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85]내가 무어라고? 이런 선물들을?
아주 오랜만에 농한기를 핑계로, 아내와 6박8일 터키 관광여행을 다녀왔다. 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고향집을 보름 가까이 비운 탓에 여동생들이 일요일마다 ‘친정’을 찾았다. 어쨌든 13일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원 세상에? 선물보따리들이 채곡채곡 쌓여 있지를 않은가. 내가 무어라고? 경향京鄕 각지에서 연말연시라고,나를 생각하며 이런 귀하디 귀한 선물과 정성을 표한단 말인가. 흐뭇하고 행복했다. 서울을 떠난 지 4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나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명절이나 연말연시에 나를 생각하며 정성을 표한다는 게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노부는 그게 못내 신기하고 신통방통한 모양이다.
맨먼저 소포를 뜯었다. 2년 전쯤에 대한민국 국보급 전각예술인을 지기知己로 사귀었는데, 이 친구가 보낸 소품액자가 기똥차다. 올해는 검은 토끼해라던가, 달나라 옥토끼 부부가 우리 가족을 위하여 ‘약방아’를 찧는다는 게 아닌가. 얼씨구나 좋을씨고. 1년내내 책상 위에 놓고 바라보리라. 그 친구의 제자격인 후배도 하나 보내왔는데 “바른 생각을 곧게 쓰시는 우천선생”이라는 문구가 민망하다. 내가 과연 ‘바른 생각을 갖고 곧게 쓰는가?’라는 문제에 부닥치게 만든다. 아무튼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역시 예술가 친구를 사귄 것은 잘한 일이다. 흐흐.
다음에 내갸 가장 좋아하는 책 선물이다. '최창신'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조직위 사무총장을 맡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르게 한 공신이다. 그 공로로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한다. 45년생 띠동갑인 이 분은 2002년 나와 인연을 맺은 고교 동창의 형님이신데, 문화체육부 차관보를 지낸 고위관료이다. 희한하게 필이 잘 통하여 지금껏 소통을 하는데, 당신이 펴낸 『우리말 오솔길』(2022년 1월 애니빅 펴냄, 230쪽, 20000원)이라는 따끈따끈한 책을 내주셨다. 평소에도 느꼈지만 체육인으로서 우리말에 대한 조예가 국어학자 못지 않고, 우리말 사랑이 대단하신 분이다. 경기고에 고려대, 전공은 영문학이다. 대한태권도협회장으로서 태권도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전도사'라 할 수 있고, 대한축구협회 수석부회장도 역임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당신이 나에게 써준 덕담같은 연하年賀의 문구이다. “가슴에 품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멋진 열매가 되어 보람찬 새해를 가득 채우기 바란다”며, 한참 후배인 나를 ‘친애親愛한다’고 하신다. 멋지다! 그 양반의 성의가 최대한 물씬 우러난다. 그러니, 감동을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사실은 읽어볼 만한 글이 아니고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읽어야 할 ‘제대로 짚은’ 좋은 글들이다. 이미 책 나오기 전에 대부분 읽은 것인데도, 실제 책으로 읽으니 더욱 그 의미와 지은이의 우국충정이 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명절 선물이라고 우리집 툇마루에 놓고간 택배 목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 일요일 KBS1 ‘TV 진품명품’ 프로그램을 아실 것이다. 김영준 감정위원은 근현대사에 관련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콜렉터collector이다. 10여년 전 성균관대 홍보위원으로 일하면서 인터뷰로 알게 된 선배이다. 이분이 작년 추석에 이어 또 부산어묵 한 상자를 보내주셨다. 어묵도 벼라별 어묵이 다 있는 걸 처음 알았다. 너무 좋은 선물이다. 큰 며느리가 부산어묵을 그리 좋아한다는데, 꼭 가져다줘야겠다. 10년 가까운 후배인데도 명절 때마다 챙겨주시니 고마운 일이다. 이 선배님 덕분에 ‘진품명품’ 프로에 의뢰인으로 두 번이나 출연하기도 했다.
2. 건설산업교육원 이사가 또 멸치 한 상자를 보내왔다. 재단법인 건설산업교육원은 국토해양부가 위촉한 토목 건축기술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인데, 인문학특강(한국기록유산, 조선의 왕릉과 궁궐, 한양도성 등 주제)을 5년여 동안 한 인연이 있다. 나름 '명강사'였다. 흐흐. 강연이 전면 중단된 팬데믹 초기인 2020년에도 설과 추석때 50만원씩을 보내준 곳이다. 비대면강좌가 3년째 이어지니 막상 대면강좌를 하려해도 예전처럼 수강신청이 적다고 해 씁쓸해 하고 있는데, 이런 선물이 왜 고맙지 않겠는가.
3. 국민연금공단 감사실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게 지난해 가을이었는데, 그곳에서 한과 한 세트를 보내왔다. 아하-, 이런 선물도 있을 수 있겠구나. 뭐, 한 일이야 거의 없어도 좋은 일이다. 홍보자문을 조금 해주었는데, 거마비가 또 쏠쏠했다. 흐흐.
4. 낙향하여 이런저런 인연과 추천으로 자문위원이라는 ‘감투’를 쓴 게 세 곳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자문위원(문재인대통령으로부터 거창한 위촉장을 받았다), 국민연금공단 자문위원 그리고 '오수개연구소' 자문위원이 그것이다. 오수개연구소 회장님이 엉겅퀴 제품을 한 박스 보내왔다. 어허, 그것 참! 아무튼 이것도 좋은 일.
5. 나의 졸문을 108편이 될 때마다 책자로 엮어주는 충무로 인쇄골목의 출판사가 있다. 그 출판사 대표가 보낸 멸치 한 박스. 아무튼 수년간 멸치는 한 봉지도 사지 않고 먹고 있다. 명절 때마다 두 상자를 아내와 함께 까는 재미가 쏠쏠하다. 실생활 먹거리 중에서 멸치만큼 유용하고 쓸모있는 생선이 어디 있으랴. 미안한 데도 군말없이 착착 받아 먹기만 할 뿐이다.
6. 동네 이장님이 전통차 한 상자를 또 선물하셨다. 지난 추석에는 홍삼를 한 박스 선물하더니만, 번번이 받아먹기만 하니 큰일이다. 할 수 있은 거라곤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니, 내가 생산한 땅콩과 옥수수 한 봉지를 드리긴 하지만, 명절 때마다 과분하다. 나도 뭐로든지 보답을 해야 할 터인데.
7. 농한기인 겨울만 빼고 나름 농사를 짓는다며 전주에서 거의 출퇴근하는 꾀복쟁이 친구가 있다. 이 친구도 나를 생각하기 보다는 내 아버지를 생각해 명절마다 고기 선물을 한다. 그제 내려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두툼한 고기를 몇 근 끊어 두 봉지를 사들고 왔다. 그것 참! 나는 무엇을 줘야 할까? 난감하다.
8. 우리 나이에도 비료회사 중역으로 일하는 친구가 여수에 사는데, 이 친구가 달포전 온갖 말린 생선을 한 상자 보냈는데,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굴비 한 두릅을 비롯해 갑오징어, 민어, 서대 등 10여종이 넘었다. 이건 숫제 횡재였다. 아버지께 ‘좋은 것 사드시라’며 봉투를 주고 가는 친구들이 많은 것은, 나를 위하고 사랑해서가 아니고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니, 내가 아버지 덕분에 호강을 한다는 말이 맞다.
9. 명절 선물의 하이라이트는 어제 오후였다. 여수에서 굴수협 간부를 지낸 친구가 '각굴' 한 박스를 보내왔다. 각굴이 무엇인지 아시리라. 쪄먹거나 구워먹어야지, 생으로 까는 것은 너무 힘들다. 우리 동네와 이웃마을의 또래 친구 10명과 함께 장작불에 구워먹고 쪄먹는 맛이라니, 이건 실제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러니 그 마당에 어찌 음치-박자치인 나의 노래가 빠질손가. 나훈아의 '테스형'을 불러제친 오후가 마냥 행복했다. 사진을 찍어 보내줬더니, 자기가 먹은 듯이 배부르다는 댓글이 왔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도시생활이라면 꿈도 못꿀 일이 아닌가. 흐흐.
아무튼, 열흘 넘어 돌아온 고향집 툇마루에 쌓인 각종 선물들을 아버지가 갈무리하면서 “니 덕분에 조선팔도 온갖 좋은 음식은 다 먹어보지만 이런 고마움을 어떻게 갚겠냐?” 말씀하시길래 “걱정마세요. 내가 다 갚을 거예요”라고 했지만, 무엇으로 어떻게 갚을 것인가? 4년째 명절 때마다 ‘한산 소곡주’ 대두병을 한 병씩 놓고 가는 이웃마을 친구가 있다. 하지 말래도 소용없는 게 ‘춘부장 계시는 동안에는 꼭 하겠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모두 다 당신이 쌓은 은덕 덕분. 고기는 내가 가서 당신 친구들 구워 주겠슴다”라는 댓글이 왔다. 아내가 언젠가도 아버지께 말한 게 기억난다. “아버님, 애비가 세상을 잘 살아온 것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친구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는 나이이고 현실인데,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찾아오고 선물도 하는 것을 보면요” 아항- 그런가? 내가 무슨 은덕을 쌓았다고? 모르겠다. 내년에 옥수수와 쌀농사 잘 지어 조금이라도 보내드리는 수밖에. 흐흐.
첫댓글 이 仙藥을 먹고 모두 불로장생하길....
이 그림을 보는 순간 타고난 藝人이구나 싶다.
섹시한 여자 토끼라는 발상도 기발하지만 도장파는 사람이 기존 도장의 테두리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발이 금禁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