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언어의 수만큼이나 많은 숫자의 종족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어떤 통계로 보면 그것이 무려 6,000종에 가깝다고 한다. 그토록 많은 종족의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독특한 환경과 지리적 여건 하에서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되면 그들이 살아가며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것과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것을 발견하게 된다. 태어나서 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누구나 어느 마을이나 동네의 한 부분에서 살게 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또 사랑을 하게 되고, 누군가와의 이별이나 죽음에 슬퍼하기도 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누구나 늙거나 병들어 죽게 되고...
누군가는 우리와 비슷한 특성을 가진 민족으로 유럽의 아일랜드 사람인 아이리쉬(Irish)를 꼽기도 한다. 그들도 우리 못지않은 은근과 끈기로 역경의 역사를 살아왔고, 땅이라는 자연의 유산에 그 누구보다도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공통점이라고 말한다. 또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성격과 문화 예술을 애호하고 사랑하는 성향 또한 서로 많이 닮아있다고도 한다. 아일랜드(Ireland)를 방문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나라의 사람들을 극히 막연하게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오랜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과 ‘더불린의 사람들’ 내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소설을 통해서 극히 단편적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직접 여행을 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와 적지 않게 닮아있다는 것을 느낀 적이 몇 번 있다. 그 첫 번째는 인도네시아에서 '누사 뗑아라(Nusa Tenggara)', 즉 ‘동남쪽의 섬들‘이라고 불리는 지역 중에서 롬복(Lombok')이라는 섬이었다. 이 섬은 발리(Bali) 섬의 바로 동편에 위치한 곳으로 밖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발리 못지않게 풍광이 아름답고, ’롬복에서 발리를 볼 수는 있지만, 발리에서는 롬복을 볼 수 없다‘는 캣치프레이즈로 관광객을 유치할 만큼 더욱 독특한 문화와 볼거리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간이 적지 않게 흘렀지만 내가 이 섬을 방문했던 1992년 12월 초만 하더라도 발리에 비해서 그 곳은 한적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사와(Sawah)라고 부르는 논은 경지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구불구불한 논두렁과 함께 어린 시절 내고향의 들판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그 크기는 조금 작지만 우리의 농촌에서 사용하는 낫과 아주 흡사한 기구로 논두렁을 깎고 있는 농부의 모습, 소의 색깔이 회색으로 우리의 한우와는 다르지만 소를 앞세워 써레질을 하는 모습, 인정스럽고 공손해 보이는 사람들의 태도, 무엇보다도 고향과도 같은 정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아낙네들의 모습이었다.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 지역사회였기에 당연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강원도의 찰옥수수와 똑같은 옥수수를 화덕에 구어 먹는 모습을 보고서는 더 없는 내고향의 정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롬복(Lombok)이라는 섬의 이름이 그곳 말로 ‘고추’를 뜻한다는 말에서는 고추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고추를 좋아하는 우리와의 막연한 동질성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롬복섬에서 그들이 보다 더 우리와 닮아있다고 느끼게 된 것은 이 섬의 동부 지역에 살고 있는 사삭(Sasak) 족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고 난 후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들이 화란과 인도네시아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지켜낸 그들의 언어인 사삭어(Sasaks)가 우리의 말과 같이 존칭 구분이 뚜렷하고 존대어가 잘 발달된 언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농경사회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가족제도 하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연장자에 대한 경어의 습관이 그들의 말에 자연스레 투영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지역에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책상다리를 하는 모습 또한 우리를 닮은 점이라면 닮은 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이 평소에는 매우 공손하기도 하고 예의 바르기도 하지만 큰소리를 내거나 서로 다투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다른 지역의 인도네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그곳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기도 하도 때로는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질이 급한 다혈질의 우리와 닮은 점이 또 하나 발견된 셈이었다.
롬복은 과거 이들보다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있던 발리의 침공을 받기도 했다. 또 그 섬사람들은 그 일부가 발리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기도 했다. 발리섬과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섬의 서부지역 사람들 중에는 종교의 힌두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동부의 사삭족들은 대부분 그들 전래의 토속신앙에 이슬람과 힌두교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웨투 텔루(Wetu Telu)'라고 하는 그들의 신앙은 이슬람의 유일신 교리를 무시하고 조상에 대한 경배, 자연신에 대한 숭배,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등 우리 전래의 토속신앙과 많이 닮아있는 듯했다.
그들의 가옥 형태는 짚으로 지붕을 엮은 것이었다. 그 형태가 과거 우리의 초가집과는 적잖이 달랐지만, 집 문 앞에 달려있는 소 방울의 모양 만큼은 우리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소가 목에다 걸고 다니는 나무로 만든 쇠방울에는 ‘Sasak Dulen'이라는 글씨가 새겨 져 있었다. 그 쇠방울을 출입문에다 달아놓고 그것을 흔들어서 사람이 왔다는 신호음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께로톡(Kerotok)‘이라는 이름의 이 소방울에 적혀있는 ’Sasak Dulen‘이라는 말은 오리지날 사삭, 즉 ’사삭의 토속품’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그들은 그들의 말과 전통을 그렇게도 보존해오고 있었다.
저녁 초대를 받아 방문한 그곳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 댁은 그곳의 기준으로도 그리 윤택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성스레 차려서 내온 여러 가지 음식들이 마치 내 고향의 냄새를 풍기는 듯 소박했다. 그들의 몸가짐 또한 공손하고 조심스러웠다. 무엇인가를 더 대접하고 싶어 하는 모습의 교장선생님 사모님의 모습에서는 바로 나의 어머니와도 같은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사삭족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동부 롬복의 도시 스롱(Selong)에서 비행기를 타야할 섬 서부 도시인 마타람(Mataram)으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우리와 닮은 또 하나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쌀 속에 섞여있는 작은 지푸라기나 뉘를 골라내기 위해 키질을 하고 있는 아낙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둥근 모양의 키 모습이 우리의 것과는 달랐지만 키질을 하는 아낙의 리드미칼한 몸의 율동은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200여의 숫자에 이른다고 하는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 중에서 우리와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는 종족은 슬라웨시(Sulawesi) 섬의 마나도(Manado)족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얼굴 외양의 모습마저도 우리와 비슷해서 우리 교민이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간혹 결혼을 하는 경우에 이 종족의 여성들을 배필로 맞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고장에는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는 가질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비교적 가깝게 우리와 비슷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바딱(Batak) 족이 사는 수마트라(Sumatra) 섬의 북부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함께한 1993년의 여름휴가였다. 북부 수마트라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메단(Medan)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며칠간의 그룹투어 중에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바로 바딱족의 생활과 문화였다.
바딱족은 수마트라섬 최대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메단에서 동남쪽으로 180Km쯤의 거리에 있는 ‘토바(Toba)’라는 칼데라 호수를 중심으로 비교적 폭넓게 흩어져서 살고 있는 종족이다. 인도네시아 북수마트라주의 주민이 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또다시 까로(Karo), 빡빡(Pakpak), 토바 바딱(Toba Batak) 등 5개의 종족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그곳에서의 나흘 동안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가이드는 여행자 속에 들어있던 한국인들을 인식했던 때문인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문화사회적 관점에서의 관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몇 차례인가 한국인과 그곳 바딱족 사람들과의 공통점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한편 우리 한국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가이드가 설명해준 공통점 중의 그 첫 번째는 바딱족 사람들이 한국인들과 같이 매우 열성적인 자녀에 대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에 비해 교육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는 물론 중앙으로의 진출도 더 활발하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공통점이라고 언급한 것은 토지에 대한 그들의 애착이 매우 유난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죽으면서 그의 자손들이 그 땅을 팔아먹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 그들의 묘지를 그 토지에다가 만들 정도라는 것이었다. 실제 길을 지나치면서 논이나 밭의 귀퉁이 부분에 묘지가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농경사회의 경제사회여건상 농토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어느 사회에서나 그 중요성이 높다고 할 수 있었으나 그들의 농토에 대한 집착은 무척이나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부류의 바딱족 중에서도 그들 전통의 생활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동남아지역 최대의 화산호수라고 하는 토바호 주변에 살고 있는 토바족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들이 같은 호수를 부르는 이름은 그들 말로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의 ‘Tapian Nauli'라고 하는데 지금 불려지고 있는 이름은 이곳에 오랜 동안 힘을 미쳤던 아랍의 영향으로 아랍어로 역시 ’아름답다‘는 뜻의 ’Taiva'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는 각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고스란히 유지해오고 있는 곳이 많지만 오랜 외세의 영향을 받을 흔적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바딱이라는 종족의 이름만 하더라도 이 말은 이 종족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되뇌이는 ‘신’이라는 본디의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을 지배했던 화란사람들이 이들의 이름을 아예 바딱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서 연유된 것이라고 한다.
호수의 길이가 80Km, 폭이 넓은 곳은 40Km나 되는 바다와도 같이 넓은 호수의 주위와 ‘사모시르(Samosir)'라는 이름을 가진 이 호수 안의 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 방식은 한마다로 우리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의 모습만 보더라도 우선 집들의 방향이 산을 향해 있고, 양쪽 처마의 모습이 삐죽해서 마치 커다란 나룻배의 모양과 같아 보이기도 했다. 또한 흰색과 검정, 그리고 붉은 색으로 칠해진 집의 느낌은 아주 색다른 세계의 이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와 닮아있다고 느낀 또 다른 점 하나는 그들이 인도네시아의 다른 민족들에 비해 조상을 경배하여 모시는 전통이 매우 강하면서도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기독 신앙을 매우 너그럽게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대부분이 사실상 국교와도 다름없는 회교를 신봉하고 있지만 분리 독립을 외치고 있는 수마트라섬 끝단의 아체(Aceh) 지역과 북부 수마트라지역 만큼은 기독신앙이 보편화되어 여기저기에서 교회당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3.9)
첫댓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곳에서 숙명처럼 살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지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일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 굴레를 벗어나기도 하지요. 세계속의 한국, 한국속의 세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 사는 곳은 똑 같아요. 푸른 눈과 오똑 솟은 코를 가진 서양인을 처음 보았을 때 너무 신기했었지요. 예닐곱살 쯤이었을 때였으니...아마도 미국인 선교사였던 것 같았는데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지요. 그가 나와 같은 사람인지 궁금했었거든요. 성인이 되고 외국문물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사람 사는 모습은 똑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이처럼 여행은 사유의 폭을 넓혀주는 것 같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