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고 남자 없다지만
딱 잘라 열번찍지 말자~
법 체계가 두 번은 커녕 단번에도 남자를 골로 보낼 수 있을 만큼 가혹하고 투다리 문어다리도 드물지 않은데다 사회적 분위기가 관심을 표현하거나 원치않는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고도의 피곤함을 유발시키는디 어케 열번을 찍을 수 있기나 할까
인연이란 기냥 세번을 스치고도 방향과 진전이 없으면 남남인 거다
기실 될 성 부른 남녀관계는 자리를 같이 한마디 말이라도 주고 받는 세번 안에 충분히 될 것 다 되는 거고 그 세번안에 별 일 없으면 지나치는 주변인 일 뿐 후로도 아무것도 아닐 가능성 백퍼로써 눈빛만 봐도 전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나잇스탠도 더러 있다던데 작금에 열번을 찍어주기 바란다는 것도 열번을 찍는 것도 남자든 여자든 피차를 피곤 무용한 짓이다
더구나 서울사람은 지방살이 답답하다 하고 지방사람은 서울살이 답답하다
토끼와 발맞추는 시골과 인파에 치어 길을 걷는 것도 짜증인 서울임에야 굳이 나이들어 익숙하지 않음을 감수하겠는가
2224년엔 다들 적당적당 누군가를 만나고 그 만나는 세번안에 좋은 짝지들 이루시기를 바람다~
모악산정에서 내려다 본 시골마을
백제와 조선 천년고도 전주를 품은 모악산자락 내고향 구이는 아홉구와 귀이를 지명으로 하고 있다
9의 큰 대덕이 날 것을 땅의 기운으로 하고 있다 하여 구이였다
근래 인물로는 김일성 정일 정은의 시조묘가 모악산에 있고 전두환 일가 음덕에도 묘소가 있다
지금은 거의 소실되고 몇기 남아 있지 않으나 고인돌도 많이 있었던 지역이다
산의 형상은 엄마가 앉아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며 구이쪽이 앞 금산사가 있는 김제평야가 산의 뒤로서 당연히 산신도 여성이라 한다
뒷쪽 지역 김제는 전국 어디든 그렇듯이 순우리말 지명이었다가 일제때 금이 제법 나왔기로 김제로 바뀐 이름이 되었다
산과 강을 끼는 침식충적토에 금이 나는 경우가 많아 전국에 김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이다
국내 유일 지평선이 있는 곡창평야여서 눈 뜨면 시작되는 노동과 뼛속까지 근로가 생활화 된 곳으로 도시와 멀리 안분자족 했다
모악산의 줄기는 전주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르는 황방산으로 이어지며 덕진왕릉 건지산을 들러 마이산을 찍은 후 노령산맥으로 노령산맥은 태백산맥으로 이어 달리다 장백백두산을 이고 곤륜희말라야를 지맥으로 한다
모악산이 여신이므로 그 배우자인 낭군산도 있는 바 7~8km쯤 마주보고 떨어져 엎드려 여인에게 용을 쓰는 지세의 고덕산이라 이름하고 모악보다 100m쯤 낮으나 산의 기세는 장중하다
고덕산에는 백제시대 금산사보다 훨 장엄한 대찰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널부러진 기왓장 외 흔적조차 대부분 멸실되었다
그 건너에 전주의 천년 외성 남고산성의 흔적이 무상한 세월을 초연하여 오늘도 비바람에 젖어들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남동쪽으로 보이는 바위능선이 사진과 같은 남고산성이다
임진 정유난에서 3대첩 못지않게 중요했지만 일제치하를 지나고 유신정부의 호남멸시 전라지역 10개군 강탈병합 시국에서 뭉개고 지워버린 호남방어전들에 대해 산야를 직접 걸으며 회상한 것을 복구해 적을 것이다
정 다시 떠올려 복구하기 귀찮으면 하두 억울해서 망가진 구폰이라도 복구 해야겠고 대강의 흐름만 적으려 한다
경상지역의 방어군은 난의 초반에 거의 궤멸수준의 타격을 입었고 잔여부대들도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 전멸해버렸다
신립장군은 갑옷을 겹처 입어 하나하나가 전차같은 전력인 3천의 기병대를 몰아 말이 거의 없는 보병위주 왜군을 짓밟아 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배수진을 치고 돌격하였다
그러나 조선군 갑옷은 조총탄을 막아주지 못했고 장군포함 어렵사리 재정비한 경상방어부대까지 전멸해버렸다
8도 도원수 권율장군이 호남방어에 치중하여 진주성에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거나 전라방어 관군의 진주성 전투 참전은 없었다거나
8도중 가장 강력했고 잘 싸웠던 호남의병 부대들은 대부분 진주성에 입성했지만 전멸해버려서 이후 호남의병 활동이 거의 없었다거나
구례 곡성 남원에 나타난 일단의 왜군에 놀란 호남관군들이 도망치기 바빴다가 명군이 남원성에 지원군을 보내자 비로서 명군과 함께 응전에 나섰지만 왜군 스스로 부산포로 회군을 했다거나 등 헛소리를 퍼뜨려 놓는 자들의 저의는 진정 무엇일까
진주성 전투를 기술하는 내용들은 수십년 동안 시기별로 천차만별 달라졌으며 그간 1차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주력으로 참전했었던 호남군대의 역할이 축소멸실 되오는 과정을 지켜봐왔고 십여년 전부터 억울함을 써서 올렸던 바 있었다 그나마 근래 호남방어전을 기술하는 뜻있는 인사들이 생겨나 반가운 일이다
1차 전투에도 호남관군이 대거 참전하여 승전했으니 논외로 하고 2차 전투는 함락되어 몰살당한 조선인이 6만명을 훌쩍 넘었다
이미 궤멸수준의 타격을 입었던 경상방어군중 진주성 자체의 4천과 거제 밀양 사천 고성 의령 등지에서 입성한 군사가 최대 1천500 인이었고 호남의병이 약 1천여명 합 6~7천의 군사와 인근 백성이 약 3만 이상으로 호남관군의 참전은 없었다 라고 적은 헛소리가 태반이다
그런대 실제적으로는 2차 전투에서 전사한 관군이 약 3만 5천으로서 경상방어군과 호남의병을 제외한 나머지 약 2만 7천 가량의 희생된 관군은 어데서 온 누구였겠는가
승전한 왜군이 취한 조선군의 수급은 성주 서예원 장군님 포함 2만이 훨씬 넘었고 남강에 떠내려간 전사자도 셀수없이 많았으며 포로로 잡힌자들도 너무 많아 다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왜군은 기록하고 있다
본래 왜군이 호남공략에는 뜻이 없었고 1차 진주성 전투에 패전했던 앙갑음을 믁적했다는 터무니 없는 헛소리도 판치고 있지만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주력이자 선봉부대였던 가등청정 소서행장까지 거의 모든 장군들과 15만 왜군중 9만 5천이 진주성앞에 집결한 것이 진주성만을 목적했었겠는가
한성과 한성이북에서 조명연합군에 대치하던 약 4만 왜군을 제외한 경기남부와 충청지역 왜군들도 금강을 도하하여 호남군대의 본진인 전주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금산군 건너편 금강유역에 약 1만 5천이 집결했었다
호남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인 진주성과 그 주변 4곳의 지원산성을 공략한 9만5천 왜군과 금강연안에 집결한 1만5천 왜군은 호남을 위 아래 양방향에서 협공하려고 진주성을 함락시키려 한 것이다
호남과 영남 접경에 위취하고 호남방어선의 전초기지였던 진주성을 지원하고 금강방어선을 사수하려고 전라도 관군들도 총력을 기울였다
황악산 민주지산 적상산 거창 무주 영동지역 군사들과 전주성에서 급파된 관군들이 금강연안에서 왜군들과 강건너를 마주하였고 진안 장수 임실 당시 전라도였던 하동 산청 함양 남해군과 다도해 연안 일원의 산성들에 속한 관군들은 대부분 진주성을 지원하여 입성하고 있었으므로 전라도 내륙의 성들이 거의 다 비어있었다
애써 진주성을 함락시켰고 조선의 군량과 병력보급의 병참지역인 호남을 함락시키지 않고는 승리할수 없는 왜군들이 호남을 버리고 돌아갈 리도 만무하였다
왜군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본토의 증원을 받자 곧 진주성 성문을 나서 섬진강 줄기를 넘으면 곧바로 호남땅으로 남원 전주 순천성으로 진군하면서 일찌기 섬진강을 넘자마자 일부는 여수 순천 강진 목포방향으로 남해연안을 따라 진격하여 무안 보성 광주 남원으로 거슬러 오르도록 하였고 남은 7만 5천은 남원과 전주성을 향해 진군했다
함양과 산청구간 사이에서 왜군의 일부는 지리산을 돌아 구례와 남원을 향해 두갈래를 나눠 약 2만여명이 갈라졌다
남은 5만 5천 가량이 전주성으로 진격하였으며 금강을 도하하여 전라도 금산군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기 위해 모인 충청지역 왜군들과 전주성에서 합세 협공하고 군산 순창 태인 정읍 고창 남원을 휩쓸고 영광 함평 보성쪽으로 공격을 예정하고 있었다
호남군대의 진주성 지원실패 몰살당함으로 인해 호남내륙의 성들이 거의 비었다시피 했었던 중이었지만 왜군의 진격은 호남의 성들을 하나하나 지날때마다 큰 고전을 치러야 했고 진안 운장산 마이산 거치면 전주성을 향하는 초입의 길목인 황석산 전투에서 진격하던 왜군 5만 5천중 약 3만여명이 갑작스럽게 증발해버렸다
사실상 3만이 넘는 왜군 증발이라는 양난 최대의 일본군 피해가 있었음에도 지난 경상 군부독재 정치하에서 멸실되어 버렸고 차라리 우주인 납치설이 타당하달까 그 진상이 전해지길 꺼리는 부류는 어떤 자들일까 궁금하다
당시 황석산에서 55,000왜군을 맞아 싸운 전라병사는 정규 관군들이 대부분 진주성 지원을 나가 복귀하지 못했음으로 1천명 이하의 정규군 외 대부분 인근의 장정들과 의병들이 무장을 했던 2~3천 합 3~4천인으로 추정되고 단 한명의 생존자가 없이 모두 전사해버려서 전화의 참상을 전하는 이도 오랜동안 없었다
선조는 전후 논공행상에서 자신을 따라 의주로 피란길을 다니며 명군을 참전시킨 공을 최우선으로 논공행상 하였고 실전에서 싸운 장수들과 군사들은 논공에 밀려 등한시 하여 큰 불만을 만들었다
승병들과 의병들은 극소수만 전공에 이름을 올렸을뿐 거의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억불정책은 오히려 심화됐던 이유로 이후 호란 등에는 민중들이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는 일이 사라져버렸다
하물며 단 한명의 생존자도 남지않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황석산 전투에야 누가 있어 주목했을 것인가
황석산 전투에서 3만명을 넘게 잃은 왜군은 운장산을 지나고 진안고원을 넘고 3500외군이 죽은 웅치등을 지나는 고비마다 전주 임실 진안지역 연합군과 호남의병들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전력의 손실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불구하고 금강전선의 왜군과 전주성 조우를 맞추기 위해 전주 인근 안행교까지 진출했지만 전주 외곽의 동고산성과 남고산성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군산으로 우회 서해연안을 짓밟아 부안 정읍 순창 남원 쪽으로 진군하여 명군의 남원성 지원에 대비한다
전주성 관군들은 군산으로 우회한 왜군을 뒤쫒기 보다는 금강에서 왜군 1만 5천과 대치한 조선군을 지원하러 금산군으로 증파하면서 군산으로 우회한 왜군이 되돌아올 것에도 대비하였다
진주성에서 진출한 왜군이 전주성 공략을 포기하고 우회하자 금강도하 작전 중이었던 충청일원 경기남부에서 모여 든 왜군도 금강도하를 포기하고 평양이남 수도권에서 조명연합군과 대응하던 도성인근 왜군을 지원하러 회군하였고 조명군이 남윈성 등 호남을 지원함으로써 전라도 내의 왜군을 공격하는 것을 차단하려 하였다
남원성 전투의 치열했음은 의병 700인도 모두 전몰하여 전후에야 따로 한데 모아 장사지냈고 교룡산성 입구에 칠백의 총으로 지금도 자리하고 있어 소싯적 입산하여 교룡산성 내에 한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던 나는 토박이인 나로서는 호남군대가 도망치기 바빴고 명군이 지원병을 보내자 왜군 스스로 부산포로 회군해버렸다는 글 따위에 분개하지 않을수 없다
그 외에도 지금의 전남지역에서 왜군에 맞선 선얼의 희생을 모독하지 말 것과 양난때 호남군대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는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여 놓는 자들이 진심 한나라 한국민이 아니길 바랜다
1300미터 높이 황석산성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워낙 적었던 바 모두 전사해버려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이순신 수군과 더불어 왜구의 퇴각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전투였다
합방 45년과 유신정부의 호남 10개군 강탈 및 훈요10조의 위변조 영구집권을 위한 지역감정 조장의 박정희 18년을 격으며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임란 재란의 분수령이었다..
프사로 쓴 사진한장만 남고 칼끝처럼 날카로운 산정의 사진도 모두 잃어버린 글..때되면 망가져 버리는 핸폰을 한하나니
한마리 독수리 되고 가루라가 되어 그날에 군영기가 휘날렸을 황석산 최고봉을 끌어안고 선얼의 넋을 위로하였다 ~
(주요사항을 빠뜨려 보충)
일본측에선 황석산 전투중 사라진 약 3만~ 3만 5천의 왜군들이 서로 군공을 다투다가 아군끼리 전투가 벌어져 대량살육되었다 한다 ..
그럼에도 책임있는 왜장이 처벌받았다거나 그런 것은 없으며 그러한 기록을 내 눈으로 본적도 없다
설사 기록이 존제한다고 해도 이미 진주성을 출발하여 두 차례 군사를 나눠보낸후 황석산의 조선군과 전투중 자기들끼리 한쪽을 몰살시켰다는 것은 억만븐의 일 가능성도 없다고 할수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