인권기구 설립은 물론, 국가보안법 폐지, 한총련 등 수배자 문제 해결, 전교조, 민주노총의 합법화, 과거 청산, 사회보장 제도의 실질화 등 사회권의 전면적 보장과 확대를 요구했다. 전자주민카드 추진 포기와 경찰, 검찰, 안기부, 교정기관의 개혁도 빠질 수 없는 개혁과제였다. 인권의 진전을 위해 챙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다려야 했다.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청산'처럼 단박에 해결된 숙제는 아무 것도 없었다. 김대중 정부는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고, 이해 당사자들의 갈등을 조정하고 가급적 합의를 도출하려고 했다.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 개혁의 과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과거청산작업도 비슷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역할을 수행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2000년 10월 출범했다. 의문사위는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등의 진상을 밝혀냈다. 의문사위는 노무현 정부에서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 이어졌다. 하지만 의문사위 설립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유족들은 여의도 국회 앞에서 무려 422일이나 농성을 진행했어야 했다. 쉬운 일은 없었다.길고 지루한 과정이 필요했지만, 인권분야에서의 확실한 변화가 하나둘씩 가시화되었다. 경찰은 어느 날 갑자기 최루탄 사용을 중단했다. 이전에도 '무석무탄(無石無彈)'이니 '무탄무석(無彈無石)'이니 하는 논쟁이 오갔지만, 1987년 이한열 열사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최루탄 사용이 계속되던 터였다. 비록 2002년 서울지검 고문치사 사건으로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수사기관의 고문 관행도 크게 개선되었다. 노골적인 구타는 대부분 사라졌다. 교정기관의 변화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구제금융사태로 급증한 재소자 숫자를 줄여야 교정교화가 가능하다고 주문했다. 한국 교정시설의 가장 큰 문제가 과밀수용에 있다는 것도 정확히 짚어냈다. 검사장 급의 검사가 임명되던 법무부 교정국장에는 처음으로 교도관 출신이 임명되었다. 수갑을 채우는 것도 모자라, 포승에 족쇄까지 채우던 관행도 개선했다. 최소한 발에 채우는 족쇄는 없어졌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재소자 입장에서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머리도 자유롭게 기를 수 있게 되었다. 검열제도는 남아 있었지만, 재소자들은 종이와 볼펜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엔 특별한 허가를 받은 소수만 누리던 특권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인권문제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진전을 이뤄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와 보상이 진행되었고,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한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이 진행되었다. 여성부가 출범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으로 복지가 보편적 인권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적은 지면에 일일이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성과가 이어졌다.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합법화되었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도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었다. 언론의 자유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장받았다.1998년 3월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은 경제대통령이나 통일대통령보다는 인권대통령으로 역사에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경제나 통일은 수단에 불과하지만, 인권은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목적(가치)이기도 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인식은 정확했다. 다만 그가 현실 정치인이라는 점, 그가 속한 정당의 구성원들이 대통령에 한참 못 미칠 정도로 인권의식이 부족했다는 점, 1961년의 군사쿠데타 세력도 참여한 연립정권이라는 한계, 그리고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집요한 저항 등의 한계적 조건들은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였을까, 김대중은 그가 평소 즐겨했던 말처럼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잔뜩 쌓인 인권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갔다. 여러 가지로 부족했지만, 적어도 현실에서는 김대중, 그가 인권대통령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김대중 정권 당시에 활동했던 인권운동가 입장에서 돌아보면, 길고 지루한 싸움의 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인간 김대중의 끈기와 가버넌스 형 갈등해결 노력 때문에 한국은 인권후진국에서 벗어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두 명의 대통령을 만난 지금에 와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인권분야에서 이룬 성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현실 정치의 한계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그가 고맙다." -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인권 운동가로 수사부터 재판, 형 집행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공부하고,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창익은 활발한 인권 교육 활동을 해왔다. 프로야구 선수와 운동선수들, 종교인, 교사, 기자, 군인, 경찰관, 대학생, 사회단체 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 <한겨레신문>과 <시사인>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썼고, 성공회대 겸임교수로 대학원 강의도 한다. CBS 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 6년 동안 고정 출연했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토론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온다ㅣ2011년 4월 1일 프레시안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청화(강호성) 스님, 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한국사회에서 '정치인' 김대중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인물로, 또 어떤 사람은 단순히 지역주의의 시혜자로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대중적인 관점이라면 정계나 학계 또는 재야나 보수, 진보 등의 눈길도 여러 가지로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들은 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밖에 안 된다. 사랑의 눈이건 미움의 눈이건 간에 한 인물의 인격적 실상을 여실히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람의 모양을 볼 때 앞에서 보는 사람은 뒤를 못 보고, 뒤에서 보는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고 우측에서 보는 사람은 좌측을 보지 못하고, 좌측에서 보는 사람은 우측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사람마다의 견해는 그 나름에서 본 일부분이지, 전체는 아니다. 인물을 평하는 데 정답은 없다. 그저 여러 관점이 있을 뿐이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면에서 보고 싶은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항시 측면에서 건너다보았다. 그것도 가까이에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말이다. 몇 년도쯤인가는 분명하게 기억되지 않지만 어느 날 종단의 중진스님들이 십여 명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그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화제는 김영삼과 김대중 두 인물에게로 옮겨가 희다느니, 검다느니 또는 길다느니, 짧다느니 각자의 소견들을 토로하게 되었다. 어느 스님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어느 스님은 우호적인 관점에서 그런가 하면 어떤 스님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두 분에 대한 평소의 소회들을 적나라하게 말했다. 그 중 교계 한 신문의 사장으로 있는 스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지난 대선 때 작가 이○○ 씨가 ○○신문의 부탁으로 김대중, 김영삼, 이 두 분의 취재를 위해 일정기간 동안 수행을 했다는 거야. 그때 처음으로 두 분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는데 두 분은 너무나 대조적인 면을 가지고 있더라는 거야.먼저 김영삼 후보를 수행했는데 그 분의 약점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라더군. 그러다보니까 항상 측근들에게 무언가를 묻게 되는데 그 때마다 측근들은 묻는 것에 대한 말을 하며 자긍심을 갖더라는 거야. 곧 자기는 김영삼 후보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로 인해서 그는 더욱 더 그 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는 거야. 따라서 그것이 김영삼 후보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되더라는 거야. 결과적으로 김영삼 후보의 아는 것이 없는 약점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되더라는 거지. 그에 반해 김대중 후보는 아는 것이 너무 많더라는 거야. 곧 측근들이 무슨 말을 꺼내면 김대중 후보는 해박한 식견과 명석한 논리로 그것은 이러이러하고 또 저것은 저러저러하다고 다 회통을 쳐버린다는 거지. 그러면 측근들은 주눅이 들어 입을 열지 못하더라는 거야. 책깨나 읽었다고 자부해온 이 작가도 김대중 후보 앞에서는 한없이 쪼그라들어 기를 펴지 못했다는 거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불문가지지. 그러니까 측근들은 김대중 후보 앞에 스스로 왜소해지면서 무용지물이라는 자괴감을 갖게 된다는 거야. 그로 미뤄 김대중 후보의 높은 식견은 대단히 돋보이는 장점이지만, 사람을 질리게 하므로 오히려 단점으로 보였다는 거야." 그 때 그 스님의 말이 내 의식 속에 각인되어선지 모르지만 그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그 말이 공감되었다. 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을 들을 뿐 동석한 다른 사람들은 별로 말이 없었다. 아마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만큼 독서를 많이 하고 知的인 노력을 부단히 하신 분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그분과 어떤 이해관계에 놓인 입장도 아니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은 정서적으로 순수하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는 나의 상이점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만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첫 대결에서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그 분은 독재가 정치에 있어서 얼마나 큰 독인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하무인으로 교만했을지도 모른다. 또 만일 전두환 정부 때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그 분은 민주주의의 열망이 생명에까지 깊이 점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힘을 가진 자 앞에 힘없는 자가 얼마나 작은 것인가도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다시 만일, 노태우 전 대통령과 맞선 선거에서 승리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었다면 그 분은 보다 더 거시적이고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어떻게 하면 국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런 진지한 고민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만일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대선에서 대통령 당선이 되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 분은 대통령의 권한을 누리는 데에 자족하고 국가의 관리능력은 부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의에 분노만 안겨 준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그분들에게 고배를 마시는 패배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패배자는 아니었다. 아주 가치 있고 유익한 패배였다. 곧 그 분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그 분들의 미숙하고 모자라고 부정적인 면들을 충분히 보완하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다. 그로 인해 그분은 훨씬 유연하고 지혜롭고 원숙한 인격자로 다듬어진 것이다. 그런 다음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국가가 부도 상태의 위기에서 국민들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부른 것이다. '준비된 대통령' 그것은 빈 말이 아니었다. 정책의 시행착오나 실기가 없었다. 그야말로 미리 다 알고 준비한 물건을 하나하나 때 맞춰 꺼내듯, 시의에 맞는 시책과 결단은 참으로 노련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았다. 특히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민주주의의 기조 위에서 국정운영의 방향을 모색한 점이다. 경제를 비롯한 모든 국가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확고했다. 그러면서 보수와 진보의 상거된 거리를 어느 정도 좁히는 정책 결정은 정치적 퇴행과 급진 사이의 조화의 묘를 살리는 것도 나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다. 예컨대 집회결사의 자유, 민주노총의 합법화, 전교조의 합법화는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완강하게 거부했었지만 김 대통령은 그것도 민주주의의 요소로 존중한 것이다. 이외에도 6·15 선언을 통한 남북 평화공존, 인권의 법적 장치 등등의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면 언감생심일 치적들이 많다. 헌정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성취한 대통령, 그리고 세계의 지도자들로부터 인정받은 대통령, 이런 대통령이 된 것은 모든 지식과 경륜과 야심이 푹 익는 노년에 대의(大意)를 얻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 길고 지루한 고난과 시련이 군더더기나 풋기나 만용 같은 흠결들을 말끔히 제거시킨 김대중 대통령을 만든 것이다." - 청화(강호성) 스님, 메이지대학교를 중퇴하고 19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돼 시인으로도 활동했으며,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의장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의장,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장, 백양사 운문암 득도, 태안사 주지스님을 거쳐 대한불교조계종 태안사 조실을 지냈으며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상임고문, 참여연대 공동대표, 6.10항쟁 계승사업회 이사 등을 맡았다ㅣ2011년 4월 1일 프레시안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권기식, 전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 국장이자 민주당 노무현대통령후보비서실 부실장
"‘선진화 대통령' 김대중은 지난 수십년간 한국정치의 아이콘이었다. 그를 지지했든 반대했든 김대중이라는 창을 통하지 않고는 한국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국내언론은 물론 해외언론들조차 특집기사를 통해 김대중 시대의 의미와 업적을 조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문가들도 언론기고를 통해 김대중 시대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대부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남북화해에 대한 공로를 주요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시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분의 업적이 민주화와 남북화해협력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흔히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 박정희는 ‘산업화 대통령’ 김대중은 ‘민주화 대통령’으로 규정한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부르고, 대한민국을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산업국가로 성장시킨 박정희를 산업화 대통령으로 규정하는 데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면 김대중을 민주화 대통령으로 부르는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올바르게 평가한 것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을 ‘민주화 대통령’으로 규정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오로지 DJ 만이 할 수 있었던 독보적인 역할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민주화 대통령은 김대중 만이 아니라 김영삼도 있다. 민주화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 중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 대통령’이 아니라 ‘선진화 대통령’으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넘어서 선진화의 길을 연 대통령이다. 민주화 대통령론은 그의 위대한 업적을 축소하거나 폄하할 우려가 있다. 정부수립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김대중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은 야만과 문명, 후진과 선진, 아날로그 문명과 디지털 문명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산업화를 거치고도 야만과 후진, 아날로그 사회에 머물던 대한민국은 김대중 시대를 거쳐 문명과 선진, 디지털 시대로 변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세분 지도자들의 정치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반쪽짜리 단독정부라도 세워야 한다는 믿음에서 반공을 국시로 독선적인 국정운영을 했고, 이 과정에서 독재와 부정부패가 발호했다. 박정희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이를 위해 민주와 인권을 탄압했다. 그들은 그 당시 시대가 부여한 역사적 과업을 완수한 지도자들이긴 하지만 문명선진국의 지도자들은 아니었다. 김대중은 그들과 달랐다. 민주, 평화, 통일·통합, 복지, 지식정보화 등 김대중의 정치절학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 것이었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지도자들조차 탄복할 정도로 선진적인 것이었다. 김대중 집권 5년 선진국가로 개조김대중은 역사의 요구에 정확히 부응한 지도자였다. 하늘이 대한민국을 위해 예비한 정치지도자였다. 김대중 집권기에 당면한 외환위기는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개발독재식 산업화와 반문명적인 사회의식, 아날로그 시스템 등 후진 사회체제의 파탄이었다.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는 대한민국이 살아날 길이 없었다. 김대중은 그 시기에 구원의 지도자로 나타났다. 그는 외환위기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후진체제에서 선진체제로 바꾸지 않고는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 집권 5년은 대한민국을 후진국가에서 선진국가로 개조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선진국은 단순히 경제가 발전한 나라가 아니다. 경제는 선진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경제는 물론 민주와 인권, 분배와 복지, 사회적 통합, 문화와 정보의 공평한 향유 등이 있어야 한다. 김대중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도록 대한민국을 개조했다. 김대중 시대는 야만과 후진의 대한민국을 문명과 선진의 대한민국으로 탈바꿈시킨 위대한 변화의 시간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적인 업적이 이를 증명한다. 역대 정권 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임시절에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났다. 그는 경제가 파탄난 외환위기 직후 취임했지만,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관리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김 전 대통령 집권시기인 1998~2002년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 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1천400만 달러로 노무현 정부 132억7천300만 달러, 노태우 정부 10억6천500만 달러, 전두환 정부 5억7천100만 달러를 크게 앞지르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연평균 감소액은 무려 86억5천500만 달러였다. 김 전 대통령은 정보기술(IT)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해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 8개월만에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당시 외신들이 한국을 ‘IMF 모범생’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한국이 지난해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김대중 정부시절부터 쌓이기 시작한 막대한 외환보유액 덕분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IT 대통령’이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배워 능숙하게 사용한 것은 물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는 길은 it강국이 되는 것 뿐이라며 it산업 발전에 주력했다.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해 it선진국을 만들었다. 우리 국민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사회에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도시에서 섬까지 차별없이 디지털 정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지식정보화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념이 이뤄낸 기적이다. 이는 산업화 시대 ‘한강의 기적’을 능가하는 정보화 시대 ‘IT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IT혁명은 선진 정치혁명으로 이어져김대중의 it혁명은 선진 정치혁명으로 이어졌다.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장이 인터넷 공간에서 열렸고, 토론문화는 만개했다. 아날로그 시대에 주목받지 못했던 노무현의 대선승리도 디지털 시대를 연 김대중의 작품이었다. 그는 벤처산업을 육성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학벌과 상관없이 누구나 능력을 갖추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수많은 벤처신화가 탄생했다. 상고출신으로 해운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했던 김대중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빈소에서 만난 최상룡 전 주일대사는 김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한류 대통령’으로 불린다고 했다. 문화를 사랑했던 대통령을 추억하며 한 말이다. 최 전 대사는 김 전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일본 문화개방을 추진한 분이다. 그의 말대로 김 전 대통령은 한류를 만든 지도자다. DJ는 문화를 현재의 우열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함께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며 문화개방 반대여론을 잠재웠다. 그후 겨울연가 등 일본에서 벌어진 한류돌풍과 이의 국제적인 확산은 김 전 대통령의 탁월한 혜안을 입증해준다. ‘욘사마’와 ‘비’가 없는 대한민국의 문화를 생각하면 얼마나 암담한가? “김대중씨가 죽고 나면 한국인들은 그때 가서야 그에게 정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뉴스위크〉도쿄특파원을 지낸 미국 언론인 버나드 크리셔씨가 남긴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김대중이라는 위대한 지도자에게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 그는 ‘자유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꿈꿨고 우리는 그분의 꿈 덕분에 자유와 평화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유업 받드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 DJ는 돌아가시면서도 당신이 일군 문명과 선진의 사회가 다시 야만과 후진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을 걱정했다. 그리고 문명의 가치와 선진의 목표를 잃지 말 것을 주문했다. 민주와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에 단호하게 맞서 싸우는 ‘행동하는 양심’이 될 것을 유언했다. DJ는 죽으면서도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업을 받드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됐다. 그의 업적을 바르게 평가하고 실천하는 것이 야만과 후진의 역사로 되돌아가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민주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대통령이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 천국에서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기도한다." - 권기식, 경북대학교 불어교육과 학사,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인천일보 기자를 시작하여 한겨레신문 기자,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 국장, 민주당 노무현대통령후보비서실 부실장, 한양대 교수, 주택공단 기획이사, 인간개발연구원 원장, 평창동계올림픽유치지원 민간단체협의회 회장, 국민일보 쿠키미디어 부사장,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지냈다. 현재 인천공항지키기 시민연대 상임대표로 있다ㅣ2009년 8월 20일 브레이크뉴스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호준석, 전 YTN 청와대 출입기자로 현재 YTN 보도국 앵커팀 차장
"청와대 출입기자로 지내면서 지난 3년 동안 지켜본 DJ는 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여리고 수줍어하는 사람이었다. 주관이 확고하고 고집이 세지만 자기 고집을 무조건 강요하기보다는 설득하고 토론하려는 사람이었다. 측근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 섬세한 결벽성이 있는가 하면 자기 철학과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관철시키는 추진력을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해외에 나갔을 때 DJ가 받는 대우는 내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선진국에 갈수록 그는 넬슨 만델라와 동격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 '20세기의 영웅'이었다. 현지 언론들은 그의 방문에 맞춰 DJ 일대기를 특집으로 제작하고 특집면을 만들었다. 에이펙이나 아셈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DJ는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다. 지난해 덴마크에서 열린 아셈 때는 주최국인 덴마크의 라스무센 총리가 각국 정상들을 소개하면서 오직 DJ에게만 "excellent leadership, President Kim"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블레어와 시라크, 주롱지와 고이즈미 같은 쟁쟁한 인물들도 아무 수식어 없이 이름만 소개됐는데 말이다. 그만큼 DJ에 대한 특별대우는 국제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DJ가 참석하는 기자회견이나 투자유치 설명회는 그의 이름만으로도 일단 대성황을 이뤘다. 정상들간의 외교적 수사(修辭)는 늘 과장되게 마련이지만 DJ에 대한 것은 수사라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었다. 예컨대 "김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조스팽 프랑스 총리), "김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라우 독일 대통령)하는 식이었다. 현 정부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한 선배 기자조차도 이런 모습을 보고는 "머리색 검고 얼굴 노란 황인종 중에서 백인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은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다. 오직 DJ 뿐이다"고 했다. 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이런 대접에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이기 일쑤였다. 대한민국의 CEO인 그가 이런 'DJ 브랜드'를 갖고 있었으니 이것이 한국에 대한 투자유치와 IMF 극복, 그리고 우리나라의 외교적 위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런 네임밸류에 만족하지 않고 발로 뛰면서 한국 경제와 햇볕정책을 세일즈했다. 해외순방 때마다 나는 80에 가까운 DJ가 강행하는 빡빡한 일정에 먼저 넉다운이 될 지경이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DJ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다. 유력 언론들이 자신의 국정이념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으니 직접 뛰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연설문은 밤을 새워가면서 직접 작성했고 지난해 2월 '악의 축' 발언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됐을 때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반대파들은 그를 여전히 특정 정파, 특정 지역의 수장으로만 간주하고 끊임없이 흠집을 내려고 했다. 몇몇 보수언론들의 노골적인 왜곡보도는 같은 기자입장에서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가치관과 이념을 달리하는데서 나오는 비판이 아니라 오직 DJ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호도하는 나쁜 보도가 너무나 많았다. 이제 그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저물어 갔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다만 경제개혁과 남북협력,그리고 IT 육성이라는 그의 기본방향이 옳았다는데는 큰 반론이 없는 것 같다. 그의 실패가 너무나 극적으로 강조돼온 반면 성공에 대한 평가에는 지나치게 인색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단지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그의 열정과 진심만은 우리가 인정하고 그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호준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를 받았고 YTN 보도국 기자, YTN 청와대 출입기자,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 객원연구원, YTN 앵커, 한국기자협회 YTN 지회 지회장을 지냈다. 현재 YTN 보도국 앵커팀 차장으로 있다ㅣ2003년 2월 23일 YTN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김찬호, JTBC 정치부 차장과 정치팀장이자 '신예리&강찬호의 직격토크' 진행자
"DJ는 국내정치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거인이었다. 한국 대통령 사상 처음으로 혁신적인 외교노선을 표방했던 DJ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힘과 일본의 영향력을 몸으로 체득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집권 뒤 북한과 대담한 해빙에 나서기 전 한·미·일 삼각동맹을 다지는 노력부터 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에게 최측근을 보내 회담의 전 과정을 브리핑해준 게 대표적이다. DJ를 신뢰하게 된 클린턴은 남북 정상회담을 적극 지지했고, ‘평생의 벗’을 다짐하는 사이까지 됐다. DJ는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도 도쿄 피랍의 앙금을 털고 “과거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신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해 일본인들의 마음을 샀다. 그러면서 장쩌민 중국 주석, 보리스 옐친·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두루 친한 외교술을 선보였다. 보수성향의 미국 정치학자 마이클 그린은 “DJ는 주변 4강과 모두 친하면서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한국에 꼭 필요하나 실현하긴 힘든 난제를 풀어낸 전무후무한 지도자”라 극찬했다. DJ의 외교는 집권 말기 부시 미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대북 송금 시비에 휘말리는 등 흠도 남기긴 했다. 그러나 한국의 대북·대외적 지평을 넓힌 점에서 그의 공은 넓고 깊다. 이런 성과 뒤엔 그만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오랜 세월 미국·일본의 정계 거물·외교관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고, 방대한 독서로 독자적인 통일론·세계관을 수립했다." - 강찬호,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조지타운대학교외교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사회부와 문화부, 국제부, 정치부와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다. 현재 JTBC 정치부 차장, 정치팀장으로 있으며 JTBC에서 '신예리&강찬호의 직격토크'에서 진행자를 맡고 있다ㅣ2009년 8월 24일 중앙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세계 석학들의 평가(15인)>
엘빈 토플러, 미래학 분야의 최고 석학으로 세계적인 미래학자
"아내 하이디와 저는 대통령께서 최근에 아프시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쾌차하셔서 내외분과 저희 부부가 다시 만찬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수년전 대통령과 가진 첫 만남 이래 대통령님을 계속 깊이 존경해 왔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을 세계의 모범국가로 변화시키신 분이다. 무슨 일이든 저희 부부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주저 없이 불러주시기를 기대한다." - 앨빈 토플러, 뉴욕대학교 학사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에서 명예박사,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명예박사, 서강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백악관 담당 정치, 노동 문제 기자와 '미래' 지의 부편집자, 코넬대학 초빙교수로 있었다. 그는 법학과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회사상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 메달'을 수상했다. 미래학 분야의 최고 석학으로 꼽히는 세계적인 미래학자이다ㅣ2009년 8월 16일 비서실이 공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과 건강위기에 대해 엘빈 토플러가 건강회복을 기원하는 전화를 했다고 밝힌 내용 중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학교 명예교수
"햇볕정책을 만들어낸 비전, 남북한, 중국, 일본, 그리고 서구 세계와의 화해 추구 노력을 존경한다. 김전 대통령은 우리시대의 진정한 위인 가운데 한 분이다." - 에즈라 보겔, 오하이오웨슬리안대학교 학사 및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예일대학교 조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박사 후 연구원,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 리서치 센터 소장, 페어뱅크 센터 소장, 아시아센터 소장을 지냈다. 그는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인물이다. 현재는 하버드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ㅣ2009년 8월 16일 비서실이 공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과 건강위기에 대해 에즈라 보겔이 건강회복을 기원하는 메세지라고 밝힌 내용 중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
"김 전 대통령은 파산한 경제를 물려받았고, 북한 플루토늄 동결조치를 일궈낸 이행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클린턴 행정부,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그를 비방해 반목을 만든 전임자가 있었다. 금융위기의 최고 아이러니는 한국 국민들이 이전 독재자들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대통령을 선출한 것이다. 이는 정부-은행-대기업의 매듭을 비판한 사람들을 권력에 오르게 했고 김 전 대통령은 뛰어난 수완으로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진정시키고 정경유착, 재벌 개혁 프로그램을 성사시켰다. 또 햇볕정책과 관련해서 김 전 대통령은 취임식부터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 평화공존을 추구해 기존 대북 전략을 완전히 뒤바꿨다. 특히 남북정상회담은 한국과 미국, 세계 이익에 깊이 관여된 북한 미사일에 관한 협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불굴의 민주주의자이자 독재정권의 반대자, 한국 정치경제를 구하고 개혁한 사람, 남북한 화해를 향한 길을 연 지도자로 마키아벨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정치가이다." - 브루스 커밍스, 미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전공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로 미국내 몇 안되는 한국전문가이다. 그는 한반도내 미국의 역할을 비판적 시각으로 다뤄 주한미군 철수 및 광주민주화운동 미국 개입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미국 워싱턴대학교 교수, 시카고대학교 교수, 노스웨스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의 노만/에드너 프리링 석좌 교수이며, 노스웨스턴 대학의 국제/비교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을 수정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저술해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비판적 아시아학'의 대표적 인물로 한국학의 권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미국의 독재국가에 대한 태도 또한 서슴없이 비판하였다ㅣ2007년 5월 21일 전남대 용봉홀에서 열린 제1회 '후광 김대중학술상' 시상식 뒤 가진 '한국인이 김대중에게 빚진 두가지'라는 주제의 수상 기념강연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
"김대중 대통령은 위대한 비전(great vision), 위대한 상상력(great imagination)을 가진 인물이다." - 헨리 키신저, 하버드대학교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국제세미나 이사, 미국 록펠러브로더스펀드 특별연구프로젝트 이사, 미국 대통령보좌관 및 미국국가안전보장회 사무국장, 미국 국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노벨 평화상과 대영제국 훈장, 독일 명예시민, 우드로우 윌슨상, 밴 플리트상을 받았으며, 현재 보헤미안 그로브 회원, 미국 외교협회 회원, 아스펜 연구소 회원, 빌데르베르크 그룹 회원으로 있다ㅣ2007년 9월 17일부터 29일까지 총 12박 13일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했던 평가의 내용 중
마이클 그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이자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고문
"DJ는 주변 4강과 모두 친하면서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한국에 꼭 필요하나 실현하긴 힘든 난제를 풀어낸 전무후무한 지도자이다." - 마이클 그린, 존스홉킨스대학교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과 선임국장을 지냈다.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이자 일본 도쿄대학교 연구원,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고문과 일본실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24일 중앙일보에 강찬호 JTBC 정치부 차장과 정치팀장이자 '신예리&강찬호의 직격토크' 진행자가 올린 사설에서 밝힌 내용 중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사회학연구소 소장으로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
"분명한 분석, 설득력 있는 주장에 놀랐다. 많은 정치가들을 만나보았으나 이렇게 명확한 비전을 가진 분은 만나지 못했다. 완전히 설득당했다. 유럽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비전을 가진 정치가가 있었으면 한다." - 울리히 벡,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법학,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을 수학하였고 뮌헨대학교대학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 교수와 밤베르크대학교 교수, 독일 바이에른 및 작센 자유주(州) 미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현재 독일 뮌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와 사회학연구소 소장,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사회학과 초빙교수로 있다. 그는 현대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이다ㅣ2008년 4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접견한 뒤에 했던 말의 내용 중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
"김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비단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뿐아니라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통찰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한 삶 전체가 기억될 것이다.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보여준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역사적인 평양방문은 그가 남긴 현란한 유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발표한 애도사의 내용 중
에드윈 폴러, 미국의 보수주의 성향 연구재단인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
"김대중 대통령은 진정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오늘 한국은 거인을 잃었고, 나는 절친했던 벗을 잃었다." - 에드윈 폴러, 레지스대학 학사,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 석사와 에든버러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그는 미국의 보수주의를 이끄는 워싱턴 싱크탱크로 정치·경제·외교·안보 등과 관련한 정책을 연구하는 미국의 보수주의 성향 연구재단으로 미국 정부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요한 갈퉁, 노르웨이 국제평화연구소 창설자로 전 오슬로대학교 교수, 평화학자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이며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인물이다." - 요한 갈퉁,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하였고 통계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도 공부하였다. 또 사회학, 철학, 인문사회학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고, 노르웨이 사회연구소에서 분쟁과 평화연구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평화연구에 심취하였다. 저널 오브 피스 리서치를 창간하였으며 편집을 담당했다. 오슬로대학교에서 평화와 분쟁 연구 교수로 재직했으며, 베를린대학교 교수도 지냈다. 노르웨이 국제평화연구소 창설자이다ㅣ2008년 9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돈 오버도퍼,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이자 한미관계연구소장
"나는 1972년 가을 도쿄에서 김대중 선생을 처음 만났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을 내리고 많은 정치엘리트를 체포하던 상황인 이때 마침 해외에 나와 있던 의사가 분명하고 용기를 가진 정치계의 한 인물을 발견하였다. 야당 정치인 중에서도 김대중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김대중 선생은 조국에서 자행되는 독재와 부당한 탄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그러다가 거짓에 속아 1973년 8월 오찬에 참석한 자리에서 맞고 마취되어 실려 재갈이 물린채 끌려 갔다. 그는 미국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선생이 겪은 여러 고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에 따르면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또 6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고 10년을 연금 또는 타의에 의한 망명으로 보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선생의 투쟁은 한번도 꺾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고난을 겪어내고 선생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2000년 북한과의 화해를 가져온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및 많은 사람들 덕택에 포용정책은 한국국민과 정치계의 유일한 대안은 아닐지 몰라도 선호하는 정책이 되었다. 1980년 필자의 대담에서 일부 고위 군 관련 인사들은 김대중이 과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현재까지도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해온 필자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1980년대 말 CIA 전문 요원 출신인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는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한 뒤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돈 오버도퍼,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 이후 40년 동안 기자를 하면서 그 중 25년을 워싱턴 포스트를 위해 일했다. 1991년과 1995년에는 방북 취재를 했다. 그는 미국 평화 봉사단과 함께 밴 플리트상을 공동 수상했으며,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군의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미 국방부 자문위원 중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현재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이자 한미관계연구소장으로 있다ㅣ2008년 12월 16일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이 주관하는 63빌딩 국제회의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8주년 기념' 행사에서 했던 특별강연의 내용과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의 내용 중
로버트 루빈, 미국 전 재무장관이자 골드만삭스 공동회장, 백악관 국가경제회의 보좌관
"한국이 1997년말 외환위기를 극복한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위대한 영웅이다. 외환위기를 겪은 아시아 국가들에 내린 IMF(국제통화기금)처방이 나라별로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국내 정치력에 따라 그 결과는 달랐다. 한국은 축복을 받았다." - 로버트 루빈,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런던대학교정치경제대학원 석사, 예일대학교법과대학원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포드 이사, 골드만삭스 공동회장, 미국 백악관 국가경제회의 보좌관, 미국 재무부 장관, 씨디그룹 공동회장 겸 이사와 회장을 지냈다ㅣ2003년 11월 19일 그의 회고록 <불확실한 세계에서:월가에서 워싱턴까지의 어려웠던 선택들> 출간에 맞춰 뉴욕 외교협회에서 연설을 한 후 기자와 만나서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최근 미국의 경제상황을 타개하는데 정치 시스템의 역할이 필요하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있었다. 미국 대통령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출마를 하면 어떻겠나?" - 로버트 루빈,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런던대학교정치경제대학원 석사, 예일대학교법과대학원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포드 이사, 골드만삭스 공동회장, 미국 백악관 국가경제회의 보좌관, 미국 재무부 장관, 씨디그룹 공동회장 겸 이사와 회장을 지냈다ㅣ2007년 9월 17일부터 29일까지 총 12박 13일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했던 평가의 내용 중
오마에 겐이치, 일본의 저명한 경제평론가로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정책학부 교수이자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객원교수
"세계에서 단임 5년에 김대중씨 만큼 변화시킨 대통령은 거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5년 사이에 한국 경제를 V자 회복 시킨 김 대통령은 희대의 명 대통령이다. 김대중씨처럼 한국 경제에 공헌한 대통령은 없기 때문에 한국민은 떠나가는 김대중씨를 마음으로 부터 감사해야 한다. 한국은 혼미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뒤로 하고 여러 분야에서 전망이 좋아졌다. 장거리 트랙경기로 친다면 일본보다 2바퀴정도 뒤쳐졌던 한국이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다가온 느낌이다." - 오마에 겐이치, 와세다대학교 이공학부를 졸업하고 도쿄공업대학대학원 석사, 매사추세츠공과대학대학원 원자력공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히타치제작소에서 원자로 노심 설계 엔지니어를 일했고 맥킨지 앤드 컴퍼니에 입사, 탁월한 성과를 바탕으로 맥킨지 앤드 컴퍼니 일본지사장, 아시아태평양지역 회장 등을 지냈고 맥킨지 재팬 회장,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정책학부 교수, 오마에 앤드 어소시에이트 대표를 지냈으며 포사이트 앤 컴퍼니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국경없는 경제학'과 '지역국가론'의 제창자로서 현재는 주식회사 비즈니스 브레이크스루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일본 최초의 원격교육 경영대학원 '비즈니스 브레이크스루' 대학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으로서 인재 양성과 교육 사업에 힘쓰고 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경영 컨설턴트이자 세계적인 경영 그루의 한 사람으로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에서 피터 드러커, 톰 피터슨과 함께 현대의 사상적 리더로 주목받았고, 현대 경영의 정신적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ㅣ2003년 2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자 그에 대해 했던 평가의 내용 중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우리가 김대중이라는 한국의 민주주의 인사이자 야당 정치가의 존재를 처음으로 안 것은 1973년 8월 8일 그가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됐던 사건이 일어나고부터다. 인터뷰 당사자가 납치돼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말들은 정말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 민주주의를 추구해 마지않는 신념을 가진 정치가의 그런 모습은 일본에선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김대중 선생은 그때도 거의 죽을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결국에는 살아났다. 그를 납치해 바다로 수장하려 했던 배 위로 날아온 비행기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에 머물러 있으나, 어쨌든 납치범들이 해상에서 김대중 선생의 살해를 단념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의 존재가 압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80년 5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끌려가 사형 판결을 받은 때였다. 김대중 선생은 사형 구형을 받은 군법회의 제1심 최종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당국이 내게 형을 집행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과연 법의 정의에 따른 것일지 심사숙고해주었으면 싶다. 나는 나에 대한 관대한 처분보다는 다른 피고에게 대한 관용을 바란다. 결국 이분들에 대한 형의 책임자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저께 구형을 받았을 때 나 스스로도 의외라 생각할 만큼 내 마음은 평온했다. 그리고 그 날은 공판정에 나갔던 탓도 있어선지 평소보다 더 잘 잤다. 이것은 내가 천주교인으로서 신이 바라신다면 이 재판부를 통해서 죽음을 당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살 것이라고 믿으며, 이 전부를 신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 계시는 피고들에게 부탁한다. 유언으로서, 내가 죽어도 두 번 다시 이러한 정치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여기엔 폭력에 맞서는 정신의 광채가 빛나고 있다. 이런 진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김대중 씨를 죽이지 말라"는 목소리가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퍼진 것은 당연했다. 나는 당시 이렇게 썼다. "이 이상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이고 민족주의·민주주의적 천주교인 정치가는, 큰 모순으로 갈라진 한국 국민을 단결시켜 민주주의를 통한 국가 건설과 민족통일이라는 난제에 맞서게 하는 열정을 불러올 수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일 것이다. 한국 국민이 지금 김대중 씨를 잃는다면 해방 후 백범 김구를 잃은 것 이상의 비극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국민을 포함해 평화와 민주주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전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이다." 물론 우리는 한국의 '소리 없는 목소리'도 움직이고 있었다고 믿는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움직였다.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일본 수상도 움직였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은 이때도 구제되었다. 사형판결의 최종 확정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감형이 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선생은 이희호 여사와 자제들에게 옥중 편지를 썼다. 그 복사본이 다른 천주교인의 손을 통해서 우리들에게도 전해졌고, 일본우리들에게도 전해졌고, 일본어로 번역해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김대중 옥중서간>이라는 제목으로 1983년에 출판되었다. <김대중 옥중서간>은 한 장의 편지 속에 자신의 생각을 전하겠다는 놀랄 만한 에너지의 집중을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엔 자기반성과 전진·향상에의 강렬한 의욕이 전해진다. 나는 이 책의 해설의 결말 부분에 이렇게 썼다. "한국 국민은 계속 고난 속에 있지만, 우리들은 이런 정치가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에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다." 내가 김대중 선생을 처음으로 직접 뵌 것은 1984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였다. 나는 국립문서관(National Archives) 계단이 있는 곳에서 그와 만나기로 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을 뒤돌아보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계신 데 대해 나는 다시 한 번 강한 인상을 받았다. 선생님이 귀국하게 되자 필리핀의 야당정치가 베니그노 아키노 씨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됐던 전례를 우려한 이들이, 미국에서부터 20명 가까이 동행했다. 그 안엔 내 친구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도 있었다. 우리들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나리타공항에서 일본정부의 위임을 받아 김대중 선생님 일행을 맞이했다. 김대중 선생은 무사히 귀국했고, 그 이래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 군사정권 퇴진을 가져왔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변혁을 전진시키는 국면으로 나아갔다. 군부 측에서 노태우 씨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데 맞서 민주세력 측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이 나서는 분열 선거 양상이었으므로 누가 보아도 민주세력 측이 불리했다. 남북관계도 긴장 상태였으므로 이에 우려한 일본의 우리들은 분수에 넘치게도 김대중 선생에게 후보단일화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결국 후보단일화는 실현되지 못했고 민주주의 회복 후 최초의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 씨의 승리로 끝났다. 5년 후 김영삼과 김대중의 일대일 승부가 벌어졌고, 김영삼 씨가 승리했다. 김대중 선생은 두 번의 선거에 패한 끝에 결국 세 번째인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우리들은 앞의 두 번의 선거를 탄식하면서 지켜봤다.그러나 되돌아보면, 이것은 필연적인 혁명의 도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노태우 씨가 대통령이 된 것은, 군부 세력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 때 전두환·노태우라는 두 명의 군인 대통령을 쿠데타 죄로 체포해 재판에 넘긴 것은 김영삼이기에 할 수 있었던 큰 일로, 군인의 정치참여를 끝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김대중 선생이 두 사람 다음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남북화해의 이니셔티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렇게 '김대중 대통령'의 출현은 한국의 민주혁명을 완성시키는 것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문'을 완전히 연 김대중 선생은 '조국통일의 문' 내지는 '남북 화해, 공존, 협력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에 취임하는 동시에 김대중 선생은 '햇볕정책', '포용정책'을 내세웠다. 그리고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하고,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정말로 단단하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한반도에서 이제 전쟁은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켰고, 정신의 해방을 초래했다. 남북의 포용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큰 의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기에 2002년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일본 수상의 방북과 북·일 정상회담이 실현된 것임에 틀림없다. 김대중 선생은 또 하나의 문, '한일 관계의 문'도 열었다. 1998년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한 그는 국회 연설에서 일본 의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수상과 한일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거기에서 오부치 수상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의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를 말했다. 이를 받아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수상의 "역사 인식의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것을 평가함과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여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기초를 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이 시대의 요청이다"라고 표명했다. 이에 따라 한일 관계는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십"이라고 선언되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에 일본 문화를 개방하겠다는 역사적 방침을 표명했다. 이것이 모든 게 새로운 한일 관계의 시작이었으며, 한류가 세찬 물줄기처럼 일본으로 흘러들게 되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김대중 선생의 처소를 나는 몇 번인가 방문했다. 2007년 가을 서울에 있는 자택을 방문했을 때 김대중 선생은 직전의 독일 방문에 대해 얘기하면서, 독일인이 여전히 과거를 반성하는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째서 일본은 독일처럼 할 수 없는 걸까, 양식 있는 일본인들이 목숨을 걸고 사태를 바꾸려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했다. 최초의 만남에서부터 25년 동안, 그 때 들었던 의견만큼 엄격했던 건 없었고, 나는 선생의 비판 앞에 몸 둘 바를 몰랐다. 2008년 12월 9일, 나는 김대중 선생에게 민주화 운동에 관한 인터뷰를 부탁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나는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은 할머니들에 대해서, 앰네스티를 위해 발언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김대중 선생은 자신은 공직에서 물러난 몸이므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말씀드린 것의 의미는 이해해주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과의 최후의 만남이었다.그가 서거했을 때 시청 앞 광장 분향소 앞에서 애도를 표하는 시민의 대열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김대중 선생은 고난 속에서 성공을 쟁취한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한국인의 지혜와 용기와 굴하지 않는 씩씩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 지혜와 용기와 씩씩함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서양사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도쿄대학 사회과학 연구소 조수와 강사, 조교수, 교수, 소장을 지냈다. 한국전쟁과 북한현대사를 연구했다. 도호쿠대학교 도호쿠 아시아 연구센터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도쿄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북일 국교촉진 국민협회' 활동 등을 통해 일본의 전후 보상, 민간 차원 북일 국교 정상화 촉구 활동 등을 하고 있다ㅣ2011년 6월 2일 프레시안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미쉬라 산딥, 인도 델리대학교 한국학 교수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빛이 되어 왔다. 한반도 평화 속에서 한국 국민 개개인이 존엄성을 지키며 살고 있고, 그의 비전은 한국의 미래를 밝혀줄 횃불이 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을 몇 차례 뵙고 나서 느꼈던 점은 정치적, 사회적 삶의 접근 방식에 있어서, 대통령님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 어느 때 보다, 김 전 대통령의 지도와 리더십이 필요한 지금 건강이 좋지않아 우려스럽지만, 곧 일어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건강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겠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국을 이끌어주는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시 시작하기를 기원하겠다." - 미쉬라 산딥, 인도 델리대학교 한국학 교수로 정치학을 가르친다ㅣ2009년 8월 16일 비서실이 공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과 건강위기에 대해 미쉬라 산딥이 건강회복을 기원하는 메세지라고 밝힌 내용 중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부 장관으로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국제관계학 교수로 있다
"김 대통령은 비전이 있고 그것을 조직적 방법으로 추진하는 뛰어난 인물로 자신의 업적 위에 우리가 대북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 매들린 올브라이트, 웰슬리대학 정치학 학사와 존스홉킨스대학교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와 컬럼비아대학교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UN 미국 대표부 대사와 미국 국무부 장관을 지냈다.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국제관계학 교수로 있으며, 워싱턴대학교 법학 명예박사와 스미스대학 법학명예 박사, 워니펙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채플힐캠퍼스 법학 명예박사를 받았다ㅣ2007년 9월 17일부터 29일까지 총 12박 13일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했던 평가의 내용 중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평가(30인)>
버락 오바마, 제44대 미국 대통령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 증진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 희생은 귀감으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용기 있는 민주화와 인권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슬픔에 빠졌다. 김 전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의 역동적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운동을 일으키고 이끌어왔다. 미국민을 대신해 유가족과 한국 국민에게 애도를 전한다."- 버락 오바마, 옥시덴탈대학을 나왔고 컬럼비아대학교 국제관계학과 정치학 학사,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와 미시간대학교 법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미국 일리노이주 인권변호사로 시작하여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 시카고대학교 법과대학 강사와 전임강사,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일리노이주의회 보건복지위원회 의장과 미국 일리노이주 민주당 연방상원의원을 지냈고 제50회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낭독 앨범상과 노벨 평화상, 미국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현재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조의를 표명하며 했던 말의 내용 중
빌 클린턴, 제42대 미국 대통령
"김대통령은 지금 한반도의 정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전주곡(overture)을 연주하고 있다. 김대통령의 일관된 비전과 강인한 의지는 이를 성공작으로 만들 것이라 믿는다다. 그렇게 되면 국방예산을 줄여 사회복지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 빌 클린턴, 조지타운대학교 정치학 학사와 옥스퍼드대학교 법학 학사, 예일대학교법과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아칸소대학교 법학과 교수와 아칸소주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아칸소주 주지자, 제42대 미국 대통령을 하고 재선을 했으며 유엔 아이티 특사를 지냈다.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과 대서양위원회공로상, 선스 오브 이탈리아 재단 생애 성취상, 월드 리더십 글로벌 어워드 글로벌 서비스 레거시 어워드를 수상했다. 현재 미국 월드컵축구 유치위원회 명예위원장으로 있다ㅣ1998년 6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가졌던 회담에서 했던 한-미 정상 백악관 기자회견의 내용 중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 한국을 움직인 용감하고 비전에 찬 지도자였다. 대통령님은 한반도 평화의 길을 놓았고, 국제사회의 인권을 지켰으며 따라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합당하신 분이었다. 우리가 92년 처음 만났을 때 대통령님은 나에게 ‘당신과 내가 추구하는 정치적 지향점이 같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께서 대통령 되고 난 후 나는 남북화해를 위해서 대통령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영광을 가졌다. 대통령님의 햇볕정책은 한국전쟁 이래 그 어느 때보다 지속적인 평화에 희망을 주었다. 힐러리와 나는 우리의 좋은 친구 김대중을 그리워할 것이다." - 빌 클린턴, 조지타운대학교 정치학 학사와 옥스퍼드대학교 법학 학사, 예일대학교법과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아칸소대학교 법학과 교수와 아칸소주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아칸소주 주지자, 제42대 미국 대통령을 하고 재선을 했으며 유엔 아이티 특사를 지냈다.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과 대서양위원회공로상, 선스 오브 이탈리아 재단 생애 성취상, 월드 리더십 글로벌 어워드 글로벌 서비스 레거시 어워드를 수상했다. 현재 미국 월드컵축구 유치위원회 명예위원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9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나의 오랜 친구이며,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였고, 결국 나라의 민주주의를 쟁취하신 분이다." - 빌 클린턴, 조지타운대학교 정치학 학사와 옥스퍼드대학교 법학 학사, 예일대학교법과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아칸소대학교 법학과 교수와 아칸소주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아칸소주 주지자, 제42대 미국 대통령을 하고 재선을 했으며 유엔 아이티 특사를 지냈다.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과 대서양위원회공로상, 선스 오브 이탈리아 재단 생애 성취상, 월드 리더십 글로벌 어워드 글로벌 서비스 레거시 어워드를 수상했다. 현재 미국 월드컵축구 유치위원회 명예위원장으로 있다ㅣ2007년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빈곤, 건강, 기후변화, 다른 세계적 이슈 등에 대해 논의하며 뉴욕 쉐라톤호텔에서 열렸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주도하는 연례 회의인 글로벌 이니셔티브(CGI)에 참석한 1,100여명의 세계 지도자들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개하며 했던 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제8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형성, 한반도의 평화조성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평화,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랬기에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오래전부터 김 전 대통령을 알아왔고, 그의 용기와 선견지명을 매우 높게 사왔다. 그는 대통령 임기 말 건강에 문제를 겪으면서도 남북문제의 해결책을 계속해서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포럼 공동 업무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모스크바대학교 법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콤소몰 서기, 공산당 중앙위원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농업담당 당서기, 정치국원, 제8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 소련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 소련 대통령, 국제그린크로스 초대총장, 씽크탱크인 사회정치연구소 의장을 지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베네딕토 16세, 제265대 교황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맡기시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화와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의 축복을 진심으로 간구한다” - 베네딕토 16세, 뮌헨대학교를 졸업했고 예비신학교 기초신학 정교수, 뮌헨과 프라이징크 대주교, 신앙교리성 장관, Velletri-Segni 추기경과 추기경단 차석 추기경, 수석 추기경을 지냈다. 현재 제265대 교황으로 있다ㅣ2009년 8월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청 국무원장인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을 통해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김 전 대통령의 1998년 런던 방문과 그다음 해 이뤄진 저의 공식 방한 당시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른다. 김 전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이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정말 기뻤다. 슬픔에 잠긴 유가족분들과 한국 국민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엘리자베스 2세, 왕위 계승을 통해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보낸 조문 전문의 내용 중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우리는 그가 인권을 위해 싸우고 북한과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기억한다. 유족과 한국 국민에 위로의 뜻을 전한다."-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대학교 학사와 비트워터스랜드대학교 법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비동맹운동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와할랄네루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유네스코 시몬 볼리바 국제상, 노벨 평화상, 국제 엠네스티 양심대사상을 수상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그의 대외 창구인 넬슨 만델라 재단을 통해 발표한 애도사의 내용 중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삼가 깊은 애도를 드린다. 김대중 선생은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였다. 장기간에 걸쳐 중한관계 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셨다. 중국 정부와 인민은 김 대통령의 기여를 잊을 수 없다. 김대중 선생의 생전에 남북화해를 적극 추진하셨으며 동북아 평화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이에 대하여 중국은 높이 평가해마지 않는다. 김대중 선생의 유족에게 저의 진심어린 위문을 전달해 주실 것을 부탁한다." - 후진타오, 칭화대학교 학사학위를 받았고 정치보도원 활동을 시작하여 수리전력부 제4공정국 기관당 총지부 부서기, 중국 간쑤성 건설위원회 비서, 제6기 중국 전국청년연맹 주석,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제1서기, 중국 공산당 구이저우성 당서기, 중국 티베트자치구 당서기, 중국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위원회 서기, 중국 국가부주석, 중국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현재 중국 국가주석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고든 브라운, 전 영국 국무총리로 세계경제포럼 고문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김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기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아시아 금융위기 때에는 한국의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도에 한반도 평화 조성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최근에도 김대중 평화센터를 통해 세계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 고든 브라운, 에든버러대학교대학원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하원의원, 재무부 장관, 노동당 대표, 국무총리를 지냈다. 현재 세계경제포럼 고문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이자, 민주주의자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독일과의 오랜 인연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 있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독일연방공화국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양국관계의 심화와 교류강화를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 앙겔라 메르켈, 라이프치히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베를린 물리화학 연구소 연구원, 동독 민주화운동단체 단원, 독일 연방하원의원과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부 장관, 기독교민주동맹 사무총장, 기독교민주동맹 당수와 원내총무를 지냈고 이화여자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와 라이프치히대학교 명예박사를 받았으며,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 시상식 자유훈장과 이해와 관용상, 포브스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 1위, 미국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현재 독일 총리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거, 제6대 독일 대통령
"나의 오랜 친구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쓰라린 아픔으로 작별하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불굴의 용기,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한민족 전체의 평화를 위한 탁월한 기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됐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옥스퍼드밸리올대학 학사와 그르노블제1대학교 학사, 괴팅겐대학교 학사학위를 받았고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위원, 연방의회 의원과 부의장, 베를린 시장과 제6대 독일 대통령을 지냈다. 현재 독일 군구조개혁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지난 수십년간 김대통령이 인권과 우리가 함께 나누는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옹호하기 위해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과 결단에 동참한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김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 - 리오넬 조스팽, 국립행정학원을 졸업하고 통일사회당에 입당, 외무부에서 근무했고 파리 제 6대학 교수로 있었다. 사회당 전국서기, 제1서기가 되었고 국민교육스포츠장관에 임명되었다.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시라크에게 아쉽게 패배하였고 그 뒤 사회당과 공산당, 녹생당의 연합 내각 총리를 지냈다. 주 35시간 노동제 등을 실시하고 유례없는 경제호황과 저실업을 이끌어내 성공한 총리로 평가받았다ㅣ2000년 10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데 대해 축하의 메시지로 보낸 내용과 2001년 덴마크에서 열린 아셈 회의 때 했던 말의 내용 중
요하네스 라우, 제8대 독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 요하네스 라우, 독일 사회민주당 의장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수상, 독일 연방의회 상원의원을 지냈고 제8대 독일 대통령을 지냈다ㅣ2001년 덴마크에서 열린 아셈 회의 때 했던 말의 내용 중
미셸 캉드쉬 제7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한국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두고 있다는 자체를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경제위기를 맞아 몇가지 고비가 있었지만 IMF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 전반은 김 대통령을 믿고 한국을 밀어준 측면이 적지 않은게 사실이다." - 미셸 캉드쉬, 파리대학 경제학 학사, 파리국립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재무부 국장, 유럽경제공동체 금융위원회 위원장, 재무부 장관, 중앙은행 총재, 제7대 국제통화기금 총재를 지냈다ㅣ2000년 2월 고별기자 회견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9대 총재
"엄청난 탄압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뤄낸 김대통령은 만델라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민주화뿐 아니라 경제의 재구축에 성공하고 있는 김대통령은 세계를 감동시키는 지도자 입니다." - 제임스 울펀슨, 시드니대학교 법학 학사와 하버드대학교경영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고 제이 헨리 쉬로더 은행 런던사무소, 뉴욕지점 매니징 디렉터와 살로몬 브라더스 뉴욕사무소에서 일했으며, 울펀슨 앨 컴퍼니를 설립, 울펀슨 앤 컴퍼니 회장이자 최고경영장를 지냈고 제9대 국제부흥개발은행 IBRD(세계은행) 9대 총재를 지냈다. 현재 씨티그룹 국제자문위원회 의장으로 있다ㅣ1999년 11월 9일 워싱턴 IBRD본부에서 세계은행이 주최하여 개막된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에서 했던 기조연설의 내용 중
게이르 룬데스타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사무총장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에 큰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있으나 한국, 아시아,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화해를 위한 그의 위대한 기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공로로 대통령님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는 그를 수상자로 선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대통령님과 유가족분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보낸다." - 게이르 룬데스타드, 오슬로대학교 학사와 트롬소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이메일로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쉘 마그네 분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로 오슬로 평화인권센터 소장
"김대중 전 대통령은 좋은 파트너였다. 진정으로 그와의 대화, 그리고 그의 조언이 필요한 데 이렇게 됐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1990년대 중반에 그를 처음 만났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되기 전으로 야당 지도자였다. 첫 만남에서 인권, 평화, 그리고 햇볕정책 등에 대한 그의 생각에 큰 감명을 받았다. 햇볕정책은 특히 남북화해를 위한 올바른 접근방식이었고 나중에 이산가족 상봉, 철도와 도로의 연결, 개성공단 설치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것들로 인해 남북한이 한층 가까워졌다. 김 전 대통령 이후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핵 문제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된다. 그 외에도 인권, 이산가족 상봉, 경제개발 등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많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남북한은 핵무기뿐 아니라 경제개발, 문화 협력, 민간 인적 교류, 이산가족 상봉 등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논의해야 하며 6자회담도 계속돼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질 기회나 이유가 없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북한을 끌어안아 북한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중단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런 점에서 햇볕정책이 적절하고 올바른 접근이었다고 본다." - 쉘 마그네 분데빅, 노르웨이 총리로 오슬로 평화인권센터 소장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연합뉴스와 가진 전화 통화의 내용 중
고이즈미, 제87, 88, 89대 일본 총리
"김대중 각하와는 수많은 회담의 기회를 가졌으며 21세기를 향한 일한관계의 비전과 북한 문제 등에 관하여 솔직한 의견교환을 하였다. 김대중 각하께서 일한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던 것은 인상깊게 남아있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 고이즈미, 게이오기주쿠대학교 경제학과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경제학을 졸업하였고 중의원 비서와 의원, 오쿠라 정무 차관, 자유민주당 재정 부회장과 부간사장, 오쿠라 상임위원장, 자유민주당 국회 대책 부위원장, 후생 장관, 자유민주당 조직위원장과 부간사장, 우정 대신, 후생 장관과 제87, 88, 89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ㅣ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팩스로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장쩌민, 전 중국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 수뇌부 상장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에 접하여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하며 여사님께 진심으로 위안을 드린다. 김대중 선생님은 나의 오랜 벗이다. 그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우리는 21세기를 향한 중한협력동반자 관계의 구축을 선언하였다. 중국 인민은 중한관계 발전을 위한 그 분의 중요한 공헌을 잊지 못할 것이다." - 장저민, 중국상하이교통대학교 전기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전국인민 정치협상회의 위원, 중국 국무원 전자공업부 부장과 장관, 중국 상하이시 시장과 당 서기장, 중국 공산당 총서기,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 수뇌부 상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팩스로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시진핑,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와 중국 부주석
"김대중 대통령께서 한중우호를 위해 적극적인 기여를 해주셨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 21세기 협력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지금의 좋은 한중관계는 각하 재임 중의 노력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이다. 퇴임 후에도 양국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해주셨다.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 성과에 만족하고 있다. 이것은 양국이익에 부합하고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발전에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한국과 함께 한중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노력 할 것이다. 각하의 높은 식견에 감사하고 귀중한 의견들을 신중히 검토하겠다. 앞으로도 귀한 의견 들려주시기 바란다." - 시진핑, 칭화대학 화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 및 현재 중국 제19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교장과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 중국 부주석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있다ㅣ2010년 5월 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중을 했을 때 나눈 대화의 내용 중
조지프 바이든, 제47대 미국 부통령으로 전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김대중 대통령의 지도력으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 커다란 변화를 이룩한데 대해 존경을 표한다.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여러가지 어려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 과감한 결단을 내린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 - 조지프 바이든, 델라웨어대학교 사학 학사, 시라큐스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민주당 연방상원의원과 와이드너대학교 법학 교수,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제47대 미국 부통령이다ㅣ2001년 6월 12일 워싱턴을 방문한 한승수 외무장관과 나눈 대화의 내용 중
호콘 망누스, 노르웨이 왕세자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그 자체를 살아오신 분이다." - 호콘 망누스, 노르웨이 왕세자ㅣ2008년 9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이명박,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작년 11월 워싱턴에 모인 G20 정상들은 금년 1/4 분기말 경이면 세계가 금융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 당시, 정상들은 세계 경제 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기 위한 경기부양대책, 특히 재정확대 정책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 각국은 아직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힘든 여정을 밟고 있고, 금융기관들도 투자자들의 신뢰를 다 회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최근 미국 정부는 은행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온 부실자산 매입을 위한 포괄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이 성공하기를 모든 분들과 함께 바라면서, 동시에 모든 국가들이 경제 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지도자들이 현재의 어려움에 대한 창조적인 해법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원활한 유동성 창출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다음 주 런던 G20 정상 회담에서는 금융위기 해결, 특히 금융기관들의 부실자산을 제거하는데에 논의의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말 금융위기를 겪고, 또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해낸 한국은 전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을 가지고 있다. 세계 지도자들이 부실자산 처리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경험을 토대로 한 다음과 같은 원칙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첫째, 시장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점진적인 조치보다는 과감하고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 한국의 성공적인 처리 경험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정부는 부실자산 정리와 금융기관 자본 확충을 위해 1997년에서 2002년에 걸쳐 1997년 GDP 대비 32.4%에 해당하는 1,276억달러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조성하였다. 둘째, 한국의 경험에 따르면 은행 자본 확충과 부실채권 정리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적용하는 것이 긍정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국은 자산관리공사(KAMCO)라는 특화된 독립기관을 설립하여 부실채권을 처리하고, 한편으로는 예금보험공사(KDIC)로 하여금 금융기관의 자본확충 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KAMCO는 부실자산을 매입하고 자산가치가 회복되면 관련 금융기관들과 손익을 정산하였습니다. 2002년까지 장부가격으로 851억달러에 해당하는 부실자산을 309억달러에 매입하여, 이후 공매, 직접매각, 국제입찰, 증권화, 출자전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민간투자자들에게 재매각하는 방식으로 2008년까지 339억달러를 회수하였다. 셋째, 부실자산 정리는 정치적으로 수용될 수 있어야 하며 이해관계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최소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주주와 경영진, 근로자, 기타 자산 보유자들이 공평하게 부담을 분담하도록 하는 특별 메커니즘이 설계되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시스템차원에서 중요한 기관이나, 자본 확충 이후 정상화가 가능하다고 판단된 금융기관에만 자본 투입이 이뤄졌다. 넷째, 부실자산 정리 대책들은 시한이 명기된 원상회복 전략과 인센티브(built-in exit strategies and incentives)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정부가 보유한 법인의 주식은 민간 부문에 매각되어야 한다. 또한, 은행 국유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일시적인 조치로 취해져야 한다. 다섯째, 정부가 부실정리를 주도하되, 민간자본도 적극 참여토록 해야 한다. 분명한 점은 그 과정 자체가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험은 잠정적인 기간에 정부가 문제의 금융기관과 합의한 가격에 부실자산을 매입하고, 재매각 후에 해당 금융기관과 손익을 정산하는 것이 유용한 방안임을 시사한다. 오늘날의 부실자산 문제는 부외자산과 연계된 파생상품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사례와는 다른 측면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사후정산방식이 더욱 더 유용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섯째, 부실자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모든 형태의 금융 보호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들이 부실자산 처리를 위한 공통의 해법을 갖고 있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리고 국가사이의 일상적 자본 흐름을 왜곡하지 않도록 하는 국제 공조 노력이 필요하다. 이 같은 취지에서 G20 재무장관들이 한국의 제안을 반영한 ‘금융시스템 정상화를 위한 기본원칙’을 채택한 것을 환영한다. 이같은 원칙들이 준수되지 않는다면, 거시경제적인 경기부양책도 심각한 경제 위기 극복에 큰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명박, 고려대학교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현대건설에 입사, 인천제철 등 현대그룹 10개사 대표이사 사장 회장을 지냈고, 제14대와 제15대 국회의원,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아태환경 NGO 한국본부 총재, 제32대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고 국민훈장 석류장, 금탐산업훈장, 조선일보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 전국경제인연합회, 매일경제신문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그룹 fDi 세계의 인물 대상, 미국 타임지 환경영웅상, 국제로타리 영예의 상, 생물다양성협약 공로상, 자이드 국제환경상 글로벌 리더십 분야, 덴마크 코끼리 훈장을 받았고 한국체육대학교 명예박사, 조지워싱턴대학교 객원연구원, 서강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국립유라시아대학교 명예박사, 몽골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 목포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명예박사, 조지워싱턴대학교 행정학 명예박사, 파리제7대학교 명예박사, 아디스아바바대학교 환경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현재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있다ㅣ2009년 3월 27일 월스트리트저널에 실은 특별기고문에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한국은 어떻게 금융 위기를 해결하였나? - 세계가 우리의 과거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는 제목의 글로 올린 내용 중
노무현,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은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다. 또 그는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김대중을 김구와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을 한다." - 노무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나왔고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알제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원광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를 받았고 이후 제17회 사법시험을 합격해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대전지방법원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후, 제13대 국회의원, 민주당 최고위원, 제15대 국회의원,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카타르 독립대훈장과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ㅣ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 <여보 나좀 도와줘>의 내용 중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다는 슬픈 소식에 접하여 이희호 여사와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애석하게 서거하였지만 그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남긴 공적은 민족과 함께 길이 전해지게 될 것이다." - 김정일,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을 전공했고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 선전선동부 과장과 부부장, 문학예술부 부장, 선전선동담당 비서, 정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으며, 김일성 사후 북한의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ㅣ2009년 8월 19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팩스로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하토야마 유키오, 제93대 일본 총리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근대화에도 큰 공헌을 하신 분이다. 김 전 대통령의 비보를 듣고 놀라움과 슬픔을 가눌 수 없다." - 하토야마 유키오, 도쿄대학 계수공학 학사와 스탠퍼드대학교경영대학원 공학부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일본 도쿄공업대학 조교수, 센슈대학교 경영학 조교수를 지냈고 자민당에 입당하여 사키가케당 의원, 민주당 의원과 대표, 간사장과 제27대 일본 민주당 대표, 제93대 일본 총리를 지냈고 미국 타임지 영향력 있는 100인로 선정되었다. 현재 홋카이도 9지역구 중의원과 글로벌 서스테이너빌리티 위원, 민주당 최고고문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발표한 애도사의 내용 중
노태우, 제13대 대통령
"수없는 난경을 겪어오면서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고 관찰력이 예리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 노태우, 육군사관학교를 나왔고 조지워싱턴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아시아협회 올해의 정치인상을 받기도 했다ㅣ그가 저술한 회고록인 <노태우 회고록>의 내용 중
전두환, 제11대,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 우리 전직들이 제일 행복했어요. 5년 재임 기간 동안 청와대 10번 가까이 초대 받아가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 전두환, 육군사관학교 학사학위를 받았고 육군고급부관학교, 미국육군보병학교를 수료했고 페퍼다인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앙정보부 인사과 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제9사단 29연대장, 제1공수특전단 단장, 청와대경호실 차장보, 국군 보안사령관, 제10대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육군 대장, 제11대와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동성훈장을 받았다ㅣ2009년 8월 1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하자 문병을 가서 했던 말의 내용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 제71대 일본 국무총리
"김 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노벨평화상을 받는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손색없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양국 관계 개선에도 큰 기여를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도쿄제국대학교를 졸업했고 일본 과학기술청 장관과 국토교통성 장관, 방위청 장관과 제71대 일본 국무총리를 지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애도사로 했던 말의 내용 중
베르나르 쿠슈네르, 국경없는 의사회를 설립했던 프랑스 외무·유럽 장관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쳐 지칠 줄 모르고 투쟁한, 용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이다." - 베르나르 쿠슈네르, 인권운동가 출신으로 프랑스의 정치인, 외교관, 의사로 국경없는 의사회를 설립했다. 현재 프랑수아 피용 내각에서 외무·유럽 장관을 맡고 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발표한 성명의 내용 중
아소 다로, 제92대 일본 총리
"1998년 10월 방일시 오부치 게이조 당시 총리와 '일한 공동선언'을 발표하여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일한 공동개최 등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일한파트너쉽을 위하여 진력하시고 그 후 일한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삼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적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한다." - 아소 다로, 스탠퍼드대학교와 런던대학교 대학원을 조업하고 가쿠슈인대학 정겨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아소 시멘트 대표이사 사장, 일본 자유민주당 외교 부회장과 부간사장, 국무 대신 경제기획청 장관과 경제재정정책 담당, 자유민주당 정무 조사회장, 일본 총무 대신과 외무대신, 일본 자유민주당 간사장과 총재, 제92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ㅣ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팩스로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세계 각국 지도자들을 보좌하는 참모들의 평가(12)>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부 장관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집권시절 투옥도 됐던, 여러 면에서 칭송받는 인물이다. 온화한 태도의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대북 포용정책이 결국 북한 정권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이상주의자(idealist)였다." - 콘돌리자 라이스, 덴버대학교 정치학 학사와 노트르담대학교대학원 정치학 석사, 덴버대학교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합동참모본부 전략핵정책 자문관과 국가안보위원회 소련, 동유럽 국장과 대통령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스탠퍼드대학교 부총장,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과 국무부 장관을 지냈다ㅣ그가 저술한 자서전 <더 없는 영광-워싱턴에서 보냈던 몇년간의 기억>의 내용 중
이언 켈리, 미국 국무부 대변인
"김 전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에 영감을 일으킨 지도자이자 상징이었다. 한반도 평화에 기여해 2000년 노벨상을 받기도 했다." - 이언 켈리,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그는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세르보크로아티아 어, 터키어를 할 줄 알며, 유럽 안전 보장 협력 기구 대표로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조의를 표명하며 했던 말의 내용 중
마이크 디버, '레이건 신화'의 주역으로 전 미국 대통령 특보
"김 대통령은 메이크 업이 필요 없는 논픽션 드라마의 인생을 살아왔다. 이름 석자만 갖고도 국제사회에 영향을줄 수 브랜드이다." - 마이크 디버, '레이건 신화'의 주역으로 전 미국 대통령 특보ㅣ2000년 6월 20일 매일경제에 워싱턴 김상협 특파원이 기사로 밝힌 내용 중
노르베르트 람머트, 독일연방하원의회 의장
"독일에서 김대중 대통령 만큼 영향력 있는 한국인은 없다." - 노르베르트 람머트, 보훔대학교 사회학 학사를 받았고 독일연방하원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현재 독일연방하원의회 의장으로 있다ㅣ2008년 8월 28일에 한국을 방문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도널드 그레그, 전 CIA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현재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 강력한 민주주의를 가져왔고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화해를 향한 중대한 진전을 이뤄냈다. 지난주 서울을 방문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의 병실을 찾아 이희호 여사에게 위로를 전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 50여년간 아시아와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 3명이 바로 김 전 대통령과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였다. 나는 올봄 김 전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대북 정책에 대해 조언을 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김 전 대통령이 이런 서한을 작성, 지난 5월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한시 그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방북을 권유한 것으로 들었다. 이는 그가 최근까지도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난주 서울 방문 때 많은 한국인에게 '김 전 대통령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를 물었더니 모두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특히 한 전직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한국 국민과 유가족들이 김 전 대통령의 삶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용감했고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투쟁했으며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는 한편 햇볕정책을 통해 대북관계에 큰 진전을 이뤘다." - 도널드 그레그, 윌리암스대학대학원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CIA에서 근무하며 CIA 한국지부 총책임자, 미국 국가안보회의 위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과 주한 미국대사관 대사를 지냈으며 한미협회 한미우호상을 지냈다. 현재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연합뉴스와 가진 전화 통화의 내용 중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로 현재 에모리대 명예총장
"세계와 함께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삶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깊은 존경을 표한다. 대통령님의 용기와 비전은 한국의 민주주의 완성과 한반도 평화를 앞당겼다. 하나님께서 대통령님을 앞으로도 계속 축복할 것임. 세계에 영감을 주는 대통령님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 예일대 경제학 학사와 석사, 박사를 받았고 미 육군 방첩대 요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했으며, 감리교 목사 안수와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또한 벤더빌트대 교수와 에모리대 신학대학장과 에모리대 총장을 지냈으며,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현재 에모리대 명예총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6일 비서실이 공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과 건강위기에 대해 제임스 레이니가 건강회복을 기원하는 메세지라고 밝힌 내용 중
"한국은 위대한 지도자, 용감한 애국자, 두려움을 모르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잃었다. 세계는 희망의 상징, 자유와 인권의 영웅을 잃었다. 그 분은 진정한 위인이며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가지셨지만 그 보다 더 큰 영광을 가진 분이다. 대통령님은 존재만으로도 힘의 상징이자, 도덕적 용기의 현현이었다. 그가 떠나면서 남긴 상실감은 절대 채워지지 않을 정도로 크다. 우리 부부는 너무나도 사랑했고 존경했던 친구를 잃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 한국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끌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 예일대 경제학 학사와 석사, 박사를 받았고 미 육군 방첩대 요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했으며, 감리교 목사 안수와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또한 벤더빌트대 교수와 에모리대 신학대학장과 에모리대 총장을 지냈으며,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현재 에모리대 명예총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9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하르트무트 코쉭, 독일연방의회 의원이자 전학독친선협회 회장
"김대중 대통령은 독일의 가장 큰 친구였으며, 아시아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표본이었다. 독일은 남북화해협력으로 한반도 정세를 변화시킨 김 대통령의 정치적 역할과 정신을 지원하며, 김 대통령을 민주주의, 정의, 평화의 용사로 기억하고 있다." - 하르트무트 코쉭, 독일연방의회 의원으로 연방재무차관, 전한독친선협회 회장ㅣ2010년 11월 4일 동교동 사저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이희호 이사장과 나눈 대화의 내용 중
모리 요시로, 한일의원연맹 회장
"총리 대신 재임시의 방한 및 각하의 방일을 포함하여 김대중 각하는 많은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21세기를 향한 일한관계의 비전과 북한 문제 등에 관하여 솔직한 의견교환을 하였다. 김대중 각하께서 일한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던 것은 인상깊게 남아있다. 생전의 훌륭한 모습을 추도하며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 모리 요시로, 와세다대학교 상학부 학사학위를 받았고 일본 문화 교육부 장관, 제32회 일본 이시카와현 의원, 일본 내각 관방장관, 제105대 일본 문화 교육부 장관, 제56대 일본 무역협회 통상산업 장관, 일본 건설 교통부 장관, 제19대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제85대 일본 내각 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수교훈장 광화대장을 받았다. 현재 일본 이시카와현 하원의원이자 한일의원연맹 회장으로 있다ㅣ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팩스로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고노 요헤이, 일본 중의원 전 의장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활약하신 김대중 각하의 모습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다. 1998년 대통령 취임식 때 특별히 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생애 잊지 못할 귀중한 추억이다. 김대중 각하와는 21세기를 향한 일한관계의 비전과 북한문제 등에 관해 솔직한 의견교환을 하였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소중한 친구가 먼저 떠나는 일에 대해 깊은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 고노 요헤이, 일본 중의원 의원, 중의원 의장, 부총리, 외무 대신, 내각관방장관, 과학기술처 장관, 자유 민주당 총재, 신자유클럽 대표를 지냈으며 일본 헌정 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의원 의장을 맡았다. 그는 내각관방장관을 맡고 있던 시기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최초로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ㅣ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팩스로 보낸 조전 전문의 내용 중
에곤 바르, 전 독일 경제협력부 장관
"김대중 대통령이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최악의 분단을 극복해 냉전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평화와 긴장완화,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온 것이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다. 남한과 북한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족에게 미래의 희망을주는 정책을 끝까지 추진하는 김대통령의 끈기에 탄복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은 이에 대한 국제적 인정의 증표이다." - 에곤 바르, 빌리 브란트 총리의 최측근으로 밑에서 총리실 차관으로서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책임을 맡았으며,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옛 서독 동방정책의 실무 부서인 특임부 장관을 지냈다. 독일 경제협력부 장관을 지냈다ㅣ2003년 2월 말쯤 주독 한국대사관이 에곤 바르에게서 받은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에 즈음해'라는 짧은 서신의 내용 중
다이안 파인스타인, 미국 캘리포니아 민주당 상원의원
"역사 속의 인물인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비전을 가진 분을 지도자로 가진 한국민은 행복하다." - 다이안 파인스타인, 스탠포드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샌프란시스코 감리위원회에 선출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민주당 상원의원이다ㅣ2007년 9월 17일부터 29일까지 총 12박 13일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했던 평가의 내용 중
에리크 손하임, 노르웨이 환경개발부 장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의 개인적 영웅이다. 다른 나라에서 하지 못했던 평화에 대한 많은 일을 하셨다." - 에리크 손하임, 노르웨이 환경개발부 장관ㅣ2008년 9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