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물 - 신한승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2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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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물 - 신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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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9. 23:02조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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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고유무술 ‘택견’을 발굴한 신한승(1928~87)
1970년대 초반, 태권도는 ‘우리 민족의 정통무예’라는 이름으로 국내외에 급속히 보급되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의 전폭적인 뒷받침 아래 세계 각국에 ‘국위선양’을 위해 태권도 사범이 파견됐고 동네마다 태권도장이 생겼다.
캐나다에서 반한활동을 하던 최옹희씨가 만든 국제태권도연맹(ITF)과는 별도로 국내에서는 김운용씨가 세계태권도연맹(WTF)을 만들어 팽팽히 대립하며 서로 세력확장을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레슬링 선수
태권도는 2천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자랑스런 민족무예였고 누구도 그 정통성에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태권도는 결코 진정한 우리의 무술이 아니다”라며 태권도의 전신으로만 알려진‘택견’(택견은 취음이며 옳은 표기는‘태껸’임)의 재현을 위해 20여년간 고독한 싸움을 벌인 한 무도인이 있었다.
직장도 팽개치고 가산 탕진을 무릅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희미하게 남아 남아 있던‘우리의 몸짓’택견을 수집했다.
갖은 협박과 멸시를 참아낸 굳은 집념은 마침내 햇빛을 보아 1983년 6월 1일‘택견’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6호로 지정됐고, 본인 역시 인간문화재가 됐다.
조선시대의‘문’을 중시하고‘무’를 천시하던 풍조와 일제의 조선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절멸할 운명에 놓여 있던 한민족 고유무술‘택견’과 수벽치기의 맥을 현대에 이어 놓은 신한승(辛漢承·1928~87)
58살의 나이에 대장암이라는 치명적인 병으로 자신이 살려놓은 전통무술을 꽃피우지 못하고 숨져간 신한승은 젊은 시절 외국운동인 레슬링 국가대표 후보선수까지 한 유도 유단자로, 출중한 운동선수였다.
현재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인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키는 작으나 다부진 체격으로 운동에 큰 소질을 보였다.
그는 유년시절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의 천석꾼 부자인 작은 할아버지 신재영의 집에서 처음‘택견’과 접하게 된다.
활쏘기나 씨름 등을 좋아했던 신재영의 사랑방엔 항상 당시의 무인들이 몇 명씩 묵으며‘택견’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한량들이어서 집안 어른들은 어린 신한승이‘택견’을 흉내내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호기심 많은 그는 적삼에 짚신을 신고 팔을 휘저으며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뒤로 거두며 발길질을 해대는 모습을 눈여겨보곤 혼자 연습했다.
해방전 만주로 가서 1944년 만주 사평성립 산성진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방 뒤 다시 서울로 와서 1949년 지금의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 체육학과 1회생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 레슬링을 전공한 그는 1956년에 열렸던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지만 최종 선발전에서 져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레슬링을 그만두고 아버지 신우선이 충주결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받아 충주로 함께 내려간 그는 한때 충주 학림중학교 체육교사를 했으나 1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 아세아극장에서 문지기 일을 맡기도 했다.
다시 충주로 내려와 유도에 몰두하던 신한승은 마흔이 넘자 자신이 어린 시절 어깨 너머로 보았던‘택견’을 되살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떳떳이‘내가 택견꾼이다’라고 내세울 수도 없었고 무술의 고수들은 지방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그 원형을 정리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경사도 안동땅에 김씨라는 무술인이 있다”는 말만 듣고 안동을 헤매기도 하는 등 전국을 다니며 고유무술을 하는 이라면 나이를 불문하고‘한수’를 배웠다.
스승 송덕기 만나 사사
그는 마침내‘택견’을 고스란히 몸속에 감추고 있던 송덕기(1893~1987)를 만난다.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전해 내려온 이 무술은 구한말 활동하던 지역의 이름을 따‘종로택견’‘왕십리택견’‘구리개택견’ 등으로 불렸다. 또 대궐에서 가까운 곳의 것을‘윗(우)대택견’, 먼쪽을‘아래대택견’이라 분류했다.
송덕기는‘종로택견’의 명인 임호로부터‘택견’을 배웠다고 한다.
왕십리에는 수염이 많이 나 박털백이란‘택견꾼’이 있었고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에는 박무경이란‘택견꾼’이 있었다.
송덕기는 12살부터 사직골 황학정 옆‘감투바위’빈터에서 임호로부터 배웠고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택견’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신한승은 1970년 한 신문에 난 송덕기 기사를 보고 서울로 달려가 3년간 본견적으로‘택견’을 익혔다.
이 때 신한승은‘택견’이 태권도와는 다른 무술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태권도가 2박자로 손과 발을 직선운동 위주로 움직이는 반면‘택견’은 3박자를 위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손과 발을 움직인다.
두 팔을 상하좌우로 활개치듯 움직이며 다리도 전후좌우로 품(品)자 형을 밟고 상대의 발이나 오금을 걸어서 넘어뜨리거나 앞·옆으로 후려찬다.
마주서서 하는‘택견’은 일정한 간격의 선을 긋거나 원을 그려 그 안에서만 했고 넘어지거나 선을 벗어나면 지게 된다.
손은 상대를 잡거나 상대를 잡지 못하게 방어하는 데 사용했고 주로 발을 이용한다.
조선시대 풍습으로는 단오절 무렵에‘택견’시합을 벌였는데 같은 마을사람끼리 겨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만을 사람들과 겨루었다고 한다.
경기방법은 십여명의‘택견꾼’을 마을에서 뽑아 한사람씩 맞붙어 이긴 사람은 남고 진쪽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내세웠는데, 이긴 사람은 경기장을 돌면서 으스대는 몸짓을 했다고 한다.
일제 때는 일본 사람들이 조선사람이‘택견’하는 것을 엄하게 막아 낮보다는 밤에 몰래 하기도 했다.
신한승은 송덕기로부터‘택견’을 배우면서 이 무술이 과연 우리의 전통무예인가에 대해 여구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어 대사전>에 처음‘택견’이란 말이 나오는데‘한쪽 발로 서로 넘어뜨리는 유희(遊戱) 또는 각희(脚戱)’라고 풀이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덕견’이라고 언급한 곳이 잇고 좀더 올라가면 구한말 시인인 최영년이 쓴 <해동죽지(海東竹枝)> 중 우리의 풍습에 관한 시만을 모아 만든 <해동운기(海東韻記)> 중에는 ‘탁견척’(托肩戚)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의 주석에“에로부터 발을 쓰는 기술이 있으니 서로 상대해서 발로 차 쓰러뜨리는데, 세가지 방법이 잇다. 서투른 사람은 다리를 차고 잘하는 사람은 어깨를 차고 비각술(飛脚術)이 있는 사람은 상투를 찰 수 있어, 혹은 보복의 수단이 되거나 혹은 애첩을 빼앗는 수단이 되기도 하여 관에서 이를 금지시키니, 이 놀이를 탁견(托肩)이라고 했다”라고 덧붙였다.
조선말·일제 거치며 쇠퇴
또 조선후기 화가 유숙(1827~1873)이 그린 <대쾌도(大快圖)>를 보면 많은 구경꾼 가운데 씨름과‘택견’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택견’이 언제부터 생겼는가는 아직 문헌상으로 명백히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다만 고구려시대의 무용총 벽화에 맨손으로 무술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과 <고려사> 등 문헌을 통해 보면 상고시대부터 있던 전통무예는 고려시대에 크게 부흥했다가 조선시대 말기에 쇠퇴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한승은 송덕기로부터 배운 뒤 충주로 다시 내려가 1973년 마을의 새마을 회관을 빌려 어린이들에게‘택견’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 74년에는‘박털백(왕십리)택견’의 전수자인 이경천과‘박무경(구리개)택견’전수자인 김홍식을 찾아가 활갯짓, 치들기, 낚시걸이 등‘술’를 익혔다.
배움과 가르침을 통해‘택견’의 원형을 어느 정도 복원했다고 생각한 신한승은 1977년 4월 서울 YMCA 체육관에서 한국 전통택견 발표회를 시작으로 고려대 강당, 충주 탄금대 야외음악당 등에서 발표회를 잇달아 열어 민속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공직에서 은퇴한 아버지가 대서소를 해 번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그는 그나마 부친이 중풍으로 대서소를 그만두자 있던 집마저 빚으로 날렸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전통무술의 복원에 대한 집념은 정경화·박만엽(택견 이수자) 등 제자를 길렀고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임동권 교수(중앙대)를 충주로 보내 현지조사케 해 마침내 1983년 6월1일 전통무술로는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된다.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보도한 83년 4월11일자 조간신문을 보고 신한승은 큰소리로‘엉엉’소리내며 울었다고 부인 김선덕(57·충주시 교연1동 남산아파트 307동 404호)씨는 회고했다.
신한승은 처음‘택견’전수관으로 사용하던 충주시 용산동 새마을 회관을 비워달라는 요청을 받고 인근 대원사 앞마당에서 눈·비를 맞아가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다른 사람의 태권도 도장을 시간제로 빌리기도 했다.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충주시는 83년 12월 충주교육청 뒤 허름한 건물을 전수관으로 내주었고 지금도 이 곳은 전수관으로 쓰이고 있다.
신한승은 제자와 함께 서울 등지에서‘공연’을 통해 보급에 힘썼고 84년 제2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충주 공설운동장)의 식후 공개행사에 충주 미덕중학생 5백여명을 가르쳐‘택견’을 매스게임으로 널리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건강하던 그의 몸은‘택견’이 부활의 빛을 발하기도 전에 대장암이라는 죽음의 그늘이 다가와 병석에 눕고 만다.
병석서 수벽치기 전수
서울대병원에서 86년 대수술을 받은 그는 강인한 집념으로 수술 일주일 만에 8층 계단을 오르내려 의사들을 놀라게 했고, 퇴원한 뒤 또다른 전통무술인‘수벽치기’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병세가 악화돼 거동을 할 수 없었던 신한승은 누워 있으면서도 자신을 찾아온 육태완씨 등 제자들에게 말로써 자신이 알고 있는‘수벽치기’를 전수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날에도 불명확한 음성으로“이것이 수벽치기의 마지막 끝장내는 수법이야. 절대 잊어선 안돼, 두발낭상하는 식으로 몸을 솟구쳐 오르면서 주먹으로 상대의 인중을 뛰어들며 치는데 번개같이 빠르게 해야 해. 그러면서 머리로 박치기하는 것이야. 이것이 마지막 수야.”
신한승은 1987년 7월 2일 충주에서 숨을 거뒀다.
그로부터 18일 뒤, 신한승의 스승이며 그와 함께‘택견’인간문화재로 지정됐던 숭덕기도 99살을 일기로 나란히 유명을 달리했다.
최근 생전의 신한승이‘택견’동작을 시범 보이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 <택견전수교본>이란 책을 낸 오장환 교수(외국어대 체육학)는“신한승이 없었더라면 택견은 그 명맥을 잇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의 고집스런 일생을 애도했다.
[출처] 신한승|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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