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정의의 가치
창덕궁 대궐 담장 밖에 진을 치고, 북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는 이백여명의 의사들!
어쩌면 이 밤이 세상에 살아 있는 마지막 밤이 될는지도 모르는 그들이었건만,
나라를 위해 의와 용에 불타는 그들의 안광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이조판서 유순정도 십여명의 동지를 거느리고 창덕궁 앞으로 달려왔다.
병사들의 손에는 이미 횃불 준비도 되어 있어서, 북소리만 들려오면
그 즉시로 횃불을 밝혀들고, 돈화문 대궐을 향하여 노도와 같이 몰려 들어갈 판이었다.
깨닫고 보니 어느틈에 끌고 왔는지 저만치 어둠 속에서는 이, 삼십필의 군마도
꼬리를 치고 있었다.
삼엄한 침묵 속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북소리만 고대하고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쿠웅!"하고, 최초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동시에 병사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확 퍼졌다.
땅바닥에 엎드렸던 병사들은 몸을 일으키며 창검을 움켜잡았다.
"쿠웅!"
두 번째의 북소리가 들려왔을 때에는 여기저기서 횃불이 일시에 확 켜지며,
"와아--."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과 동시에 횃불과 함성은 창덕궁 돈화문을 향하여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밀려드는 병사들은 이백여 명에 불과하건만, 함성이 하도 요란하고,
횃불이 어찌나 난무를 하는지, 습격해 오는 무리가 수천, 수만으로 많아 보였다.
이에 기겁을 하게 놀란 사람들은 대궐 파수병들이었다.
"웬 놈들이냐!"
그러나 그 소리가 요란스러운 함성을 제지 시킬 수는 없었다.
범강장달이 같은 병사들이 돈화문 판잣문을 발길로 들이차는 바람에,
대궐문은 어이없게 부숴지고 말았다.
"아코!""에크!"
여기저기서 문지기들의 비명이 들려왔으나, 대문을 부숴놓은 반정군은 반항하는
파수군들을 좌충우돌로 휘둘러 갈기며 대궐로 대궐로 밀려들었다.
대궐 안에는 아직 병사가 어지간히 많았다.
그러나 워낙 썩어빠진 병사들인지라 모두들 혼비백산해서, 반항을 하기는커녕
도망칠 구멍을 찾지 못해 야단법석이었다.
개구멍으로 도망을 치다가 엉덩이가 빠지지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는 자도 있었다.
저고리를 거꾸로 입고 땅바닥에 엎드려 손을 싹싹 빌며,
"그저 목숨만 살려줍쇼!"하고, 넋두리를 하는 비겁한 자도 있었다.
대궐 안에 있는 병사들은 임금을 지키는 것이 임무인지라, 몇 사람쯤은 목숨을 내걸고
반란군과 싸우려고 덤비는 자가 있을 법도 하건만, 그렇게 기특한 병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군기가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대궐을 습격한 반란군은 가는 곳마다 대항하는 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애초의 계획대로, 변수와 최한홍은 내성의 동쪽을 점령하고,
심형과 장정은 내성의 서쪽을 점령하였다.
대궐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조금도 힘이 들지를 않았으니,
그야말로 무인지경을 진격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일단 궐내 점령이 끝나자, 이번에는 연산군의 침전을 에워싸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궐 안에서 갖은 작태를 다 부리던 전동, 김호손, 강응, 심금손 등의
간신배를 군전에서 목을 베었다.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간신배의 최후는 그렇게도 비참했던 것이다.
반정군이 이 모양으로 대궐을 습격하는 그 시간에, 신윤무와 이한은, 천하의 장사 이심과
그의 부하 십여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감옥으로 달려가 옥문을 부순 뒤에,
옥에 갇혀 있는 수많은 죄수들을 풀어 내어, 시중에서 반정에 호응하게 하였다.
죄수들은 모두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혀 있던 양민들인지라, 그들은 제각기,
"연산군을 쳐부숴라!"
"연산군을 내몰아라!"하고, 고함을 지르며 거리 거리로 퍼져 나갔다.
시민들도 난데없는 함성에 놀라 깨어 "연산군울 쳐부숴라"는 소리를 듣자 하도 좋아서
덩달아 고함을 지르며 시위에 참가하니, 거리는 가는 곳마다 반정군의 바다를 이루었다.
"자는 사람을 왜 성가시게 깨우느냐?"
"상감마마! 큰일났습니다. 대궐 안에서 아우성이 요란한 것을 보오면 필시 무슨 변고가
생겼나 보옵니다."
세 계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아뢰었다.
"뭐? 변고가 일어나?"
연산군은 베개에서 머리를 들며 귀를 기울였다.
아닌게 아니라, 중문 밖에서는 이상한 아우성소리가 들려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다시 베개를 베고 누워 버리며,
"이런 태평성대에 어찌 변고가 있을 수 있겠느냐!
염려 말고 어서 자기나 하자!"하고, 계집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태평성대"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었다.
연산군은 그토록 태평세월이건만, 그러나 계집들은 여전히 치를 벌벌 떨었다.
"상감마마! 바깥 경태가 암만해도 심상치 않사옵니다."
"글쎄, 염려 말래도 그러는구나. 밖에서 떠드는 것은, 아마 아랫것들이 말다툼이라도 하고
있는게로다!"
"아무러나 승지를 부르사, 속히 알아보아 주시옵소서."
"너희들이 그처럼 걱정된다면 정승과 금부당상을 불러 즉시 처치케 하리라!"
연산군은 그렇게 말하고, 입직승지 이우를 불렀다.
"대궐 내성이 매우 소란하니, 그대는 속히 나가 그 까닭을 알아보고 오라!"
입직승지 이우는 열쇠를 가지고 궐문을 순찰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잠시 후에 창황히 돌아오더니,
"상감마마, 큰일났습니다.
반란군이 이미 대궐을 점령하고 관군을 군문에 버리옵니다."하고,
후들후들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뭐? 어떤 놈이 역적 모의라도 한다는 말이냐? ...
궐내의 장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연산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오늘밤의 입직 도총관 민효증과 참지 유경께서도 반란군에 사로잡힌 몸이 되었사옵고,
침전 문 밖의 온 세상은 이미 반란군의 세상이옵니다."
"뭐? 온 세상이 이미 반란군의 세상이라고? ...
승지야! 이 일을,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단 말이냐!"
연산군은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깨닫고 치를 부들부들 떨었다.
장녹수, 전비, 김귀비의 세 계집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전신을 사시나무 같이 떨었다.
"입직 승지는 어디 갔느냐? 모두 이리 오너라!"
연산군은 어쩔 줄을 몰라 밖으로 달려나오며, 입직 승지를 불렀다.
그러나 이우는 어느새 어디로 종적을 감추었는지 보이지 아니하고, 여태 잠만 자고 있던,
승지 윤장과 조계형의 두 사람이 달려나왔다.
"대궐에 반란군이 쳐들어왔다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단 말이냐!"
연산군은 평소의 위엄을 어디로 갔는지, 두 승지의 옷소매를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하였다.
마침 그때 침전 문 밖에서는 또 한번 아우성소리가 들려왔다.
윤장과 조계형은 그때서야 큰일이 난 것을 깨달았는지라,
"상감마마, 진정하십시오. 저희들이 밖에 나가 알아보고 들어오겠사옵니다."하고,
상감의 손을 뿌리치고 궐문으로 달려 나왔다.
연산군을 지키고 있다가는 죽음을 면할 길이 없겠으므로,
그를 내버리고 꽁무니를 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궐문 밖에 한 걸음 나서기가 무섭게, 난데없는 창검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중문을 수비하는 의병들이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마침내 사랑하는 세 계집과 더불어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야아--게, 누구 없느냐?"
그는 치를 벌벌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번 호령에 천하가 들썩들썩하던 그였건만 이제는 개새끼조차
대답하지 않았다.
"정승을 불러라! 어영대장은 어디 갔느냐! 금부당상을 불러라!"
그래도 대답은 없고, 다만 사랑하던 계집들만이 애처롭게도 손에 손을 마주 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입직 승지는 어디 갔느냐! 활과 화살을 가져오너라!"
연산군은 침전 안마당을 미친 사람처럼 오락가락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야말로 갈팡질팡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악을 쓰며 분부를 내려도, 아무도 거동하는 사람이 없었다.
중문 밖에서는 연산군의 고함을 비웃는 듯이 또다시 환호성이 들려오며
횃불이 휘황찬란하게 비치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공포와 전율에 몸을 떨며 연산군을 바라보고 있던 계집들이,
일시에 그의 앞으로 달려들며,"와아--."하고, 목을 놓아 통곡을 하였다.
연산군도 사랑하는 계집들을 부둥켜안으며, 어이 어이 소리내어 울었다.
대궐에서 그와 같은 소동이 일어나고 있을 그 시간에, 신윤무와 이한과 이심은 옥문을
열어 놓고나서는, 좌참찬 임사홍과 좌의정 신수근과 도승지 신수영을 각각 집으로 찾아가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고, 다시 개성에 사람을 파견하여, 개성유수로 있는 신수겸을
죽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천하는 완전히 뒤바뀌어, 간신배들은 저승으로 물러가고,
천하의 폭군 연산군은 침전에 유금된 몸이 되었고, 대궐은 박원종, 성희안 등의 손에
완전히 점령되었다.
자고로 화무십일홍이요, 세무십년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어제까지도 천하를 호령하던
간악한 무리들은 하룻밤 사이에 자취조차 없어지고,
이제 이 강산에도 새로운 서기가 천지에 충만하게 되었다.
성즉 공신이요, 패즉 역적의 커다란 도박은 보기좋게 성공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