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성지순례
(2022.11.2~11.11)
1일차 :11월 2일(수)
지난 10월 한 달간 나홀로 피정을 마치고 나서
위령성월을 맞아 국내 성지순례를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책자 증보판을 구입했다.
아내가 갖고있는 책자는 111곳이 수록되어 있는데
증보판에는 59곳이 추가되고 3곳이 삭제되어 167곳으로 늘었다.
아내는 2013년 성지순례를 시작해 111곳 중 반 이상을 했지만
10년이 된 지금까지 완료를 못했는데,
어떤 성지는 5번 이상 순례한 곳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함께 순례를 도와 내년까지 완료할 생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작이 반이니까~
장시간 집을 비울 수가 없고 본당 제대꽃꽂이와
농사일을 감안해서 한 번에 열흘 정도씩 나누어서 하기로 했다
제주도에서 차량을 육지로 가지고 가서 전국을 3~4 지역으로 나누어
순례하기로 하고 1차로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를 했다.
민구(개) 밥주는 문제와 산책은 근처에 살고있는 대자에게 부탁하고
마늘밭에 물 주는 것은 선녀씨에게 부탁했다.
일주일 전부터 일자별로 방문할 곳을 최단거리 루트로 정하고
숙박할 곳을 정하고 음식점등도 알아놓았다.
초행길이라 스케줄이 달라질 수 있어 숙박예약을 이틀 전에 하기로 했다.
여행은 늘 그렇듯이 실제여행보다는 계획을 짜면서
더 즐거운 것 같았다.
신혼여행을 설악산에서 시작하여 부산 처가에서 마치는 7박 8일을 했기에,
42년 만에 하는 이번 부부 순례여행도 기대되었다.
그리고 신혼여행과 순례여행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오늘 묵을 숙소를 창성장으로 정하고 며칠 전 예약을 했다.
어제 마트에서 구입한 물건들과 옷가지들을 트렁크에 싣고
제주연안여객 터미널을 향해 11시에 집을 나섰다.
13시 40분 출발하는 제누비아(JENUVIA)호에 배를 선적하고
대합실에게 기다리다가 승선했다.
4시간 30분 배를 타고 18시 10분에 도착하여 숙소로 가기 전에
산정동성당(가톨릭 목포성지)에 들렀다.
창성장(숙소)
9호 온돌 70,000원
전 국회의원 손혜원 조카가 운영하는 곳으로
옛날 여관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곳으로 방이 작지만
편리하게 디자인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인기가 있다.
예약은 카톡으로만 받는다.
우리가 잔 방은 온돌방으로 색동이불이 놓여 있어서
신혼여행 때 추억이 떠올랐다.
목포에 도착한 후 성지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7시 30분이 되었다.
사전에 알아본 음식점에 전화하니 모두 문을 닫는 시간이다(오후 8시)
근처에 있는 민어골목으로 가서 민어회와 저녁을 먹었다.
색동이불을 덮고 자니 신혼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내일 일정이 빡빡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성지순례 2일차(2022.11.3)
내 순례책자에는 없지만 아내가 갖고있는 책자에 있는 곳을 발견(다산초당)하여
급히 스케줄에 끼워 넣다보니 2시간이 지체되어 일정이 빡빡해졌다.
5시에 기상하고 공용주방에서 누룽지를 끓여먹고 커피 마시고
6시에 다산초당으로 출발했다.
순례가 끝나고 나주 지하터널 통과할 때 과속위반을 했다는
30,000 원의 범칙금 통보를 받았다.
빡빡한 일정에 서두르다보니 그리된 것이다.
"급할수록 천천히'라는 말이 생각난다.
2. 다산초당(茶山草堂)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하느님의 종' 125위 시복 시성 대상자 중 한명으로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약종의 자식이다.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3. 나주 순교자 기념성당
나주 성당은 천주교 박해 시대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1807~1839, 베드로), 강영원(일명 성운, 1822~1872, 바오로),
유치성(일명 치경, 1825~1872, 안드레아), 유문보(일명 작객, 1822?~1871) 등
네 명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는 경당이 자리한 곳이다.
그중 세 명의 순교자는 1871년 나주에 잡혀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1872년 나주 무학당(진영의 군사 훈련장) 앞에서
석침과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비망기》(461쪽)에는
1839년 공주 태생인 이춘화 베드로가
나주에서 잡혀 고문을 당하면서도 마음을 굽히지 않아
11월에 읍내 감옥에서 33세로 선종했다고 나온다.
▼ 순교자 기념경당
기해박해(1839년)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 베드로와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네 순교자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무덤 형태의 경당으로 2004년 건립하였다.
경당 입구에 서 있는 60톤의 거석은
‘석침사(石針死)’를 당한 무학당 순교자들의 용맹을,
사방이 막혀 캄캄한 경당 내부는 순교자들의 고난을,
관 모양의 제대는 순교자들의 장엄한 죽음을,
경당 안쪽 천장이 없는 회랑은 순교자들의 부활과 영광을 상징한다.
▼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이 집은 1956년 당시 제5대 광주 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몬시뇰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한 까리따스 수녀회의 최초의 본원이자 지원원이었다.
건물은 원래 정병교씨 소유였던 것을 1956년 구입하여 개조한 것으로
안채(1934년 건립)는 수도자들이,
행랑채(1933년 건립)는 지원자들이 사용하였다.
1959년 본원이 광주 학동으로 옮겨졌으며,
초기 수도자들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2004년 5월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2010년 안채의 안방을 회원들의 피정과 휴식을 위해
현대식 주거공간으로 개,보수 하였다.
이 우물은 당시 수녀들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다.
물이 깨끗하지 않고 짭짭했지만
이 물을 마시고도 아픈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4. 곡성 옥 터(곡성 성당)
곡성은 정해박해의 발상지로 그 시초는
일부 행실이 좋지 않은 신자들과의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됐지만
그 박해의 끝은 순교의 영광으로 물들었다.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는데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韓德運, 1752-1802년)의 아들인 한백겸은
성질이 아주 광포하고 주사가 심해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마를 여는 축하연이 벌어지고
거나하게 취한 그는 주막집 주인 부인에게 행패를 부린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남편 전씨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곡성 현감을 찾아가 그를 포함해 몇 명을 관가에 고발했다.
곡성 현감은 관내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
닥치는 대로 교우들을 잡아들였다.
정해박해 당시 전라 감사 이광문(李光文)이
추위·더위와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의 많은 수를 배교하게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약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잡혔는데
그들 대부분이 배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장계 고을 이 바오로의 누이이며 이명의의 어머니인 이 막달레나는
박해 시초에 곡성에서 체포되어 온갖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황해도 백천으로 귀양 가 4년여의 유배 생활 끝에
1830년 5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고산(高山)에서 포졸에게 온 가족 13명과 함께 잡힌 이성지 세례자 요한은
무려 9년 동안 옥에 갇혀 괴로움을 당하고
8개월을 병마에 신음하다가 1835년 세상을 떠났다.
또 그의 셋째 아우인 이성삼 요한 역시 그 해 3월에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반년이 채 못 돼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이들의 행적 중에 일부는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 내려와
후손들에게 박해를 뚫고 믿음을 지킨 용맹한 신앙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李景陶, 1780-1802년)와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인
이경언 바오로(李景彦, 1792-1827년)도 책과 상본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수 없는 배교의 유혹과 매질 속에서 순교하고 만다.
5. 영광 순교자 기념 성당
1801년 신유박해 직전 영광 지역 신자로 붙잡혀 처벌을 받은 신자들로
이우집, 이종집, 오씨, 이화백, 윤종백, 남조이와 그녀의 남편 김득겸 등 7명이 있다.
이 가운데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만이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하였고,
김치명과 유문보는 병인박해 때 공주와 나주에서 각각 순교하였으며,
배교자 이우집은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영광성당은 영광 출신 이화백과 양반 오씨(성명 미상)가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한 것을 기리고자
2010년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2백년 전 신앙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침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주위의 냉대와 박해의 고통을 감내하며 오직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영광순교자들의 끈질긴 믿음을 대지의 흙덩어리로 형상화 하였다.
작품의 주제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마태6,10)이다.
영광의 순교자 네 분(이화백, 오씨 양반, 김치명, 유문보 바오로)을
다양한 십자가를 넣어 비석 형태로 모시고 그 중심에는 영광순교자들에게 바치는
이해인 수녀의 기도시(주제: 핏빛 사랑으로)가 시비에 새겨져있다.
6. 고창 개갑 장터 순교 성지
고창 개갑 장터는 신유박해 때 고창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최여겸(崔汝謙, 1763~1801, 마티아)이 처형된 장소다.
최여겸은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후
고향에서 열렬히 전교하여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기록상에만 28명이 되며
전라도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이곳에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강석진 요셉 신부를 만났습니다.
신부님은 성지를 관리하고 계십니다.
부모님은 제주 신창성당에 매일 미사에 참례하시는데
얼마전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부산 딸 집에서 치료받으시고
아버지 혼자 계셨는데 어머니가 한 달만에 돌아오셨습니다.
어린 예수님을 업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 속에
복자 최여겸(마티아)의 마음을 담았다.
그는 순교 직전 늙으신 어머니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으나
박해 당국자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최여겸은 어머니를 만나,
그녀의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7. 김제 순교 성지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김제 동헌은
하느님의 종 한정흠(韓正欽, 1756~1801, 스타니슬라오)이
1801년 신유박해 때 45세를 일기로 참수 치명한 순교의 터전이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 자녀들의 스승으로
김제에서 태어나 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순교하였다.
김천애, 최여겸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한정흠은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오늘 2일차 순례여정을 마쳤다.
오늘 숙소는 김제에 있는 지평선모텔(온돌 45,000원)이다.
모텔에서 제주 마트에서 구입한 아귀구이를 안주삼아 맥주 2캔 마시면서
내일 묵을 숙소를 찾아보았다.
전주 나비잠한옥호텔에 문의했으나 만실로 방이 없었다.
금요일로 주말이기도 하지만, 인기가 있어 1주일 분이 마감된 상태다.
서둘러 다른 곳을 알아보았지만 쉽지않았고
겨우 조금 비싼 호텔(130,000원)을 잡을 수 있었다.
매일 순례장소를 이동하며 숙식을 하는 것이 42년 전 신혼여행 생각이 난다.
당시에는 설악산 - 도고온천 - 직지사 - 부여 - 남원 - 전주 - 광주 - 부산으로 다니며
주로 시외버스를 이용한 것 같아.
아내가 떠준 커플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오징어,땅콩을 먹으면서
추운 겨울날씨에도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오늘 복음을 읽으니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 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처럼,
또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도로 찾은 어느 부인처럼
죄인의 회개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이른 새벽 레온을 나오면서 있었던 이야기,
잃어버린 양말 한짝을 찾던 외국인도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