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89]최백호라는 가수의 ‘원숙한 노래’
뜬금없이 터키(튀르키예)를 다녀온 후, 보고 듣은 게 있는지라, 망각하기 전에 나름 기록을 남겨놓으려 하나 능력 부족임을 깨달았다. 가이드 말을 아무리 귀에 담았을망정 워낙 방대한 정보와 해설이 며칠 지나니 가물가물,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길레 “터키에서 맨 돌덩어리만 보고 왔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하여, 인근 면소재지 도서관에서 터키관련 책 네 권을 빌려왔다. 『터키-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이희철 지음) 『세계를 읽다-터키』(번역서)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이호준 지음) 『이희수교수의 지중해 문화기행』이 그것이다. 이호준은 기자 출신으로 오랜 교류가 있는데, 책을 보고나서야 책을 많이 펴낸 여행가인 줄 처음 알았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란 말도 있지만, 가기 전에 한두 권만이라도 읽고 갔더라면, 이번 여행이 훨씬 윤택해졌을 것인데, 뒤늦게 후회가 된다. 오죽하면 수도를 앙카라가 아니고 이스탐불(탄이 아니고)로 알았을까.
아무튼, 이것저것 뒤적이다 골치가 아프고, 정리에 자신이 없었다. 문득, 얼마 전 <열린 음악회>에서 최백호가 불렀던 <책>이라는 노래가 생각나 유튜브 검색으로 들어보았다. 그때 스치듯 들었는데 노랫말이 무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한 <책>의 가사를 시 낭송하듯 읽어보자.
책을 읽으면/머리카락 몇 올이/돋아나는 것같아/
아주 큰 무엇은 아니고/
/딱 그만큼만/아주 작은 그만큼만//
그래도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신발끈을 조여매는 힘은 생기지//
노래도 그래/먼 기적소리처럼/
가슴 뛰던 젊은 날의 울림은 아냐/
그냥 헌 모자 하나 덮어쓰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가고 싶은 정도이지//
책을 읽으며/노래를 들으며/
아직은 눈물흔적 지우고 살아//
내가 그래/
당신은 어때//
72살의 대중가수의 내공이 놀랍다. ‘역시 최백호’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최백호가 누구인가? 일찌기 <낭만에 대하여> <영일만 친구> 등을 부르지 않았던가. 누가 딴따라라고 우습게 보는가? 그는 그다운, 그만의 세계가 있다. 정태춘, 조용필, 나훈아, 송창식, 장사익이 그러듯, 그들만의 '준수한' 세계에 있다. 이 노래를 배워서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음치와 박자치가 원망스러울 때가 딱 이럴 때이다. 노랫말은 바로 가수 최백호가 책을 주제로 지은 ‘어엿한 시詩’가 아닌가. 노래를 들으니 어지러운 머리가 개운해졌다. 마지막 구절 ‘당신은 어때’에 물음표(?)를 붙여야 하리라.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은근하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때?” 무슨 대답이 나올까? 궁금하다. 나를 ‘미친 넘’이라고 잘라 말할까? 흐흐.
더구나 지난 연말에 <찰나刹那(moment)>라는 신곡을 부르면서 한 인터뷰의 한 대목 “낭만은 그저 낭만일뿐. 매일 매순간이 최고의 찰나”라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빛나던 순간/희미한 순간/그 모든 찰나들이/나의 삶을 가득히 수놓았음을/지금 이 순간도 나의 빛나던 찰나여/이미 지나버린 찰나여/나의 영원한 찰나여/지금 빛나는 순간이여>로 끝나는 <찰나>의 노랫말은 본인이 지은 게 아닌 듯한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찰나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찰나, 모멘트다.
이러하기에 나는 트로트와 뽕짝으로 불리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에 유난히 끌린다. 언젠가 나의 졸문을 엮은 책 제목을 송대관의 <유행가>를 본따 <네 박자 꿍짝>으로 지으려다 주위의 반대에 부닥쳐 <나는 휴머니스트다>로 정한 적이 있었다. 흐흐. 가황歌皇이라 불리는 나훈아, 가왕歌王이라 불리는 조용필, 가객歌客이라 불리는 장사익, 정태춘 등이 부르는 노래에도 한번 듣고 흘리기 아까운 주옥같은 노랫말들이 있다. 나는 그래서 그들이 좋다. <테스형>을 보자. 자기 아버지 무덤가에 제비꽃이 피웠는데, 들국화도 수줍어 새노랗게 웃는단다. 그러고선 ‘그냥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성묘를) 자주 오지 못하는’ 자기를 꾸짖는 것같다고 한다. 멋지지 않는가? 그런가하면 ‘늙은 소’가 ‘긴 하루를’ ‘음-메’하며 힘들어한다고 한다.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로 만들어 부른 성악가도 있다. 세상은 참 재밌고 또 재밌다. 무심한 듯한 송창식의 바보웃음과 제스처를 보아라. 주먹을 불끈 쥐고 <황토강으로>를 열창하는 정태춘을 본 적이 있는가. 불행히도 50대 초반에 요절한 ‘범능’이라는 스님가수가 있었다. 그의 잔잔한 노래들은, 늘 우리의 거친 정서情緖를 순화시켜준다. 그들만의 독특한 재주이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재능기부가 아닐 것인가.
최백호는 원숙하다. 그의 말대로, 80대에도, 90대에도 그는 틀림없이 좋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이번에 힙합음악을 처음 들었다는 그는 후배 뮤지션들과 콜래보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도전적이고 실력있는 가수라는 생각이 든다. 하하- 어느 누가 SNS에 쓴 "최백호가 힙합앨범을 내면 ‘대한민국 3코(지코와 다이내믹 듀오의 개코 그리고 최배코)의 최고의 콜래보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재밌다. 오후엔 터키 책들을 덮고 최백호의 <책>과 <찰나>를 들었다. 오늘 그리고 매일의 매순간이 (내 삶의) 최고의 찰나임을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일단 한번 감상해 보시라니까요!