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 [오세영]
무대는 화려하였다.
색소폰의 저 노을빛 저음,
트럼펫의 저 하늘빛 고음,
클라리넷의 저 호숫빛 청음,
누구를 위한 한밤의 음악회던가.
우주를 향해 커튼을 활짝 걷고
장미,
백합,
라일락 제각각
빨강, 하양, 파랑 화음들을 고른다.
악기가 바람을 모두어 음색을 내듯
향기로 발성하는 이 지상의
백화난만(百花爛漫),
그러나 오늘의 주 연주자는
튤립이다.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모차르트 협주곡
C장조 제1악장,
맑고 슬픈 그 선율.
- 마른 하늘에서 치는 박수소리, 민음사, 2012
인상파 [기혁]
세상의 빛을 모두 섞으면
환해진다
빨강은 파랑에게 파랑은 초록에게
서로를 양보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
무수한 빛깔들,
이를테면 아이를 잃은 여인의 눈물은
보라빛을 더욱 연하게 만들고
배신당한 악공의 기타는
초록을 연둣빛으로 바꿔 놓는다
보이는 것보다
들려온 빛깔들이 점점 많아지면,
자신에게서 가장 먼 것들의 이름부터
차례로
속을 내비칠 수 있었을텐데
맹인의 검은 동자가
미래를 예언하던 시절에도
우리의 구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 매번
어두운 주변이 필요하고,
손전등을 비추다 맞닥뜨린 진실은
노상 강도를 닮아 가는 법
모든 것을 빼앗긴 끝에
목숨만을 부지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희미해진다
주황이 남색을 양보하듯이
남색이 노랑을 양보하듯이
-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민음사, 2014
11월이란 [김경미]
갑자기 다리를 저는 일
순식간에 눈이 머는 일
심장 부서지기 직전의 일
너무 큰 옷 속에서 몸이 어쩔 줄 모르는 일
누군가가 목의 반쪽을 새빨갛게 물었다
단풍잎이었다
유월에만 붉은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살아남은 장미의 빨강
넘어진 무릎 색깔을 가졌다니
날아가네 날아가네 날아가네
기러기 같은 손목과 발목
유족의 심장을 하고
이름을 바꾸고 싶은 일
갈대처럼 첫눈 내리고
계절은 다섯 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11월
다섯 계절 내내 하도 몰래 드나들어서
11월 날씨만 제일 낡았다
무엇을 진정
누구를 진정 사랑했는지
미안해지는 일
미안하다 말 안 하려 입을 꾹 다문 채
-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사, 2023
질문들 [유병록]
산 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가
죽은 자도 가끔 산 자의 안부를 궁금해하는가
연인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이별한 자는 사랑을 정의하는가
검은색으로 빨강과 파랑을 기록할 수 있는가
차분한 목소리로 분노할 수 있는가
경어체로 항의할 수도 있는가
가난을 위한 노래는 빈털터리만이 부를 수 있는가
빈털터리의 노래는 단조로워야 하는가
사물과 대화를 나누려면 그를 흉내 내야 하는가
사물에게 사람 흉내를 부탁해야 하는가
기억은 말할수록 각인되는가
떠들어댈수록 휘발되는가
깨어난 자가 꿈을 기록할 수 있는가
지금 질문하는 자는 나인가 당신인가
대답은 나의 몫인가 당신의 몫인가
-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2020
나는 당신을 빨강합니다 [이대흠]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오직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키워온 말입니다 아직은 익지 않았습니다 내가 할 말은 세상에 없는 첫 향기일 것입니다 어떤 냄새와도 다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마음입니다
비슷한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껍질만 닮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은 저온 창고의 과일들처럼 이미 죽은 말입니다 나는 당신께 살아 있는 말을 건네러 왔습니다 나는 처음을 꺼냅니다 나는 당신을 빨강합니다 이토록 싱싱한 나의 빨강을 당신께 드립니다
- 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 2022
페루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
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
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
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
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
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
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
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
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
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
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
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
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붙어버
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
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
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
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
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
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노랑보라빨강초록 [장영수]
백김치의 흰색 혹은 노란색 간장 혹은 가지
나물무침의 보라 고추장이나 고춧가루의 빨강
열무김치 미나리나물무침의 초록 쌀밥 잡곡밥의
형형색색 빛깔들 생선들 정육들의 흰 빛깔 붉은 빛깔들
웬만하면 대범하게 때로는 세세하게
매사를 대하는 중에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토론 대담 정보 소개 창들
건강 장수에 대한 존경스러운 말씀들
현란한 말씀들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말씀들
또 어느 날 난데없이 새로 대두되는
이외의 학설 사실 정보들
그냥 수월하게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숱한 현상들
하루하루 옷깃을 여며가며
늘 처음인 것처럼 또다시
새롭게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 푸른빛의 비망록, 문학과지성사, 2015
누군가 두고 가버린 [최현우]
이것은 심장?
아니, 빨간, 너무나 빨간 파프리카
탱글탱글 햇빛이 미끄러지는
싱싱한 체육
흙과 물을 섞어 먹고
초록, 초록에서 검정이 되었다가
가장 밝은 힘줄이 열릴 때까지
색채에서 어둠을 빼는
둘레, 쪽창 가득 굵은
연둣빛 꼭지를 연결하고
터져나오는 석양을 수혈받는
빨강, 흘러넘쳐 빨간 식탁
공간의 윤곽을 따라
현관을 향해 사물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이빨이 새겨놓은 하얀 실금들이
백발처럼 도드라지는 수저통 속 숟가락들
접시, 끼워놓은 책갈피의 기분으로
건조대 위의 늦은 오침 속으로
눈물자국 섞여 남은 개수대
말라붙은 물때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식사와 식사의 사이, 구부러진 고요
그 중심에서 모든 색깔을 밀고 당기며
새빨갛게 두근거리면서
멈춰 있는, 멈춰 있지 않은
이것은 파프리카?
아니,
누군가 두고 가버린
너무나 붉은
-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2020
애 [오은]
빨강과 파랑
검정과 하양
연두와 보라
너를 지우려 애쓰면 애쓸수록
너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빨강과 다홍
파랑과 청록
어제와 오늘처럼
번번이 경계가 흐려졌다
올리브와 아이보리
에메랄드와 부르고뉴
주고받았던 편지를 떠올릴 때면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나는 愛를 쓰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늘
잔상이 남았다
- 왼손은 마음이 아파, 현대문학, 2018
빨간 장날 [이여원]
빨간 장날에는 슬쩍 훔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하늘이 맑아서 예비용 서답이 없는 처녀들은 불안합니다 음전이 할머니도 오늘만큼은 빨간 몸빼를 갈아입고 빨간 장미 무늬 양산을 쓰고 왔군요 빨간색에 민망한 파란꼭지를 단 파프리카가 파라솔 아래 담겨 있고요
빨간 날은 빨강들이 옹기종기 건너오고 있습니다 그날은 기상예보처럼 빨간 게 무겁고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운수처럼. 장날은 빨간 쉼표 같은 날, 아랫배부터 살살 흥이 올라 파장까지 번져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되바라진 처녀들이 올 적마다 주머니가 불룩해져 가고 얼굴은 빨개집니다 초록색 지붕의 범수 아제도 하얀 삼베적삼에 빨간 목수건 걸치고 붉은 팥을 경운기에 싣고 왔군요 모두들 꽁꽁 숨는 빨간색과 드러내는 빨강이 숨바꼭질하듯 합니다
월요일의 빨간 수탉벼슬을 따라가면 빨간 일요일이 나오고 일요일 처녀 일요일 소녀 일요일 폐경들이 왁자한 장날입니다
모든 빨강은 식욕의 끝에서 자라고 있는데 흰 바지 밑에 빨간 양말 아저씨는 왜 나이가 들수록 빨간색을 묻히려고 할까요
구름의 한쪽 끝에서 빨간색이 터집니다
아슬아슬한 나이들이 모여들어 뭉게구름을 만듭니다 빨간 장날이 되면 사르르 아픈 배 챙겨 온 새털구름은 다 흘러가버리고 발을 동동 구릅니다 빨간 고추잠자리 서너 마리가 날고 서쪽으로 뉘엿거리는 하늘빛이 붉습니다
- 빨강, 현대시기획선 21
꾀꼬리단풍 [허문영]
이 말 아세요
꾀꼬리단풍이라뇨
꾀꼬리도 알고 단풍도 아는데
단풍이 꾀꼬리라뇨
못 찾겠다 꾀꼬리
그런 노래 가사도 있지요
꾀꼬리는 몰래 우는 새라 하더군요
꼭꼭 숨어있는 단풍인가요
국어사전 찾아보니
노랑, 빨강 등의 색이 섞여 있는 예쁜 단풍!
공작새 깃털 같은 단풍인가요
조류도감도 찾아봤어요
노란 털에 검은 선이 있는 날개!
부리만 약간 빨갛네요
특별한 색깔은 아닌 것 같아요
꾀꼬리 같은 소리로 노래 부른다는데
그렇다면 울음소리가 아름다운 새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빨주노초파남보처럼 물들었나요
꾀꼬리단풍은 색을 듣게 하는 단풍
나 이렇게 생을 예쁘게 마감하는 거야!
올 가을 꾀꼬리단풍 정말 징하네요.
- 별을 삽질하다, 달아실, 2019
여름 언니들 [안현미]
빨강과 파랑 초록과 보라
색깔을 레고처럼 가지고 노는
여름 언니들
여름은 비밀이 가득한 계절
파랑 물방울 사전, 초록 보라 선풍기, 빨강 코 수은주
낱말을 레고처럼 가지고 노는
여름 언니들
그 비밀의 온도 사상 최고치 경신!
팡, 팡, 팡
폭죽처럼 터지는
여름 언니들
더 이상 비밀은 비밀도 아니어서
눈물과 비밀 여자와 여자라는
레고를 가지고 제2의 성(城)을
쌓았다 허물고 허물었다 쌓는
여름 언니들
마침내, 여름 언니들 그 성의 여왕으로 등극!
-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첫댓글 색깔별 테마 새롭네요. 김경미 시인의 문장이 있어 특히 더 좋습니다….
아하, 김경미시인을 좋아하시는군요.ㅎㅎ
자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