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끈 [김경미]
서랍 뒤쪽에서 불쑥 주황색 구두끈이 나타났다.
나타 났다는 말이
갑자기 마음에 들어서
주황끈에 어울리는 구두와 정장을 사서
찻집에 나타나고 싶었다
최대한 길게 대화의 선을 잇는 사람들
서랍같이 열렸다가
서랍같이 닫히며
서로를 보관하려는 사람들
나도 양말에 어울리는 스카프를 사고
스카프 같은 초승달을 보며
갑자기 나타날 사람과 걷고 싶다
잘 어울리고 싶다
-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사, 2023
셀로판지의 사색 [박은영]
얹어 놓으면 색이 겹쳐져요 밖이 보이긴 보여요
가운데 죽은 사람도 보이고
어제 거리에서 작은 등에 금성을 매고 다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붉은 온도는 끓고 있지만 푸른 셀로판지가 무능화 시켜요
손부채에 성역은 날아가고
에어컨 실외기는 계속 돌아갑니다
서울이라면 한강 쪽으로 걸어오시고
제주도라면 한라산을 향해 오세요
바르셀로나에서 기차 타고 40분 정도 가면
시체스라는 도시가 나와요
리세우역 앞에서 아침밥을 먹다가
귀가 어두운 한국인 할아버지께서 오늘은
어디 가냐고 물어보는데
시체스요! 시체스!
아무리 크게 외쳐도 모르셔요
그런데 옆에 언니가 시체, 시체!
하니까 바로 알아채시더라고요
하얀 건물 속에 둘러 싸였다면
얼른 빨강 셀로판지 뒤로 와요
노란 튤립은 주황색 꽃으로 보이기 마련이지요
이젠 바다를 향해 행진해요
신비한 종이는 파도에 노랑 안감을 덧대요
파란 튤립은 초록색 꽃으로 보이기 마련이지요
당신이 견고히 연산 작용 해온 보편적 표상들 속에서
유일하게 무너지는 법칙은 무엇이에요?
…
친애하는 명왕성에게,
얼음산에 수국을 심어서 형광 나비 성을 만들게요
청록의 셀로판지가 필요 없는 행성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널리 혜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메인 뉴스는 저녁 그늘의 길어진
관상을 보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말을 하네요
분무기로 창문에 물을 뿌려요
셀로판지를 조각조각 붙여요
볕이 들면 한두 번 정도는 아름다운
그림자를 바라보고요
사색을 넘어선 세상을 보아요
어떤 날엔 장의사가 무지개 색 의자를 만들고 있어요
- 오장환 신인문학상
푸른 색1[김승희]
푸른 색
석란희의 보라가
섞인 듯한 푸른 색
푸른 색
김환기의 회색이
섞인 듯한 푸른 색
푸른 색
반 고흐의 미친 주황이
소용돌이치는 푸른 색
푸른 색
모네의 아침 햇빛 일렁거리는
잠이 덜 깬 푸른 색
푸른 색
모딜리아니의 누드에서
설핏 끼쳐 있는 서러운 푸른 색
푸른 색
천경자의 푸른
독사에 나온 광나는 푸른 색
푸른 색
색상은 건반이고
영혼은 피아노
그러면 빨강은 `도'
파랑은 `레'
초록은 `미' 라고 했던
그 어디에도 없는
칸딘스키의 푸른 색
이 모든 푸른 색
그 모든 푸른 색
내가 죽어도
남아 있을
저 이유 없는 행복.
- 냄비는 둥둥, 창비, 2006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김미량]
꽃은 세상에 오기 전
작은 색종이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녁이면 신과 함께
형형색색 꽃을 접었다
말없이 동그란 탁자에 마주 앉아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를
맨 처음 제비꽃으로 접어주셨다
열 두살이 되었을 때
나는 신의 무릎에 앉을 수 있었다
(당신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떠나오던 날
신은 분홍색 분꽃을 접어 손바닥에 올려주셨다
어른이 되어
누군가의 손바닥에 분꽃을 올려놓으면
그 사람은 겨울에 죽는단다
신의 부탁으로
사람들에게 꽃을 알리러 세상에 왔다
걸어오는 꽃은 고백처럼 잘 보이고
쓰러진 꽃들은 기도처럼 일어났다
목마른 꽃을 위해 빗소리를 틀어두었다
방향을 잃은 꽃들은 새로운 기억으로 더 붉어지고
어젯밤 꿈에
신의 무릎에 앉아 그날처럼 제비꽃 오백 장을 접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전생은
믿거나 말거나 다 끝난 이야기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저녁에 잠든 꽃을 찾아갔다
너는 알고 있지?
그때 나는 주황색이었니 보라색이었니
그때 나는 살았니 죽었니
가까이 하면 불행해진다는 분꽃을 잊고 살다가
가을에 나를 부르는 꽃이 수상해
당신에게 그 꽃을 따다 주었다
신의 예언처럼 크리스마스에 죽은 사람
꽃과 나와
신의 거리가 분간되지 않는다
-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달아실, 2023
비눗방울 하우스 [심재휘]
광대분장을 한 사내가 박물관 앞 광장에서
두 팔을 휘저으니 큰 비눗방울이 생긴다
아이들은 제 키만한 방울 속으로 들어가려고
뛰어다닌다 물로 부푼 집을 만져보려다 이내
비눗물을 뒤집어써도 미끌거리며 깔깔거린다
나도 저런 얇다란 잠 속에 한 몸 들어가
꿈을 꾼 적이 있었던 것 같고
어룽거리는 바깥을 내다보며 웃다가 깨어
어둠 속에 오래 앉은 적도 있는 것 같다
박물관 문은 닫히고 그 사내가
바닥에 깔아놓은 비닐 장판을 걸레로 훔치면
아이들이 사라진 저녁이 온다
분장을 지운 사내는 가방을 든 하루를 메고
제가 만든 비눗방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유물이 되지 못한 그의 하루는 터져서
길바닥에 흥건해도 방울 속 뒷모습은 멀어지며
무지갯빛이다 그는 비눗방울 속에서 오늘도
터지지 않는 꿈을 꾸리라
제발 그러리라
- 시작, 2019년 가을호
포옹 [이기성]
비가 수천의 하얀 팔을 뻗어
너를 안는다
흰 도화지 같은 공중에
너의 입을 예쁘게 그려줄게
주르륵 녹아 흐르는 입을 다시 그려줄게
똑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파란 입술 그려줄게
비의 하얀 팔들은 어디로 가서
낯선 얼굴 어루만지는지, 어디로 날아가
검고 차가운 목덜미를 감싸며 흩어지는지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
아직 따뜻하고 고요한 뺨이 있다는 듯
주황색 포크레인이 우뚝 멈춰 있다
부서진 옥상 위
아이의 슬리퍼가 고요히 젖고 있다
비의 팔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가는지
퍼붓는 빗속에서 아이는
하염없이 입을 벌리고 걸어간다
- 채식주의자의 식탁, 문학과지성사, 2015
정안사에서 [공광규]
백화점과 명품브랜드 상점에 둘러싸인
상해 남경서로
오래된 절이 주변 빌딩과 키를 같이하고 있다
붉은 대리석 회랑과 화강암 마당
주황색 나무기둥과 연이은 처마
기와지붕과 용마루에서 금장을 한 잉어와 코끼리가
뛰어놀고 있다
유리빌딩을 빠져나온 저녁 햇살이 반짝 잉어꼬리에서 튄다
저 잡아 둘 수 없는 반짝
풍경을 쨍강쨍강 나뭇잎처럼 매달고 서 있는 황금탑
가지가 무성한 고향의 느티나무를 닮아
꼭대기가 눈에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들이대도 답이 안 나온다
사물은 떨어져서 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일까
나와 헤어진 사람은
멀리서 봤을 때 내가 멋있었다고 한 적이 있다
한 움큼 향을 쥐고 기도하는 사람들
평생 죄를 짓고 살지 않을 것 같다
옥으로 만든 불상을 모신 법당에서
귀때기 새파란 여자가 절을 올리고 있다
자신을 바치는 마음이 옥빛이다
저런 공손을 아는 나이 먹은 여자 하나를 모시고
여생을 보내고 싶다
오늘은 종교에 귀의한 늙어가는 여자 동창생처럼
종교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품목으로 들어온다
공손이라는 것
발원이라는 말을 생각하다가
강원도 신흥사였던가
작은 법당에서 절을 올리던 여인의 뒤태를 한참 생각하였다
- 월간< 太白> 2017.02.vol.138.
꽃게처럼 안아줘* [장이지]
"안아달라고 말해봐"
"안아줘."*
투명한 빌딩 유리 안에서 고도를 기다리다 보면
고도는 오늘도 오지 않고,
컴퓨터만 살찌우는 직장이 싫어져서
옆에선 에스트라공, 구두를 벗어볼까 시늉한다.
가자, 노을이 빌딩 안에 밥상을 차렸다.
꽃게탕안의꽃게꽃게안의꽃게알,
주황색 잘 익은 꽃게알 안에서
우리는 연극배우랄 수도 있어서
날마다 고도를 기다린다.
가자, `삶'아진 알에서 깨어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퇴장인지 퇴근인지
세파 거품 안에서 서로 헤어진다.
라이트를 켠 갑주어 주둥이로 들어갔다가
다음 막을 알리는 태양의 페이드 인,
갑주어 똥구멍으로 나와 횡보, 횡보,
으으 , 가자,
컴퓨터 앞에 앉아 넥타이로 하는
교수형놀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
조명이 하얀 사무실 안에서
해결사 놈을 기다리다 보면,
놈은 오지 않고 옆에선 럭키 부장이
`생각' 씩이나 해본다.
투명한 빌딩 유리 안에서 고도를 기다리다 보면
살갗을 뒤덮어가는 골갑 특유의 촉감,
집게발은 누구를 죽이고 싶다.
혹은 상처를 힙힐(을)까 봐 슬프다.
안아달라고 말해봐.
안아줘 꽃게처럼.
집게발이엉킨다.
절실한너무나꽃게다운.
- 안국동울음상점, 랜덤하우스, 2007
세상의 기척을 다시 쓰다 [김경미]
앙코르와트엔 아직 가지 못 했습니다
주황색 가사袈裟 입은 촛불들 간절할수록 꺼지기 일쑵니다
빗자루와 양탄자를 타고 석류가, 석유처럼 익는 페르시아 시장
에는 skf마다 갑니다 캐스터네츠처럼 이빨을 딱딱대며 전쟁이
언제나 꽁무니를 쫓아 다니죠
물통을 두 팔 높이 받쳐들고 구름 녹기를 기다려야
세수할 수 있는 밀림에도 오후 늦게 가봤습니다
항복과 경배의 높이를 구경만 하고 왔죠
밀주처럼 진흙 묻은 구두를 만들어 파는 사막에서는
입 벌린 저녁 석양 속에 피조개들이 꼭 장미꽃 같아
상처도 때론 화병이나 액자에 걸 만하다 적어두었습니다
그 나라 이름이 무엇이였던지
중국,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만들어내고 다 고장내는
중국집에는 한두 달에 한 번도 가고 두 번도 갑니다
청춘일 때는 더 잦았을까요
비행기는 어린 백합꽃을 닮아서 갈증을 자꾸 내죠 물을
자꾸 찾죠 그래선지 저 밑으론 물이 끝없어서 세상은
물 위의 수상 가옥 몇 채,물 드나듦의 골목자국들,
언제고 발밑을 찰랑이는 물의 기척과
팔에 서린 노 자국
다만 수면을 스치는 햇빛의 굴절뿐임을 알게 되죠
아직 흙 위의 국경들 끝없는 듯해도요
- 시힘 25주년 기념 동인지[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bookin, 2009
아마도 아프리카 [이제니]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호랑이, 그것은 나만의 것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
살고 있나요 묻는다면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나는 아주 조금 살고 있어요
내 머릿속은
반은 쑥색이고 반은 곤색이다
쑥색과 곤색의 접합점은 성홍열 같은 선홍색
열두살 이후로 농담이 입에 배었다
옷에도 머리카락에도 손톱 끝에도
주황색 양파자루 속엔 어제의 열매들
양파가 익어가는 속도로 너는 울었지
눈을 감아도 선홍색이 보이면
다시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너무나 멀리 있지만 아마도 이미 아프리카
나는 하룻밤 사이에도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능소화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 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 옛애인의 집, 솔, 2003
첫댓글 ^^ 시 잠시 읽고~ 후다닥!
출근요,,ㅋ
흐흐.늘 바쁘신 바브시인님.
소도 키우시고 시도 키우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