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기대여료 체불이 끊이지 않아 대여업이 고사직전이다. 건설경기 하락과 건기공급 과잉으로 가동률이 40%가까이 떨어져 사업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인데, 체불까지 겹치면 대여업자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데, 건설사들이 부도직전 신청하는 법정관리가 체불금 지급을 회피하는 요인이 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건기대여료 체불현황=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시 체불신고센터에 2011년∼2013년 접수된 임금·하도대·건기대여료 체불 신고건수는 883건. 임금 267건(30%), 하도급대금 147건(17%), 기타 61건(7%)인 반면, 건기대여료는 408건(46%)를 차지했다. 2011년 89건이던 하도대 신고는 2013년 27건으로 대폭 줄었지만, 건기대여료는 143건에서 123건으로 소폭 주는데 그쳤다.
대한건설기계협회(회장 정순귀, 이하 건기협)의 체납신고센터에 접수된 지난해 체불은 284건. 49억6545만5천원 규모다. 월 평균 23.7건, 4억1378만원 수준. 올 2월까지보면, 월 평균 신고건수는 작년의 2배가 넘는 55건. 신고액도 64% 이상 불어난 6억7846만이다.
건설노조 조합원 조사를 봐도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2013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3년 체불경험’을 가진 응답자가 10명중 6명꼴. 1대당 3년 평균 체불금액을 보면, 굴삭기가 1480만원, 덤프트럭이 917만원이었다. 이 액수로 전체 체불금액을 추정한다면, 두 기종만 해도 1조7382억원으로 추산된다.
건설경기가 그런대로 괜찮을 때는 체불을 그런대로 감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체불 이전에 가동률 급락으로 사업유지조차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 건기협에 따르면, 굴삭기 등 7개 기종의 지난해 평균 가동률은 40.71%로 전년(42.52%)보다 1.81%포인트 떨어졌다. 4대강 사업이 한창이던 2011년(49.15%)과 비교하면 8.44%포인트 급감했다.
지난 6년간 기종별 가동률 감소폭을 보면 굴삭기가 7.78%p(55.00%→47.22%), 덤프트럭이 9.44%p(58.01%→48.57%), 믹서트럭이 9.39%p(54.09%→44.70%), 펌프카가 4.07%p(45.00%→40.93%), 기중기가 9.12%p(49.42%→40.30%) 수준이다.
건기대여업자들은 가동률이 건기협 집계치보다 더 낮다고 주장한다. 이주성 경기건기연 회장은 “한달에 10일도 일을 못하는 회원들이 많고, 그 중 신용불량자가 된 건기대여업자가 상당하다”고 토로했다.
▲ 건기업자들이 건기임대료 체불 해결을 촉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법정관리 제도로 건기대여료 체불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와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체불의 종류=건기대여료 체불이 발생하는 종류와 원인은 다양하다. 발주처에서 하도급 그리고 임대차계약까지 이어지는 산업구조 속에서 각 주체들의 이기와 불법이 난무하는데, 그 최종 피해는 늘 밑바닥에 자리한 건기대여자에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불법 하도급계약에 따른 대여료 체불이다.
불법하도급에는 건설업 면허가 없는 자가 건설공사를 맡는 무면허와 하도급사가 재하도급을 주는 다단계하도급이 있다. 3월 서울지방경찰청은 4조200억원 규모의 무자격 시공을 적발했다. 지난해 7월 포천의 한 건설현장에서 세달간 작업을 한 이씨도 2천여만원의 대여료를 받지 못했다. 부도를 내고 사라진 건설사(임대차계약을 한)가 무등록업체였던 것. 건설업을 하려면 건산법 제10조에 따라, 기술능력·자본금·시설·장비 등을 갖춰야 한다. 건기대여업자와 주로 계약을 맺는 전문건설업 대부분(6개 업종 제외)은 2인 이상의 기술자와 2억원 이상의 자본금을 갖춰야 한다.
불법다단계 역시 건기대여료 체불을 양산하는 원인. 발주처-원도급사-하도급사로 이어지는 세 단계를 지나, 하도급사가 재하도급을 주는 경우다. 비용과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 건기나 인력의 조달·관리를 불법 재하도급한다. 건설노조에 따르면, 2013년 3억2천만원 규모의 울산의 한 관급공사 현장에서 불법재하도급이 발생했다. 3천만원에 재하도급을 받은 K씨는 실공사비(4900만원)에 비해 1900만원 적자를 봤고, 건기대여료 체불로 이어졌다. 불법다단계 하도급을 준 하도급업체는 앉아서 2억9000만원을 떼어간 셈.
이런 불법다단계 하도급을 보면 별일이 다 있다. 서경인10협회(회장 조상업)에 따르면, 경기 남부 한 주택공사 현장에서 원도급사 K소장이 하도급사(K소장 부인이 대표이사) 사내이사로 돼 있다. 하도급사가 일을 하고 원도급사는 서류만으로 돈을 번 것. 마찬가지로 불법재하도급 업체대표가 하도급사 이사명함으로 건기임대차계약을 맺기도 한다. 대여료 체불시 책임소재가 불분명해 보상에 어려움을 겪는다.
선급금이나 기성금으로 다른 자금을 돌려막다 이른바 ‘돈맥경화’로 건기대여료를 체불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의정부의 15층 아파트 현장. 8층까지만 올라간 뒤 4개월째 공사가 중단됐다. 분양률 저조로 시행사가 공사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부도가 난 것. 시행사->시공사->하도급사->건기업자(자재업자)로 이어진 연쇄 피해. 박기웅씨도 건기대여료 1200만원을 받지 못했다. “건기 할부금과 이자, 그리고 생계비 등 월 최소 3~4백만원이 필요한데, 체불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설계변경 분쟁도 대여료 체불의 한 원인. 발주처와 원도급사 또는 원·하도급사간 분쟁의 한 원인이다. 한국가스공사가 지난해 발주한 주배관 건설공사 현장에서 하도급사는 설계변경을 요구했고, 원도급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원도급사는 하도대 지급을 미뤘고, 하도급사는 건기업자에게 임대료를 체불했다.
굴삭기·덤프 최근3년 체불 1.7조 추정
△‘법정관리’ 대여료체불 해결의 걸림돌?=대여료 체불이 여러 이유로 이뤄지듯, 건설사도 여러 이유로 부도로 내몰리는데 그 때 건설사(10%이상의 채권을 가진 이도 신청가능)들이 위기를 넘기려고 법원에 신청하는 게 법정관리. 이 법정관리가 체불 대여료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고, 일부 건설사는 채무변제 의무를 피하고 경영권을 되찾는 수단으로 이를 악용하기도해 논란이 되고 있다.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을 파산시키기보다 살려내는 게 단기적으로는 채권자의 이익을 희생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과 채권자는 물론 국민경제 전반에 바람직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또 회사의 인적자원이나 경영노하우를 보호하자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채무를 피하고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허점이 있어 문제다.
법정관리 기업으로 결정되면 부도 기업주의 민사상 책임이 면제되고, 모든 채무가 동결된다. 채권자의 권한행사를 제약하는 것. 체불 건기대여업자 역시 법정관리 기업에 채권을 행사하기가 힘들어 진다. 법정관리 신청을 하면 보통 3개월 정도 심의를 거쳐 결정된다. 기각하면 파산절차를 밟거나 항고·재항고할 수 있다. 이 기간 중 법원의 회사재산보전처분 결정으로 채권자들은 권한행사를 할 수 없고, 건설사주는 채무변제 의무를 피할 수 있다.
법정관리 건설사를 보면, 그 수가 상당하다. 2월까지 시공능력평가 100위권 내인 건설사도 쌍용건설, 동부건설, 울트라건설, STX건설, 동아건설산업, 남광토건, 동양건설산업, 한일건설, 티이씨건설, LIG건설, 남양건설 등 10개나 된다. 전문건설업계도 수두룩하다. 전문건설공제조합에 따르면, 2013년 67개, 2014년 45개 등 2년 동안 112개사에 이른다. 같은 기간 도산한 업체가 2013년 109개, 2014년 70개나 되니, 한해 부도 업체의 절반 이상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셈이다.
건설사들의 법정관리가 늘면서 기업회생률은 높아진 반면, 건기대여업자들의 피해는 늘고 있다.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채권 행사가 제한돼, 체불 대여료를 제대로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여업자 A씨도 그런 경우다. 최근 B건설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법원이 대여료 30%를 제외한 나머지를 면제한다고 통지한 것. A씨는 1년 넘게 작업을 해주고 기름 값과 식비도 못 건졌다.
원주국토청이 발주한 국도 38호선 태백~도계와 국도 6호선 두능~연곡 구간 공사현장에서도 시공사인 동부건설이 지난해 12월 법정관리를 신청하며 12억4천여만원대의 건기대여료 체불이 발생했다. 대여업자들은 동부건설측과 협상중이지만, 보상비율(대략 30%)을 놓고 이견이 커 교착상태다.
법정관리가 이처럼 증가한 것은 건설사들이 손쉽게 채무를 피(면제)하고 도산을 면해 다시 경영권을 찾아올 수 있기 때문. 도산할 경우 설비시설 낭비와 기술력 유출 등 국가경제 전반에 손해를 끼치는 제조업과 달리 건설사는 법정관리가 채무변제의무를 피하고 도산을 우회하는 허점으로 이용되고 있는 셈이다. 한 건기대여업자는 “건설업 면허만으로 기술·설비 없이 재하도급을 하다 경영이 어려워지면 법정관리로 숨을 돌린 뒤 회생을 명분으로 다른 공사를 수주해 빠져나간다”고 말했다.
신영철 경실련 단장은 “정부가 기업보호에만 매달리는 사이 악질 하도급업자들은 법정관리를 악용해 대여료를 떼먹고 있다”며 “건설사 법정관리에 엄격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도급사슬 체불피해, 늘 아래쪽 전가
△해결방법=법정관리 악용 피해를 줄일 개선이 요구된다. 채권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부실·악덕 경영 도피처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 채권단이 회생계획안 수립을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 국가미래연구원이 지난 13일 ‘기업구조조정 개선방안’을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정용석 산업은행 구조조정본부장은 “자금지원이 가능한 워크아웃과 채무재조정이 가능한 법정관리의 장점을 섞는 가칭 크레디터트랙(Creditor’s Track)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회생절차 기간단축이 목표인 현재의 패스트트랙(Fast Track)과 달리 채권자들이 신규자금 지원과 채무조정 등이 담긴 회생계획을 만들게 하자는 것이다. 채무조정 과정에서 채권자간 갈등을 줄이고, 신속하게 기업에 자금을 공급해 법정관리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법정관리로 채무만 탕감받고 경영권을 다시 거머쥐는 데 악용되는 ‘기존관리인 유지’(DIP) 제도 개선 목소리도 나온다. 현행 통합도산법(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 DIP제는 중대 위법사실이 없다면 해당 기업을 잘 아는 기존 경영진을 법정관리인으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부실 책임이 있는 자에게 경영권을 위임하니 악용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2013년 동양그룹, 지난해 동부건설도 마찬가지. ‘피해가 큰 채권자과 투자자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란 비난을 받았다. DIP제 시행 첫해인 2006년에 76건에 불과하던 법정관리 신청건수가 지난해 803건으로 6년만에 10배이상 급증했다. 이병기 서울자주식굴삭기협회장은 “고의적 피해를 준 경영인을 법정관리인 선임에서 배제하고 기존경영자를 법정관리인으로 선임할 때 법원의 특별감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 건기대여업계 내 자구노력이다. 대여료 체불의 원인과 종류가 다양하다 하더라도, 지급보증서를 받아놓으면 대부분 해결할 수 있기 때문. 하지만 지급보증서 발급 실적이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2013년 6월부터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보증서 교부율은 0.3% 수준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