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 교회를 본받자(행 11:19~26)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사용할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도 12명을 선택하셨고,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살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와 기도를 심히 많이 하는 백부장 고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고넬료 집에 보내셔서 성령을 받게 하시고 안디옥에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디옥을 선택하신 이유는 안디옥은 수리아의 수도이기도 했지만 로마제국의 매우 중요한 도시 중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3대 도시에 들어간 곳이었습니다. 전략적으로 주변 나라의 급소에 해당하는 장소로써 헬라가 인도에서 애굽에 이르는 천하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복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디옥을 이방인 선교기지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총사령관으로 사도바울을 최전선 사령관으로, 고넬료를 참모로 사용하셨습니다. 본문 19~20절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기점으로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환난을 피해 안디옥, 베니게, 구브로까지 흩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섭리요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해와 핍박을 피하여 도망간 피난민들은 안디옥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끊임없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이른 유대인 피난민 성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피난 온 성도 중 이방인인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성도들은 용기를 내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1:20). 이방인을 전도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주신 사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의 모델로 본다면 우리교회가 닮아야 할 교회는 바로 이 안디옥 교회입니다.
1) 환난을 이기고 세워진 교회입니다. 스데반 순교 이후 극심한 핍박이 일어났고 그 박해로 인해 흩어져 퍼져나갔습니다(행11:19~20). 그리고 그들은 믿음을 지키며 살기위해 피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머무는 곳에서 열심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인생에게나 사람이 사는 곳에 안정된 환경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뒤로 미루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지금 바로 선교하고 그 사명을 감당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본문을 보면 수적인 부흥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11:21, 24, 26).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고 마땅한 교회의 본질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을 갖고 복음을 들고 나가는 그들에게 주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교회가 부흥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전도는 되는데 부흥이 안 되는 이유는 그 만큼 빠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흥하는 교회는 열정적인 전도와 함께 전도된 성도들이 머물 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열기가 풍성한 하늘꿈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입니다. 안디옥에서 제자들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 닮은 성도와 교회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11:25~26). 오늘의 크리스챤들도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성도란 말은 주님을 닮아서 거룩한 길을 가는 거룩하게 구별 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하신하나님의 명령과도 같이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4) 도와주는 교회입니다. 천하가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교회는 구제금을 모아 예루살렘교회를 도왔습니다(행11:29~30).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행20:35). 우리 하늘꿈교회도 이 말씀을 실천하여 안디옥 교회와 같이 교회나 가정이 재난을 당할 때 피하게 하심을 체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5) 하나 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을 보면 다섯 명의 교회 지도자가 나오는데 먼저 거론되고 있는 바나바는 그 교회 담임목사이고, 시므온과 루기오는(아프리카인) 천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헤롯의 젖동생인 왕족 마나엔 보다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마지막 사울은 그 교회 부목사직입니다. 이것은 안디옥교회가 차별과 분열이 없는 하나 된 교회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똘똘 뭉친 하나 된 단결한 교회였으며, 오직 주의 일을 하는데 하나 된 말과 마음과 뜻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 주면서 성장해 갔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들도 이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만을 주장하는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하늘꿈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어디서든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6) 기도하는 신령한 교회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받았습니다(행13:2). 기도의 샘이 흐르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 주님의 뜻을 이루어 전도하고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 사랑으로 섬기면서 하나 되는 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이 온전히 기도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부흥하고 교회를 세워갔던 이유는 일주일에 이틀은 금식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속에 기도가 천대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늘꿈교회도 안디옥교회와 같이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7)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보내라는 지시에 그대로 순종하여 보냈습니다(행13:3). 교회전통으로 보아서 불가능한 일을 그들은 실천했습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제사보다 더 좋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죽기까지 순종을 함으로써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빌2:8). 우리 하늘꿈교회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듯이 사람의 상식에 벗어난다고 해도 절대 복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8)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고 출발하여 1,2,3차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행13:4). 선교사가 교회에서 배출 돼야 하고 교회가 또 선교사를 지원 하고 필요한 모든 선교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원리에 따라 네 곳의 선교 구역을 설정하고 균형 있게 추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최후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늘꿈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본받아서 8가지의 모습으로 늘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교회가 되기를 위하여 모두가 하나가되어 같은 말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전진해 가는 데 온 힘을 결집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의 면류관(살전 2:17~20)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고 우리들이 따라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영혼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9:25).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 한 영혼이라는 것입니다(눅19:10). 또한 이 세상에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받는 핍박과 어려움은 모두 주님께서는 계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막10:29~30). 주님께서 이 땅의 모든 임무를 완수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서 모든 사람들로 제자를 삼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이게 가르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부탁하신 것을 보면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마28:18~20). 주님의 부탁하신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찾아서 나가서 전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그들을 주님의 제자를 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의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의 발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롬10:13~15).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복된 것이며, 그 발걸음이 바로 주님께서 함께 하는 발걸음이며,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며, 그 사람이 바로 이 땅에서 복을 받고 내세에서도 영생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에 데살로니가에 갔으나 그곳에서 핍박을 견디다 못해 너희를 두고 떠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9절에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전도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듣고서는 시기하여 바울의 일행을 잡아서 백성들 앞으로 끌어내어 심문하려고 할 때 바울을 돕는 사람들이 밤에 몰래 뵈뢰아로 숨기어 보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들이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니기에 다시 너희를 보기 원하지만 사단이 가는 길을 막고서 허락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주님 앞에서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드리는 면류관과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바로 내가 전도한 사람들입니다. 하늘꿈의 성도들도 많이 전도하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시기를 바라고 이 땅에서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전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도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생기는 것입니다(롬10:17). 그러므로 믿음이 성장하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요5:39).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려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서는 어느 것도 증거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읽는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 시간을 내야 합니다. 통독의 일정을 따라 순종하면 1년에 반드시 1독은 할 수 있습니다.
▣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끝마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모두가 두려워서 고향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몸으로 오셔서 도망하여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하신 일을 증거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20:22).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려면 능력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눅24:48~49). 이 능력은 바로 성령입니다(행1:3~5). 그래서 그들 중에 120명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서 한 곳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니 10일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하는 일이 바로 세상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충만하여 지금의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서 주님이 살아나셨고 그분이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꿈의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모르고 입이 열립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전도는 영혼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영혼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전도를 못합니다. 말씀을 알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영혼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전도하여 구원의 확신을 같게 하였고, 결국은 그녀 자신도 주님을 만남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주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셨고, 그 여인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병든 자를 보면 그 사람을 고쳐 주셨으며, 믿음이 없는 자를 보면 믿음이 있게 했으며, 약한 자를 보면 그를 불쌍히 보면서 강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무시 한 채로 그냥 지나치던 일이 성령의 능력을 받고서는 그 영혼이 불쌍히 보이면서 고쳐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영혼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불타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하늘꿈 가족 여러분!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주님 앞에서 우리들의 기쁨이고 자랑이며, 면류관입니다. 이 면류관을 다 쓰고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는 하늘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원을 이루는 신앙-수로보니게 연인(마 15:21~28)
본문의 시작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을 떠나시게 됩니다. 유대 땅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셨으며, 그들의 불신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이방지역이며,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곳으로 해상 무역과 상업이 발달한 곳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유대인들이 증오하는 원수 민족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막7:26).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온 까닭은 딸이 흉악한 귀신들려서 고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침묵을 극복하고 거절을 극복하며, 멸시 천대를 극복하는 큰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 여인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마15:22~28). 하늘꿈의 모든 성도가 이 여인과 같이 감동적인 믿음을 가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세상에서 위대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절망과 불가능의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계를 뛰어 넘는 극복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에디슨과 베토벤은 청각장애의 한계를 뛰어 넘었고, 세익스피어와 루즈벨트는 지체장애를 뛰어넘었고, 축구선수 마라도나와 마라톤의 이봉주는 짝발이라는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성경에서 성공한 사람들 역시 그들의 정해진 한계를 뛰어 넘은 극복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식 없는 설움과 나그네 설움을 극복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타향의 설움과 형의 미움을 극복한 야곱, 구덩이와 유혹과 감옥의 위험을 극복한 요셉, 키 작은 설움을 극복한 삭개오, 죽음의 한계를 기도로 이겨낸 히스기야, 사자굴과 풀무불의 위험을 극복한 다니엘과 그 세 친구, 그리고 38년이라는 시간과 12년이란 시간을 뛰어 넘어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현장을 극복한 고침 받은 두 여인, 특별히 오늘 본문 성경의 나오는 가나안 여인의 불가능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그 너머에서 만나 주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의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주님께서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 이 여인은 예수님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이 여인이 소리 지르며 큰 소리로 간청을 해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시며, 결국 자신을 개 취급을 하면서 무시를 했어도 가나안 여인은 ‘주여 옳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하면서 자신이 개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오직 자신의 문제를 안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인정할 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노예 상이었던 존 뉴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그 믿음을 전파하며 43년을 봉사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정하고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요셉을 보더라도 자신에게 주신 꿈을 붙잡고 끝까지 참고 장애물을 이겨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진해 갈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꿈대로 되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모두가 안 된다고 했을 때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였을 때 두 사람은 살아남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두려움 없이 의심하지 않고 따라갈 때 딸이 죽음에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극한 한계 넘는 자에게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도 바로 이 같은 경우인 것입니다. 주님의 침묵, 거절, 외면, 인격 모독, 멸시 천대 등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그것이 장애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주님께 간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더니 결국 자신의 딸의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 이 여인은 겸손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본문의 이 여인은 정말 겸손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겸손의 삶이 몸에 배어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그 여인을 시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므로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들의 긴 인생 여정 속에서 삶을 윤택하게 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아주 피기 어려운 꽃이요 힘들게 맺는 열매와 같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교만이란 잡초가 자라게 되어 마음의 정원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귀히 쓰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한 것처럼 사람이 겸손해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잠16:18). 그러므로 교만이 머리를 들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이겨 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평가 기준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인정하며, 인내하고, 겸손해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인정하므로 예수께서 기대했던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보면 그 여인이 간구하는 대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리고 그 시로 그의 딸이 고침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곳이 바로 이 여인이 구원받은 믿음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의 신앙-스데반(행 7:54~60)
초대교회가 점점 성장하고 부흥해 감으로 이제는 12사도의 힘만으로는 교회의 운영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7명의 집사를 선택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스데반입니다(행6:2~4). 이 스데반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고, 스데반을 통해서 은혜와 권능의 역사로 큰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행6:8). 그로 인해서 자리를 보존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모함을 받게 되어서 공회 앞에 서서 스데반은 열정적으로 그들에게 변증의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들이 설교를 듣고서 순간적으로 귀를 막고 스데반을 해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행7:54, 57).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해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행7:55~56).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늘만 바라보고 살았는가를 절실히 보여줍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가 형성됩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물질과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평가받지도 말고, 신앙과 기도와 인격의 열매로 사람을 평가하고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는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가장 큰 이유는 말씀 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자신의 잘못된 점에 대하여 찔림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증거하다가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고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서 순교를 맞이하였습니다. 이같이 담대하게 장렬한 순교를 맞이할 수 있었던 그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 말씀에 대하여 확실히 알았고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용기는 자신이 믿고 지켜야 할 것에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요 인간성이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가져야 할 진정한 용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삶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참된 의미를 확실히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곧 그들 조상이 섬겨 온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언되어 온 구세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리 위협을 해도 억압을 해도 스데반은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간절히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행6:10). 자신이 믿는 말씀을 굳게 붙잡고 그것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스데반과도 같이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어야만 세상의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말씀대로 살아가며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사랑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 줄 것입니다.
▣ 한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스라엘 조상들의 실패한 역사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은혜를 증거 할 때는 참으로 단호하고 엄숙한 것을 봅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말씀을 용감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스데반과 같은 심정으로 얼마나 간절하고도 확고하게 한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롬9:1~3).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천하 보다 귀한 한 영혼에 대한 확실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의 온전한 신앙의 행동인 것입니다.
▣ 스데반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된 마음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에 대하여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어떻게 하던지 약점을 잡아서 해를 입히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고도 하지 않았고 듣기 좋은 말이나 타협적인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행7:52~53). 스데반에게는 오직 한 마음 한 가지 이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충성된 마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스데반뿐만 아니라 사도들도 여러 가지 방해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만을 좋아하였다고 했습니다(고후5:9, 갈1:10).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뜻을 세우고 나가는 주님의 충성스런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스데반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진정으로 용서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마음에는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스데반의 설교를 들으면서 분노에 가득 차 결국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믿음이 되면 아무리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며, 능력 행하심을 본다고 하여도 자신들에게 위험이 되고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고 자신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고 간에 귀에 들어오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스데반에게 행하는 것 같이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시49:12, 20). 그러나 스데반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행7:60).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도 아무리 극한 상황에서도 스데반처럼 용서의 기도가 나오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며, 이 3가지 덕목은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살전5:16~18).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처럼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되, 특별히 용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호흡처럼 꾸준히 하고, 일이 생길 때 즉각적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결국 기도의 맛을 체험하고, 주님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주님을 위해 순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 문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가르치고자 하는 뜻은 스데반과도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갈 때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소망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용감하게 증거하고 어떤 사람들 앞에서나 상황 앞에서 말씀을 담대하게 증거했던 스데반과 같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순교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년 병 고침 받는 신앙-혈루증의 여인(막 5:25~34)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는 데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작품은 1816년 메두사호가 세네갈 해상에서 파선을 당하여 승객 149명 중에 겨우 15명만이 살아남았던 실화를 소재로 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서는 좌측에 절망의 무리들과 우측에 있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고 필사의 몸부림을 하는 무리로 나누어집니다. 작가는 이것이 인생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아픔과 질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고통과 슬픔을 안고 저마다 풍랑에 흔들거리는 메두사의 뗏목을 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세상에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벌떡 일어나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배를 향해 믿음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구원의 환희를 맛보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아빠와 동물원에 놀러온 어린 아들이 으르렁거리는 사자를 보고 겁에 질려 울 때에 아빠는 사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자를 막고 있는 철장을 보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사자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철장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의 풍랑이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능력이 보이고 있습니까? 본문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은 혈루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여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막5:30).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을 가면서 만난 사건을 중간에 끼어 놓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그 분을 잡고 만지기도 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믿음하고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헌신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경 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병 고침을 받는 신앙은 주님을 믿음으로 ‘나는 지금의 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의 행동을 일부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33절을 보면 두려워하여 떠는 여인의 행동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왜 고침 받은 여인은 그런 행동을 했습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정한 여인이 남자의 옷에 손을 댄다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이었습니다(레15:7). 그러니 이 여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위가 매우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여인의 존재를 드러내신 이유는 구경하러 모여든 모든 무리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이 여인으로 하여금 간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능력을 구경하러 모여든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만이 오직 구원의 참된 길임을 보여 주시려고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을 우리로 하여금 증거 하기를 원하십니다. 전도는 예수님을 만나고 내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내 가정과 일터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어떠한 복을 받으면서 사는지 보여주는 것이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증거 하는 삶이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34절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회복과 평안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렇게 선포할 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대로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일로 지치고 고달픈 삶이라 할지라도 이 여인 같은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을 가질 때 주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 여인이 고침 받는 믿음은?
1) 지적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적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는 바를 믿지 않을 때 그 지적인 것은 무의미하지만 아는 그대로를 믿고 시인하고 순종할 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행하시는 분이시며 그 분을 통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소상하게 알아보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예수님만 만나면 지금까지 12년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막5:27~28).
2)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 여인은 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끝까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고침을 받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한다면 적극적인 신앙, 포기하지 않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구하는 자에게 약하십니다. 야이로에게도 이 여인과도 같은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이겨내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 부정한 여인, 멸시 받은 여인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하시면서 그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3) 자립적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좋은 의사를 많이 찾아다녔습니다(막5:26~28). 그것은 그녀에게 괴로움 자체였습니다. 그 병은 괴로움뿐만 아니라 그녀가 의지하는 돈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는 아무 기력도 남아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의지할 때에 그 믿음은 이미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이 연인의 눈과 마음을 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려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 스스로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자립의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작정한 대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녀가 사력을 다해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나서서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자 하는 강한 집념은 그녀의 믿음대로 그녀를 죽음의 자리에서 포기의 자리에서 그를 살렸던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긍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눈을 뜨고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주님을 찾아 나서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능동적인 신앙을 갖고 살아감으로 어떠한 문제든지 해결 받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택함 받고 쓰임 받는 신앙-바울(행 9:1~9)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 그 경험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사람은 행동과 생활과 대인관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사람은 지적 만족으로 공백을 채우려 하지만, 그분과 진실한 만남을 경험한 자는 새로운 삶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불편할 때 남을 통해 자신의 삶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란 안에서 잠근 문과 같아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지 않으면 밖에서 아무리 두드려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이 먼저 변화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변화는 목표와 목적 등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의 변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변해야 합니다. 주님의 존귀하심을 위하여, 성경적 가치관과 성경에 나타난 창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변해야 합니다. 그 목표와 목적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중단 없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화하고자 열망하는 자에 의해 발전되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 의해서 발전되는 것입니다. Change (변화)에 'g' 자를 'c' 자로 바꾸어 보십시오. Chance(기회)가 됩니다. 변화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변화는 기회이며, 기회는 축복의 도화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쓰시려고 할 때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쓰시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큰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던 사울은 자신이 자랑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배설물로 생각하면서 완전히 변화된 사람으로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랑했던 배운 지식에 대하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식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고후10:4~5, 빌3:4~9). 이같이 자신의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쓰십니다. 바울이 쓰임 받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를 택하여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행9:15). 그러므로 택하여 쓰임 받는 사람의 신앙을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변화는?
▣ 바울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거의가 다 자기 중심적인 인생으로 출발합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사울의 청년 시절을 보면 그는 세상에서 입신하기에 아주 좋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 다소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길리기아의 수도로서 동서양의 문물이 합류되는 지점이었습니다(행21:39). 그래서 바울은 어려서부터 세계적으로 발전된 로마 문명의 영향을 듬뿍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바울은 아주 보수적인 신앙과 바리새적인 정통 신앙을 소지한 열정적인 사람이며, 학문으로는 당대의 주류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아주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행22:3). 그 결과 바울은 당시 정치, 문화, 종교 할 것 없이 다방면을 섭렵하였고, 그것에 정통했으며, 거기다 번뜩이는 지성과 천재적인 학문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데 앞장도 섰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그 곁에서 죽어 가는 광경을 보면서 그런 자신의 행동이 곧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을 위해서 미친 듯이 뛰어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느라고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바울의 “자기중심적”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 그런 바울에게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박해와 핍박을 피해 도망한 그리스도인들을 추적하여 대제사장으로부터 발행된 체포영장을 받아들고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사울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전환점이 다가왔습니다. 사울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은 바로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행9:3~7). 주님의 음성과 빛이 사울에게 임하실 때 사울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습니다. 사울이 ‘그 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이 곧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네가 행할 것’이 있다고 하심으로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이 깨어짐의 지점이 바로 사울이 바울 된 지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이 깨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를 완전하게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을 갇혀 있는 동안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깨지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면서 눈물로 회개하는 동안 깨어짐의 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삼손은 눈이 빠지는 고통을 당하고 옥에 갇혀서 맷돌을 돌리는 수모를 당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깨어짐의 시간을 통해서 사명을 깨닫고 마지막 힘을 다해서 두 기둥을 잡고 함께 죽임을 당하며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 많았습니다.
▣ 바울은 눈에 비늘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고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아나니아의 기도로 눈을 뜨게 된 바울은 이제까지 자신이 가지고 보던 눈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 된 눈이 떠졌습니다(행9:8). 그리고 바울은 그의 일생을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 다시 보게 된 바울은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바뀌어졌습니다(행20:24). 우리들도 주님을 만나고 깨어짐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제부터는 바울과도 같이 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보는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있습니다. 이 눈은 보이는 것만 바라보고, 현재만 바라보고, 물질적인 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요, 행복이기 때문에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변화를 바라볼 때마다 감사하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이 눈은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도 봅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인하여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자기중심적으로만 보는 것이 흠입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잘 관리해야 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보면 좋게 보이지만 나쁜 마음으로 보면 나쁘게 보입니다. 영적인 눈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은 하나님의 눈으로, 말씀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릴 때에만 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닫히면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고 쓰임 받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깨어짐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눈은 비늘에 쌓여서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비늘이 벗겨진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의 눈으로 보아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으며, 세상이나 물질이나 자기중심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영혼을 사랑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본이 되는 신앙-에바브로디도(빌 2:25~30)
교회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세워주신 가장 영광스런 공동체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운 예수님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크든 작든 모두 똑같이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교회가 완전한 곳은 아닙니다. 교회도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기에 비판받으며 성숙해가는 곳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고쳐야 할 것도 많고 갱신해야 할 요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라는 사실과 교회를 인간의 단체나 한 기관으로만 보아선 안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적인 동기에서 교회를 비판하고 공격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꼭 해야 한다면 신학적 동기와 신앙의 동기에서 해야 하고 반드시 대안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마구잡이로 비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런 교회에서는 진실과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덕을 세우는 것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000년 교회 역사를 보면 성도들이 교회의 영광을 알 때 교회의 진정한 영광이 회복되었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교회를 말없이, 그리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요 말없이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존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들이 누구일까를 본문을 통해서 본을 삼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천거하면서 알아주기를 원했던 사람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도우라고 보낸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한 자요, 함께 군사된 자요,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서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였습니다. 26절을 보면 에바브로디도가 위독한 중병에 걸렸지만, 27절을 보면 섬김의 삶을 살던 에바브로디도를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고, 바울을 긍휼하게 여기셔서 근심을 면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28절을 보면 바울은 고침을 받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보내어서 회복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29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서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의 그 일을 위해 죽기까지 바울을 진심으로 도왔습니다. 이처럼 섬김은 빛도 소리도 없이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섬김은 은근히 강렬하며, 철저히 목숨을 걸 정도로 프로다운 것이고,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희생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섬김의 사람들입니다.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최선을 다하여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인 교회에 지체를 이루는 성도는?
1) 성도들에게 근심이 되지 않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옥중에 갇힌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중에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바울의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정말 극한 상황에 닥쳤음에도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의 시간과 싸우면서도 혹시나 자신으로 인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근심이 될까하여 심히 근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바울이 알고 감사한 나머지 존귀하게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빌2:26, 28). 성도가 되었다고 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 앞에서는 웃지마는 뒤로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 중심부에 서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교회 안에 있으면서 목사 곁에 있으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목회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까? 사울은 왕이 되었을 초년에는 정말 겸손하고 잘하였지만, 나중에는 선지자 사무엘에게는 슬픔과 근심거리였으며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는 후회의 대상이었습니다(삼상15:35). 사랑하는 하늘꿈의 가족 여러분들도 부름 받은 성도로 어떠합니까?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는 후회의 대상으로, 주의 종의 마음에는 염려와 슬픔의 대상은 아닙니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는 증거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히11:5). 우리들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 왕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에녹처럼 교회에 근심이 될 까봐 병든 것조차도 숨겼던 에바브로디도처럼 교회의 근심이 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주의 일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빌2:30).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눅9:23). 에바브로디도는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기에 자신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을 주님만 존귀하게 여기 것이 아니라 모두가 존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믿음은 희생에 있는 것입니다. 한 곤충학자가 개미를 연구하였는데, 개미집에 불이 났을 때 불에 자신의 몸을 던짐으로 불을 끄더라는 것입니다. 개미가 불을 보고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불태우므로 다른 개미를 살리듯이 희생에는 값진 열매가 뒤따르는 법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요12:24).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이 같은 희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믿음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관을 얻는 것입니다(계2:10).
3) 교회의 부족함을 채우려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려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돌보기전에 교회를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교회에 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빌2:30). 빌립보교인들은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도우려 했고, 이러한 마음을 가진 교인들을 위하여 머나 먼 에베소 감옥까지 찾아간 사람이 바로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를 도우려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증언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교회가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누가 어떠한 일을 맡아서 하든지 서로가 서로의 부족을 채우며, 일을 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함께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서로의 섬김이 있는 교회와 그런 일꾼들이 있는 교회가 정말 아름답고 칭찬 받을 교회인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섬기는 일에 힘썼던 사람이며, 교회의 근심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근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하늘꿈의 가족들도 이런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의 신앙(시138:1~8)
맥추감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서 얻은 밀의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으로 추수한 것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맥추감사주일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해야 합니다. 즉, 맥추감사는 곡식을 받아서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감사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구절이 약 178개가 됩니다. 바로 우리에게 감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주요 감사 요지는 ‘나’ 입니다. 그래서 ‘내가’ 또는 ‘나를’ 이라는 단어가 5절이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감사가 ‘나’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나와 관계 되어진 모든 것’을 완전케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또한 자연 만물과도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비록 더불어 사는 관계가 복잡하고, 불편할지라도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윗은 ‘구원의 사건’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기자인 다윗의 감사를 통해 꼭 배울 것이 있습니다.
▣ 감사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시138:1). 전심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약간의 사의나 사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의 삶의 어느 한 부분에 대해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심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들이라는 말은, “세상의 권능자들”을 말합니다. 다윗은 세상의 여러 왕들 앞에서 하나님만이 나의 왕, 나의 주 되심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한 나라의 왕은 정략적으로 이방신을 믿는 나라와도 적당히 손을 잡고 관계를 유지해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솔로몬도 정략적으로 이방 나라와 혼인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이며 정치가인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중의 신으로 높이고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만을 왕 중의 왕으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다윗을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진정한 믿음의 용사요 감사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케냐에 선교사로 일하던 히긴스(Matt and Lora Higgens) 부부는 폭도들에게 습격을 당할 처지에 있을 그 시간에 16명의 성도가 선교사 부부를 위해 기도함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 감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성전에서 예배할 때마다 감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행하시며, 말씀대로 기도의 응답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시138:2~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도록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극한 상황에서도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그 극한 상황을 자신에게 가장 좋은 상황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항상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주신 꿈을 안고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 함께 하시고 간구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좀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확신해 합니다(롬4:20). 믿음으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롬1:17).
▣ 감사해야 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지만 낮은 곳에 오셔서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시138:6). 정말 올 한해도 위험에서, 병마에서, 사고에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직장에서, 사업에서 우리들을 보호하셨기에 우리들은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었고 아무런 문제를 만나지 않고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알 수 없었지만 언제나 함께 하셨고 불꽃같은 눈을 뜨시고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도단성을 에워싼 아람의 군대를 보고 놀라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지만 엘리사는 이미 하나님께서 보낸 불마와 불 병거를 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사환에게 안수하자 그의 영안이 열리고 아람의 군대를 에워싸고 있는 불마와 불 병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하셔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수많은 고통을 감수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일들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들이 자신이 왕이 되어서 하나님께 대한 더욱 확신과 소망을 가지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7~8절의 말씀은 전적으로 다윗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왜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불완전한 우리들을 부르시고 우리들을 완전하게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 있는 진흙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이 우리들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온전케 하셔서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늘꿈 가족 여러분! 감사의 신앙, 다윗의 신앙으로 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스웨덴 출신의 복음성가 가수인 안나는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늘 감사하면서 극복하였습니다. 나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좋게 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나아가시는 우리 하늘꿈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피하여 가면(룻 1:1~5)
룻기를 일컬어 성서학자들은 인류가 낳은 최고의 단편 문학으로 그리고 사사기와 사무엘서라는 딱딱한 조개껍질 사이에 끼어 있는 “영롱한 진주”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룻기는 히브리인들에게 참 사랑받는 책 중에 한 책인데, 추수를 다 끝내고 가정에서 가족이 모여 앉아 돌아가면서 읽는 책 중에 한 책입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때 읽는 메기로트(megilloth)라 불리는 아가,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 그리고 룻기가 들어 있는 두루마리 책이 있습니다. 룻기는 3000년도 더 된 이 옛날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게 생긴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배경은 약속의 땅 가운데서도 “떡집”이란 뜻을 가진 베들레헴입니다. 이곳은 곡식 수확이 풍부하고 농토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시루떡을 쌓아 놓은 것처럼 되어 있어서 “떡집”이라고 불러지게 된 곳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흉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떡집에 떡이 사라지고, 약속의 땅에 약속이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왕국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흉년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시대에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닥친 흉년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나오미 가족이 지금 그곳 모압으로 갔습니다(룻1:1).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들 모압의 후손들이며,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에 거짓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원수 족속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경제나 건강의 흉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흉년도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며, 말씀이 읽기 싫어지고, 기도의 문이 막혀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과 신앙의 흉년을 만날 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문제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고, 환경을 바꾸면 해결되겠지 도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의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흉년이 자신들에게 닥쳐왔을 때 먹을 것을 찾아 떠난 모압은 잠시 풍요롭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곳을 벗어나면 영과 육이 죽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느끼게 하거나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때때로 위기 즉, ‘위험한 기회’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잘 대처해 나간다면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사시대는 범죄, 징계, 구원, 또다시 타락을 거듭하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율법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시대였습니다(삿17:6, 21:25).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닥친 가뭄은 하나님의 징벌로서 임한 것이었습니다(룻1:1). 그때에 유대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 가족은 그 흉년을 피하여 모압 지방으로 이주를 하였던 것입니다(룻1:2). 그런데 살고자 피한 곳이 죽음의 자리가 되었습니다(룻1:4~5).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나오미 가족이 당한 환란의 원인을 살핌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고자합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말아야 할 곳을 떠났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도는 주님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흉년의 기근 때문에 엘리멜렉은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갔습니다. 흉년이 들지 않은 모압 땅으로 가면 형편이야 나아지겠지만 우상숭배에 물들게 되고 믿음은 병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믿음을 저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였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오늘날에는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성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어떻든 하나님이 계신 곳을 떠난다면 탕자처럼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과 시험이 닥쳐온다 해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품인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을 오늘 엘리멜렉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엘리멜렉 가족은 흉년만 피하면 되는 줄 알고 모압 땅에서 피하여갔지만, 그로 인해 엘리멜렉이 자신도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 마저도 죽었습니다(룻1:3~5). 하나님의 징계가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식들에게는 깨닫게 하려고 징계를 합니다(히12:7~8). 믿음은 하나님의 뜻인지를 깨닫는 분별력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말론과 기룐은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맞아 결혼을 했습니다. 징계를 받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속히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잘못을 돌이키는 복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희망을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의 ‘남았더라’라는 단어 속에 함축된 영적 의미는 대단합니다. 이 단어를 근시안적으로 가볍게 보면 슬픔과 비극을 자아내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남았더라’는 말의 의미를 거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큰 뜻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룻기는 암울하고 불행한 시대에 아름다운 희망의 모습이 있음을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룻기 전체에서 오늘의 본문을 조명한다면 본문은 희망의 역설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보아스를 만난 것이 남편과 자식을 잃은 비극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보아스를 만난 것이 최대의 희망을 맛본 것입니다. 우리는 룻기의 사건을 좀 더 확대해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야는 더욱 넓어지는 것입니다. 나오미, 룻, 보아스를 넘어 다윗의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며 나오미와 룻의 자손입니다. 그렇다면 룻기는 희망의 최대 극치이며 오늘 본문의 비극은 희망의 최대 역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최대의 역설에 해당하는 인물이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이며 그것은 더 나아가 다윗의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매우 혼탁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가 ‘남았더라’는 단어 속에 함축된 영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을 통해서 큰 소망을 가지고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만끽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환난이나 흉년을 피하여 도망하지 말고, 그것을 담대하게 맞아들이면 나에게 닥친 비극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을 알게 되고, 희망의 나라를 바라보며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희망을 노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짊어지는 신앙(룻 1:6~18)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의 남아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지만 남아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니 희망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모압을 떠나기 위해 결단을 하고 일어났습니다(룻1:6). 신앙은 누구든지 약해질 때가 있지만, 낙심하지 않고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면 나오미와 같은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고 역전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모압 땅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나와서 유다로 돌아가는 도중에 멈추어 서서 두 자부에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재혼할 것을 권면합니다(룻1:7~14). 나오미는 모압에서 얻은 모든 것을 무섭고 철저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 룻을 남겨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놀랍게도 우리가 필요한 것은 남겨두시고 나머지는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는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룻은 굳게 결심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룻1:16~18). 이것은 시어머니의 신앙의 영향력이 아니고는 결정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진정 나오미에게 필요한 사람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가장 존경받는 효부 룻기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오미의 어떤 신앙의 인격이 룻에게 영향력을 주어서 고난을 짊어지고 그 어렵고 힘들고 외로운 길을 가게 할 정도로 결단하게 했습니까?
▣ 하나님께 소망을 둔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한 나오미의 참된 신앙의 모습 앞에 두 자부는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존경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우상숭배가 강했던 모압에서도, 또한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은 삶 가운데서도 여호와께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룻1:6). 이같은 신앙의 모습은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나오미처럼 억장이 무너지는 처지가 되면 상당히 믿음이 좋던 사람들도 하나님과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의심을 하거나 아예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이나 불평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대한 소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분별력이 없어도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놓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또 다시 기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역경 중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고난의 현장에 찾아주시기만 하면 그곳은 아무리 암울한 처지에 있었더라도 노래가 흘러나올 만큼 기쁨과 축복의 장소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시42:5).
▣ 남의 입장을 더 생각해 주는 참 사랑의 모습입니다
나오미는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자부들을 먼저 생각해주었습니다. 나오미는 의지할 데 없는 자신의 처지보다도 젊으나 젊은 두 자부의 처지가 더 가여워 보였으며,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어 돌려보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마음 아파했습니다(룻1:13). 후에 베들레헴으로 갔을 때에도 룻이 보아스와 재혼을 하도록 지도를 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룻3:1~). 이것이 참 성도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존중하고 대접해야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고 존중받고 대접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눅6:31). 이제 우리도 내가 먼저 사랑하며, 존중하며, 대접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교회로 하여금 사랑과 그리스도의 정이 넘치게 해야 하겠습니다.
▣ 결국 룻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룻이 아무것도 없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갈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나오미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머니가 의지하고 어머니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고백합니다(룻1:16). 이 고백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섬기던 신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룻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마음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말한 것을 지키는 것이 신앙입니다(마23:3). 룻은 자기의 일생을 걸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마음도 영혼도 몸도 모든 것을 여호와에게 던진 결단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말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었던 것입니다. 항상 믿음의 길, 복된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선택하고 계십니까? 내가 선택하는 길이 아무리 큰 희생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선택하며 살고 계십니까? 내 앞에 있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든 생명의 길, 영생의 길, 축복의 길이든 선택은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렘21:8). 우리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고민하며 기도하실 때 ‘결국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며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의 뜻을 믿고 내가 다 알 수 없고 억울함과 부당함이 있더라도 담대히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인내하는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뒤에는 놀라운 부활의 사건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면서 당당하게 십자가를 맞서는 예수님을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사랑과 능력을 믿으며, 나를 이 어려움에서 이끌어내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귀한 일꾼 삼으시려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당당하게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나오미와 같이 예기치 않은 고난이 찾아오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제외 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고난에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오미와 같은 신앙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모든 것을 다 잃고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다시 고향을 찾아가는 것과 같이 언제나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모습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불길같이 끓어오르는 욕망을 제거해주며, 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내 신앙을 이끄는 기회가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새로운 삶의 태도를 보게 됩니다. 고난을 당한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신앙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시어머니의 신앙을 본 받아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르는 룻을 통해 진정 고난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바르게 배우는 우리 하늘꿈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속에서 피어나는 소망(룻 1:19~22)
신앙은 자신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늘 전수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가 본이 되면 나 혼자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2). 신앙의 본이 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와 같이 참된 신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켜 행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참된 삶인 사랑을 본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그야말로 쓰디쓴 인생이요 힘든 인생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압을 청산하고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나오미가 맞느냐고 말했습니다(룻1:19). 그때 그녀는 나오미의 이름의 뜻인 ‘기쁨’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버리고 ‘마라’라고 부를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녀 스스로 인생을 쓰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를 신앙에서 발견하였습니다(룻1:21). 사람들은 고통의 환경에서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비관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철저히 자기반성을 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라는 말을 보면 고향을 떠날 때만해도 얼마나 든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도 있고, 두 아들도 있고 재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보면 나오미의 가족이 모압 땅으로 간 것은 흉년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풍족한 삶을 꿈꾸면서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로 들어갔던 나오미가 꿈도 이루지 못하고 남편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진짜 인생의 흉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쓰디쓴 인생으로, 텅 빈 인생으로, 괴로운 인생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하여 볼 것은 나오미는 그렇게 만드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절망스러운 환경에서 자신의 눈을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집니다
본문 20~21절을 보면 두 번이나 “전능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엘-샤다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와 말로 할 수 없는 처절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항상 계시고 인생이든 역사이든 시작과 끝을 맺으시는 분이며, 역사의 주관자요 인생의 주인이시기에 인생들에게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게 하는 분입니다(계1:8). 창세기 17장 1절은 나이 들어 늙고 힘이 없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이며, 사라가 90세가 되어서 여자로서 임신할 수 없음에도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으로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힘드는 상황이라고 해도 신앙고백은 분명하고 긍정적으로 고백하면서 믿고 나아가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을 잘 되게 하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좋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는데 룻을 딸 같은 며느리로 주시고 나중에 며느리를 통해 보아스라는 아들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을 주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43장 14절은 야곱이 막내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면서 고백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야곱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요셉까지 다시 얻는 기쁨의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나오미의 인생도 룻과 보아스를 인해서 슬픔이 기쁨이 되고 상상할 수 없는 인생의 역전을 통해서 손자까지 품에 안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9장 25절은 야곱에 요셉을 축복하면서 지금까지 자신과 요셉을 도와주시고 복을 주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종의 신세, 빈손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하늘의 복과 원천의 복과 자녀의 복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도 고향으로 올 때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애를 풍성하게, 넘치는 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같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인생이든 가장 좋게 가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어서 웃게 하시는 하나님, 야곱과 같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어도 마침내 기쁨과 웃음의 인생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 빈손의 인생으로 종의 인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요셉을 그의 꿈대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 나오미가 고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 좋은 동행자와 함께 하면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집니다.
본문 중에서 중요한 단어는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즉, ‘함께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힘들어지면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지지만, 그러다 보면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은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좋은 동행자를 만나면 우리의 삶에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반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는 뜻을 합해야 하고, 뜻을 합하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생각도, 성격도, 감정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서로가 가고자하는 목적지를 위하여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서로의 장점을 보면서 서로 도와가면서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좋은 만남을 통해 동행하기 위해 우리 인생 속에 초청해야 할 분은 바로 오늘 증거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오미와 룻,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서, 두 사람의 동행만을 통해서 좋은 방향으로 그들의 인생이 바꾸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좋은 동행자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해서 기쁨을 다시 찾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소망도 찾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늘꿈 가족 여러분! 영국의 작가요 비평가인 러스킨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꽃 중에 ‘히야신스’라는 꽃의 꽃말은 “마음 편히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꽃이 피기까지는 여러 주 동안 캄캄한 곳에서 자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두움이나 닫힌 문은 자신에게는 당장 괴로움도 주고 아픔도 주지만 또 하나의 문을 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준비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 그들에게 닥친 고난 속에서 또 다른 소망의 이야기를 피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나오미가 돌아온 때는 보리추수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즉 추수를 통해 두 힘없는 여인들이 무엇인가 살아갈 수 있다는 소망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지금 어두움이 닥치고 내가 가려고 하는 문이 닫혔습니까? 또 하나의 다른 소망의 이야기가 시작하려는 것임을 깨닫고 인내하면서 견디어 내는 신앙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만남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룻 2:1~7)
나오미와 룻이 고향에 돌아온 시기는 보리를 추수하는 때였습니다. 두 과부에게도 노력만 하면 먹고 사는 일에는 문제가 없을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기회의 때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과부의 어렵고 힘든 삶의 무게를 덜어 줄 그 땅에서 또 기막힌 만남의 은혜를 베풀어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어찌할 수 없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룻은 삶의 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밭에 가기 전에 먼저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밭에 가든지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구하는 양식을 구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룻2:2). 그 밭이 바로 나오미의 죽은 남편 친족 중에 유력한 자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도와주십니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그래서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고 고통과 가난과 아픔의 길임을 알고도 함께 동행하기로 결정하고 베들레헴 땅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밑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룻2:12). 이것이 룻기의 중심주제입니다. 문제 해결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정말 만나야 할 사람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는!
▣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나오미의 기족을 돌볼 사람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룻2:1). 그 사람은 바로 그 지방에서 소문난 재력과 인격을 갖춘 덕망 있는 사람 보아스였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시는 참 좋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스런 하나님 아버지를 체험하려면 우리 자신도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룻은 새로운 인생의 첫 날부터 사람을 만나거나 나를 도울 사람은 없나 하면서 사람의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힘입어 살기를 원했습니다(룻2:2).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사모하는 룻에게 준비해 놓으신 곳으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룻이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밭에 가서 뒤를 따르며 이삭을 주었는데 그 밭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룻2:3~4). 본문 3~4절에서 주의하여야 할 단어는 ‘우연히, 마침’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룻이 우연히 행한 일을 통하여 보아스를 만날 수 있도록 그 걸음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은 절묘합니다. 그 때를 맞춰서 마침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마침’은 히브리어로 ‘히네이’인데 누군가 뜻하지 않은 순간에 갑자기 벌어진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보아스가 룻이 그 밭에서 이삭을 줍던 바로 그 때,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도착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나홀 성에 도착해서 성 밖 우물곁에 앉아서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인도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을 때, 마침 리브가가 물을 깃기 위해 우물에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마침’은 하나님의 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인도의 은혜는 정확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만남을 통해 축복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샬롬’이라는 히브리인들의 일반적인 인사에 비해서 보아스의 인사는 사랑하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상한 주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룻2:4). 일꾼들이 화답하는 인사 속에서 보더라도 보아스가 일상생활 속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일꾼들을 사랑하고 일꾼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임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아스는 일군들 사이에 낯선 여인을 발견하고 추수꾼들의 감독사환에게 그 여인에 대해 물었습니다(룻2:5). 사환은 룻의 성실성에 깊은 인상은 받았는지 주인이 묻지도 않는 말에 룻의 됨됨이를 덧붙여서 말합니다(룻2:6~7). 룻은 힘든 현실 속에서도 진실하고 성실한 자세로 살았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지켜보지 않아도 성실하게 이삭을 주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참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행실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내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여전히 괴로운 삶의 짐을 지고가야 하는 삶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 백성답게 충성되기란 결코 더더욱 쉽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박한 믿음 생활을 계속해서 해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해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신실하게 인도하시며 함께 하십니다. 바로 룻에게 보아스를 만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늘꿈의 가족 여러분! 룻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내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딸의 문제를 안고 주님께 나왔던 가나안 여인처럼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승리는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때 진정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룻과 같이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룻은 자신의 처지를 그냥 앉아서 비관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삭을 줍기로 작정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레19:9~10).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도 그 섭리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보아스는 누구입니까? 보아스는 라합의 아들로서 사람을 인종이나 배경이나 외모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인 라합이 체험한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은혜를 안 여인들의 피는 계속해서 흘러 마지막에는 모든 인류를 구원할 예수님의 구속의 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늘꿈의 가족들도 은혜를 사모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축복을 받고 그 축복을 나누어 주면서 영향력을 주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만남의 위로와 도움(룻 2:8~16)
우리는 지난 시간에 힘없는 두 과부가 사람을 바라보거나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때에 맞춰 인도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두 사람에게 준비해 주시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고난을 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며 살아가려는 룻에게 하나님께서는 살아갈 방법을 준비시켰으며, 불쌍한 과부를 위로 할 사람을 준비시키셔서 그 사람에게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때에 깨어지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이 깨어짐은 우리로 깊은 깨달음의 길로 인도합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흔드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흔들림을 이겨내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보면 사람을 불러서 사용하시기 전에 환난, 고난, 시련을 통해 먼저 흔드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13년 동안 종살이, 감옥살이를 통해서 흔들었으며, 다윗은 10년 동안이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숨어 도망 다니면서 하나님의 흔드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흔들었습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죽는 거센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룻은 그 길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어두움의 골짜기, 시련의 강을 맞이하여 헤쳐 나갔습니다. 고난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은 그 시간을 이겨낸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면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보아스를 예비해 두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룻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아래 보호받고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보아스와의 만남을 통해서 보상해 주셨습니다. 훈련 받지 않은 위대한 군인이 없고, 연주자가 없고, 작가가 없고, 항해사가 없는 것입니다. 훈련을 잘 끝내고 나면 남이 경험하지 못한 기쁨을 경험하게 된 것에 오히려 그 시간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이겨낸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1) 보호하심의 은혜입니다(룻2:8).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보호해 주시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가기를 원하셨던 하나님과 같이 새끼를 왕중의 왕을 만들기 위한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키면서 보호함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훈련을 잘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은혜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처음 시작은 좁고 협착한 힘든 길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길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보호를 받아서 결국에는 복을 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룻이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도와주심의 은혜입니다(룻2:9~10).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아름다웠고 더불어 고상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기댈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룻을 지금 보아스가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꾼들에게도 도와 줄 것을 명하고 또 당사자인 룻에게도 도움을 피하지 말고 따를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3) 위로하심의 은혜입니다(룻2:11, 13). 보아스는 이방 여인인 룻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남편이 죽은 후에 시어머니에게 행한 효심과 자기 부모와 고국을 떠나 이스라엘 가운데로 온 일과 룻이 행한 모든 일에 룻 스스로가 현숙한 여인임을 누구보다 가장 잘 보여 주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기 원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자기들을 위로할만한 대상을 찾아다니다가 우상을 만들어서까지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우리에게 주어지는 참된 위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계7:17). 우리들도 고통당하고, 애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 주는 위로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언어는 보아스가 룻을 위로하는 말과 같이 위로와 격려하는데 사용하는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우리 하늘꿈 공동체가 보아스와 룻과 같이 모두가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는 가족 공동체로 굳게 세워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4) 풍성한 채움의 은혜입니다(룻2:15~16). 이제 보아스를 만난 룻에게 나타난 또 하나의 준비 된 은혜는 보아스의 풍성함이 바로 룻의 풍성함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풍성함에 있습니다. 이 풍성함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풍성함, 환경의 풍성함, 그리고 물질의 풍성함을 약속해 주셨습니다(요10:10, 빌4:19, 고후8:9).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과 물질은 나누어 주고 마음껏 헌신하기에 넉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와 성도들의 가정과 기업 위에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인간의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만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았습니다. 그것도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라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이방여인이 자존심 강한 유대 땅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을 만나도록 인도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은혜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베풀어주시고, 채워주십니다. 룻과 같이 만남을 통해서 채워주시고 위로와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과 사업위에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만남의 축복을 기대하면서...(룻 2:17~23)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시고 만난 보아스를 통해서 인도하심의 은혜, 보호하심의 은혜, 위로하심의 은혜 그리고 풍성하게 채워주심의 은혜를 경험한 룻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룻을 위하여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도 공평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얻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생명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주시기 원하는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요? 룻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만남을 통한 축복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룻에게서 은혜와 축복을 받기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배워야 할 것입니다.
▣ 룻은 성실한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세상적인 외적 기준으로 볼 때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룻에게는 아름다운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실성입니다. 룻이 저녁까지 이삭을 줍는다는 말을 강조하며 표현함은 그녀의 성실함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룻2:7, 17). 진정한 성실은 환경이나 조건이 더 좋아졌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태도가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공하는 사람은 부러워하지만 성실한 사람은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실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사귐을 가지면 반드시 룻과도 같이 은혜 위에 은혜, 복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룻의 성실함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 룻은 작은 일에도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성실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대하여 작은 일이라고 해도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룻은 이삭을 줍는 일을 소중히 여겼으며, 그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룻2:7, 17). 작은 일이라고해도 소중하게 행하는 행동을 보고 보아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그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마25:21). 작은 일이라고 해도 맡겨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2) 룻은 자신의 일에 변함없이 행하였습니다. 룻과 같이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든지, 그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살아가기 위하여 주저앉아 원망이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그 일을 행하는 것을 봅니다(룻2:18). 바로 성실이란? 이같이 환경이 어렵고 힘이 들고 고통이 따른다고 하여도 아니 더 죽을 것 같은 현실이 엄습해 온다고 하여도 그가 믿는 진실하게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사자굴에서 건져내 주셨으며, 시대가 바뀌고 왕이 바뀌어도 형통하게 하였습니다(단6:16, 28).
3) 룻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실한 사람은 룻과 같이 자신의 주제를 알고 위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룻은 지금 보아스의 보호와 위로와 도움과 채워주심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방심하지 않았습니다. 성실한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실한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성실함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룻은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엡6:1~3). 룻이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시어머니를 잘 공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룻에게서 어른을 공경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1) 룻은 받은 축복을 함께 나눔으로 어른을 공경했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서 은혜로 받은 축복을 시어머니와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룻2:18). 축복은 나눌수록 풍성해 지고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으며, 자신의 위치를 바로 알고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주는 축복을 아낌없이 나눔으로 더 큰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을 통해서 듣기를 보아스를 통해서 복을 받았다고 하자 보아스를 나오미가 축복하는 것입니다(룻2:19~20). 그 결과 보아스가 더 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같이 룻은 어른과 함께 자신이 받은 복을 나누며 공경했습니다.
2) 룻은 밖에서 있었던 일을 나눔으로 어른을 공경했습니다. 은혜가 있고 복을 받는 가정에는 충만한 대화가 있는 것입니다. 룻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나오미에게 소상하게 말씀드리는 것을 봅니다(룻2:19~21). 나오미는 룻과의 대화중에서 보아스를 만났다는 말에 하나님의 섭리하고 계심을 깨달아 하나님의 축복을 빌었습니다. 어른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진정한 대화를 하면 어른에게 알지 못하는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룻은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함으로 공경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며느리인 룻이 잘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룻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다시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으라’고 부탁합니다(룻2:22~23). 룻은 보아스의 부탁의 말에도 순종하였고, 시어머니 나오미의 부탁의 말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룻은 어른들의 말에 순종함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은 화목한 가정위에 임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녀들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룻은 어른을 공경하는 믿음으로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고 그대로 행하였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크게 받았습니다. 어른을 공경 할 줄 알아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가 자신의 기업을 무를 자라고 말합니다(룻2:20, 레25:25). 어쩌면 자신의 남편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보아스를 통해서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구속자가 되고 기업 무를 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바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분이 더욱 중요한 것과 같이 축복보다도 축복을 주시는 분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룻과 같이 준비함으로 이 세상에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하늘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새로운 인생의 준비(룻 3:1~5)
지난주에 우리는 룻이 성실함과 어른을 공경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준비한 만남을 통해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나도 준비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며 살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본문에서 나오미는 룻에게 새로운 남편을 만나서 가정을 통한 행복한 삶을 살게 하고자 하는 새로운 인생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룻3:1). 나오미는 자신의 행복보다 며느리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위하여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고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순종하며 효도하니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룻에게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와 어떻게 하면 좋은 만남을 이룰 것이며, 사랑을 이루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게는 자신의 인생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을 얻는 지혜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면 나오미가 룻에게 사람을 얻는 방법, 사랑을 성취하는 방법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가르침을 잘 배워야 합니다.
1) 나오미는 룻에게 목표를 정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지금 룻에게 ‘너는 이제 네 남편 될 사람으로 보아스로 정하라’고 정확한 목표를 정해 주고 있습니다(룻3:2). 우리들이 만약에 자녀들의 배우자를 구한다고 하였을 때도 막연히 구하는 것보다도 구체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오미와 같이 구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안목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보이고 성공이 보이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직업을 가졌든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은 누구나 목표를 갖고 분명하게 세우고 나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히11:1).
2) 나오미는 룻에게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가 기거하는 곳이 어딘지, 그리고 보아스에게 어떻게 해야 그가 감동을 받게 될지에 대하여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룻3:2~4). 나오미는 보아스의 마음을 끌기 위하여 구체적이고도 치밀한 계획을 룻에게 세워주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은 항상 이같은 구체적인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나가야 합니다(시20:4). 나오미는 룻에게 자신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려는 그 꿈을 위하여 정확하게 계획을 세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나오미는 룻에게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철저히 준비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최고로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시키는 것을 봅니다(룻3:3, 11). 사람에게 첫 인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인상은 10초 안에 결정되지만 그 인상을 바꾸는 데는 10년이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룻은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현숙’이란 ‘정숙하고, 고상하고, 지혜로운’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현숙한 여인을 얻는 것은 ‘진주’를 얻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잠31:10) 보아스는 이미 룻의 내면을 알았습니다(룻3:11). 우리들도 좋은 사람을 얻고 훌륭한 사람을 얻으려면 자신의 내면을 잘 가꾸고, 외모도 잘 가꾸어서 누구에게나 자신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철저히 준비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나오미는 룻에게 목표가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고 기대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였습니다(룻3:4). 무슨 일이든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고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그가 네게 대하여 할 일을 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대하는 것이 있어야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게 하십니다(엡3:20). 우리들은 기대하는 것만큼 얻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5) 나오미는 룻에게 기회를 잘 선용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추수를 끝내고 난 보아스가 먹고 마시면서 마음이 즐겁고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기 전까지는 그에게 나타나지 말라는 것입니다(룻3:3). 그래서 룻은 나오미의 말대로 순종하여 기회가 오기까지 기다리다가 기회가 오자 그 기회를 따라서 보아스에게 자신을 나타내었습니다(룻3:7).
6) 나오미는 룻에게 기회가 오면 바로 행동으로 옮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꿈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포착하였다고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룻3:5~6).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룻은 보아스와 상대가 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환경이 어렵다고 해도 목표가 설정되고 계획을 세웠다면 확신과 기대감을 가지고 포기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실패를 가져온다고 해도 그 실패는 정지시키는 표시가 아니라 다시 새롭게 도전을 하게 하는 방향 표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일에 도전을 하고 확신을 가졌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의 전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7) 나오미는 룻에게 마지막으로 일이 이루어지기 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룻3:18). 하나님의 타이밍은 오차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생각과 일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인도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다면 반드시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나오미는 역시 인생을 살아오면서 믿음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겪고 체험한 것을 잘 활용하여서 며느리인 룻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코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일이 이루기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이며, 인내하는 자는 약속을 이룸 받고 반드시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약1:4, 히6:14~15). 나오미가 룻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고 있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목표가 분명했습니다.(막10:45, 눅19:10) 그리고 목표를 이루시고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시고 30년간 철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기회가 되자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실패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기다렸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혜의 성령님과 늘 동행하셨으며, 이 같은 일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짐도 아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내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계획이 이루어짐을 기다리셨습니다. 본문의 나오미는 진정 룻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룻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얻는 길임을 알았습니다(잠11:30). 우리들도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참 인생의 행복은 참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룻 3:6~13)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싼 대가와 노력을 지불했을 때에 비로소 믿음의 가치가 있고 남들에게 인정도 받고 하나님 앞에도 인정받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시어머니의 간절한 사랑을 볼 수 있었으며, 그 간절한 사랑을 그저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닌 것을 알았으며, 그 사랑을 이루는 7단계의 비결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계속해서 룻이 시어머니의 명령을 따라서 새로 가정을 이루어야 할 남편감으로서의 보아스를 만나서 결혼을 허락 받는 장면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뜻을 따라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다가 자신을 발견한 그에게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자이므로 자신의 청혼을 받아 줄 것을 요청합니다(룻3:7~9). 이에 대한 보아스의 반응은 ‘너의 그 귀한 중심이 처음에 시어머니를 따라서 여기에 온 것도 귀하지만 지금 또 이렇게 가문의 대를 잇겠다고 나이 많은 나에게까지 와서 이렇게 시집을 오겠다고 한 그 마음은 더 귀하다’고 대답합니다(룻3:10). 인생은 누구나 전환점이 있습니다. 룻은 지금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전환점에 스스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인생의 전환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룻에게서 우리는 또 배워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에서 우리들의 신앙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신앙의 삶은 점점 더 나아지고 좋아지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도 연애할 때 보다 살아가면서 더 좋아지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람도 처음 만날 때보다 만나면 만날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사랑도 세월이 갈수록 깊어지는 사랑 갈수록 정이 쌓여가는 사랑, 그 사랑이 값어치기 있고 소중한 사랑입니다. 믿음도 처음 믿는 믿음보다도 갈수록 더 깊어지고 높아지는 믿음이 진짜 귀한 믿음인 것입니다. 하늘꿈의 모든 성도들도 보아스가 룻을 향해서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다는 말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처음 보다 나중이 더 좋은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의 인격이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믿을 때보다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갈수록 더 좋은 인격의 신앙입니다. 신앙의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열심보다도 나중에 더 나갈수록 내어지는 열심 이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봄에 씨앗을 많이 뿌렸다고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에 추수 많이 할 때에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서 말하는 축복도 시작은 미약했어도 나중에 잘 되는 것입니다(욥8:7). 처음은 작게 시작을 해도 점점 잘 되는 것이 신앙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시작보다도 끝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전7:8).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손님들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포도주를 대접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성도의 모습이고, 축복 받은 백성의 삶의 모습이고, 이것이 천국의 법칙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와 같은 신앙의 인격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룻이 이런 여인이었습니다. 룻이 자신의 신앙의 인격을 잘 가꾸면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룻이 이스라엘에 올 때보다도 더 인정을 하고 룻의 인격을 칭찬하였음을 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보아스의 결혼 약속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은 육의 감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발치에 누워있던 룻을 발견한 보아스는 그녀의 청혼을 조건부로 수락합니다. 그것은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 중에 ‘기업 무를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룻3:12~13). 보아스는 인격적으로 설명하며 순리를 따르는 절제된 모습을 룻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일은 육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그 인생을 진실 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온전하게 배웁니다. 나오미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 죽음을 깊이 음미하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보통 때보다 7배나 뜨겁게 달구어진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부터 그들은 완전하게 바꾸어진 인생을 살아갑니다. 때로는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고난이나 역경은 나를 만나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진실해 집니다. 그러니까 룻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어머니가 가는 곳에는 나도 같이 가고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나도 죽습니다’라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생명력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자라고 열매 맺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신앙생활 했는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변화가 없다면 생명이 있는 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참 믿음의 사람으로 서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나는 온전한 생명력이 있는 믿음의 사람인가를 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고 뜻 때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은 이미 그것을 터득하고 자신들의 일이 이루어지기 까지 사람의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서로를 믿고 기다려서 결국 일을 하나님의 뜻 때로 이루지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때 신앙의 모습은 점점 더 나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 보다 올해가 더 나아야 됩니다. 신앙의 모습, 인격의 모습, 인간관계 모습, 교회 출석하는 모습, 그리고 각 봉사하는 부서와 목장 활동의 모습까지 점점 더 좋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 좋은 인생으로의 전환점을 룻과 같이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쉬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룻 3:14~18)
지난주에 우리들은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룻과 보아스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시어머니의 나오미의 명령을 따라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던 룻은 그로부터 기업 무를 자의 임무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는 다짐을 들은 후에 보아스이 말대로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들이 알아보기 전에 일어나서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룻기3:14). 이제 룻의 아름다운 성품이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룻은 나오미가 말할 때도 잘 순종했고, 보아스가 지시할 때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보아스의 말에 순종하면 보아스가 책임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죽을 때까지 책임져주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는 달라도, 도저히 우리 이성으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씀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면 우리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또 보이는 윗사람의 말씀에도 순종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성품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이 룻이 보아스의 말대로 일어나 가려고 하자, 보아스가 룻에게 그의 겉옷을 펴게 하고 그 옷에 여섯 번이나 보리를 부어준 것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룻3:15). 하나는 보아스가 불쌍한 사람을 거져 보내지 않는 돌아보는 성품의 표시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본문의 전체의 흐름을 보면 아마도 집에서 기다리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현숙한 자부를 보내놓고 잠을 편히 자지 못할 것을 안 사람의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뜻을 알았다는 응답이기도 한 것입니다. 룻은 그런 제안을 하는 보이스에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고 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약속을 잊은 것이 아니라 바로 성읍으로 들어가 자기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를 찾아서 그의 의향을 묻고는 룻과의 약속한 일을 속히 매듭지으려고 힘들고 지쳐 있지만 아침 일찍 성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룻3:18). 시어머니에게 온 룻은 어머니를 섬기고 효도하는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전후 사정을 묻는 시어머니에게 보아스가 자신에게 행한 모든 것들을 다 말하였습니다(룻3:16). 그 말을 들은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에게 이제는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일이 될지를 지켜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보아스는 “오늘 이 일이 성취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오미의 믿음과 같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보아스가 쉬지 않는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시고 함께 하시며, 택한 우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약속으로 보내준 보리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 시대에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장차 우리와 결혼하시기 위한 약속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지켜 나간다면 우리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 약속들을 이루기 위하여 보아스가 룻과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서 쉬지 않고 그 일의 성취를 위하여 바쁘게 다니는 것 같이 오늘도 우리들에게 역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1) 나오미가 가졌던 보아스와 룻이 반드시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통해 룻이 가져 온 보리를 보는 순간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통해 가져야 할 자세는 바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처리하셨다는 확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을 승리하고 앞으로 장차 주님과의 혼인자리에서 영광스러운 날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약속하신 말씀임을 확신하고 반드시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늘 기쁘게 남은 생애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나오미와 같이 자부 룻을 보내놓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이 우리들도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룻은 궁금해 하는 나오미에게 보아스가 자신에게 보리를 여섯 번 준 일과 보아스가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고 한 말까지 전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보아스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나오미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왜 보리를 여섯 번 주었을까요? ‘여섯’이란 완전수 ‘일곱’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아직 일이 다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의 상태이며 완성을 향해서, 즉 안식을 향해서 나아가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가 앞으로 이루어가게 될 일을 지켜보라고 권면합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으면 기다려야 하는데 인내하지 못하고 서두르면서 인간의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하고 사람의 처세술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다윗과 같이 욥과 같이 인내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끄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3) 보아스가 일이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열심을 가지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성실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시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요5:17).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부지런히 열심히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하여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과 같이 열심을 가지고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일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바로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그 말씀이 나를 통해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고. 이루어 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을 삶을 살면서 나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같이 진정으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고 열심을 다하여 일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남(룻 4:1~12)
세계적인 전도자요 목사인 '디엘 무디'는 모세의 일생을 세 가지의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처음 40년을 영어로 “I am somebody”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즉, “나는 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40년은 “I am nobody”, 즉,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의 40년은 “I am God’s body” 즉, “하나님의 종” 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하나님만 의뢰하고 사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바로 이런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놀라운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펼쳐 가신 것입니다. 룻도 모세와 같은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결혼을 했을 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와 함께 생계유지를 위해 보리 이삭을 주어야 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룻기의 핵심적인 단어 중 하나는 “기업 무를 자” 입니다. 기업 무를 자란? 가문 내에 어떤 집안에 문제가 생겨서 위기에 처했을 때 친족에게 도움을 주고 땅을 저당 잡힌 것을 도로 찾아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가난한 친척의 기업을 다시 사 주어야 했으며(레25:25), 자녀가 없이 죽은 친족인 경우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신25:5~6). 기업 무를 자의 자격은 혈연관계이어야 했습니다(룻2:20). 보아스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침에 일찍이 성읍으로 들어가서 자신보다 먼저 기업 무를 자를 발견하자 그를 불러서 자리에 앉게 하고는 그에게 왜 그를 불렀는지를 설명합니다(룻4:1~4). 보아스는 먼저 이 일에 관계되는 관계자들을 다 불러 모으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성 문은 그냥 성 문이 아니라 그 위에 공회당 같은 그런 장소가 함께 마련되어 있는 공공장소였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 1순위인 사람을 불러 사람들 앞에서 묻습니다. 나오미가 자신의 소유지를 팔려고 내놓았다는 것입니다(룻4:3). 어떤 한 가문이 자기들이 상속받은 땅을 팔려고 내 놓았다는 것은 친족들에게 의무를 시행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그 자리엔 당사자들 뿐 아니라 그 마을의 장로들 10명을 위시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입니다. 기업 무를 자 1순위의 사람은 보이스의 설명을 듣고는 그 의무를 포기합니다(룻4:6). 기업 무를 사람은 재산만 책임지고 팔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없으면 대를 잇게 하기 위하여서 자식도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스라엘에서는 무슨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서 그의 이웃에게 주던 습관이 있었는데, 기업 무를 자가 신을 벗음으로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모든 백성과 장로들에게 자기가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됐음을 공포하였습니다. 보아스가 이 사실을 공포한 것은 그들을 떳떳하게 해 주고, 그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또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공포하자 장로들이 축복으로 화답을 해주고 있습니다(룻4:9~12). 야곱의 가문과 같이 룻을 통해서 복을 받기 원하며, 이스라엘의 조상을 이룬 라헬과 레아와 같이 되기를 바라며, 지금도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집안이지만 앞으로도 더 유명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룻을 통하여 보아스에게 상속자를 세우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다말이 유다에게서 난 베레스와 같이 축복의 가문을 이끌기를 바란다고 축복하였습니다. 유다가 계대결혼법을 어기고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냈을 때, 다말의 지혜롭고 현숙한 행동으로 인해 유다의 자손이 번창한 일을 보고 그 후손들은 자손대대로 이 사건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정확하게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읽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현숙한 여인 룻이 보아스의 집에도 축복이 되기를 바란다고 복을 빈 것입니다. 이같이 보아스가 룻에게 기업 무를 자가 되어서 값을 지불하여 진정한 대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게 되고,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모압 사람 룻은 가난한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이 여인을 값을 지불하고 모든 것을 물고 자신의 빚으로 여기고 갚아준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자유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의 채무를 지시고 우리들을 죄와 흑암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룻이 자유를 얻은 것도 귀한 것이지만 더욱 귀한 것은 보아스의 아내가 됨으로 이제 룻의 신분이 완전하게 바꾸어진 것입니다. 룻의 고향인 모압은 롯의 후손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아내가 죽고 살아남은 두 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바로 모압과 암몬입니다. 롯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육의 사람이었기에 이스라엘의 족보에 들어 올 수 없는 후손인데 그런데 이제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족보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도 똑같이 룻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꾸어지고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3) 가문과 대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룻은 보아스로 말미암아 룻의 가정의 기업을 잇게 된 것입니다. 이제 보아스가 베풀어준 은혜로 말미암아 엘리멜렉의 가문이 기업이 보존 되게 되고 대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룻4:10).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룻에게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고, 그 인생이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룻은 가난에서, 과부라는 고통에서 자유로워 졌고 새롭게 거듭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인생은 누구를 만나야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구속 사업을 다 이루시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 기업을 잇게 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피 값으로 사셔서 구속하시고 신랑 되신 예수님이 신부로 삼아주시고 하늘의 은총을 얻게 해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난 것과 같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난 것임을 굳게 믿고 날마다 더 좋아지는 인생을 꿈꾸면서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새 인생의 기쁨(룻4:13~17)
농부가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인내하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은 야구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구는 9회 말 끝나기 까지 끝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9회 말에 역전승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생에 비유하면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 시간에 찬송으로 마무리 되는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언제든지 역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막막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구하는 것을 다 주시지 않지만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현실이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먼저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을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인생의 홈런을 날 릴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야구는 9회 말로 끝나지만 인생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도 않고 도전 할 수 있는 기회도 무한한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룻을 통해서 이 같은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축복을 준비하고 계심과 그 준비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어떻게 인도하시고 간섭하시는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내고 주님의 이름을 믿으면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룻을 통해서 가르치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견디고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22, 11:6). 우리들도 룻과 같이 어떠한 상황이나 형편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잘 견디어 내고 참고 인내하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가장 좋은 것들을 받으면서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보아스는 예식을 갖추고 그녀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룻은 이제 보아스이 아내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여시고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룻4:13). 얼마나 감격적인 사건입니까? 우리들은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복 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즉, 믿음의 삶은 언제나 기쁨을 얻는 삶입니다(룻4:14).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은 어느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또한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마음도 우리 모든 신앙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니 하나님 안에 있는 참 기쁨을 함께 누리고 나누며 살게 되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기쁘지 않는 신앙생활은 오래갈 수 없으며 오히려 또 하나의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 안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항상 기쁨이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요15:11).
▣ 룻을 통해서 새로운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들은 룻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삶으로 변화 되는 룻을 보았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룻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기쁨을 줍니다. 그러기에 어떤 형편에서도 기뻐하는 예수님과도 같은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의 삶을 살았으며 감옥이든 고난의 시간이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룻은 새로운 인생의 기쁨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아스를 만남으로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되는 것을 봅니다. 룻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베푸시는 기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자식을 얻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함께 나누면서 더 많은 것을 얻는 기쁨입니다. 룻을 통해서 보아스도 복을 받았고, 나오미도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은 사람을 잘 만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것보다도 더 큰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룻을 통해서 자식을 얻게 하심으로 가문도 이어지게 되었고 상상할 수 없는 넘치는 기쁨도 맛보게 하셨습니다(룻4:13).
2) 회복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아들을 보고 여인들이 나오미를 축복합니다(룻4:14~15).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기업 무를 자를 세워서 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네 생명의 회복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새로운 삶의 자리로 생명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과거의 아픈 상처를 보아스를 통해서 싸매 주셨습니다. 룻은 이 회복의 기쁨을 맛본 것입니다. 이 회복의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3) 살맛나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룻의 아들이 바로 나오미의 노년의 봉양자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룻4:15).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사람이 살맛나는 인생으로 바꾸어집니다. 룻의 아들 오벳이 나오미의 품에서 성장합니다. 나오미가 오벳의 양육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손주들을 통해서 내가 못 이룬 꿈들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고 그들의 생애를 복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노년의 남은 생애가 복되고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선지자는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유명한 선지자가 되었고,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의 기도로 유명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음을 교훈합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항상 자녀들에게 신령한 사람으로서 유명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베들레헴 여인들의 축복의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이란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불평, 불만으로 원망이나 하면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아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내었습니다. 꿈을 꾸던 계획을 세우던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게 우리들의 인생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좋게 만드셔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인생을 통해서 믿음으로 맡기고 나가니 가장 좋게 하셔서 기쁨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안 되는 것도 바꾸어지는 룻과 같이 놀라운 새 인생의 기쁨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새 인생으로 세워진 신앙의 가문(룻 4:18~22)
룻기에서 만나는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1장에서는 ‘고통’이라는 뜻인 ‘마라’라는 단어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을 떠나서 모압에서 10년을 넘게 살면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게 되었고, 거기서 만나 가족이 된 룻도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와서 살게 되는 고통의 인생으로 시작합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쓰디쓴 인생으로 살 수 밖에 없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한 줄기의 빛을 맞이하게 됩니다. 3장에서는 ‘안식’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룻과 보아스가 만나고 그들의 만남으로 새로운 인생의 안식이 이루어집니다. 4장의 단어는 ‘찬송’입니다. 고통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준비된 은혜로 가정이라는 안식처를 통해서 서로가 더 좋아지는 복을 받고 그 결과로 찬송의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결국 룻기는 가슴을 치면서 아프게 살 수 밖에 없던 그들에게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되는 축복받는 인생으로 바뀌어서 행복으로 끝나는 책이 바로 룻기입니다. 나오미가 룻을 만남으로 복을 받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만남으로 복을 받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만남으로 복을 받습니다. 룻이 보이스를 만남으로 복을 받습니다. 룻 때문에 엘리멜렉의 집안의 가문이 새롭게 세워집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으로 다윗이 태어납니다. 다윗 때문에 이스라엘이 복을 받습니다. 결국 우리는 현숙한 여인 룻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복을 받고 전 인류가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룻의 계보에서 낳았습니다(룻4:18~22, 마1:3~9). 이같이 한 여인이 가졌던 신실한 믿음이 그 여인으로만 끝마친 것이 아니라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역사가 얼마나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복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복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장인 4장에서 등장한 여인들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치유를 받은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이 그렇습니다. 창녀의 행세를 하면서 시아버지와 동침을 하여 아들을 낳은 기가 막힌 여인입니다. 그 다음은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입니다. 그녀는 이방인이었으며, 기생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을 만나 낳은 아들이 보아스였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보아스는 자신이 상처 입은 룻의 상처를 대신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실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들은 룻과 같은 존재입니다. 죄인이며 버림을 받은 존재이며, 고독의 인생, 아픔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유력자요 전능자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시고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같은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들로 하여금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인 구원자로, 상속자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게 깨닫고 살아야 할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입니다(고전13:13). 왜냐하면 룻기서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듯이 믿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패와 좌절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며, 믿음 때문에 꿈이 생기고, 비전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생긴 소망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우리들로 하여금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넉넉하게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과 같은 믿음을 가진 인생은 소망을 잃지 않게 합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어렵고 힘든 상황들을 오히려 더 좋은 환경이나 상황으로 바꾸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어떻게 은혜로 함께 하시고 믿음의 인생들에게 어떠한 축복을 준비하고 계시는 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믿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한 두 번의 장애를 만났을 때 쉽게 포기하느냐 아니면 포기하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막2:5). 진정한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낳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 새로운 역전의 삶을 누리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리들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룻기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보다 자식들의 대에 더 소망이 있는 족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기 앞에 서 있는 우리가 깨닫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세워진 가문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떤 믿음의 대가라도 지불해야 합니다. 내가 죽어짐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이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고, 기도하고, 인내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나 자신이 될 때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보다 자녀의 신앙이 더 좋은 가정이 소망이 있는 가정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역시 교육관 시설은 아주 기본이고, 교사들의 영성 훈련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본문을 보면 분명 베레스의 가문은 갈수록 더 좋은 가문이 되었습니다. 베레스에서 보아스로, 보아스에서 다윗으로, 다윗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메시야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베레스의 가문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복된 가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룻, 나오미, 보아스처럼 자기들만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늘꿈교회가 20세기에 세워진 가장 복된 교회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새 시대에도 변함없이 어떤 환경이 닥치던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얽매이지도 말고, 물러서지도 말고, 방해받지도 말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복된 교회로, 영적 유산을 이어가는 복된 교회를 향한 꿈이 현재 믿는 우리들과 앞으로 계속해서 들어오실 모든 분들에게 까지 넘쳐나기를 끊임없이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순종(욘1:1~10)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로 나타나 있습니다(욘1:1, 왕하14:25). 요나가 활동한 시대는 기원전 803~790년경으로 엘리야와 엘리사 다음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중 최초 선지자였습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도성의 회개를 통해서 모든 나라가 죄에서부터 회개하기 원하신다는 것과, 부름 받은 사명자가 그 사명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어떤 결과를 얻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 요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니느웨 성은 BC 700년 경 산헤립이 왕이 되어서 도시를 확장하여 앗수르의 수도로 삼은 후 BC 612년 경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서 함락될 때까지 수도로서 위용을 떨쳤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시시탐탐 괴롭혔고, 그래서 원수같이 대하였던 나라였습니다. 니느웨 성이 걸어서 삼일 길이라고 했는데, 그 크기는 서울 전체의 크기보다 약간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욘1:2). 그 이유는 그 성의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하여 심판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관심과 주권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모든 민족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요나가 가야 할 곳은 니느웨이고 외쳐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40일이 지나면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욘3:4). 개역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쳐서 외치라”고 하셨습니다(나3:1, 욘1:2). 이는 니느웨 성의 죄악을 대적하여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요나를 멸망을 받을 도시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든 이스라엘이 아니더라도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의 시간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 불순종하여 도망하려는 요나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요나의 태도는 “그러나”였습니다(욘1:3). 불순종은 언제나 “그러나”의 구실을 찾아 이곳 저 곳을 헤매는 것입니다. 요나가 “얼굴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피하려한다는 뜻입니다.
요나가 이 사명을 피하려는 이유는 그가 받은 사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으며, 니느웨 성이 이방인 성읍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명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그런데 여기 요나가 이 사명을 피하려고 한 것은 어리석은 불신앙에서 나온 불순종의 행위입니다. 요나가 보인 불순종의 모습은 그것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육체의 행위를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욥바로 내려갔고” 5절의 “배 밑창에 내려가서”라는 말씀은 바로 타락의 생활로 내려가는 생활이고, 내려가는 첫 단계는 불신앙에 의한 불순종이며, 둘째 단계는 하나님께 묻지 않는 기도 없는 삶과 함께 교만함과 핑계함과 완악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 항구에 가니 배가 ‘마침’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요나는 순조롭게 준비되어서 탈 배를 보고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을 주의해야 합니다. 요네다 유니까(米田豊) 목사님은 마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를 낚아채려고 순조로운 조건을 준비하며, 또 자기중심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도록 돕는다고 했습니다. 메튜 헨리는 하나님을 거슬려 내 육체의 중심대로 형통하고 소원성취가 될 때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올무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지불한 배 삯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위한 죄의 삯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그 삯에 대한 값을 하나님은 고난과 징계인 폭풍과 물고기 뱃속에서의 무서운 경험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 나 한 사람의 불순종은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자에게 형벌이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삼상12:15).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묵인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가 승선한 배가 순풍으로 항해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바람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되어 진 바람입니다(시135:7). 신앙인이 불순종 하는 이유는 자신의 심령이 어두워져서 신앙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어둠이 찾아오면 영적인 잠을 자게 되고, 영적인 잠에 빠지면 영적인 삶이 무감각해 지고, 무책임해 집니다. 그러기에 노아와 삼손, 그리고 다윗과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신앙인이 영적인 잠을 잔다는 것은 영적 문제의 심각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창9:20~24, 삿16:19, 삼하11;1~5, 마25:1~13).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내리신 것은 요나를 찾고 다시 돌이켜서 그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요나는 인간적인 수완으로 숨어보려고 했지만 제비뽑기에 의하여 다시 하나님께 붙잡혔습니다. 결국 요나는 아무리 도망치고자 발버둥 쳤으나,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사람들에게 고백하였습니다(욘1:10). 불순종한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을 고생하게 하였고, 재산을 잃게 하였습니다. 말씀에 보면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다고 했으며(롬5:12~17), 아간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이성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될지언정 풍랑의 원인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구약에 있어서 최초로 이방 전도라는 큰 사명과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전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사명이고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요나는 이 사명에 불순종 하다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는 전도의 사명을 망각하고 등한히 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경고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렘48:10). 사명을 버리면 풍랑을 만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 풍랑을 만나고, 범죄 하면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전도하지 않고 도망하면 풍랑을 만납니다. 풍랑만나 야속하다고 하지 말고, 주의 뜻을 바로 받들고 맡겨주신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하늘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지극히 기쁘게 해드린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성품과 모든 행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빌2:5, 8~9).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이고 확실한 순종이 우리 모두의 삶의 본질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것 처럼 쓰던 달던 내것으로 만들어야 제 영혼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멋진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