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
최서림
네가 내 이름을 자작나무 숲에다 묻고
눈으로 덮어버렸듯이,
이젠 나도 네 이름을 지운다.
네 이름을 냉동실에다 얼려도 보고
장작불에다 태워도 본다.
그래도 살아 꿈틀거리면
페루까지 날아가서 죽는다는 새에게
물려 보낸다. 그래도
네 이름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 돌아온다면
내가 삼켜버릴 테다.
이미 삼킨 바 있는 네 이름
한 번 더 삼켜버릴 테다.
내 염통 안에서
열두대문집을 짓고 있는 네게 돌려주마.
---반경환 {사상의 꽃들} 15권에서
우리가 타인을 경멸할 때는 쾌락이 따르고, 우리가 타인을 증오할 때는 고통이 따른다. 대부분의 경멸의 대상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처럼 하찮아 보이고, 그들의 마음씨나 행동은 어느 것 하나 배울 것이 없다. 이에 반하여,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은 예수나 부처, 또는 미국이나 일본인들처럼 우리보다 강력할 때가 많으며, 이 강력한 적들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재산이나 주권을 빼앗기고 고통을 겪을 때가 많게 된다. 끊임없이 재물이나 조공을 바치고, 끊임없이 존경과 찬양을 표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상대방을 증오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험담을 퍼붓게 된다.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그 증오의 감정을 발본색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부를 하고, 또 공부를 하며, 자기 자신을 높이 높이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고 어떻게 극락에 갈 수 있는가’라고 부처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도대체 신의 창조질서를 부정하고 유전자 조작을 함부로 해대는 악마들에게 왜, 천벌을 내리지 않느냐’고 예수의 목을 비틀어 버린다. 모든 국경일마다 대사면을 통하여 ‘범죄인 천국’을 만드는 네가 바로 ‘악마’라고 그 녀석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도대체 왜 그렇게 검찰을 두려워하느냐, 네가 바로 악마가 아니냐’고 그 녀석의 목을 비틀어 버린다. 백전백승의 최고급의 전략과 전술은 상대방의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할 수 있는 지혜에서 솟아나오며, 최고급의 지혜를 가진 전인류의 스승들은 모든 인간들을 경멸하지 증오하지 않는다.
이름은 한 인간의 존재 증명이며, 이름이 있기 때문에 너와 내가 서로를 믿고 신뢰를 하며 사귈 수가 있는 것이다. 친교는 우정이며, 어렵고 힘든 ‘인생의 길에서 함께 울고 웃자는 묵언의 약속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까이 있고, 원수도 가까이 있다. 아니, 네것 내것 없이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어느날 갑자기 싸우고, 원수형제처럼 돌변한 예가 이제까지의 모든 우정의 흑역사일 수도 있다. 원수가 그 적대적 감정을 버리고 친구로 된 예는 거의 없지만,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배신을 때리고 원수로 돌변한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할 수가 있다.
최서림 시인의 [너의 이름]은 ‘우정의 흑역사’를 노래한 시이며, ‘너와 나’는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수 없는 원수형제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고, 우정이 배신으로 이어진다. 이기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인 배신은 서로간에 유, 무형의 손실과 상처를 남겼고, 그 결과, 하늘마저도 무너뜨리고 싶은 대분노를 폭발시킨다. “네가 내 이름을 자작나무 숲에다 묻고/ 눈으로 덮어버렸듯이/ 이젠 나도 네 이름을 지운다.” “네 이름을 냉동실에다 얼려도 보고/ 장작불에다 태워도” 보지만, “그래도 살아 꿈틀거리면/ 페루까지 날아가서 죽는다는 새에게/ 물려” 보낼 것이다. 최서림 시인의 [너의 이름]의 시적 문맥으로 보면 그 친구가 먼저 ‘배신의 방아쇠’를 당긴 가해자이고, 그 피해자인 나는 그 배신의 원한맺힌 감정을 어쩌지 못해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최서림 시인의 분노- 증오의 대폭발은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의 연립방정식과도 같고, 매단계마다 그 폭발의 위력은 점점 더 가중된다. “네가 내 이름을 자작나무 숲에다 묻고/ 눈으로 덮어버렸듯이/ 이젠 나도 네 이름을 지운다” 라는 시구는 첫 번째 방정식에 해당되고, “네 이름을 냉동실에다 얼려도 보고/ 장작불에다 태워도 본다”라는 시구는 두 번째 방정식에 해당된다. “그래도 살아 꿈틀거리면/ 페루까지 날아가서 죽는다는 새에게/ 물려 보낸다”라는 시구는 세 번째 방정식에 해당되고, “그래도/ 네 이름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 돌아온다면/ 내가 삼켜버릴 테다/ 이미 삼킨 바 있는 네 이름/ 한 번 더 삼켜버릴 테다/ 내 염통 안에서/ 열두대문집을 짓고 있는 네게 돌려주마”라는 시구는 네 번째 방정식에 해당된다.
최서림 시인의 [너의 이름]은 ‘분노- 증오의 대폭발’이며, 그 폭발과정은 천지창조의 그것과도 같다. 먼지와 먼지가 모여서 가스덩어리가 되고, 이 가스덩어리들의 대폭발로 인해서 수많은 은하계와 은하계의 별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절제하고 싶어도 절제할 수가 없고,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분노와 증오가 있는 한, “내 염통 안에서/ 열두대문집을 짓고 있는 네게 돌려주마”와도 같은 원한맺힌 저주감정을 폭발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의 이름’은 먼지와 먼지이고, 가스와 가스덩어리이며, 모든 만병의 근원이자 대재앙의 진원지라고 할 수가 있다. 강 건너 불구경이 아름답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과 증오와 전쟁의 불꽃놀이며, 우주적인 대폭발이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