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황보씨 (永川 皇甫氏) 증시: 1명 시주 1명
*황보인(皇甫仁) 미상∼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영천
시호: 충정(忠定) 危身奉上曰忠 純行不爽曰定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순수하게 행동하여 어긋남이 없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영조 34년(1758) 시장 없이 증시(不待諡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의 아들이다.
관직: 문과급제. 도승지. 강원감사. 형조. 병조. 이조판서. 대제학. 좌찬성. 영의정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고, 1414년(태종 14)의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 좌정언이 되었고, 1420년 좌헌납이 되었으며, 1422년에는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으로서 강원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기근을 규찰한 뒤 귀환하여 곧 장령이 되었다.
1425년 1월 한성소윤(漢城少尹) 재임 중 경상도찰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1428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해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으로 발탁되고 좌부대언을 거쳐 1430년에는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이듬해 강무행행(講武行幸) 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마(人馬)가 살상되자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되었다가 같은해 형조참의로 복직되었으며,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432년 형조좌참판‧병조우참판을 역임하였다. 같은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정효전(鄭孝全)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판중추원사 하경복(河敬復), 형조판서 정흠지(鄭欽之), 예문관대제학 정초(鄭招)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찬진(撰進)하였고,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파견되고 같은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兵曹事)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幸)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되어 종성을 수주(愁州)강변으로 이치(移置)하면서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하여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되어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하였다.
1445년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임하고, 144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뒤 1449년 의정부의 직에서 해임된 뒤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하였으며, 같은해에 좌의정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하였으며, 이듬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문종의 국상을 총령하였고, 이듬해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같은해에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奔), 우찬성 이양(李穰),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되었다. 오랫동안 신원(伸寃)이 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 31) 7월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계기로 김종서와 함께 복관(復官)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1719년 후손이 이조(吏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되었고, 1746년(영조 22) 완전히 신원되었고, 1758년에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端宗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고, 1804년(순조 4) 집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읍의 광남서원(廣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다.
황보인묘갈
공의 휘는 인이고 자는 사겸인데 혹 춘경이라 이르기도 한다. 호는 지봉이며 그 선계는 영천인이다. 아버지는 지중추원사를 지낸 임이다.
공은 태종 갑오년(태종 14, 1414년)에 감찰로서 친시에 응시하여 장원하였다. 세종을 두루 섬겨 북도체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김종서와 같이 북쪽 땅을 개척하여 6진을 설치하였다. 북쪽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공을 기린 것은 이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의정부 좌찬성을 거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정사에 힘쓰고 몸가짐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면서 은인자중하여 국가의 중신이 되었다. 문종 임신년(문종 2, 1452년)에 영의정이 되어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과 같이 어린 왕을 보필해 줄 것을 부탁하는 고명을 받았다. 다음해인 계유년(단종 1, 1453년) 겨울 10월에 이들 세 재상은 모두 세조에게 화를 당하였다. 이 일은 모두 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 임금 정묘년(영조 23, 1747년)에 이들 세 재상의 관직을 복직하라는 교지가 있었다. 지금 임금의 이 교지는 계유의 정변이 있은 지 295년만이다. 후에 다시 명하여 모두 시호를 내리고 왕께서 친히 글을 지어 조문하고 관리들을 보내어 제사하게 했다. 이로써 공은 마침내 충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 시호를 살펴 보건대 국가가 위태로울 때 몸을 바쳐 신명을 다했으니, 왕은 이를 포상하여 충이란 글자를 취하라 하셨고 또 사심없이 행하여 모든 일을 사리에 맞게 행하였으니 정이란 글자를 취하게 하여 시호를 충정이라 하게 하신 것이다.
오호라! 공의 언행과 성취한 바의 일에 대하여는 세대가 멀어 모두 알기가 어렵도다. 그러나 그 큰 절의는 크게 빛나 만세토록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여기에 다 또 무엇을 적어 공의 행적을 기술하겠는가?
부인은 양성이씨로서 화윤의 따님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 석은 벼슬이 참판에 올랐고 차자 흠은 벼슬이 직장에 이르렀는데, 이들 두 아들은 모두 공과 같이 죽었다. 셋째는 은인데 어리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딸은 다섯 명을 두었는데 사위는 도사인 유목노, 좌랑인 홍윤숙, 선략장군인 최열, 사인인 장계숙, 주부인 윤당이다. 장자 석의 후예는 지금 울산에 살고 있으며 차자 흠의 후예는 장기 · 영천에 살고 있으며, 막내인 은의 후예는 황주에서 살고 있다.
숙종 때 이미 녹겸은 벼슬이 참봉이었고, 공이 복관됨에 따라 녹도도 벼슬하여 현령에 이르렀다. 이번에 왕께 글을 올려 공의 신원을 풀어준 데 대하여 공경한 감사를 올렸다.
공은 파주 향양리 천재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는데 부인을 먼저 이곳에 장례를 지냈고 공의 묘소는 그 위에 있다. 옛날에 조그마한 비가 있었으나 다만 공의 성씨만 기록하였을 뿐인데 이번에 9대손 종 등이 서로 의논하여 새로이 비를 고쳐 세웠다.
적순부위전 세손익위부사솔 김 종후는 글을 짓고,
통훈대부 공조정랑 김상숙은 글을 쓰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을유년(영조 41, 1765년) 8월 일 세움
융희 후 40년 경인년(1950년) 전란에 비석이 깨지고 훼손되었기 때문에 16대손 곤이 사비를 들여 갑진년(1964년) 정월에 고쳐 세움.
皇甫仁墓碣
公諱仁字四兼或曰春卿號芝峯其先永川人考曰知中樞院事琳公 太宗甲午由監察擢親策試歷事 世宗爲北道軆察使則同金公宗瑞拓地置六鎭北人祠之由議政府左賛成入相務持大軆隱然爲國家重 文宗壬申爲領議政與左議政金宗瑞右議政鄭苯同受 顧命輔 幼主明年癸酉冬十月三相俱及於禍事具在國史今 上丁卯有 旨復三相官上距癸酉二百有九十五年也後又 命皆賜謚而 上親爲文遣官祭之公遂得謚忠定按法危身奉上曰忠純行不爽曰定嗟乎公言行事業世遠難悉然其大節卓然萬世不可磨滅他又何述焉夫人陽城李氏少尹之澤女有男三人長錫參判次欽直長同公死次銀以幼免女五人其婿都事俞牧老佐郎洪允淑宣略將軍崔洌士人張季淑主簿尹塘也錫之後居蔚山欽之後居長鬐永川銀之後居黃州 肅廟時已錄慊爲參奉及公之復官也又錄鍍仕至縣令至是上書訟公寃得靖者也公葬于坡州向陽里泉岾之原夫人先葬在上舊有小碑止記公姓氏至是九代孫淙等相與易新之云迪順副尉前 世孫翊衛副司率 金鍾厚撰
通訓大夫工曹正郎 金相肅書
崇禎紀元後三乙酉八月 日立
隆熙後四十年庚寅戰亂破損故十六代孫坤以私資甲辰正月改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