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에 붉은 곰팡이 [김용만]
감잎이 감꽃을 숨기고
감꽃이 떨어지자 푸른 감도 숨겼다
푸른 감은 햇빛을 보기 위해 사투를 한다
떫은 맛을 숨기고 단아하게 매달려 있다
거꾸로 매달려 사는 감
떫은 감을 한 입 베어문다
떫은 맛이 감잎을 바라본다
점점 배가 부르고 붉어지는 감
나를 울리고 떠난 첫사랑이다
젊은 피가 흐르던 그때
꿈이든 생시든 떨어지고 싶지 않은
붉은 감이 꿈을 꾸고 있다
그리움의 눈부심에 붉은 곰팡이가 낀다
어느덧 감잎은 떠나고 덩그러니 홍시만 남았다
이가 없어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어머니의 간식
저 붉은 홍시가 까치의 부리를 먹고 있다
- 참 다행입니다, 포엠포엠, 2023
물끄러미, 여름 [육호수]
거울에 붙은 모기를 죽이려다
무언가를 죽이려 다가가는 얼굴을 들켰다
웅덩이에 빠져 몸을 휘젓는 지렁이를 빤히 바라보다
깜짝 놀라 지렁이를 건져냈다
정오의 태양은 태양으로 가득했고
손차양을 하다
손등에 난 점 하나를 처음 발견했다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구름에게 하루를 다 내어주어도 좋았다
그해 여름엔
거울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거울 속에 손을 넣어 지렁이를 건져냈다
감감히 잠겨가는 감나무 그늘 아래 앉아
외면할 수 없음은
포기일까 망설임일까 생각했다
몸을 휘젓기도 했다
구름에게 하루를 떼어주고 맞바꿔온 소원을
여름이 다 가기전에
다시 하루와 맞바꿔왔다
-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문학동네, 2023
살(肉) [이재무]
마당을 서성이며 듣는다.
개울에서 기어 나오는 빗소리
감나무에서 튕겨 나온 빗소리
대추나무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밤나무에서 뛰어내리는 빗소리
채전에서 흘러드는 빗소리
지붕에서 통통 튀는 빗소리
우산 위에서 굴러온 빗소리
빗소리들 서로를 밀쳐내고
껴 앉고 스미고 엉킨다.
손 뻗어 빗소리의
뭉클한 살(肉)을 만진다.
빗소리가 깊게 들어와 나를적신다.
소리에 젖은 몸 흘러내린다.
- 서정시학 2022년 겨울호
고수 [박경희]
땅뙈기 쬐끔 떼주면서 심고 싶은 거 심어보라고
뒷짐을 먼 산에 걸쳤다
냉큼 받아든 땅에
고수씨를 뿌리고 밤낮 움텄는가, 한걸음에
잠자는 개를 일으켰다
한나절 멀다 하고 나가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뒤쫓아 나와
뭘 심었길래 꽁지에 불난 듯 드나드냐길래
고수 심었다고 겉절이 해 먹으면 맛나다고
딱새 감나무 가지 꽉 쥔 모습으로
고개만 왔다 갔다 했다
아무 말 않고 돌아서는 뒤끝
흘러들어오던 퉁명
심어도 지 같은 거 심었다고
빈대 냄새 나는 거 심어서
혼자 다 처묵으라고
하수 주제에 고수 같은 소리 허고 자빠졌다고
절에서 나오라고 헐 때 나왔어야지
입맛이 염생이라고
인심 쓰듯 땅뙈기 쬐끔 떼주고
욕만 바가지로 하신
아버지
-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창비, 2019
새벽 [이흥규]
아그덜아, 새복 되얐다.
장딱이 목청을 뽑은 지가 한참 되얐당께!
바다랑 하눌이 지금 쪼개지고 있는 것 잠 봐라.
해님이 바다 너머에서 튀어 터진다.
햇살이 하늘 사방 군데로 화살을 쏘아뿐께
빛을 몽땅 빨아먹은 바다가
새악씨 볼따구니맹키로 뽈구작작허니
연지곤지를 찍어 볼르는구나.
둥근 해가 이마빡을 살짝 내비친께로
어둠이 어느새 내빼부렀다.
아그덜아, 언능 인나거라.
뒤 안 대밭에서는 폴시께 굿판 낫당께!
밤새 뽀시락도 안 허고 잠자던 삐둘기들이
후다닥 푸드덕 날개 춤을 춤시로
뚱실뚱실 얼굴 내미는 햇덩어리 속으로 날아가뿐다.
감나무 가장구에서는 까치가
어서들 인나서 부지런히 움직끼레 보라고
새복잠 웂스시던 할아부지 대신
보튼 지침을 해쌈시로 깨우잖느냐?
아그덜아, 싸게 서둘러라.
언능 세수 허고, 밥 먹고, 핵교 가야쓴당께!
해님이 벌써 솟뚜껑섬 우게 뽈딱 올라 서부렀다.
늑아부지 괭이는 폴새 땅을 백번도 더 팠겄다.
지 몸땡이는 돌볼 틈도 웂시
아등바등 발싸심 해쌓는 부모 생각 혀서라도
느그덜도 얼렁얼렁 핵교당에 가서
선상님 말씸을 부지런히 주서담어야지야.
아, 후딱후딱!
- 어머니의 편지, 생각나눔, 2015
대설 [유현숙]
흰 눈 뒤집어쓴 사람이 골목 끝에 서서
점묘화 같은 하늘에다 호루라기를 불어 호명하는 것만 같아
세제 거품 칠갑하며 설거지하던 손을 앞치마에 닦고
덧신발로 미끄러지며 문을 덜컥 여는데
여남은 알이 달린 감나무가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만 길게 끈다
낯설고 분란한 궁리가 폭설 쳐
내 안에 속수무책의 크레바스 하나 생기는 저녁
캄캄한 섣달 난장亂杖의 대설부待雪賦다
- 몹시, 상상인, 2021
황소가 춤출 때 [황미현]
먼 들판에서 황소가 춤췄지.
처음엔 황소가 아지랑이에 묶여있는 줄 알았지. 묶여있는 아지랑이를
풀려는 줄 알았지. 할머니가 소의 뿔을 타고 춤추는 줄 알았지.
춤추는 황소가 들어간 할머니는 더 온순해지다가 돌아가셨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속에 들어간 황소는 한참 동안 묶여있다가 죽었지. 할머니 제삿날이면 아버지는 혹시 소가 따라 왔을까 싶어 워워 소를 쫓아내는 시늉을 하곤 했지.
멀리서 보면 죽음은
춤처럼 보일 때가 있지.
황소의 춤에 공중을 날아다니시던 할머니. 그 사이로 아지랑이가 섞이고 마을 사람들의 이마엔 손차양이 생겼지. 황소가 평생 묶여있던 감나무는 온순해졌지만, 가끔 바람 부는 날이면 춤추는 황소처럼 미쳐 날뛸 때가 있었지. 떨어진 풋감을 혀에 대면 황소의 입에 묻어있던 침 버캐가 내 혀에 붙곤 했지.
뿔에는 날뛰는 꽃의
발정시기가 있다고 한다.
해거름 묻은 할머니 옷소매에서 날뛰던 황소, 들녘의 바람을 따먹던 까마귀의 떪은 입. 해마다 기일이면 황소와 할머니 이야기가 전설처럼 문밖에 묶여 있곤 했지.
-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1월호
할아버지는 들에 가서 [신철규]
구야, 감꽃 맛있쟤? 너그 할배 무덤가에도 감꽃이 수두룩
하것다, 그날 빨래만 하러 가지 않았으모 그래 세상 베리지
는 않았을 낀데, 까치밥 딸 게 뭐 있다고 감나무에 올라갔는
지 내사 모를 일이다, 그때 우째 집 앞 신작로까지 뛰어왔능
가 모르것다, 눈이 아지랑이가 낀 거맬로 어찌나 어지럽던
지, 온몸에는 히바리가 없고 발은 허방을 밟는 것 같고, 입
에 피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걸 보고는 깜빡 자물실 뻔했
다 아이가, 그 높은 곳에서 널쪘어도 정신이 있었는지 눈으
로 나를 찾으면서 손안에 피범벅이 된 이 세 개를 쥐여줬능
기라, 내사 너그 할배 손을 잡고 웃도 못하고 울도 못하고
가만히 안 서 있었나
묏자리 팔 때도 돌이 어찌나 많이 나왔던지, 들강*이었던
밭이라 그랬것제, 너그 할배가 집채만한 돌을 세 개나 집어
냈는데도 말이다, 어금니 빠진 자리 같은 땅속에 관이 내려
가는데 내는 암시랑토 않았다, 게춤에 들어 있던 이만 만지
작거리고 있었제, 너그 고모들도 다 내리가고 내 혼자 노을
속에 잠겨 있다가 그놈을 뫼똥 귀티에다 안 묻어줬나, 허청
허청 집에 돌아오는데 너그 잔할매가 개복숭맬로 볼이 튼
니 동상을 업고 저수지 짬에서 지둘리고 있더라, 얼라 놀랠
까봐 장지에 오지도 못하고, 고 어린 게 생이** 나가는 거
보고 이캤다 카더라, 할아부지 들에 가더만 안 온다, 할아부
니 들에 가더만 안 온다――
* 돌이 무더기로 모여 있는 골짜기 혹은 평지
** 상여(喪輿)의 경상도 방언.
-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
홍시 [문충성]
메밀잠자리 서너 마리
누렇게 날아다니는
가을날
비쩍 마른 감나무 한 그루
홍시들 가지 가지
찢어지게 익어가고
그늘에 들면 몇 없는
이파리 한 장 한 장 울긋불긋
바람 만들고
홍시 따 먹는 것보다
홍시 따 주시던 외할머니
외로운 생각에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네
외할머니 얼굴 보듯
그때
높은 가지에서
투욱 떨어진다 홍시 하나
서늘하다
- 마지막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16
돌의 뼈 [곽효환]
돌의 뼈를 본 적이 있다
들녘 가득한 감나무 황금색으로 물드는
청도읍성 언저리 석빙고
수백 년 풍장에
홍예虹예로 남은 돌의 뼈대
돌벽 틈새로 혹은
경사진 돌바닥 배수구 따라
물과 풀과 흙이 들고 날 때마다
돌들은 어깨를 걸고 몸을 붙였을 게다
많은 것들이 맺히고 풀리고 흘러갈 때마다
더 가까이 더 깊숙이
서로가 서로의 몸으로 파고들며 견디어온
돌의 뼈대에는 단단한 시간의 문양이 있다
수많은 바람이 실어 오고 실어 간
풍경과 삶이 물결치는 세월의 무늬가 있다
- 너는, 문학과지성사, 2018
면역력 [이진욱]
너에게서 멀어지려고
뒤란 감나무에서 덤으로 태양을 얻었고
부엌 앞에 놓인 우물은 몇 번의 펌프질에 울컥 그리움을 토했다
방에 붙어 있던 부적은 누군가의 따뜻한 배경이었다
도배를 하고 바람소리 몇 구절을 들여놓았다
봄에는 밭을 얼갈이하고 호박 고추 상추를 심고
닭과 오리도 몇 마리 풀었다
문득 귀에 익은 발소리가 찾아오면
푸성귀 뜯어 한 상 내줄 요량이었다
너에게서 멀어지려고
- 달이 당신을 먹는다,시인동네, 2014
무심풍경 [복효근]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 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을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꾹 눌러
표구나 해뒀으면 싶었습니다
- 마늘 촛불, 애지, 2009
시래깃국 [양문규]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 식량주의자, 시와에세이, 2010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1 [배창환]
잘 있었느냐, 이젠 가을이다. 지난 여름 무척이나 보고 싶었느니라. 덥고 쓰라린 여름의 땟자국이 서늘한 가을 강으로 빠져드는 이때, 너는 잠자지 않고 남아서 들창에 비친 감나무 그늘에 놀라, 제 그림자 뚝뚝 흩어놓고 달아나는 가을 기러기의 울음을 듣지나 않는지
얼마 안 있으면, 안타깝게 다만 바라보면서 가질 수 없었던 학창시절을 날려 보낸 회한에 소스라쳐 놀랄 때가 오겠지. 그건 너희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너흰 말하리라, 실로 따가운 햇살과 한겨울의 혹한 같은 나날이었다고,그래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쁨 없이 보내었느냐
줄을 서서 부동자세로, 혹은 밑도 끝도 없는 시험 또 시험, 야간자습하는 너희 어깨 너머로 무너져 내리는 꽃잎들이 너희를 부르고 있음을 안타깝게 뿌리치며 근심 어린 손마디에 연필을 끼우던 너희 모습들을, 나는 안다. 네 친구 순이는 그런 밤마다 침 흘리며 엎드려 자곤 했었지
누구를 위하여도 울릴 수 없었던 너희들의 종을, 언젠가 너희 손으로 우렁차게 울릴 그날이 오리라 오리라. 나는 생각한다. 때때로 알 수 없는 슬픔이 오고, 뜻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까워 가슴 치는 너희에게는 너무 높이 올라가버린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이 눈물 나고, 귀뚜라미 울음이 길게 이어놓은 가을밤이 너희를 몹시도 괴롭히리라
그러나 잠깐이다. 극기를 자신의 양식으로 삼는 사람에겐 확실히 그 어느 것도 무심하게 지나치진 않을 것이어니,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이었다 말하진 말아라. 보내준 편지는 날마다 접어서 저 먼 강물까지 내보냈다가 새로 조금씩 되돌려 받고 있다. 깊어가는 강물 소릴 다 듣기 전에 가을이 가고, 너희가 가고 없는 쓸쓸한 교정을 내 다시는 바라보지 못하리라, 안녕
-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작은숲,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