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점 (외 6편)
안차애
나는 너무 많은 손금을 가졌다
바람이 물양지꽃과 보라엉겅퀴를 깊이 쓰다듬은
길목에서 가만히 핸들이 흔들리곤 한다
너의 몸안에서도 제일 깊은 회오리바람 소리가 나는
지점을 짚어내어
번갈아 귀를 대보다 출렁! 운명선으로 스며들 듯
신갈에서 여주분기점으로
감곡 IC로 다릿재고개 나들목으로
외곽 순환도로에서 39번 지방도로로 잔금진 계곡길로
핸들을 꺽을 때마다 감정선 부근이 출렁, 먼저 휘어진
다
스며드는 길의 묘미는 절묘한 타이밍에 있다
큰 길, 큰 금, 큰 이정표들을 미련 없이 제때 버려야
떠도는 선들이 제 가닥을 잡고 팽팽히 날아오른다
또, 새 분기점이다
너의 가장 빽빽한 소용돌이 속으로 출렁!
스며들어야 할 포인트다
떨리는 유혹이다
존재는 길 쪽으로 쏠려 있다
눈 쌓인 산 중턱에서 길을 잃었다
깊이 눈이 길을 덮고 앞서 간 발자국을 덮었다
내가 손때 묻힌 흔적이나 희미한 기억마저 덮어버렸다
스틱을 저어 나뭇잎 쌓인 곳을 찾는다
언젠가 동행한 산 친구가
나뭇잎 쌓인 켜가 두꺼운 곳이 길이랬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떨어져 내린 나뭇잎들도 외로웠던 것이다
갈길 몰라 난분분 떨어져 내리면서도
발걸음 낯익은 쪽으로, 발자국 포개진 쪽으로
몰려가고 싶었던 것이다
길 위에 몸을 누이고 비로소 길을 찾은 것이다
길 위에 몸을 포개어 마침내 길이 된 것이다
나는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론의 시작은 물 속에서다
연어가 찾아가는 것도 결국 태초의 양수 냄새다
우울할 때 몸이 무겁거나 미열이 오를 때
사우나탕에라도 가서 물방울 안마기 속에 몸을 묻는다
둥글었던 것들의 회귀본능이다
물방울들은 알처럼 뽀글거리며
내내 무거웠던 관절들을 뚝뚝 떼어낸다
하방 경직성의 생각들도 가볍게 툭툭 던져 버린다
제대로 상한 오장육부를
꽈리처럼 까르륵 부풀려 마사지다
연골이나 세포 사이가 새 살 올라오듯 간지럽다
신생대 중생대를 아득히 역류하여
비로소 마찰 없는 유선형의 캄브이아기다
내가 자궁 속의 알이었을 때의 빙글거리던 느낌?
내 자궁에 작은 알을 품고 있을 때의 울렁거리는 느낌?
알이었던 나와 알을 품었던 나
사이의 한 세상이 내 진화의 전모다
나의 아프락사스다
생필품
프랑스 생장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800킬로 순례 길은 버려야 사는 길이다
마음의 짐이든 몸의 짐이든 버려야
어깨 패이지 않고 발톱 빠지지 않고
눈물에 탈수되지 않고, 마침내 걸어내는 길이다
한 이틀 걷고는 소설책 한 권과 안내책자를 버렸다
또 며칠 걷고는
소주 팩과 고추장 튜브를 다 먹어치웠다
반도 못 가 물 로션과 샴푸를 버렸다
여자와 향내를 버리고 나니
흰 길의 한숨소리나 새벽별의 기침소리가 간간 들렸다
배낭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건
수건 두 개, 속옷 두 벌, 여벌 옷 한 벌과 침낭
물파스와 바셀린, 칫솔치약 세트였다 그리고
6포인트로 줄여 양면 출력한 시 한 묶음이 들어 있었다
냄새나고 구질구질한 시 300편,
내내 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버리지 못했다
땀에 절고 햇살에 바래고 불면과 피로에 찌든 채
배낭 한 구석에 구겨져 징징거리고 있었다
생필품이었다
마녀사냥을 반성함
샤갈의 그림 속 고양이들은
성당 꼭대기로
거기,
첨탑 뾰족 창가로 날아가는 신부의 옆구리로 날아올
라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눈을 감아요
날고 싶은 고양이들은
열 마리가 울어도 혼자 울어요
백 마리가 서성여도 혼자 울어요
큰 소리로 웃어도, 혼자 울어요
오래 잠자거나 중얼거리거나 혼자 울어요
눈을 크게 뜨고 있어도 꿈꾸며 울어요
지나치게 예뻐서 혼자 울어요
세상이 가려워서 혼자 울어요
가장 서늘하게 뛰어내릴 줄 알아서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꿈을 가져서
제 울음을 견딜 수 없어서
때때로 혼자 울어요
호동그란 제 눈알 속으로 제 울음을 다 몰아넣으면
둥근 기구처럼 방긋
지붕 위로 떠오를 거예요
울음이 출렁출렁 부력의 날개가 되어서
연緣
-정면의 사랑
강가 풀섶에 거미 한 쌍이 산다
집이 곧 일용할 옷이거나 밥이니
따로 집 한 채씩 짓고 산다
억새 키 가 가지런한 곳에 촘촘하게 정면으로 마주보는
정조준 위치의 집
만 햇살 환시리의 투명한 응시다
사랑은 은근슬쩍 시선을 눙치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한 발 비껴갈 곳 없이 정면으로 마주보는,
바람도 숨을 죽이는 눈물겨운 집중이다
몸 부비며 치대지는 않는다
은근슬쩍 등짝에 올라타 무임승차하지도 않는다
철저한 독립채산제의 사랑방식이
투명 줄로 한 번 그네 뛰면 그대 있는 곳까지,
먼 바다를 사뿐히 건너게도 한다
마침내,
안정된 대국對局 자세로
천 년은 버틸 듯한 고요한 몰입!
햇살도 바람도 그 부근에선 가만히 선정에 든다
치명적 그늘
이용백 화백의 그림 '엔젤 솔저' 를 본다
그림 속의 꽃들은 유난히 생기 있게 반짝인다
그 꽃들이 시들지 않는 이유는 치명적 그늘 때문이다
꽃 밑이거나 꽃 사이의 여백에
묵직한 무기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통꽃이거나 겹꽃이거나 자잘한 톱니모양 꽃이거나
혼자 피었거나
와글와글 무리지어 피었거나 이미 꺾였거나
모든 꽃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총구가 있다
때로 외연이 내포를
꽃받침처럼 받쳐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꺾인 꽃과 내려앉은 꽃 사이, 시들거나 마르는 꽃 사이
발작적인 난분분과 붉은 웃음소리 사이의
음험한 그늘에
검은 무기가 숨겨져 있다
때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한 잎에 세 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점점이 박힌 반전이 있어 꽃빛은 요요하고 향내는 깊다
짐승처럼 뜨거운 숨소리를 내는 검은 입들
돌아서기엔 너무 늦어서 다행이다
삶이 일회적이어서 너무 섹시하다
-시집 『치명적 그늘』문학세계사.201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